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기
월간 『노동자의 힘』제41호(2003.10.20)

 

'조합주의'와 코포라티즘

 코포라티즘은 20년 전에 '조합주의'란 용어로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그러나 조합주의라는 용어는 노동조합론에서 말하는 노동조합주의(trade unionism)나 생디칼리즘(syndicalism)과 혼동되는 난점을 보인다. 뿐만 아니라 '조합'이라는 말은 계약에 기초한 근대사회의 다원주의적 이익대표 개념에 더 가깝기 때문에 코포라티즘이 함축하고 있는 유기체적이며 공동체적인 의미를 표현하지 못한다. 코포라티즘은 사회적 권리와 의무를 전제로 자율적 직능집단의 정책결정 참여를 통해 안정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던 중세 장원제도에서 연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코포라티즘'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적절한 용어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적절한 용어가 발견될 때까지는 코포라티즘이라는 영어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자 하는 학회의 한 결정을 따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코포라티즘의 개념

 코포라티즘은 1970-80년대에 사회과학의 주요 논쟁 대상이 되었는데, 그 정의와 접근방법은 학자마다 매우 달랐다. 자본주의 체제의 정치적 하부구조 중의 하나로 파악하거나, 포드주의적 축적양식과 연결하여 케인즈주의 양식이 사라지고 포스트포드주의로 이행과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수렴이론의 입장에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를 대체한 것 혹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간의 제3의 체제적 대안으로 보거나, 적절한 위기관리 방식으로 보는 학자도 있었다. 이 중에서 마지막 입장은 노조가 국가조절기제에 결합함으로써 등장한 독일의 코포라티즘과 관련해 특히 주목받는 입장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여러 입장들 중에서도 코포라티즘의 공통적 특징이 되는 이론적 핵심은 '국가기구의 적극적 중재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사회집단들의 독점적·기능적 이해관계 대변조직들이 이해관계대변과 국가 정책집행을 연결하는 고리로서 노·사·정 3자의 정치적 교환에 참여하는 사회정치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때 사회집단은 물론 사안에 따라 의약 집단이나, 종교집단 등 다양한 사회집단들을 포괄하는 의미이다. 그러나 산업자본주의 국가에서 노사의 대표조직은 다원주의자들이 비차별적으로 등치시키는 사회 내의 무수한 다른 조직들과는 상이한 핵심적 이해관계대변조직이라고 보아야 한다. 노사 대표조직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적 요소인 자본과 노동을 대표하는데, 특히 코포라티즘적 체제에서는 독점적으로 대표하고 통제할 뿐만 아니라 국가와 정부정책의 정치적 정당성의 확보에도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코포라티즘의 분류

 코포라티즘의 분류도 학자마다 매우 다양하며, 그 분류의 기준에 따라서도 매우 상이한 개념들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에도 대개는 근대사회의 코포라티즘을 양차대전 사이에 나타났던 코포라티즘과 2차대전 이후 서유럽에서 나타난 코포라티즘으로 구분하는 것에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전간기의 나치즘과 파시즘 등 독재정치의 사회통제 메커니즘을 의미하는 전자를 주로 국가 코포라티즘이라고 한다면, 의회민주주의 체계에서 나타나는 후자는 흔히 네오 코포라티즘이나 사회 코포라티즘 혹은 민주적 코포라티즘으로 불린다. 여기에서는 국가코포라티즘의 대당적 의미를 살리기 위해 사회 코포라티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국가 코포라티즘이 부르조아가 약해지거나 분열되어 자유민주주의 지배질서에서는 비특권계층의 합법적 요구에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가 억압적 방식으로 지배계급을 대신하는 것이라면, 사회 코포라티즘은 안정된 의회민주주의적 부르조아 지배체제에서 피억압 계급을 체제에 통합시키는 방식으로서 사회 갈등을 평화적 방법으로 해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1960년대 말 70년대 초중반 독일의 사회코포라티즘

 독일은 사회 코포라티즘의 측면에서 볼 때에는 라틴유럽 국가들에 비해 강력하지만,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나 오스트리아에 비해서는 약한 코포라티즘 국가이다. 그러나 히틀러의 나치정권이 국가 코포라티즘의 전형적인 예에 속했으며,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중반의 독일은 사민당 주도의 연립정부아래 사회 코포라티즘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국가의 하나였다. 이른바 독일 모델이 독일의 특수한 제도적 특성과 정책적 특수성으로 인해 분명한 사회 코포라티즘의 형태를 구성했던 것이다.

