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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공부할 대상과 공부하는 사람과의 '순수하고 맑으며 고독한' 대결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부>도 일종의 제도라서, 공부하는 주체들은 그 한계와 제약과 구차스러 보이는 여러 '조건'들과 대결하고 교호해야 한다. 이런 문제에 관심이 많은 우리는 이 선생이 하고 있는 <공부>의 이면에 대해서도 질문해야 했다.

1959년생이시면, "이미" 불혹을 넘긴 나이신데, "아직" 선생님은 제도 바깥에서 공부하고 있는 건데요.  
이성형> 뭐ㅡ 제도 밖에 있었던 것도 아니죠. 대학교 연구소에 소속된 상임 연구자로 있었기 때문에 금전적인 어려움도 덜 했고, 또 비교적 자료에 대한 접근도 쉬웠고요. 비교적 좋은 조건에서 공부했다고 볼 수 있죠. 2000년 하반기부터 이제 바깥에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아바나』의 서문에 보면 "지역연구의 한이 많은 나로서는 여행기를 통해서 여러 가지를 발언하고 싶었다"는 구절이 있던데요?
 이성형> 우리나라는 지역 연구가 많이 필요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참 현실은 다르죠. 왜 그런 이야기를 하냐면요... 우리가 '우리의' 지식세계를 구축하고 만드는 과정이라는 것은 우리 중심의 분업구조를 갖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건 스스로 구성되는 게 아니라 타자와의 접촉, 충돌, 대면 속에서 만들어지지요. 그런데 우리는 늘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를 반복해온 것 같아요. 하나는 바깥 세계에 대해서 국수주의적이고 편협한 태도를 가지고, '우리 것'을 무조건 강조하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잡식적인 태도로 가리지 않고 삼키고 보는 태도죠.
외국이론이나 문화에 대해서나. 소비행태에 있어서 안정감이 없죠. 그래서 제가 <과식과 설사>의 싸이클이라 쓴 적이 있어요. 잔뜩 먹고, 한순간에 잊어버리는 - 이런 불안정한 시선이 왜 반복될까 하는 의문을 가졌는데ㅡ, 이는 우리가 자신감이 없고 외국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우리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탓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좀더 개방적이면서도 외국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연구해야 우리의 학문이나 지식세계를 가질 수 있다고 봐요.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사실 막연히 동의하면서도 진짜 별로 행동에 옮기지는 않거든요.
  

 

왜 그럴까?나는 그 이유가 우리의 지식세계를 조직하고 조절하는 지도가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자아준거적 정체성의 부재(不在)야말로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그린 지도가 없기에, 우리가 만든 현장교범이 없기에 우리 지식의 세계는 과식과 설사의 사이클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지적 자원이 낭비되고 중복 투자되고, 결국은 앵무새처럼 유행가만 반복하다 지쳐 쓰러지고 말게 된다. 그 결과 머리통은 자그마하고 몸통은 우스꽝스럽게 큰 공룡과 같은 지식세계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지지도를 다시 그린다는 것은 지난 50년간 폭발적으로 팽창한 지식과 지식인사회를 재점검하고,'지금 이곳'의 현실과 코드를 맞추고 화해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신토불이(身土不二)를 외치며, 우리의 것이 마냥 좋다는 토착주의자들의 한풀이가 될 수도 없고, 영어(논문)만이 살 길이라는 무차별적 개방주의자들의 주장이 될 수도 없다.
- 이성형, <위기의 지식사회에 묻는다 - 우리만의 지식은 있는가>, 『중앙일보』, 2001년 10월 25일자

 

김영삼 정부가 들면서 세계화다, 하면서 그런 생각이 힘을 받던 시절이 있었죠. 그래서 서울대를 비롯하여 유수 대학교의 국제대학원에 5년간 1,000억을 주는 프로젝트로 연결되었지요. 그런데 이 대학원이 어찌된 연유인지 지역연구를 제대로 하는 곳이 아니라, 국제관계나 국제통상을 주로 하는 교육기관으로 변질되어 버려요. 물론 학내의 힘관계나 갈등에 기인한 바가 크지요. 지금도 지たП만?제대로 하는 대학원이 하나 없다는 것이 참 아쉽게 생각됩니다.

