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슨웹에서 퍼왔습니다. (www.personwe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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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하고 글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쓰고 있던 글의 1절과 3절의 순서를 바꾸기로 했다. 그리고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글을 시작하게 되었다.

순전히 아르헨티나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는 불과 2주 사이에 대통령을 5번 갈아치우며 세계기록을 수립하고, 세계를 상대로 「채무불이행」을 선언했다. 보르헤스와 게바라, 마라도나의 고국은 그렇게 '망'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태」가 도무지 「남의 일」 같지 않은지, 한국의 모든 매체가 아르헨티나 사태를 다루고 있다. 다루되  그냥 「팩트 fact」만이 아니라, 뭔가 저마다 해석을 곁들이고 태도를 갖추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실 글을 처음과 전혀 다르게 쓰게 만든 건 아르헨티나 때문이라기보다 아르헨티나 사태를 다루는 한국 언론의 태도와 관련된다. 이 해석적 태도는 비단 아르헨티나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머리 속에서 막연히 뭉뚱그려보는 남미 라틴아메리카 전반에도 걸쳐 있다. 일단 이를 편하게 「남미 담론」이라 불러보는데, 「담론」이 된 남미에는 결코 편하지 않은 「한국의 상황」이 「낑겨」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담론을 둘러싼 조용하지만 결코 간단치 않은 싸움을 이성형 선생과의 인터뷰를 기록하는 일의 중심으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이성형 선생과의 첫 번째 만남에서도 한국에서의 「남미 담론」이 갖는 양상이 중요한 화제이기는 했다. 그러나 처음 인터뷰하기로 했을 때나, 두 번째 만날 약속을 잡았을 때나 특히 아르헨티나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일이 긴박하게 돌아가게 될 줄을 전혀 몰랐다. 두 번째 만남을 약속했을 때도 처음 만남이 「차(車)」 때문에 건조하게 끝난 것에 대한 미련 때문에, 「술 한 잔」을 약속한 것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한국에서 몇 안 되는 남미 전문가의 한 사람인 이성형 선생은 아르헨티나 사태 때문에 아주 바쁜 연초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이 선생은 약속한 토요일 저녁에도 「CBS 시사쟈키」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왔으며, 우리에게 와서도 신문 기고문 하나를 다듬어 전송하고 나서야 술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다 아르헨티나 사태 「덕분」이었는데, 그 자리들에서 『조선일보』를 위시한 한국 신문의 사태 「왜곡과 무지」를 「씹어주고」 왔다고 했다.

한국의 언론은 입맛대로 저 먼 나라에 대해 「팩트」 자체를 왜곡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다. 이러한 왜곡이나 의도된 무지에 대해 싸우는 것이 이성형 선생 자신의 중요한 과제이며 임무라 생각한다고 지난 번 만남에서도 밝혔다.

 한국에서는 <남미>라는 코드를 둘러싼 좌우파의 담론이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우파 담론은 한 마디로 "남미처럼 되지 말자!"는 말로 집약되는데 (특히 경제 문제에 있어) 남미를 피하거나 닮지 말아야 할 어떤 것으로 상정하고요, 반대로 좌파의 경우에는... 사실 남미에 대해서 말하는 것 자체가 우리 스스로를 제3세계적인 정체성으로 바라보고, 종속이나 파시즘의 문제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제기하는 것과 관계 깊었거든요. 70년대나 80년대에 특히 그랬었죠. 우리를 제3세계라고 규정하는 것이 허구적인 제1세계인의 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대항적인 정체성을 갖는 것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고요.
그러니까 이전에는 남미에 대해서 실제로 아는 것이 거의 없으면서도 좌우가 다 그것을 굉장히 정치적인 담론으로 사용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지금은 남미라는 <코드>에서 정치적인 색깔이 많이 탈색되고, 문화적인 착색이 많이 됐거든요. 북한의 몇 안 되는 맹방이라는 "쿠바"음악을 들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물론 포퓰리즘 문제는 또 좀 다르지만요.

 이성형> 남미라는 하는 땅이 "정체와 종속"이라는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는 것도 맞지요. 실제로 남미의 정치경제적인 모델은 대부분 실패, 파산해왔고요. 그래서 "남미병"이 객관적인 실재로 인정이 되죠. 또 그 안에서도 "아르헨티나 병"도 있고 "베네수엘라 병"도 있어요. 이런 말들은 학술적으로 정립이 되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과연 「그 병의 기원이 뭐냐?」 하는 문제가 있어요. 그 문제에 있어 신비화가 시작되는 거죠. 그래서 아주 통속적인 답으로는 아르헨티나 같은 경우, 병의 원인이 포퓰리즘(populism)이나 노동조합이다... 그러죠. 사실 굉장히 익숙한 담론이죠.