당시 독일의 사회 코포라티즘은 1966/67년의 경기후퇴에 대한 대응으로 사민당과 기민/기사연의 대연정이 '경제안정·성장촉진법'을 도입하여 경제에 개입할 것을 시도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에 따라 1967년 6월에 연방의회는 가격안정, 완전고용, 외부재정균형, 적절한 경제성장을 국가정책의 4대 경제목표로 설정하였고, 정부로 하여금 5개년 재정계획을 세우도록 하고, 협주행동(Konzertierte Aktion)의 도입을 규정하였다.

특히 협주행동은 사회 코포라티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조절기제였다. 당시 경제장관이었던 칼 쉴러(Karl Schiller)가 경제전문가위원회, 연방은행, 사용자단체, 독일노련 등 관련 6개 부문의 대표들을 소집하여 거시경제적 목표와 구조정책 및 소득정책에 관해 토론하고 협의한 것이다. 쉴러는 관련단체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사용자측으로부터 가격안정을 보장받고 노동자측으로부터는 임금인상의 양보를 얻어내어 인플레이션 억제와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고자 했다. 그에 대해 사용자측은 조세부담인하와 공공비용절감을 기도했고 노동자측은 실업문제의 해결과 정책참여를 요구했다.

독일의 초기 사회 코포라티즘의 결과는 일정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되었다. 1967년 봄에 62만9천명이었던 실업자가 같은 해 10월에는 34만1천명으로 감소하였으며, 이 해의 경제성장률도 5%에 이른 것이었다. 또한 공동결정법이 확대되었고 중하층 국민들의 교육기회도 증대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1972년 쉴러 장관이 사임한 후 협주행동은 형식화되었으며, 1974년 이후에는 노동시장 파트너들에게 국내외적 상황을 알리는 데에만 이용되었다. 그에 따라 노조 내에서도 비판이 거세어져 결국 독일노련은 1977년에 불참을 선언하였다. 사용자측도 같은 해에 공동결정법 확대(1976년)에 불만을 품고 참석하지 않게 되었다.

  

코포라티즘 종언론의 대두와 그 배경

 독일식 사회 코포라티즘의 특징은 조직된 이해관계집단들보다 정부가 주요정책결정을 발의하는 데 중심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사회 코포라티즘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조건은 안정된 행정지도력, 지속적 경제성장, 고용 등 노동시장 조건의 안정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의 쇠퇴기를 거쳐 1980년대에는 기민/기사연과 자민당의 신보수주의 정권이 등장한 이후 독일도 이른바 코포라티즘 종언론의 대두와 그 정치경제적 배경의 성숙을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첫째, 서비스업의 확대, 화이트칼라층의 증대 등 산업구조의 변화로 인해 노동의 분화와 내적 이질화 현상이 심화되었다. 둘째, 포스트포드주의와 작업장의 유연적 전문화 등 자본주의 축적양식의 구조적 변화가 본격화되었다. 셋째, 1980년대 초반 이후 국제화와 세계화 물결이 거세게 불어닥치자, 국민국가적 중앙교섭이 기피되고 기업 혹은 초국적 기업 수준의 분산적 임금·고용협상이 더욱 선호되기 시작했다. 넷째,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가 심각한 재정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업 혹은 노동자그룹 수준에서 노동과 자본간의 교환합의인 생산성연합(productivity coalitions)이 코포라티즘에 대한 대안으로 제기되면서, 노동측이 경영측과 협력하여 기업의 생산성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그 대가로 고용안정과 기업의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받으려는 경향이 확대되어 갔다.

1980년대 초·중반은 독일 노동조합운동의 수세기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정치적 수세기와 탈정치화의 극복은 참으로 어두운 긴 터널을 마주하게 되었다. 코포라티즘의 관점에서도 독일은 신자유주의적 공세와 세계화의 광풍 속에서 노사정협의체제의 종말을 극복하지 못했다. 물론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성공적인 주35시간제 투쟁은 노사정협의체제의 종말이 아니라 코포라티즘과 노사정협의체제 자체를 극복하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한 그 투쟁조차 노동시장 유연화와 교환된 반쪽의 성공에 불과했다.

  

적녹연정과 공급조절 코포라티즘

 코포라티즘 종언론을 종식시킨 것은 사회 코포라티즘의 새로운 등장이 아니었다. 1998년 사민당의 집권과 적녹연정의 성립은 한때 사회코포라티즘의 재시도를 예측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3의 길'과 '신중도'로 포장된 사회조절정책은 이미 수요조절정책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사회 코포라티즘은 이제 수요조절 코포라티즘으로 치부되면서, 슘페터식 공급조절 코포라티즘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독일의 새로운 좌파정부정책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면, 경제정책에서 탈규제, 민영화, 조세인하를 중심으로 하고, 사회정책에서 재정적자 해소와 복지제도의 효율화와 감축을 추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 제고를 강조하는 탈규제 정책을 대폭 수용한 점이 경제정책의 구체적인 내용이라면, 이른바 '근로를 촉진하는 국가'를 추구하며 실업을 해소한다는 명분아래 열악한 일자리조차 복지혜택의 조건으로 강제하는 것이 사회정책의 실상이다.

