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송 2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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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이어......

 

19세기의 정통 소설 스타일을 기초로 했다고 밝혔듯이 소설 속의 묘사는 상당히 섬세하고 치밀하다. 예술과 창작에 관한 논의 뿐 아니라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에서도 등장 인물들은 단어의 본래 뜻과 상황이 내포하는 의미까지를 포함하여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며 말을 고른다. 그러면서도 언어의 부정확 혹은 불명확을 염려한다. 그러한 고민, 대화 중의 미묘한 심리 변화, 상대방의 표정이나 이해의 정도를 살피는 태도, 심지어 침묵의 소리와 의미까지 농밀하게 표현된 글을 읽고 있자면 마치 영화를 슬로모션으로 보는 듯 하다. 모든 동작이 눈에 들어오고, 그들 사이에 울리는 미세한 감정의 파장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리하여 소설은 길어질 수 밖에 없으나 지루하거나 따분하다기보다는 현실을 새롭게 보여주는 일종의 프리즘으로 작용한다. 책을 읽어가는 와중에, 작품 속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와 태도에, 상대방의 반응에 보다 신경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어느 인터뷰에서 문학의 힘은 언어의 명확성, 즉 생각이나 사고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체화시키는 명확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근원적인 문학적 힘 역시 언어를 구체화 시키는 명확성에 기인한다.고 언급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가 지닌 문학적 힘은 다른 형태의 예술 작품인 그림과 음악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정점에 이른다. 1권 마지막 부분에서는 들라크루아가 몇 년간 심혈을 기울인 하원 도서관 천장화를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질서와 무질서의 대립이라는 주제에서 출발하여 「그리스에 문명을 전하는 오르페우스」「이탈리아를 유린하는 아틸라」를 통해 화가가 표현하고자 한 의미를 설명하고, 그림의 전체 모습을 부분으로 나눠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들라크루아가 자신이 정한 주제와 세계관을 그림으로 형상화했듯이, 히라노 게이치로는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언어로 형상화해낸다. 음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작가가 클래식 음악에 상당히 조예가 깊다고 들었으나, 음악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능력일 터이다. 쇼팽의 연주회 장면은 40여 쪽에 이른다. 한 곡 한 곡 연주할 때마다 변화하는 연주자 쇼팽의 태도와 감정, 청중의 반응, 피아노의 선율을 타고 피어 오르는 정경, 연주회장의 뜨거운 열기를 섬세하게 짚어내는 묘사를 따라가면,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라곤 전혀 없는 나조차 쇼팽의 녹턴과 프렐류드와 첼로 소나타를 듣고 싶은 열정에 휩싸이게 된다. 가히 문학의 힘이라 할만 하다.

 

작가는 르네상스를 앞둔 중세 말기를 무대로 한 『일식』,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한 메이지 시대 말기가 배경이었던 『달』, 1840년대 프랑스의 혁명기를 묘사한 『장송』까지 모두 시대의 전환기를 탐색한 3부작으로 구상했다. (역자 후기)고 밝혔다. 작가의 구상은 타당해보인다. 한 세기를 마감하면서 새 천년으로 진입한 현대 역시 시대의 전환기일 터이므로, 과거를 돌아보고 그 의미를 밝혀내는 일은 당연히 필요하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지 않던가. 또한 이는 작가 자신이 원했던 대로 문학의 역사를 자신의 창작에 흡수하여 탄탄한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꼼꼼하고 치밀하게 자신의 길을 준비하는 이 작가의 행보가 새삼 감탄스럽다.

 

2003년과 2004년에도 『다카세가와』, 『방울져 떨어지는 시계들의 파문』이라는 단편집을 발표했고, 현재 번역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두 단편집은 현대 일본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 한다. 드디어 동시대로 들어선 히라노 게이치로가 어떤 작품을 써냈을지 사뭇 궁금하다. 출간되자마자 구입해 읽을 1순위 작가다.