 아래 두 글을 보면 한국의 보수언론이 아르헨티나 사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2002년 경제 위기의 원죄가 1940년대의 정권과 그에 의하여 시행된 정책에 있다는 기괴한 논법이다. 사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건 그 논법보다도 「동아일보」와 「한국경제신문」의 사설 담당자가 얼마나 서로 입이 잘 맞는가 하는 점이다. 발상법과 표현이 너무 유사하여 한쪽이 표절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1930년대까지 세계 7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던 나라가 오늘날 이 지경이 된 데는 한 두 정권의 정책실패로는 설명할 수 없는 '원죄(原罪)'같은 이유가 있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1940년대에 노조세력을 바탕으로 집권한 후안 페론의 포퓰리즘 정책이 두고두고 후대에 고통을 물려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페론은 집권내내 노조의 무리한 임금인상과 연금확대 등의 요구를 수용하는 등 노동계층에 편중된 각종 사회·경제정책을 시행함으로써 국력을 탕진했다. 생산력은 도외시한채 분배에만 관심을 두는 정책은 결과적으로 사회에 무절제한 욕구와 이기주의를 증폭시키게 됨을 페론주의는 확인시켜 주었다. 연이은 쿠데타와 집권세력들의 부정부패가 국가기강을 무너뜨리게 되었던 것도 페로니즘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 [한국경제신문 사설] (1월 4일자) "아르헨사태 病根은 무엇일까"

 20세기 중반까지 손꼽히던 경제대국이던 아르헨티나가 오늘날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한 정권의 경제정책 실패로는 설명할 수 없는 ‘원죄(原罪)’ 같은 이유가 있어 아르헨티나가 경제난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누적된 과거 정부의 잘못과 이로 인해 아르헨티나 사회에 가득 찬 불신, 이기주의가 바로 그것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노조세력의 지지를 바탕 삼아 집권한 후안 페론은 집권 내내 노조의 무리한 임금인상 요구를 수용하는 등 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 정책으로 일관해 후대에 고통을 물려준 대표적 지도자로 꼽힌다
- 동아일보 「사설」(12월 21일자) "아르헨 사태 강 건너 불 아니다"

 

이성형> 그런데 실제로 제가 싸우고 싶은 게 바로 그런 겁니다. 과연 남미병이란 게 그래서 만들어진 거냐? 아르헨티나 페론 대통령의 포퓰리즘도 그렇게 역사적으로 간단한 게 아니거든요.
오히려 페론 대통령은 아르헨티나에 뿌리깊은 왜곡된 토지소유구조 - 극소수가 대규모 토지와 부를 편중되게 갖고 있는 - 가 온존할 때 대통령이 되었는데, 대중의 열망을 실제로 등에 업고 있었어요. 물론 그 사람이 실수를 많이 했고 그 실수가 경제 실패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런 실수는 부차적인 거고, 본질적으로는 지주과두제의 시스템을 고치고 깨기 위해서 나온 것이 포퓰리즘이예요. 또 본질적으로는 대중의 사회경제적 욕구를 표출한 것이고요. 이런 맥락을 다 빼버리고 이야기하면 안 돼죠. 그건 주객을 전도시키는 거잖아요. 그렇게 단순화될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이죠. 물론 포퓰리즘도 예산 낭비라든가, 잘못된 사회 행태를 만들어낸 문제아라는 점도 인정하지만요.

아르헨티나가 월드컵 우승후보라는데, 저러다가 출전 못하는 거 아녜요? 어떻게 전망하세요?
이성형> 아르헨티나는 사실 미래가 없는 나랍니다. 정말 크게 망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중산층이 거의 몰락해가고 있거든요. 아르헨티나를 규정하는 단어가 '르쌍티망(resentment)'일 겁니다. 계급 계층간에, 또 정치적 파벌간에 원한 감정이 있는 거죠. 예컨대 페론주의자와 반페론주의자 같은 대립 세력들 사이에 절벽 같은 게 놓여져 있어요. 서로 대 놓고 이야기는 안 하지만, 뒤에서는 서로 죽이려 그러죠. 에비타만 해도 그렇거든요. 한쪽은 에비타를 성녀라고 하고, 다른 쪽은 창녀라 부릅니다.

이성형> 참으로 놀라운 일인데 아르헨티나는 한 번도 State Building(국민국가 형성)을 이뤄보지 못한 나랍니다. 헤게모니를 가진 계층은 자기네들을 무슨 유럽인인양 착각하고요, 최상층 지배계층이나 최고위직 관료들이 유럽 나라(이탈리아, 독일 등)의 국적을 갖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이런 사실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도 않고요.

