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 2 > < 3 > 


- 카리브적 지식을 위하여 -

 

애초에 우리가 만나려 한 사람은 '아르헨티나 전문가'가 아니라, 지난 가을에 발간된 한 책의 저자였다. 표지 장정이 아주 매력적인 이 책은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라는 독특하고도 낭만적인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보기 드물게도 한국인의 손으로 씌어진 라틴 아메리카 여행기였다. 이 책을 두고 우리는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이야기를 좀 편하게 들어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를 빼면 이성형 선생을 만나고 난 뒤에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경계 없고 자유로우며 전방위적(全方位的)인 지식」에 대하여 생각하여야 했다. 화제가 되었던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창작과 비평사, 2001, 이하 『아바나』로 줄임)에서 이성형 선생의 해박은 음악·신화·문학 등등을 포함한 라틴아메리카의 문화 전반에 대한 소개에서 이미 드러나 있지만, 직접 만나서 본 그것은 호사나 개론(槪論)의 차원이 아니었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에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그날 나는 전혀 '문외(門外)'인 인류학에서 시작하여, 이성형 선생을 따라 보들레르에서 도정일에 이르는 세계의 문학가들과 살만 루쉬디의 『악마의 시』에서부터 황석영의 근작 『손님』에 이르는 세계 문학 작품을 따라다녀야 했고, 마르크스에서 에드워드 사이드에 이르는 여러 대가들의 책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느라 바빴다. 책 읽는 데 게으르며, 쓸데없이 많은 지식이야말로 때로 생(生)에 진짜 해(害)가 된다고 믿기도 하는 나로서는 이런 대단하고 자유로운 넘나들기와 뛰어다니기가 어디에서 왔는가/올 수 있는가 하는 의아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기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무엇보다도 우선 - 그가 생각하는 자기 전공학문, 즉 지역연구(Area Studies)가 가져야 할 요건이 넘나듦이었다. 제대로 된 "지역(地域)"연구는 국지(局地)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전방위적으로 '글로벌(Global)'스럽게 구성된 지식세계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 했다. 그것을 위해서 대상 지역과 나라의 역사, 문화, 정치, 경제에 대한 '기본'적 지식 뿐 아니라, 세계의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문학·음악·영화로 된 자료들을 섭렵하여 그에 대한 형상적 지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그 공부를 위한 요건을 어떤 사람이든 다 가질 수도 없고, 다 가진 것도 아니다. 모든 지역 연구자나 인류학 전공자가 그처럼 넘나들고 섭렵하지는 않기는 때문이다. 뭔가 타고난 「끼」와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인 것이다. 이성형 선생은 이를 가진 듯했다. 그리고 여기까지라면, 내가 이렇게 많은 지면(화면)을 할애하여 어떤 이의 해박과 유식에 대한 문장을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식세계의 일꾼들 중에는 박식한 사람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부하는 어떤 사람을 가리켜 '참 해박하다'고 하는 것이 결코 칭찬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성형 선생은 차고 넘치는 그저 박식한 사람의 하나가 아니었다는 것인데, 다시 이는 그가 지역연구가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지역연구는 다른 「공부」처럼 방구석에 틀어 박혀 수만 권의 책과 씨름한다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발로 뛰며 사람들 속에 자주 부지런히 섞임으로써 가능한 공부이기 때문이다. 그 지식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과 말과 그들이 호흡하는 살아 있는 공기와 그 역동을 통해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화 속에서 그러한 지식은 그의 세계관 자체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성형 선생은 넘나듦을 삶과 앎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로 삼은 그것을 '카리브적 감수성'이라 썼던 것 같다.(이성형, <위기의 지식사회에 묻는다 - 우리만의 지식은 있는가>, 『중앙일보』, 2001년 10월 25일자 참조) 좁고 편협한 국수주의적 태도와 동전의 양면이 되어 있는 편협한 서구-미국 지향성을 넘어서는 것이 한국 지식사회의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아바나에 이르기까지 -