두 번째는 지적하고 싶은 것은요, 제대로 된 지역연구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은 제대로 된 좋은 도서관과 자료입니다. 정말 기본을 갖춘 지역연구 자료실 내지 도서관이 국내에는 한군데도 없습니다. 신문, 도서, 잡지, 영상 및 음반 자료 등이 모여 있는 데가 하나도 없죠. 그래서 그런 것을 한번 제대로 만들어 보는 게 꿈이었는데... 잘 안 됐죠. 언젠가 기회가 오겠죠 뭐.

지금부터는 어떨 것 같습니까? 특별히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요?
이성형>  현재 초고가 완성된 것이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정복과 현대 라는 주제로 500년 전의 정복사를 다룬 것으로 정복이 현재까지 남긴 유산에 대해 음미하는 것이지요. 한 1천매 정도 썼는데, 아무래도 자료들을 좀 더 읽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시간을 두고 출판을 할까해요. 다른 하나는 <라틴 아메리카의 교훈>이라는 제하에 그동안 계간지, 월간지 등에 기고했던 입문적 성격의 글들입니다. 이 글들은 우리 학계나 사회에 편재해 있는 잘못된 해석, 오해, 문제점들을 주로 지적한 것들로, 대중들이 라틴아메리카 사회의 문제점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쓴 것들이지요. 겨울 방학에 작업을 해서 봄학기에는 출간할까해요.  

선생님 작업을 보면 진보적인 학자나 이론 전통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고, 실제로 하신 작업도 진보적이거나 좌파적인 관점에서 해 오신 걸로 보입니다만.
이성형> 꼭 진보다, 보수다라기 보다는 저는 아무래도 크리티칼 퍼스펙티브(Critical Perspective 비판적 시각)로 접근하는 쪽으로 공부를 했죠. 왜냐하면 텍스트나 지식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어떤 면에선 구성이 되는 건데, 항상 구성하는 사람의 시각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고. 그래서 만들어진 지식은 수용자가 속기 쉽잖아요. 속기 쉬운 지식의 세계에서 좀 덜 속으려면 삐딱하게 보는 수밖에 없죠. 그것이 하나의 방법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익숙하고 접하기 쉬운 것은, 지배적인 패러다임에서 만들어진 것 - 미디어나 돈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그런 것이 되잖아요.
 

- "지역연구"의 알파 & 오메가 -

지역연구(Area Studies)이란 것이 제국주의적인 기원과 목적을 가지고 출발한 학문이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합니다. 그리고 현재에 그것은 '제국주의적인' 의도가 아니라도, 지역연구가 국가나 기업의 정치 경제적 이해와 긴히 관련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런 걸로부터 자유로운 지역연구가 어떻게 성립하는 것일까 하는 점이 궁금한데요.

이성형> 네ㅡ. 맞습니다. 제국의 경영과 이해를 위한 지식세계를 건설한 게 지역연구죠. 국가나 기업으로부터 굉장히 많은 돈을 받아서 키운 거죠. 그래서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역연구'라는 말이 '추악한 신조어'라고 말한 적이 있고요. 분명히 지역연구나 인류학이 다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말하는 지역연구는 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어죠. 그것이 지식세계에 자극과 활력을 줄 수 있는 이유는ㅡ, 기존의 학문 체계가 너무나 분과학문적인 데 머물러 있고 전체에 대한 윤곽은 잊어버리고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지식만 생산한다는 거거든요. 뉴튼 물리학적인 세계를 사회과학에 대입해서 만든 그런 근대 학문의 체계가 복잡하게 변화하는 세계를 설명할 능력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그런 체계가 모더니티의 위기상과도 관련된다는 생각이거든요.