대부분의 매체가 아르헨티나 사태의 '원인(原因? 遠因?)'으로 페로니즘을 드는데요. 선생님이 보시기에 원인이 뭔가요?
이성형> 한마디로 「잘못된 개방 정책」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가 오늘 사태의 원인이지요. 개방 정책이 잘못되면서 국제 투기자본이 어떤 규제나 룰없이 단물만 쏙 빼먹고 토껴도 되는 데가 된 거죠. 그게 가장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포퓰리즘에 대해 의도된 「단순화, 무지한 척」이 많은데요. 원론적으론 문제에 대한 그러한 단순화가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한 방법이겠죠.
이성형> 예. 실제로 남미병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병의 원인에 대해서 왜곡하지 말라는 겁니다. 칠레의 기적에 대해서도 왜곡이 많아요. 그런 걸 제대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오늘, 「남미 담론」에 「낑겨 있는」 한국의 상황이란 무엇일까? 지구 정반대편에 있는, 평생 한 번 가볼 수 있을까 말까한 나라의 사태가 신자유주의 개방·개혁 정책의 공과, 인민주의(포퓰리즘 populism)와 페론주의(peronism)에 대한 역사 해석, 김대중 정권의 성격과 그 정책에 대한 평가에 대한 담론 투쟁과 결부되어 있다.

지난 여름 이후 우리는 「남미 담론」이 한국의 좌/우 대결(?)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한 생생한 실례를 볼 수 있었다. 정치인과 한국의 언론인들이 라틴아메리카산(産) 포퓰리즘을 놓고 논란을 벌인 것이다. 논란은 김만제라는 기업 회장 출신 한나라당 정책위 의장이 김대중 정권의 언론개혁과 세무정책을 "남미식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매우 상투적이고 악의적인 용어사용과 역사 해석에 기반한 이런 선동은 정부와 전쟁을 벌이던 조중동에 의해 매우 크게 다루어졌다. 당시 보도는 "김만제정책위의장, 언론탄압, 남미식 선동정치 정점"이라는 식으로 「미다시」를 뽑았고, "김 의장은 포퓰리즘은 서민 노동자 시민단체를 선동적으로 동원해 재정을 마구잡이로 퍼 쓰는 것이라 규정하고 현 정권은 국론을 개혁과 반개혁으로 분열시키면서 세몰이를 하고 있다"(2001년 7월 4일 한국경제신문)는 주장까지 여과 없이 실었다. 이런 주장은 곧 정권의 정책에 대한 색깔론으로 이어져나갔다. 포퓰리즘은 곧 사회주의적인 정책이라는 것이다.

정권측도 이에 맞서서 포퓰리즘에 대한 다른 해석을 내놓았는데, 제일 들을만했던 것은 노동부장관의 설명이었다. 김호진 장관은 "노동정책 포퓰리즘 아니다"는 제목이 달린 통신문을 보내 "정치권 일부에서 노동정책을 포퓰리즘이나 심지어 사회주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 타당성과 실증성이 없는 소모적 정치논란"이라고 반박하고 "그는 노동관련 대학교수를 지낸 장관답게 포퓰리즘의 의미와 사례 등을 들며 아르헨티나 페론정권이 군사쿠데타의 위협 앞에 전전긍긍하고 배우 출신의 영부인이 대중의 열광과 환호를 즐기는 가운데 그 나라는 고통과 희생이 따르는 경제살리기보다는 박수갈채가 쏟아지는 포퓰리즘의 길을 택했다"(8월 6일 연합뉴스)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포퓰리즘'이란 용어가 동원된 참으로 쓸 데 없는 말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중에서 우리를 가장 「즐겁게」 하는 용례는 한나라당과 관계가 틀어진 자민련이 쓴 방법이다. 좌-우가 아니라 「보수 반동」 「저거끼리」 벌어진 정쟁에서도 「포퓰리즘」이 동원된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는 함부로 만들어진 '남미'의 부정적 이미지가 얼마나 무책임한 '말'로 사용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자민련 대변인 정진석이라는 사람이 성명을 통해 "한나라당은 한때 김대중 대통령을 향해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했는데, 표피적인 여론에 이끌려 교육정책(교원 정년 연장 문제)을 대권 전략화하는 이회창 총재의 자세야말로 신포퓰리즘의 전형"(12월 4일 인터넷 중앙일보) 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정말 지하의 페론을 모독하는 언사가 아닐 수 없다.