 

* 한 가지 아쉬운 점. 조르주 상드를 비롯한 비중 있는 조연급의 여자들은 그다지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조르주 상드에 대해서는 아는 바 전혀 없으나 이 소설을 통해 보자면 바람직하지 않은 의미에서의 '낭만주의적 인물'이다. 여성에 대한 관점조차 고전주의식으로 따라간 건지, 다소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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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11-10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술이 처한 모든 위기는 반드시 실현된다."
이것이 최근의 제 고민인데요.
"반드시 실현된다"는 말을 함께 고민해보시면 어떨까 하는 고민이 ... 흐흐
히라노 게이치로는 왜 소설에 복고적 취향 혹은 스타일을 끌어들였을까?

urblue 2005-11-10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은 별 생각없이 제목을 붙였는데, 님 말씀 듣고 보니 어쩐지 발악처럼 느껴지는군요. -_-
"예술이 처한 모든 위기는 반드시 실현된다."라... 제가 고민하기엔 지나치게 거창합니다. 생각없는데다 게으르기까지 하다니까요.
히라노 게이치로가 복고적 스타일의 글을 쓴 건, 제 리뷰를 읽으시고 파악이 안 된다면 작가 본인에게 여쭤보심이...영어 잘 한대요. ㅎㅎ

바람돌이 2005-11-10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목할만한 작가일 것 같은데요. 땡기는 군요.
일단 일식부터 읽어보고.... 이책은 처음 도전하기에는 분량이 장난이 아니군요. ^^

urblue 2005-11-10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일식>이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달>을 엄청 좋아하죠. 그런데 제 친구들은 일식이 더 재밌다는 반응을 보이더군요. 혹시 일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더라도 달까지 읽어보시기를... ^^

바람구두 2005-11-10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말을 약간 오해하셨군요.
저는 그가 왜 그런 스타일을 구사하였는가에 대한 것...
그 의도가 궁금했던 거랍니다. 그 의도가 제가 앞서 말한 위기의 발현을 증명해주기도 하겠다는 생각...

urblue 2005-11-10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_-; (바부, 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웃지 마세요.)
그 점에 대해서는, 거의 동감,이랄 수 있겠네요.

로드무비 2005-11-1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동시대를 다룬 그의 소설이 더 보고 싶어요.
이 책 수첩에 적어놓습니다.
블루님 표 근사한 리뷰여요.^^

urblue 2005-11-11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저도 그가 현대 일본을 어떻게 다뤘을지 무지 궁금해요.
칭찬 감사. ^^

sudan 2005-11-13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는 [퍼온글]인줄 알고, 나중에 시간 내서 읽어야겠다 생각하고는 이제야 읽었어요. 거의 논문에 가까운 리뷰군요. (멋있어요!)

urblue 2005-11-13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제목을 잘못 지었어요. 아무 생각없이, 김연수와의 인터뷰 내용이 생각나서 붙인건데. -_-
읽은 척 안 하시면 서운해하려고 했어요! ^^
 
장송 1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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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쓰다 보니 길어졌다. 예상 못한 바는 아니다. input이 워낙 방대했으므로 output 역시 평소보다 늘어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1, 2권에 나누어 등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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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게이치로는 독특한 작가이다. 이십대 초반(1998년)에 문예지에 투고한 첫 소설로 무라카리 류 이후 23년 만에 대학 재학 중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으며, 그가 써 낸 소설이라는 것이 중세시대의 유럽 수도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당시의 종교와 사상을 깊이 있게 천착(알라딘 책 소개)『일식』이다. 1999년에 발표한 두 번째 작품 『一越物語 (일월 이야기, 번역 제목 )』는 고풍스러운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19세기 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예스럽고 애잔한 사랑이야기로,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는 듯 『일식』보다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끌어내었다. 새 천년을 앞둔 일본의 스물 서넛 젊디 젊은 대학생이 관심을 가진 소재가 중세의 종교와 사상, 메이지 시대 선인(先人)의 예술혼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련한 사랑의 감정이라는 사실이 내게는 다소 의아했다. 문체는 또 어떤지. 배경에 걸맞은 의고체(疑古體)는 물론이거니와 일본에서도 틀림없이 잘 쓰이지 않을 법한 한자 단어도 모자라 의미와 정서에 맞게 직접 조어(造語)까지 했다는 걸 보면 이 젊은 작가의 역량과 치밀함을 말하기에 앞서 그가 상당히 특이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 그가 4년의 준비 끝에 내 놓은 세 번째 작품이 바로 『장송(葬送)』이다. 일본에서는 2002년에 출판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이제야 번역이 되어 나왔다. 너무 젊은 작가라 다른 할 일(!)이 많아서 글을 안 쓰는 건 아닌지, 이 작가의 새 책을 다시 볼 수 없는 것인지 염려하며 오랫동안 기다려 온 나에게는 엄청나게 반가운 소식이다. 게다가 원고지 5500매, 사륙판 1600쪽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쇼팽과 들라크루아, 조르주 상드를 중심으로 예술가의 삶과 고뇌, 사랑과 죽음이 장려하게 펼쳐진다(문학동네 책 소개)고 하니 어찌 기대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또다시 의아했다. 일본인인 그가, 21세기를 살아가는 그가 어째서 19세기 유럽으로 눈을 돌렸는가.

