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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릴라 이스마엘
다니엘 퀸 지음, 배미자 옮김 / 평사리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01
제자를 구한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에서 고릴라 이스마엘을 만났다. 그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주제, ‘감금’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감금’이 주제라고? 인간은 문명의 포로라고? 아, 당신도 유행에 민감하군. 역시 최근 유행의 키워드는 ‘자연’이야. 전원 주택을 짓고 유기농 식품을 먹고 주말 농장을 운영하고 천연 소재로 만든 옷을 입고 울창한 자연림이나 해외 휴양지에 나가서 휴가를 보내는 거, 그렇지, 그게 제대로 사는거지. 도시 생활이란게 아주 번잡하고 갑갑하잖아. 돈이 좀 많이 드는게 흠이라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지만, 나도 나름대로 자연의 삶을 즐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나이 들면 시골로 돌아가 농사지을 생각도 한다구. 그걸 알아줬으면 해.
이스마엘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02
이스마일이 내게 무언가를 묻는다. 정말 모르겠다.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가 다른 식으로 묻는다. 이제 알 것도 같다. ‘세계’와 우리의 ‘문명’과 인간의 ‘삶’과 ‘종교’에 관한 것들. 그러나 그가 묻는 게 내가 ‘알고 있는’ 그것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어 머무적머무적 대답을 한다. 그러면 이스마엘은 그 내용을 처음에 물었던 방식, 다른 관점으로 비틀어버린다. 뭐? 정말? 그게 그런 의미였어? 다시 이어지는 이스마엘의 설명.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대로 글러브 낀 주먹이 되어 내 머리를 마구 두들긴다. 살짝 잽을 날리기도 하고, 강한 어퍼컷을 먹이기도 한다. 난타당한 충격에 비틀거리다가 ‘STOP’을 외칠 수 밖에 없다. 잠깐, 내게 시간을 좀 줘! 그러나 실은 그만두고 싶지 않다. 그의 말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많이 듣고 싶은 심정이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뭔가가, 진부한 상투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뭔가가 머리 속으로 뚫고 들어오려는 듯 긁어대는걸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03
초등학교 수업 시간에 식량 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반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인류가 굶어죽는 날이 올 거라고 배웠다. 불과 이십년 정도 지난 지금, 아무도 그런 걱정은 하지 않는다. 대신 석유를 비롯한 천연자원이 고갈되어 가는 것을 염려한다. 또한 희귀 동식물의 멸종과 생태계 파괴를 얘기한다. 그러나 정말은, 그런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스마엘의 지적대로 우리들은,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조금 더 기술이 발전하면 나아질거야, 하는 생각으로 잊어버린다. 어차피 내 힘으로 해결해야 할 내 문제가 아니니까, 과학자가 혹은 정부가 나서야 할 성질의 것이니까.
그러나 이스마엘이 원하는 것은 이런 차원의 문제의식이 아니다. 흔히들 말하는 발상의 전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따라가기가 버겁기도 하지만, 결국엔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04
놀랍고도 암담한 심정으로 모든 걸 인정했는데, 이스마엘은 이제 우리의 대화를 끝내자고 한다. 잠시 조급한 마음이 든다. 이봐, 문제를 지적했으면 대책을 제시해야지.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건데?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이런 질문을 이스마엘에게 던질 일은 아니다. 그는 ‘신’이 아니다. 인간이 신을 흉내내어 ‘선악’을 판단하고 세계를 손아귀에 넣고 흔들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는게 이스마엘의 주장이다. 그가 신이 아닌 이상, 신을 흉내내는 인간이 아닌 이상 우리에게 완벽한 대책을 마련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도 안 된다. 스승으로서 그의 몫은 인류 앞에 ‘화두’를 던져주는 것까지이다. 그 후엔 ‘상상력이 풍부한’ 인간들이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05
이스마엘이 내게 던져준 충격이 여전히 나를 사로잡고 있다. 그러나 당장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삼십년 동안 살아온 내 삶의 방식을 바꿀 수도 없고, 바꾸겠다고 결심해봐야 이스마엘이 원하는 방법은 아닐 것이다. 거리에 나서서 ‘여러분, 이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라고 외칠 수도 없다.
그래,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스마엘을 만나게 하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것이다.
여러분, 이스마엘을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