이성형 선생은 1959년생. 부산대 회계학과를 1982년에 졸업했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1987년부터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와 문화를 공부하기 시작하여 「라틴아메리카 사회구성체 논쟁 : 1960∼1980년대의 논의를 중심으로」(1990)로 박사 학위를 땄다. 1997-2000년에 서울대 국제지역원 초빙교수를 지내다, 멕시코에 1년 나가 있으면서 그만 두었다고 한다.
이 때의 경험을 중심으로 해서, 지난 해 10월 하순,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라는 독특하고 흥미로운 기행기가 책으로 묶였다. 현재 초판 4천부를 다 팔고 2쇄 2천부를 '소화'중이라는 이 책은 "우리 사회에 라틴아메리카를 제대로 소개하고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기념비적 저작"(손호철, 「서평-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 『시민의 신문』)으로 꼽히며 선생을 유명하게(?) 만들기도 했다.
귀국한 이후 이 선생은 서울대 국제지역원과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강의를 맡고 있다. 우리가 만난 날도 서울대 대학원의 2학기 막바지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국내에 라틴아메리카 관련 강의가 얼마나 개설되어 있나요?
이성형> 사실 별로 없지요. 가끔 '중남미 정치론'이 간헐적으로 개설되긴 하는데요. 서문학과에서 중남미 역사나 문화 강의가 한 두 과목 개설되는 편이고요. 전체적으로 보면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아직 우리한테는 라틴아메리카란 게 굉장히 생소하고 먼 대륙이니까요. 서울대의 경우에도 문학 전공자외에는 관련 전공 교수가 하나도 없지요. 반면에 학생들의 관심은 꽤 큰 것 같아요.

 주로 중남미 정치 관련 강의를 하시는 거죠?
이성형> 예, 그런 편인데 국제지역원에서는 중남미 역사도 강의하고 있지요. 왜냐하면 그 쪽을 전공한 사람이 없어서요. 저도 공부를 해 가면서 강의를 했어요. 저한테는 큰 다행이었고, 도움이 많이 됐지만, 처음에 강의를 들은 학생들한테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왜 명의가 되려면 사람을 많이 죽여야 된다는 말이 있지 않아요, 하하하. 아직 저는 명의는 아닙니다만. (웃음)

그래도 늘 "라틴 아메리카 전문가"라 손꼽혀 일컬어지시는데요.
이성형> 하하, 그 말이 웃기는 게. 워낙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저 혼자 노는 거지요.  

<라틴아메리카 학회>가 있는 걸로 아는데요.
이성형> 예-. 거기 문학하는 사람도 많이 있고, 인류학, 정치학 하는 사람들도 좀 있는데요. 그렇지만 관련된 논문을 매년 1-2편씩 쓰는 사람은 희소합니다. 중남미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도 한국정치를 주 전공으로 하면서 곁가지로 그걸 다루는 경우가 많지요.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이나 공부를 하는 이들은 평범하지 않은 길을 걸어온 경우가 많다. 국내에서 드문 "라틴아메리카 전문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캐물었다.
이 선생은 부산상고와 부산대 회계학과를 졸업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은 우등생들이 빨리 자립하기 위해 가는 학교 중에 하나가 이전의 부산상고였는데, 처음부터 관심은 딴 데 있었다고 한다.

이성형> 대학 다니기 시작한 79년이나, 80년때는 학교 문이 닫혀 있었어요. 거의 수업을 안 했어요. 81년도에도 그랬던 것 같고. 매일 레포트나 내 주고 그랬죠. 전공 과목에 관심이 없어서 그 쪽 과목은 다 C, D만 받았는데, 다행히 수업을 거의 안 하니까 그냥 혼자서 읽고 싶은 책만 읽는 거예요. 전두환의 은덕을 받은 셈이죠. (웃음)

 그래서, 어떤 책을 주로 읽었나요?
이성형> 문학 책을 많이 읽었어요. 소설책, 시집 등 이것저것. 보들레르나 랭보에서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들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어학 공부겸 원어로 읽었지요. 역사 책 읽는 것도 참 좋아했어요. (선생은 지금도 '애들 기죽일 때' 보들레르나 랭보의 시를 불어로 왼다고 한다.)   