    - 미래를 향한 남미라는 상상력 -

 왼쪽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좀 해보면요... 80년대에는 식민지자본주의나 사회성격 논쟁에서도 라틴아메리카의 경험이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논의가 되었고, 아옌데 정권이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같은 것이 가진 상징성도 대단히 크게 받아들여졌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좌파들에게 있어서도 남미는 많이 의미가 달라졌죠?
이성형> 그렇죠, 그동안 남미 자체가 신자유주의 개혁 노선과 담론에 따라 죽 왔었고 또 그게 사실상 실패로 귀결되었죠. 오히려 요즈음은 신자유주의 개혁 실패의 반면교사로서 남미가 중요해졌는데요, 근데 그런 것에 대한 분석은 많이 된 것은 아닙니다.

 좌파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가 당장 머리에 떠오르는데요. 사파티스타 운동과 쿠바의 미래...
이성형> 사파티스타 운동의 경우, 지금 세기에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둘로 정리되는데요... 하나는 신자유주의 개혁의 극단적인 폐해와 그 효과에 관한 것인데요. 살리나스 정부의 농지개혁이란 게 기존에 공유지였던 것을 다 민영화하고 야만적인 시장의 논리에다 맡긴 거잖아요. 살 사람은 살고, 죽을 사람은 죽으라는 식으로. 거기에 적응할 수 없었던 농민들이 그런 식으로 반발을 하고 나온 것이고요.

두 번째로는 망각되었던 인디언들의 세계의 복원에 관한 것이었거든요. 인디언들은 끊임없이 수탈당하고 자기들의 정체성을 해체할 것을 강요당하면서 살아왔는데요. 5백년간의 저항과 수탈의 역사가 있었던 거죠. 이 사람들이 일어나면서 내건 중요한 단어가 "존엄성'입니다. 자기들이 이어온 언어, 생활방식, 문화의 존엄성을 위해 투쟁한다는 거거든요. 이거는 멕시코에서 그동안 수없이 시도되었던 진행되어온 서구적 근대화 논리에 저항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근대화라는 게 당신들만의 논리가 모두가 아니다, 우리에게도 우리만의 습속이 있고, 합리성이 있고 우리가 추구하는 유토피아 프로젝트도 있다 - 이거를 내세운 거죠. 일종의 공동체주의이기도 한데요. 그런 것들을 한쪽에 강하게 내세운 거죠. 그걸 대변하는 이데올로그로 마르코스가 나온 거고요.

기존의 근대화논리에 대항하는 굉장히 강력한 새로운 유토피아 담론이라 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그것이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논리는 아니고 그 사람들의 지역적인·국지적인 논리이기에 어디에서나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건 다원주의 질서 안에서 우리 목소리를 인정해달라, 한편으로는 문화적 권리선언이기도 한 거고요. 자기들 아이덴티디가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기획이기도 하죠.   

 마르코스의 말에서 사회학적 해방적 상상력이 대단하다고 느꼈는데요, 말씀처럼 마르코스가 말하는 것이 분명히 그 민족과 지역적 정체성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기는 한데, 분명 기존의 서구의 진보 운동 - 서구의 68이나 신사회운동, 또 남미의 좌파 운동 등의 논리와 전통을 종합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거든요. 마르코스가 인텔리 출신이라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우리나라에서도 마르코스의 책이 많이 팔리고 대학생들이 좋아한 이유가 그의 논리가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이성형> 서양 지식인들이 마르코스에게서 다시 보는 것은 잃어버린 68세대의 새로운 얼굴이 아닐까요? 68세대가 추구했던 유토피아 프로젝트 같은 거는 지금은 다 파산했고 지금은 생동감 있게 그걸 추구하는 게 불가능하니까요. 그래서 그런 걸 보면서 대리충족을 하는 게 아닐까요. 사실 그런 서구 지식인의 시각에 대해서 멕시코 지식인들은 정작 비판적인 게 많죠, "너희는 우리에게서 고귀한 야만(bon sauvage)를 보고 싶어하는 것일 뿐이다"는 비판이죠.

어쩌면 왼쪽에서 만들어진 오리엔탈리즘 같은 거네요?
이성형> 그렇죠. 실제로 그렇게 비판을 하죠. 로헤르 바르트라(Roger Bartra)라는 유명한 인류학자가 그런 비판을 했어요.

쿠바의 미래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요?
이성형> 『아바나』에서도 그런 이야길 썼지만 사실 쿠바란 나라가 가진 조건이 열악하지요. 인구도 1100만밖에 안되고, 생산하는 자원도 아주 제한되어 있고, 그래서 수입에 많이 의존해야돼요. 대단한 산업국가가 되리라고 생각이 되지도 않고, 탄탄한 경제구조를 가진 것도 아니거든요. 그런데 미국이 규제만 풀면 충분히 먹고 살고 잘 살 수 있어요. 원래 그 나라는 사탕수수나 담배, 그리고 음악 - 이런 거 해서 먹고 살 수 있거든요. 관광이나 야구선수도 그렇고...  