 

모든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것 뿐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일기 쓰듯 소설을 써대는 몇몇 작가들이 이 말에 강하게 동조할지 모르겠으나, 그런 의미로 한정하여 폄훼할 말은 아닐 것이다. (작품 속에서 쇼팽과 들라크루아가 언급한 예술가의 태도,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비교 등으로 일기 쓰는 작가들을 논할 수도 있겠다.) 한 시대와 지역에 속한 개인으로서 세계와 역사와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 살아가는 방법 혹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 또한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 수렴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뿌리내리고 있는 지역, 시대와는 동떨어진 19세기 유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더라도 이는 결국 자신의 사유를 드러내고자 함이며, 따라서 작가 자신의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책을 읽어가면서 이런 생각을 확인하게 된다.

 

16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 중 상당 부분은 예술론에 해당한다. 고전주의의 엄격함에 대한 반발로 낭만주의가 한창 꽃을 피워갈 무렵,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낭만주의자로 이해되고 있던 쇼팽과 들라크루아는 오히려 그러한 호칭을 거부한다. 그들은 단순히 격렬한 영감에 의해 즉물적으로 표현되는 낭만주의적인 작품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엇보다 예술의 이상(理想)을 추구하며, 천재(天才)에 의해 한순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작품이 아니라 고상한 취미로 갈고 닦은 세련되고 완벽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고자 한다. 고전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되 표현 방법에 있어서는 전통에 얽매이지 말고 근대적 기법을 추구할 것, 그것이 들라크루아가 생각하는 낭만주의의 본질이다. 이는 쇼팽의 음악과 들라크루아의 그림 뿐 아니라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칙일 것이다. 들라크루아의 완강한 예술론 아래로 작가의 목소리가 겹쳐 들려온다. 작가는 『장송』을 쓰면서 발자크와 플로베르를 비롯한 19세기 프랑스 소설을 염두에 두었으며, 19세기의 정통적인 소설 스타일을 철저히 탐구하고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 마치 음악이나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이 화성학과 데생 공부를 거쳐 그 전통에 맞서는 것처럼. (역자 후기의 신문 인터뷰 인용)이라고 고백한다. 기본을 중시하고 고전을 완벽히 이해한 후에 새로운 기법으로 작품을 만들어내고자 한 쇼팽과 들라크루아의 창작론에 일치하는 태도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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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1-11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젊은 작가라 다른 할 일이 많아서...ㅎㅎ
모두 블루님 같은 줄 아신다니까!
본격 심층 리뷰 되겠습니다.^^

urblue 2005-11-11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만 놀러다니느라 바쁜 걸까요? -_-;
그치만 젊은 작가들은 아직도 가능성들이 많으니까 다른 길로 빠지지 않을까 진짜로 걱정된다구요. 글 쓰는 게 내 길이다,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봐요. 물론 좋아하는 작가에 한정된 얘기긴 합니다만. 어떤 작가들은, 제발 다른 길 좀 찾아보라고 조언해주고 싶기도 해요.
 
앰 아이 블루?
마리온 데인 바우어 외 12인 지음, 조응주 옮김 / 낭기열라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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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금기시되고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연예인의 아우팅 사건으로 세간에 화제가 되고 이제는 그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우리 주변의 모든 동성애자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는 십대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인권 영화제에서 상영된 <이반 검열>이라는 다큐멘터리는 이런 상황을 잘 보여준다. 교사들은 동성 친구들끼리 주고 받은 편지와 지나치게 가까운 관계를 문제 삼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떼어놓기 위해 전학을 시킨다. 그런 상황 하에서 아이들은 묻는다. 왜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면 안 되는데? 