그런데, 정치학 공부를 하려고 대학원에 간 것은요?
이성형> 그 때는 또 정치의 시대였잖아죠. 정치학과 과목을 청강했는데 그걸 공부해 봐야겠더라고요. (보충이 필요한 대목이 아닌가 합니다.) 대학원을 가지말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갔고요.
생각해보니까 '전공'을 제대로 한 게 없는 거 같네요. 대학원 가서도 정치학이 아니라 주로 맑시즘 공부했지 뭐, 정치학과 전공 공부를 팠던 건 아니거든요
.

그 때는 대학원생들도 모여서 세미나 많이 했죠? 어떤 걸 주로 읽었어요?
이성형> 예. 주로 복사본으로 된 원전을 많이 읽었죠. 하하하. 마르크스부터 시작해서요. 레닌, 알튀세르까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런 공부가 어쩌면 학문을 황폐화시킨 면도 있는 듯한 것 같고 그래요. 시대가 그래서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남이 하면 다 같이 하나만 하잖아요.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사실 알튀세르 『자본을 읽자』가 사실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잖아요? 그 서문이야 재미있지만 본론 부분은 지금 하나도 기억이 안 나거든요. 『마르크스를 위하여』 는 비교적 흥미롭게 읽었지만요. 당시는 레닌주의의 정통이니 해서 모두 알튀세르를 읽었지요. 도그마티즘이 강했던 시대였지요. 세미나가 가지고 있는 단점이기도 하죠. 오소독스(정통)를 따지는 것도 우습고요.

"정통"을 따지던 시대였죠, 정말.
이성형>  정통에 대해서 한마디 할께요. 제가 학부 졸업할 때에는 종속이론이 유행했고, 좀 지나니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이, 프랑스의 조절 이론 책들이 소개되더라고요. 또 동시에 유럽의 현존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유로코뮤니즘 계열의 저작들도요. 제가 대학원 석사과정 공부를 할 때에는 지적인 분위기가 비교적 개방적이었고, 토론도 자유로왔지요. 그렇지만 19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갑자기 언로가 경색되면서 소위 '정통' 시비가 벌어지더라고요. 세계체제론도 가짜고, 조절이론은 변절한 사민주의자들의 푸념이라는 둥, 사이비 시비가 점차 확산되더라고요.
그 다음 유행한 것이 레닌의 저작물들, 나아가 맑스의 원전 읽기로 확장되었지요. 20세기 말의 정보화 사회에서  레닌의 저작으로 호흡을 하려했으니, 얼마나 우스꽝스런 일이에요. 물론 경색된 정국이나, 차갑게 얼어붙은 학원가의 분위기가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했겠지요. 그러나 주변에는 그런 획일성에서 과감히 벗어나서 "이게 아니다"라고 외친 사람은 참 드물었어요.    
요즘 생각하니, 학부 때 공부했던 것 - 소설책이나 역사책이나, 평전들이 머리에 많이 남고, 지금도 많이 써 먹는 것 같아요. (웃음)

처음부터 라틴아메리카 정치를 전공하고자 서울대 대학원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석사논문(「국가개입에 관한 한 연구 : 8·3조치(1972년)를 중심으로」)도 전혀 다른 영역의 것이었다. 논문은 제3공화국 말기의 사채 동결령을 정치경제학적으로 분석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중요하고 결정적인 삶의 많은 순간이 그러하듯, 라틴아메리카를 전공하게 된 데에도 우연의 옷을 입은 '운명'과 계기가 찾아왔다.