지역연구가 이런 데서 탈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분과학문의 벽을 헐어가면서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e study)가 가능한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월러스타인(I. Wallerstein) 같은 사람도 『사회과학의 개방(Open Social Sciences)』과 같은 데서 지역연구의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평가합니다. 미국 같은 데서도 분과적인 학문 체계가 너무 강력했기에 지역연구가 발전할 수 없었어요. 혹자는 학과 제국주의(departmental imperialism)란 표현도 썼지요. 그런데  최근 미국에서도 지역연구에 대한 입장이 많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지역연구에 돈을 많이 대줬는데 국익에 기여한 바가 뭐냐 하는 건데요. 국정 담당자들이 그런 판단을 하기 때문에 이제 돈을 많이 안 준다는 건데요.
예를 들어 소련 연구자들이 많았지만 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소련 붕괴를 아무도 예측하지도 못했죠. 미국의 러시안 스타디는 동유럽과 소련에서 건너온 유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는데 소련을 무슨 "惡의 제국"이라는 식의 종교적인 멘탈리티로 봐서 실상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고 해요. 물론 수정주의적인 시각이 나오는 80년대 이후에는 좀 달라졌다고 하지만.











모든 지역에 대한 연구가 다 그런 실정인까요?
이성형> 지역마다 좀 다른데요. 라틴아메리카 연구의 경우, 80년대 레이건 행정부의 대 중남미정책을 굉장히 비판했어요. 그라나다 침공이나 니카라과 문제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국무성 당국자들은 화가 났지죠. "실컷 돈 줘서 연구하라 그랬더니 국가 정책이나 비판하고 말야"이지요. 수없이 그런 일이 반복되었죠. 그래서 90년대 이후에는 아젠다가 바뀝니다. 글로벌 세계가 되니까 글로벌 스타디를 해야 한다고.
그런데 한국에서는 야, 미국도 안 하는데, 우리가 그런 걸 왜 해야 되냐? 이런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거야말로 맥락을 모르면서 하는 말이죠.

말씀하시는 "타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지역연구라는 것은 인문학의 냄새를 많이 풍기는데요, CIA 같은 기관이 필요로 하는 학문(?)까지는 아니라 해도 분명히 여타 인문사회과학에 비해 실용성을 많이 가진 학문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은데요.
이성형> 세부 분야별로 좀 다를 수 있겠죠, 경제나 정치를 연구하는 것과 문화 연구를 하는 것이 다르니까요. 그러니까 지식의 용도를 일괄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잖아요. 굉장히 실용적인 것고 있고 인문학적인 지평을 넓히기 위한 것도 있고요. 지역연구를 한마디로 뭐라고 규정하기보다는 마치 코끼리 같은 거라서, 코도 있고 다리도 있다고 해야겠지요.
그리고 꼭 실용주의적인 연구가 나쁘다고도 할 수 없죠. 상호 관계를 맺거나 교역을 하려면 그런 지식이 요긴하잖아요. 어차피 상호의존적인 세계니까요. 그런데 다만 과거에 지역연구가 가졌던 어두운 그림자는 정확히 밝히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을 찾으면 되죠.

현장에 많이 가셨겠지요.
이성형> 인디오 마을 같은 데도 많이 다녔고 할 이야기도 많은데, 과연 여행기 책 안에다 그런 내용을 쓰면 읽힐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서 『아바나』에서는 이야기를 별로 안 했어요. 멕시코에서도 한국 여행객들이 쉽게 잘 가는 데만 포인트만 잡아서 쓴 건데도 양이 그렇게 나온 것이거든요. 그렇게 써도 책이 어렵다는 말이 나오잖아요.