 

영화를 보고 처음에는 저 아이들이 자신의 성 정체성에 관해 어느 정도나 확신을 가지고 있길래 저러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고, 다음에는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상당히 일찍 시작될 수 있음을, 그럴 때에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적절한 조언과 보살핌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앰 아이 블루?>는 그런 아이들을 위한 책이다.

 

엮은이 메이언 데인 바우어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글을 쓰는 작가들이 동성애처럼 사회가 침묵으로 덮어두려는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미국의 유명한 청소년 문학 작가들을 대상으로 단편을 공모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의 여러 저자들 중에는 동성애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또 그래서,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퀴어 아이(Queer Eye for the Straight Guy)>의 카슨을 연상시키는 요정 대부 멜빈이 유쾌하게 동성애에 관한 강의를 늘어놓는가 하면(앰 아이 블루?), 세상의 온갖 차별에 반대하는 유태인 할머니가 동성애자 손녀를 이해하기도 하고(어쩌면 우리는), 생사를 오락가락하는 위험한 전장에서 아름다운 사랑이 피어나기도 하고(땅굴 속에서),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며(학부모의 밤, 홀딩),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위니와 토미). 그러니 기본적으로 이 책이 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관심과 긍정, 의사소통, 이해와 믿음이라는 전통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학부모의 밤>에 등장하는 교사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확신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가장 큰 교훈이라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성애자다, 혹은 동성애자다 라고 미리 못박은 채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괴롭힐 필요는 없다는 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다는 점.

 

하나 더, 내가 이 아이들의 부모라면 어떨까. 자신이나 타인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과 비교해서 자식의 문제에 똑같이 관대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또한 부모들을 위한 책이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고 그 가치를 이해한 부모라 하더라도, 과연 자신의 아이에게, 특히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아이에게 권해줄 수 있을까는 여전히 의심스럽지만, 최소한의 발판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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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n 2005-10-24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깔끔한 리뷰네요. 어떤 책인지 정확히 알 것 같아요.

히피드림~ 2005-10-24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의도아래, 작가들이 모여 적절한 것을 써주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네요. 이 책 보관함에 들어갑니다. 아울러 추천도 꾹!!^^

2005-10-24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릴라 이스마엘
다니엘 퀸 지음, 배미자 옮김 / 평사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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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제자를 구한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에서 고릴라 이스마엘을 만났다. 그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주제, 감금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감금이 주제라고? 인간은 문명의 포로라고? 아, 당신도 유행에 민감하군. 역시 최근 유행의 키워드는 자연이야. 전원 주택을 짓고 유기농 식품을 먹고 주말 농장을 운영하고 천연 소재로 만든 옷을 입고 울창한 자연림이나 해외 휴양지에 나가서 휴가를 보내는 거, 그렇지, 그게 제대로 사는거지. 도시 생활이란게 아주 번잡하고 갑갑하잖아. 돈이 좀 많이 드는게 흠이라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지만, 나도 나름대로 자연의 삶을 즐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나이 들면 시골로 돌아가 농사지을 생각도 한다구. 그걸 알아줬으면 해.

이스마엘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02

이스마일이 내게 무언가를 묻는다. 정말 모르겠다.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가 다른 식으로 묻는다. 이제 알 것도 같다. 세계와 우리의 문명과 인간의 종교에 관한 것들. 그러나 그가 묻는 게 내가 알고 있는 그것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어 머무적머무적 대답을 한다. 그러면 이스마엘은 그 내용을 처음에 물었던 방식, 다른 관점으로 비틀어버린다. 뭐? 정말? 그게 그런 의미였어? 다시 이어지는 이스마엘의 설명.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대로 글러브 낀 주먹이 되어 내 머리를 마구 두들긴다. 살짝 잽을 날리기도 하고, 강한 어퍼컷을 먹이기도 한다. 난타당한 충격에 비틀거리다가 STOP을 외칠 수 밖에 없다. 잠깐, 내게 시간을 좀 줘! 그러나 실은 그만두고 싶지 않다. 그의 말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많이 듣고 싶은 심정이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뭔가가, 진부한 상투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뭔가가 머리 속으로 뚫고 들어오려는 듯 긁어대는걸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03