이성형> 제가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소 조교를 했는데, 그 때 소장님이 김세원 선생님이었어요. 조교를 마칠 때쯤 그동안 수고했다고 외국여행을 보내주신데요. 유럽에 갈 수도 있었는데... 미국과 남미로 가볼 기회가 생겼어요. 우연한 선택이었어요. 남미를 한 번 그냥 가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브라질까지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너무 멀고 그래서 브라질까지 가는 여비는 반납하고 멕시코까지만 가서 한 3주정도 있었어요. 그게 제가 한 첫 번째 외국여행이었어요. 그게 멕시코였다는 게 박사논문을 그 쪽으로 쓰게 된 계기죠.

첫 남미(멕시코)여행에서 본 것이 무엇이었길래 그랬습니까? 무엇이 운명적인 힘으로 작용했나요?
이성형> 아무래도 서점에서 만난 책들이었던 것 같아요. 스페인어 책을 읽을 수는 있어서 거의 매일 서점가를 돌았는데, 제가 처음 접한 지식 세계여서 거의 황홀한 기분이었어요. 참고로 스페인어권은 4억이 넘습니다. 그래서 영어, 불어, 독어, 이탈리아에서 나온 주요 서적들이 금방 번역되어 나오고, 또 자체의 언어권에서 쏟아져 나오는 지적 성과도 대단합니다. 그 다음 반한 것이 라틴 음악이었어요. 당시 멕시코에는 중남미에서 망명온 수준높은 음악인들이 다수 있었고, 이들이 연주하고 노래부르는 <알 라 뻬냐> 라는 술집이 있었어요. 그곳에 두어 번 갔었는데, 저녁 8시에 가면 꼭 연주가 끝날 새벽 1-2 시쯤에 돌아왔지요. 물론 구할 수 있는 테이프와 음반도 꽤 샀지요.
아마도 여비로 받은 대부분의 돈으로 책만 샀지요. 당시 소개받았던 선배집에서 숙식을 해결했기에, 꽤 많이 샀지요. 책 짐이 약 100kg 정도 되었지요. 짐 끌고 다니느라 캘리포니아를 여행하려니 고생 많이 했죠. 국내선 탈 때는 오버차지 40 달러 정도를 내기도 했고요. 돌아와서  그 책들을 정리하고 읽으면서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지요.
그러다 박사 학위 논문 준비를 하게 됐는데, 사회과학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중남미를 전공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이런 공부를 시작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88년에도 다시 멕시코로 가셨다면서요.
이성형> 예, 그 다음에는 88년인데, 논문을 쓴다는 목적의식을 좀더 분명히 하고 주제를 정하고요, 조교하면서 모아뒀던 돈을 다 털어서 갔다왔죠.

제가 '이성형'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고 지금껏 기억하는 게 선생님이 『현실과 과학』 같은 잡지에 쓰신 글 때문인데요. 그 때 이야기를 해 주세요.

호랑이 담배 피던, 1988년에 창간된 『현실과 과학』이라는 무크(아마 1500원쯤 했을 거다)를 알면 당신은 구세대다. 이 잡지는 1991년까지 발간되며 당시 PD 그룹의 가장 강력한 이론적 지렛대 구실을 했다. 윤소영, 이진경, 서관모 등의 이론가가 편집을 맡았던 발간 초기에 이 잡지의 반향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른바 반제반독점민중민주주의혁명, 즉 AIAMC_R을 알기 위해 대학생들은 이 책을 들고 '공부'를 하곤 했다. 1988년 겨울에 나온 『현실과 과학』의 제2호는 "사회구성체의 이론적 규명"을 특집으로 했고, 이진경·서관모·윤소영·이성형의 글을 차례로 게재했다.

 이성형> 제가 『현실과 과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것은 아니고요ㅡ 라틴아메리카 사회구성체 논쟁에 대해 기고해달라고 부탁이 왔어요. 알다시피 윤소영, 서관모 같은 분들이 편집을 했잖아요, 참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죠. 근데 저는 그때 생각하면 약간 쓰라린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요?
이성형> 부끄러웠어요. 제가 살아온 연륜, 무게에 맞지 않는 글들을 썼다는 약간의 자괴감이 있기 때문이지요. 직접 운동권에 속해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마치 운동에 자그만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착각도 있었던 것 같았고요. 여하튼 글과 삶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은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아요.

