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 > 노란색이 파란색에게
몇 년 전 늦가을이었습니다.
전날 밤 나의 잠을 방해하던 몽상의 여운 때문인지 평소보다 일찍 깨어나 버스를 타고 학교로 갔습니다. 전날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난 후 하늘은 여전히 두꺼운 회색빛으로 덮여 있었고, 전날의 몽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나는 차창밖으로 빗물에 젖어 우울한 거리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버스종점에 도착했답니다.
버스의 종점에서 학교 정문까지는 20여미터 정도의 거리로, 곡선으로 굽어 있는 철조망 담장을 따라 돌아가는 길이랍니다. 타박타박, 평소처럼 느릿느릿 담장을 돌아 정문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습니다. 담장을 돌아서는 순간 거대한 정문의 모습이 눈가에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눈부신 빛이 제 눈 속으로 쏟아져들어 왔습니다. 저는 순간 너무 놀라 우뚝 멈춰서서, 멍하니 그 빛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빛이 뭐였나구요? 그건 사실은 빛이 아니라 색이었습니다. 노란색, 너무나도 노란, 비에 젖어 더욱 더 깊어지고 맑아진 노란색 은행나무가 뿜어내는, 정문 옆에 서 있는 은행나무가 펼쳐내는 놀라운 노란색의 광선들이었습니다. 제 입에서는 낮은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 저게, 저게 바로 노란색이구나 ...”
저는 그 때 처음으로 노란색이 어떤 색인지 깨달았습니다. 노란색이야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수백번 수천번도 더 봤지만, 노란색이 어떤 것인지는 그 때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노란색은 바로 그 색이었습니다. 너무 두껍지도 얇지도 않고, 너무 탁하지도 맑지도 않고, 너무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바로 그 색, 그 색, 그 빛깔, 그 광채가 바로 노란색이었습니다. 플라톤이 그 색을 보았다면, 아마도 “노란색의 이데아가 저기 있다!”고 소리쳤을 만한, 바로 그것이 노란색이었습니다.
고흐는 해바라기에서 그 노란색을 봤던 걸까요? 고흐가 봤던 그 노란색을, 제가 은행나무에서, 은행잎에서 다시 본 걸까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겁니다. 고흐와 저는, 감히 비교하자면, 노란색의 절정을 경험했다는 점에서는 같겠지만, 둘 모두 노랑의 색채가 뿜어내는 황홀경에 감격했다는 점에서는 한가지겠지만, 각자가 본 노란색은 또 각자만의 노란색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해바라기는 그에게 노랑 그 자체였듯이, 저에게 은행잎은 바로 저에게 노랑 그 자체였던 거죠.
저는 그래서 그 노란색을 통해, 그 순수한 노란색의 빛을 통해 비로소 발터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의 의미를 이해했답니다. 아우라란 그런 거죠. 그 어디에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매순간, 여러 곳에서 출몰하는 사물 그 자체의 신비,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예측하지 못한 순간 다가와 문득 갑자기 나의 눈을, 나의 손을, 나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그것, 사물 그 자체의 접촉 ...
그건 다른 말로 하면 아마도 생명의, 삶의 신비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70년 가량을 살아가면서, “나, 살아 있어, 지금, 여기에. 이게 바로 삶이야, 생명이야!!”라고 느끼고 말할 수 있는 순간, 그 순간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을까요? 내가 노란색을 경험한 그 순간은 1분도 안되는, 아니 10초, 아니 1초도 안되는 찰나의 순간이었으니, 우리가 70년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사실 무한에 가까운 삶의 순간, 생명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는 셈인데, 그 순간, 삶 자체가 문득 나에게 다가와 나를 스치고, 나를 접촉하고 지나가는 그 절정의 순간을 왜 그렇게 경험하기가 힘든 걸까요?
노란색의 경험, 노랑 그 자체의 경험은 저에게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한번도, 또는 거의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사물 그 자체가 존재한다는, 내가 사물과, 삶과 접촉하고 있다는 느낌,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 ...
블루님의 파란색 이미지를 보면서 가끔 그 때의 노란색을 떠올렸습니다. 블루님에게는 파란색이, 파랑 그 자체가 바로 저의 노란색이 아닐까 하고 말이죠. 삶으로, 생명의 절정으로 통하는, 삶이 우리에게 문득 자신을 드러내는, 그 내밀하면서도 평범한 순간으로 들어가는, 비밀의 문 ...
어느날 문득, 그 열쇠를 얻으시기를, 그리고 그 재미있고 짜릿한 뒷이야기를 들려주시기를 ... ^o^
앗, 하나 빼먹었다 ... ^^;;;
음악선물!!!
슈베르트의 [세레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