이전 시스템으로 돌아가야 할 부분이 생길 텐데, 그래도 쿠바 혁명 이전의 나라로 돌아가진 않을 거예요. 혁명 이전에는 사실 나라가 미국의 창녀촌 비슷하게 굴러 갔거든요. 그런 데로 다시 돌아가진 않을 거고요. 사회복지, 의료, 교육 같은 것이 잘 갖춰져 있어요. 그래서 심지어 카스트로가 없어진다 해도 쿠바는 사회민주주의적인 가치 같은 것이 잘 보존된 사회로 남을 가능성이 큽니다. 개방이 되더라도. 최소한 사회복지정책은 유지되면서 민주화되는 사회로 이행할 가능성이 크죠. 그건 무엇보다 쿠바 국민들이 그동안 40년동안 하나의 '국민됨'을 경험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특히 최근에는 쿠바의 경제 사정 자체가 좋아졌고요.

 남미가 가진 문제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종속, 특히 대미 종속인데요. 남미에 있어 미국이란 나라가 어떤 거라 생각해야 됩니까?
이성형> 종속이라는 게 다양한 차원일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종속된 거야 부인할 수 없을 거고요  그러나 단순히 미국이라는 존재 때문에 그 사회가 엉망으로 되었다고 단순화시키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외국세력과 유착되어 있는 국내의 과두제 세력이 더욱 문제이죠. 그런 세력이 또 내외 독점자본과 연합 종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고, 그런 시스템 때문에 종속이 내면화되어 있는 거죠.  문화적 종속을 매스미디어 부문에 있어 많은 논의를 해 왔는데, 남미에 있어서는 크게 문제 안됩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남미 문화라는 것은 끈질깁니다. 미국문화에 저항하고 자기 정체성을 보존하는 능력은 대단하다고 봅니다. 음악이나 다양한 사회운동으로 표현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그런 경제적 종속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런 것들은 종속이라는 쉬운 한 단어로 말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반면교사로서의 남미를 말씀하셨는데요. 경제적 구조의 취약함 때문에 신자유주의 개혁이 실패하거나 희생이 가중되었을 듯한데요. 신자유주의 개혁과 관련하여 반면교사가 될 수 있는 어떤 방향을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성형> 20여년간의 과정을 죽 보면요,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교범에 충실하게 따른 나라들이 멕시코와 아르헨티나 등입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는 경제가 굉장히 심하게 망가졌고, 멕시코는 중간정도로 망가졌죠. 칠레는 성공한 걸로 되어 있습니다만, 그 경우는 시장개혁 자체가 성공한 것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국가가 굉장히 강력하게 규제를 행한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동아시아적인 모델과 가깝다고 할 정도로 시장 개혁과 정부의 적절한 규제가 결합된 거죠. 그런데 「칠레의 기적」을 말할 때 시카고보이 이야기만 하는데, 사실은 잘못된 이야깁니다. 시카고보이의 잘못된 점을 정정했을 때 경제가 나아졌거든요. 그래서 이런 것도 정확하게 소개될 필요가 있습니다.

 

 Tip for you  * 워싱턴 컨센서스 = 미국식 시장 경제체제의 대외 확산 전략을 뜻하는 말. 미국의 정치경제학자인 존 윌리엄슨이 지난 89년 자신의 저서에서 제시한 남미 등 개도국에 대한 개혁 처방을 "워싱턴 컨센서스"로 명명한 데서 유래됐다. 이후 90년대 초 IMF와 세계은행, 미국내 정치경제 학자들, 행정부 관료 들의 논의를 거쳐 "워싱턴 컨센서스"가 정립됐다. (야후 경제용어 사전) 워싱턴 컨센서스는 개발도상국 등 제3세계 국가들이 시행해야 할 구조 조정 조처들을 담고 있다. 이 조처들은 정부 예산 삭감, 자본시장 자유화, 외환시장 개방, 관세 인하, 국가 기간산업 민영화, 외국자본에 의한 국내 우량기업 합병·매수 허용, 정부 규제 축소, 재산권 보호 여덟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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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5-05-25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을 만나본 적이 있는데요, 글은 정말 좋은데 말씀은 참 못하세요 ^^

urblue 2005-05-25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
지금 <신자유주의의 빛과 그림자> 읽고 있거든요. 책은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