임영일 선생하고 같이 낸 『국가란 무엇인가』(한울, 1985)가 알려져 있던데요. 어떤 책입니까?
이성형> 예... 편역인데 풀란차스 논쟁 같은 거 다룬 거거든요. 그 책은 최근까지도 조금씩 나간다고 합디다.  

그럼 인세를 받으셨겠네요?
이성형> 아뇨, 석사과정 당시 그 때는 거의 매절이었어요. 1984년도에 2,500원씩 받은 거니까 잘 받았죠, 그걸로 아마 한 학기 등록금도 내고 술값으로도 좀 쓴 것 같아요.

박사논문 쓴 과정을 돌아 보시면요...?
이성형> 중남미에 대해서 누군가로부터 배우면서 공부한 게 아니기 때문에, 굉장히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처음 어떤 주제를 잡아야 할지부터 힘들더라고요. 그러다가 그 쪽 지성사의 흐름을 정리할 수 있는 주제를 정해보자고 생각했어요. 대단한 업적을 내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쿠바혁명 이후 2-30년간의 지성사의 흐름을, 특히 라틴아메리카의 지식인 세계를 지배하는 좌파 지식인의 사상을 정리해보고 싶었어요, 그게 제 박사논문이고요.

아무도 공부하지 않은 분야에 뛰어들 수 있었던 데는 그전부터 그가 기본적으로 스페인어를 읽고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성형 선생은 영어와 스페인어 외에도 불어, 포르투갈어, 등을 읽고 쓴다.

 공부라는 게 원래 '혼자'하는 거긴 하지만, 선생님처럼 특히 거의 동학이나 선배가 없는 그런 상황에서 공부한다는 게 뭘까 궁금해집니다. 책을 읽다 모르는 게 있으면 누구한테 물어보고, 뭘 쓰면 누구한테 검토를 받아보고 하는 일이 일종의 공부하는 방법 자체이기도 한데 말이죠.
이성형> 전혀 없었는 건 아니죠. 문학이나 인류학 쪽에도 한두 명씩은 있고. 자그마한 커뮤니티도 있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사회과학 쪽 특히 정치학 쪽에서는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를 잘 하면서 하시는 분들이 거의 없어요. 혼자 하는 거니까 책 구하고, 읽어 내는 일도 벅찼지요. 1997년부터 대학원에서 라틴아메리카 근현대사 수업을 했는데, 닥치는 대로 읽었지요. 혼자 하는 거니까 그런 어려움도 있지만 장애물이 없어서 좋은 점도 있고요, 심심하기는 하지만 걸리는 건 없고, 넓은 바다에 혼자 헤엄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오히려 노는 물이 괜찮은 거라 할 수 있는 거죠.

일본 같은 경우엔 전통적으로 남미와 관계가 많은데, 공부하시면서 일본 책을 많이 참고하셨는지?
이성형> 일본 같은 경우에는 남미 연구 전통이 상당히 오래되었죠. 그 역사나 연구자들 숫자도 대단하고요. 뭐 비교할 수 없는 정도죠. 이런 예를 들면 될 것 같은데, 일제시대 때 경성제국대학에도 남미연구자가 있었어요. 서울대 도서관 구장서관에 가면 1930년대 아르헨티나 일간지가 보관되어 있는 정도니까요.  

아 그래요?
이성형> 저도 깜짝 놀랬는데, 일간지를 받아볼 정도였으니까 그 시스템이나 연구자들의 수준이 대단한 거죠.