초등학교 수업 시간에 식량 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반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인류가 굶어죽는 날이 올 거라고 배웠다. 불과 이십년 정도 지난 지금, 아무도 그런 걱정은 하지 않는다. 대신 석유를 비롯한 천연자원이 고갈되어 가는 것을 염려한다. 또한 희귀 동식물의 멸종과 생태계 파괴를 얘기한다. 그러나 정말은, 그런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스마엘의 지적대로 우리들은,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조금 더 기술이 발전하면 나아질거야, 하는 생각으로 잊어버린다. 어차피 내 힘으로 해결해야 할 내 문제가 아니니까, 과학자가 혹은 정부가 나서야 할 성질의 것이니까.

그러나 이스마엘이 원하는 것은 이런 차원의 문제의식이 아니다. 흔히들 말하는 발상의 전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따라가기가 버겁기도 하지만, 결국엔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04

놀랍고도 암담한 심정으로 모든 걸 인정했는데, 이스마엘은 이제 우리의 대화를 끝내자고 한다. 잠시 조급한 마음이 든다. 이봐, 문제를 지적했으면 대책을 제시해야지.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건데?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이런 질문을 이스마엘에게 던질 일은 아니다. 그는 이 아니다. 인간이 신을 흉내내어 선악을 판단하고 세계를 손아귀에 넣고 흔들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는게 이스마엘의 주장이다. 그가 신이 아닌 이상, 신을 흉내내는 인간이 아닌 이상 우리에게 완벽한 대책을 마련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도 안 된다. 스승으로서 그의 몫은 인류 앞에 화두를 던져주는 것까지이다. 그 후엔 상상력이 풍부한 인간들이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05

이스마엘이 내게 던져준 충격이 여전히 나를 사로잡고 있다. 그러나 당장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삼십년 동안 살아온 내 삶의 방식을 바꿀 수도 없고, 바꾸겠다고 결심해봐야 이스마엘이 원하는 방법은 아닐 것이다. 거리에 나서서 여러분, 이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라고 외칠 수도 없다.

그래,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스마엘을 만나게 하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것이다.

 

여러분, 이스마엘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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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n 2005-10-20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만 좀 꼬시세요. 주문했어요.

urblue 2005-10-20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은 말고. ㅋㅋ
다른 분들도 꼬셔야죠.

물만두 2005-10-20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까말까 중입니다...

로드무비 2005-10-21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만나봐야 할 것같은 생각이 물씬!
독특하고 근사한 리뷰네요.
내용, 형식 모두.^^
수첩에 메모해 놓을게요.^,.~

urblue 2005-10-21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고맙습니다. 님밖에 없어요. 흑.

물만두님, 음, 꼭 보셔야 하는데.

바람구두 2005-10-21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추천...
 
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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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이 그랬었다. 그런 얘기라면 너무 빤하지 않은가요? 엄마가 집 나가고 아이들은 불쌍하고…… 너무 상투적이에요. 상투적인 그런 얘기 새삼스레 할 필요 있나요? 그런 건 피디수첩에서도 안 다뤄요. (겨울의 정취)

 

맞다, 상투적이다. 어느 시대 어느 마을에나 집 나간 엄마는 있었고, 그 엄마 찾아 전국을 떠도는 아빠가 있었고, 병든 혹은 거동이 어려운 할머니나 할아버지와 사는 아이들이 있었다. 엄마가 집 나가고 아이들이 불쌍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피디수첩에서도 안 다루는 진부한 얘기. 그런 줄 알면서 작가는 왜 굳이 집 나간 엄마와 엄마 찾는 아빠와 남겨진 아이들에 천착하는가.

 

돈을 벌기 위해, 몸서리쳐지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나와 도시의 변두리에서 다시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는 사람들은, 사실 우리 문학의 전통에서 보자면 전혀 낯선 인물들이 아니다. 저 멀리 일제시대부터 가깝게는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소설 속에 수도 없이 등장한다.