대학원에서 지역학 연구를 위해 트레이닝 차원에서 학생들에게 강조하시는 게 있다면요.
이성형> 인류학자가 아니지만, 저는 인류학적 훈련을 강조합니다. 제가 지역연구입문을 가르칠 때에는 항상 오리엔탈리즘, 옥시덴탈리즘을 첫순서로 읽히지요. 이건 시선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필드(현장)를 갔을 때 늘상 생길 수 있는 많은 문제, 즉 '시선의 문제'들을 대비하기 위해서지요. 그리고 어떤 정보나 데이타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 - 예컨대 음반이나 영상자료 같은 다양한 자료도 많이 활용해야 된다는 것도 이야길 많이 하죠.  
그 다음에 지역연구 하려면 소설책을 많이 읽어야 된다는 것도 말하지요. 직접 안 가본 다음에야 리얼리티에 가장 밀접히 접근할 수 있는 건 역시 문학작품이기 때문에. 자기 연구하는 지역 작가가 쓴 소설책 최소 20권은 읽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현대작가부터 고전에 이르기까지.

현지조사라든가 오리엔탈리즘, 옥시덴탈리즘과 관련하여 권할만한 책이 있다면요?
이성형> 오리엔탈리즘, 옥시덴탈리즘과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책이 많아요. 저자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Colornizing Egypt』라는 책의 일부를 읽힌 적도 있어요. 1899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참가한 이집트 사람이 본 서구인들의 '이상한' 행태에 대한 분석인데요. 굉장히 재미있는 글이예요. 페르난도 코로닐(Fernando Coronil)과 같은 인류학자의 책도 큰 도움이 되죠.

탈오리엔탈리즘, 탈식민주의가 근래 인문사회과학에서 각광을 받는 한 시각인데요. 물론 많은 이쪽 연구자가 제3세계 출신이라는 점이 있긴 해도, 그 시각이 결국 미국과 미국 내의 잘 짜여진 제도와 학제 안에서 만들어진 시각이라, 이게 역동성이나 전복성을 갖기에는 한계가 있을 거라 느낌이 저는 들었거든요.
이성형> 아시다시피 탈식민주의론은 여러 계통의 연구가 하나로 만난 거잖아요. Subaltern Studies,   마르크시즘, 페미니즘, 인도인에 의한 인도사 서술(Indian Historiography)로부터 영향을 받았잖아요. 이제 연륜도 꽤 되었고 대학교의 교과과정에도 들어갔으니, 아무래도 그 다이내미즘이 많이 떨어졌겠지요. 제도화된 측면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우리한테도 그런 시각을 적용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시각을 개척하는 게 중요한 거죠.

남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위하여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소설이나 책을 추천하신다면요?
이성형> 번역본을 중심으로 말씀드리지요. 소설로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간의 고독>... 사실 이외에도 <사랑과 또 다른 악마>, <에렌디라>, <족장의 가을> 등등도 좋은 작품들인데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녹색의 집>,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아르테미오 크루스의 죽음>... 문명비판을 다룬 <태내의 크리스토퍼스 Cristobal nonato>는 좀 어렵지만, 작가의 바로크적 언어감각과 문명사적 비전을 잘 볼 수 있고요. 영어본을 구해볼 수 있을 겁니다. 후안 룰포의 <뻬드로 빠라모>,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 그리고 자서전적 전기로 리고베르타 멘추의 <나, 리고베르타> 등이 있어요. 사실 좋은 작품들이 정말 많이 있지만 번역이 되지 않은 것이 많아서 위의 책들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말하긴 좀 힘든다.

첨언해서 영어로 된 훌륭한 르포로는 <뉴요커> 지의 정기기고자인 알마 기예르모쁘리에또(Alma Guillermoprieto), <마이애미 헤럴드> 지의 중견기자 안드레스 오펜하이머(Andres Oppenheimer)의 저작들이 있어요. 아마존 같은 데서 쉽게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글-정리 : heutekom@personwe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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