 여기서는 어떤 학생들이 남미 관계 수업을 듣는지요?
이성형> 어문학 전공하는 학생들이 국제지역원에 많이 오지요. 어학능력이 있으니 사회과학 쪽 공부를 대학원에서 하고 관련 분야에 취직을 하려는 학생들이죠. 취직은 잘 되는 것 같아요. 라틴아메리카 쪽은 사실 직업과 관련해서는 기회가 많이 있어요. 재벌기업들도 많이 뽑고요. 삼성, SK부터 은행에 이르기까지. 자동차나 가전제품을 남미에 많이 팔고 있거든요. 최근 통계는 못 봤지만 멕시코만 해도 20억 달라정도 흑자를 남길 걸요.

박사학위를 쓰고 난 뒤에, 멕시코에는 몇 번 더 다녀오셨나요?
이성형> 멕시코는 학위 논문을 끝난 뒤 평균 2년에 한번 꼴로 다녀왔어요. 1990년대에 들어와서 교육부의 해외지역연구비가 대폭 늘어서 현지연구 기회가 많았거든요. 1993년부터 4번의 현지조사를 거쳐 낸 것이 1998년도에 서울대 출판부에서 낸 <<IMF 시대의 멕시코: 신자유주의 개혁의 명암, 1982-1997>> 이었어요.

멕시코 초빙연구원 시절(2000. 3.-2001. 2)에 관한 이야기 좀 해주세요...
이성형> 멕시코 방문은 멕시코 외무부에서 주는 연구비로 다녀왔지요. 원래 6개월을 예정하고 연구비를 신청했는데, 예정된 3월에 나가려는 2월 20일이 되었는데도 연락이 오지 않아요. 안된 것도 아니래요. 그러다가 신학기 전에 보길도에 놀러 간 적이 있었어요. 멕시코 대사관에서 두 주 후의 비행기표가 도착했으니 받아가라나요. 황당하기도 했지만, 놓칠 수도 없는 기회라서 무리를 해서 갔지요. 6개월간은 <멕시코 혁명 벽화에 대한 정치적 독해> 라는 주제로 연구를 했지요. 나중 논문을 외무부에 제출했고요. 이 부분의 연구결과는 멕시코 기행부분에 반영이 되어 있어요. 벽화 운동 세 거장의 차이점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해석이지요. 과달라하라에 있을 때 이 논문을 조그만 학자들 소모임에서 발표한 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흥미를 표하더군요. 아직 멕시코 잡지의 지면에 발표하지는 못했지만 시간이 허락하면 손질을 해서 보내려고 합니다.  
6개월을 보내고 나니, 좀 아쉽더군요. 뭘 제대로 구경도 못했는데, 떠날려니... 그래서 국제지역원에 폐를 끼치기도 그렇고 해서 사표를 내고 6개월간 더 멕시코 시티에 머물렀지요. 그 이후는 쿠바, 페루, 칠레 등지에 여행을 다녔고, 그 기록이 바로 <<아바나>> 입니다.

2000년에서 2001년까지, 정확히 말하면 9.11 테러 이전까지 표피적인 것에 가까운 것이기는 하지만, 한국에는 "라틴 붐" 비슷한 게 일었다. 라틴 댄스와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비롯한 쿠바 음악, 게바라 평전 등을 중심으로.

 『아바나』 자체가 기획된 것도 그런 라틴붐과 무관하지 않은 듯한데요. 그래서 아마 9.11 테러가 없었으면 라틴 붐은 더 확대되었을 수도 있고 『아바나』는 더 많이 팔렸을 것이다, 는 말들을 하기도 하던데요.

이성형> 그런 소식을 듣기는 했는데(작년에 그는 멕시코에 있었다), 저는 국내사정과 관계없이 책을 썼고요. 라틴 음악이나 댄스붐 같은 것은 어쩌면 아주 옛날부터 있었던 거라고 할 수도 있어요. 춤바람은 언제나 라틴댄스 바람이었잖아요. 정비석의 <자유부인> 에 나오는 댄스 열풍도 아마도 그랬을 거예요. 맘보, 차차차, 탱고 같은 거요. 게바라 평전 같은 경우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사실 전 약간의 불만이 있어요. 그 게바라 평전은 그 많은 전기 가운데서도 족보에 쳐주지 않는 것이거든요. 근데 아마 몇 10만부가 팔렸다죠?