 

그들이 사라진 건 언제부터였을까. 어느날 그들은 사라졌다. 포스트모던의 시대가 왔고, 가난은 상투적이었고, 가난을 얘기하는 것은 진부했고, 그래서 문학 작품 속에 꾸준히 살아있던 궁핍하고 애처로운 사람들은 더 이상 차지할 자리가 없었고, 우리 시대에는 더 이상 궁폐한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불행은 가난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에서 비롯된다는 듯, 그렇게 그들은 사회에서 잊혀졌다. IMF로 다시 절대적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뉴스에 등장했으되 다만 가십거리일 뿐, 시대와 사회의 문제로 인식되지는 못했다. 살인적인 빈곤은 끝나지 않았는데 빈곤에 대한 담론만 뚝, 끝나버렸다.

 

공선옥의 작품을 접하는 것은 <유랑가족>이 처음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으면서 무척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공선옥이, 오랫동안 잊고 지낸 저 우리 문학의 전통과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90년대 이후로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상투적이고 진부한 이야기. 작가 자신이 무척 어렵게 살아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일까, 그가, 남들이 진부하다며 묻어버린 이야기를 꿋꿋이 끌어내어 샅샅이 보여주는 이유가. 남들이 뭐라든 간에 그에게는 그것이 현실이고 진실이니까. 아직은 끝나지 않은, 끝내서는 안되는 이야기니까.

 

다섯 편의 연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궁상이다. 다들 가난하고, 그러면서도 서로 버리고 버려지고, 속고 속이고, 악다구니와 칼부림이 난무한다. 간간이 보이는 사람 사는 정이라는 것도 어느새 슬그머니 묻혀버린다. 게다가 작가는 상황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부엌이 망가졌어도 둘이 함께 하니 문제 없는 두 사람이……영주를, 키워줄 것이(남쪽 바다, 푸른 나라)라고 기대했던 사진작가 한에게 두 사람의 처참한 결말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나는 그만 울컥하고 만다. 가난하지만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결말은 애초에 작가에게는 허황한 꿈일 뿐이다. 그는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불가능한 희망은 과감히 뿌리친다. 전국 방방 곡곡을 아무리 헤매도 한번 엮인 가난과 불운의 사슬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는 걸 작가 스스로 처절하게 깨닫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랑가족>에 등장하는 인물들 때문에, 그들의 비참한 결말 때문에 먹먹하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음을 보았기에 아직은 절망에 이르지 않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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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5-07-26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보고 있습니다.

로드무비 2005-07-27 0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주 데리고 하룻밤 자러 들른 친구집, 그 친구놈에 대한 분노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마누라 시켜 그 꼴같잖은 책 전해줄 땐
갈대문학인가 솟대문학인가 패대기 치는 제 마음이 있었죠.^^

sudan 2005-07-27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선옥이라는 작가는 요즘 들어 귀에 많이 들어오네요. 리뷰 좋은데요?

urblue 2005-07-27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단님, 로드무비님 덕분에 공선옥을 읽게 되었는데, 다른 책도 좀 더 봐야겠어요. 90년대 이후의 여타 작가들과는 확실히 다르네요. 감사.

로드무비님, 따지고 보면 그 친구도 달리 어쩔 수 있겠어요. 내가 그 친구같은 모습이 아니라고 자신할 수도 없고.

바람돌이님, 재미있으신가요?

새벽별님, 고맙습니다. ^^

히피드림~ 2005-08-08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공선옥은 로드무비님 페이퍼에서 여러 번 소개됐던 작가라 낯이 익었는데 님 리뷰를 보니 흥미가 더 생기네요.^^
윗 분들 말씀처럼 정말 멋진 리뷰입니다.

urblue 2005-08-09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unk님, 공선옥은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 ^^

happyant 2005-08-10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선옥, 읽어봐야지읽어봐야지 하면서도 여태 미뤄두고 있었는데, 님의 리뷰를 읽으니 참을 수가 없네요. 어서 읽어봐야겠습니다.^^

urblue 2005-08-11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기분 좋군요. 재밌게 읽으시길. ^^

구르는돌 2005-08-17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러운 글쓰기네요.

2005-08-31 1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8-31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8-31 1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9-01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9-01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9-01 1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