2002년 재집권에 성공한 슈뢰더 총리는 적녹연정 2기의 출범에 즈음하여, 연정의 정책목표는 '개혁과 지속 가능한 경제발전 및 사회적 통합'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서, 어려운 경제 여건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지켜온 복지국가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재정 절약을 비롯한 복지국가의 감축은 그 이후에도 지속되어 왔을 뿐 아니라, 적녹연정의 핵심적 사회정책의 하나인 고용창출정책은 임시노동과 비정규직 노동에 집중되었다.

이와 같이 '개혁, 정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목표로 '노동시장 개혁과 경제회생'에 중점을 둔다는 2기 적녹연정의 정책기조도 1기의 사회경제정책을 지속할 것으로 보이며 특히 재정정책과 관련해서는 긴축정책을 한층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코포라티즘의 관점에서 보면, 적녹연정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중반 '협주행동'의 경험을 살려 노사정간 새로운 고용협정을 추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중도' 노선의 고용협정은 '협주행동'의 수준에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공급조절 코포라티즘로서 그 성격을 완전히 달리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적녹연정은 처음부터 고용협정의 협의 내용을 정책에 반영한다는 의지를 갖지 않은 채 정부 정책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는 정책적 동원기제를 구상한 것이다. 그것은 또한 국가 개입의 측면에서 직접 개입을 피하되 다른 한편으로는 이 협의기제를 통해 간접 개입은 확대함으로써 경쟁력뿐만 아니라 제반 분배조건도 개선하려는, 공급측 개입을 위주로 하는 코포라티즘적 사회통치(corporatist social governance)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수요조절 코포라티즘으로 불리는 사회 코포라티즘이 완전고용, 노사관계안정, 사회복지의 확대를 주요의제로 삼았다면, 공급조절 코포라티즘은 노동시장의 유연성확보, 생산성 증대, 그리고 사회복지지출의 통제를 통한 국제경쟁력을 강조하는 한편, 노동시장의 열패자에 대한 보호 및 재취업 기회 제공, 불공정해고의 제한, 그리고 경제성장 과실에 대한 공정한 분배 등의 이슈를 주요 내용으로 한다. 한마디로 독일 정부의 공급조절 코포라티즘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친화력을 가진 것으로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위한 사회적 동원과 통제의 기제로 이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코포라티즘의 양면성

근대 독일 코포라티즘의 역사는 나치즘의 일방통행적 경험과 대연정과 적황연정의 자발적 협의기제 시도를 거쳐 적녹연정에서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친화성 있는 공급조절 코포라티즘으로 변해 왔다. 정부기구로부터의 억압의 경험에서 자발적 참여의 형태로 전환해 온 측면이 존재한다. 특히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중반의 '협주행동'은 당시 전통 사민주의 노선을 표방한 사민당의 집권이라는 정치적 조건 외에도 당시 유럽 전반을 휩쓸었던 자발적 노동투쟁의 힘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회 코포라티즘은 노동체계의 제반 갈등을 '노동시장으로부터 정치의 장으로 끌어들여 해결하고자 하는 '노동계급의 투쟁의 산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협주행동' 조차도 노조의 정치적 파업을 금지한 1952년 공장법 제정이후 특히 심화된 노조의 순치 및 지속적인 관료화의 영향뿐만 아니라 사민당의 우경화에 따른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자발성을 띠었다고는 하나 전반적으로 정부주도의 성격을 처음부터 노정했던 '협주행동'도 이를 주도했던 경제 장관의 사임 이후 곧 쇠퇴한 것은 이러한 성격을 잘 증명해준다.

특히 최근 적녹연정의 공급조절 코포라티즘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그 통제적 성격을 더욱 뚜렷이 하고 있다. 고용협정을 중심으로 하는 적녹연정의 삼자협의체제 시도는 자본주의 질서의 신자유주의적 재생산을 목적으로 국가와 자본이 노동계급을 회유·통제하기 위해 발전시킨 관리메커니즘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정부 주도의 사회적 동의 창출 기제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독일 노동측의 적극적 노력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의 경험은 사민당의 집권을 정치적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코포라티즘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의 위기극복과 구조조정을 위한 사회적 관리기제임을 시사해준다. '사회'적이든 '공급조절'적이든 코로라티즘의 기능적 핵심은 노동자들의 이익대표기제로서 적극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측면도 있지만, 계급성을 탈각한 사민당과 순치된 노조를 통한 노동자들의 탈정치적 동원기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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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05-24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