 저도 그 게바라 평전(실천문학사에서 발간된 빨간색 표지의 책)읽고서 좀 문제가 많다고 느꼈는데요. 왜 하필 그 책이 번역되었을까요? 게바라 평전 중에 유명한 건 따로 있죠?

 이성형> 게바라 전기를 전부 조사해서 고른 것이 아니라서 그랬겠지요. 여하튼 많이 팔려서 다행입니다. 책도 운명이 있는 모양이지요. 게바라 평전 중에 유명한 거는요, 멕시코 기자인 따이보 2세(Taibo II)가 쓴 것이나, 현재 외무부 장관을 하고 있는 호르헤 가스따녜다(Jorge Castaneda)의 것을 최고로 칩니다.
_

 라틴아메리카에 대해 관심 많은 사람들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는 것 같은데요. 일반독자들한테서는 어떤 반응이 왔는지요?
이성형> 예, 반응이 있어요.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는 반응도 많았고요. 약간 어렵다는 반응도 많았어요. 특히 교수들에게서도 어렵다는 반응을 받았을 때 약간 실망스러웠죠. 요즘 지식인이란 게 너무 전문적인 분야에만 매몰되어 그런지... 그렇지만 여성 독자로부터 점수를 많이 받은 거 같아요.(웃음) 특히 교수들한테 책을 주면 자기가 직접 안 읽고 일단 부인한테 먼저 주거든요. 아무래도 학부 학생들이 읽기에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좀 있을 거예요. 학부 수준에서는 좀 접해 보기 힘든 인류학이나 음악 이야기 같은 게 많은 있는 편이니까요.

책 안에서 쿠바여행 가이드북의 '과장'(쿠바에서는 남녀 물문하고 눈을 맞추지 말라)을 지적하셨던데, 어떤 책이었어요? 『Lonely Planet』은 아니고.....?
이성형> 『Lonely Planet』은 아니고 그 비슷하게 많이 팔린 책이 있어요. 『Lonely Planet』이야 아주 좋은 책이죠.

『아바나』는 쿠바, 멕시코까지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그런데 세 번째 부분까지는 보통 설명하고 말하는 투로 되어 있는데, 마지막 부분은 "그러면 당신은 어디로 갈 것이다..."는 식의 2인칭으로 씌어져 있는 걸 보고 뭐가 좀 다르다고 느꼈는데요. 멕시코 부분에서 서술체가 달라진 이유가 있어요?
이성형> 예-. 멕시코는 상대적으로 너무 오래 있었으니까요. 너무 익숙하고 자주 봤고 하니까요, "내가 어느 날 어딜 가서 무엇을 봤고..."하는 식으로 쓰지를 못하는 거예요. 실제로 내가 한국에서 오신 분들을 위해 가이드를 몇 번 하기도 했거든요. 그 분들에게 풀었던 이야기를 써 놓은 거라 보면 돼죠. 아직 멕시코에 못 가보신 분들을 위해 가이드북처럼 쓴 것이기도 하고요. 그 부분은 먹물 좀 먹은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라 보셔도 됩니다. 하하하.

책의 멕시코 부분에 보면 토도로프가 한 해석을 뒤집어 설명하는 부분이 나왔는데요, 이런 부분이 저한테는 무척 인상적이었거든요.

 

Tip for You... 구조주의 문예이론가이며 저명한 기호학자인 츠베탕 토도로프는 『아메리카의 정복』이라는 책에서 아즈텍 문명이 유럽인들에게 쉽게 절멸한 이유를 '커뮤니케이션의 실패'에 있다고 설명한 것이다. 글쓰기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고 낮은 단계의 커뮤니케이션 체계만이 있었기에, 타자성이 있는 대인적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한 유럽 정복자들에게 패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은 「아즈텍인 = 낮은 단계의 문명 / 유럽인 = 높은 단계의 문명」과 같은 이분법을 전제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고야말로 유럽중심적이며 오리엔탈리즘적인 것이라는 것이 비판의 요지이다. (『아바나』, 224-5쪽)

 

이성형> 츠베탕 토도로프 같은 경우는 워낙 유명한 학자이니까요, 그 권위가 대단하죠. 그 사람이 해석한 걸 보고 저도 처음엔 "참 잘 썼다, 기호학으로 정복사를 그렇게 쓸 수 있다니"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러다가 나중엔 그래도 정복은 전쟁이고 힘 문제인데 기호론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의심을 좀 해봤어요. 정복사에 관심을 갖고 이 책, 저 책을 읽어보니까 거짓말 같아요. 처음부터 정복자들이 이긴 전쟁이 아닌 거거든요. 첫 번째는 실패했지요. 두 번째에 와서 주변의 동맹을 잘 활용하고, 또 무엇보다 무기의 압도적인 우세를 앞세워 쓰러뜨린 것이지요. 전쟁하는 방식도 다른 것도 중요했지요. 아스텍 사람들은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상대방을 생포하려 했지, 칼로 사람들을 한 방에 죽이는 그런 개념의 전쟁에 익숙하지 않았지요. 전쟁사를 조금만 읽어보면 토도로프 논리는 상당한 과장이라는 걸 알게 되죠. 그래서 구체적인 역사 분석이 중요하지요.  

 그리고 저는 칠레에 대한 서술에서, 다른 라틴아메리카인들과 구별되는 칠레인들의 국민성이랄까요, 그것이 기실 정치적 무의식의 발로이며 역사적 연원을 갖고 있는 것이라는 서술이 인상적이고도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혹시 이 부분과 관련하여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지요?  
이성형>  칠레의 근현대사는 광업의 역사입니다. 초석 광산과 구리 광산이 이 나라 국민들의 밥줄이었던 셈이지요. 최근에는 과일과 포도주 산업이 부가되었습니다만. 광산 경기란 것은 세계자본주의에 그만큼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흥청망청하다가도 금방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것이지요. 어쩌면 칠레 노동자들은 맑스주의 세계관을 받아들이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예요. 게다가 광산주는 대부분 외국인들이었으니. 개인의 삶은 항상 경기부침에 따라 격변하니, 자연히 계급주의적인 사고가 노동자들에게 깊숙이 파고듭니다. 반면 광산주들이나 지주들 역시 이런 거친 민중세력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려니, 자연히 억압과 폭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지요.
그래서 칠레 정치는 19세기부터 날카로운 대립의 계급정치를 학습했고, 또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이를 제도화하려고 노력을 해왔다고 할 수 있지요. 아옌데의 인민연합, 그리고 그를 뒤이은 피노체트의 쿠데타는 20세기 후반에서 그런 학습이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해 준것이지요. 민주화가 되어 많이 순화되긴 했지만, 지배층의 권위주의적인 정치문화랑, 민중의 투쟁적인 전통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는 나라라고 평가할 수 있어요.

 멕시코 외에 다른 나라들 관련해서 어떻게 준비를 하셨는지?
이성형> 그동안 이 책 저책 가리지 않고 읽었지만, 여행을 가기 직전에 다시 한번 정리를 하기도 했지요. 쿠바의 경우에는 가장 최근의 정치 상황에 대해 미국 학자가 쓴 책을 한권 읽었고요. 제가 있던 콜레히오 데 메히코의 쿠바 관련 장서들도 많이 참고했어요. 쿠바 음악이나 문화에 대해서는 평소에 관심 갖던 것이어서 새로울 게 없었지요. 페루의 경우는 잉카 제국의 역사 책 몇 권을 뒤졌어요. 칠레는 대학원 수업에서 가끔 다루었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고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