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인간아 > 청수(淸水) - 히라노 게이치로, 양윤옥 옮김

                                                     청수(淸水)

 

                                                                                         히라노 게이치로 - 양윤옥 옮김

 

먼 곳에서 맑은 물이 뚝 떨어지고 있다.

그날은 아침부터 햇빛이 쉬임없이 쏟아져, ……견딜 수 없었다.
새벽녘 나는, 오랜만에 고집스레 달아나기만 하는 잠의 행방을 짚어가며 커튼에 비치는 바깥 풍경이 새삼 이상해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나는 내 몸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되도록 납득할 만한 설명을 찾아내려고, 이것저것 두서없는 사색을 거듭해왔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조용한 마음은 아니었다. 조용한…… 그렇다, 이제는 조용하다. 이런 것을 체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체념이 이토록 무력감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이라는 전제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 기억의 단편은 한번 뇌리에서 싹을 내밀자 갑작스레 담쟁이가 넝쿨을 쭉쭉 뻗어가듯 식물적인, 씩씩한 신속함으로 무성해져갔다.
그것은 먼 옛날 태양에 관한 기억. 우리 머리 위를 빈틈없이 덮었던 거대한 태양이 빛을 가득 흩뿌리며 멀어져가던 날의 기억이었다. 하늘에는 허름한 푸른색이 차츰 퍼져갔다. 나는 별리(別離)를 슬퍼했다. 눈물을 떨구며 허망하게 언제까지나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억. 그렇다, 나는 지금 기억이라 했다. 그러나 애초부터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최초에 그렇게 생각했고, 즉시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이건 어디선가 읽은 신화의 단편이 아닐까, 거기에 이끌려 내 마음대로 해본 몽상의 흔적은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영화의 한 장면인가. 생각을 더듬어가며 묘사했던 내 소설의 한 구절인가. 잠에서 벗어나 눈 뜨면서 잃어버렸던 꿈이 어느 결에 되살아난 것인가. 어쩌면 그저, 이리저리 굴리며 놀던 공상의 잔재일까.
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미덥지 않았다. 무엇보다 먼저 앞서는 것은 ꡐ생각이 돌연 떠올랐다는 느낌ꡑ, 그리고 ꡐ그 기억의 현실감ꡑ이었다.
이불에서 나온 나는 테이블로 다가가 어젯밤에 남긴 커피를 마시며, 그 곁의 비스킷 상자에 눈을 던졌다.
대체 의심하려야 의심할 수 없는 기억 따위, 존재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에 나는 다시 끌려들어갔다. 어제 일어난 일조차, 아니 바로 지금 일어난 일조차도, 그것을 확증할 물적(物的)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면, 얼마든지 의심이 가능한 것 아닌가.
이를테면 여기에 있는 비스킷 한 조각이 그렇다. 나는 분명 지금 이 비스킷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먹어버린다. 기억 속에는 손바닥 위의 한 조각 비스킷의 영상이 남는다.
이번에는 손바닥 위에 아무것도 두지 않고, 그저 비스킷의 영상만을 떠올려본다.
(나는 주의깊게, 일단 주먹을 쥐었다 편 뒤 거기에 비스킷의 영상을 떠올리고, 다시 주먹을 쥐었다.)
그러면 어떤가, 역시 내 기억 속에는 손바닥 위의 한 조각 비스킷의 영상이 남아 있다. 이때, 두 조각의 비스킷 중에 다만 첫번째 비스킷만 실재했었노라고 어떻게 논증할 수 있는가. 기억 속에서는 같은 비스킷의 영상이다. 어쩌면 실재했던 것은 두번째 비스킷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좀더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비스킷 같은 건 한 조각도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식은 커피를 입에 가져갔다.
―그렇다면, 그 앞뒤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된다. 첫번째 비스킷을 상자에서 꺼내고 종이봉지를 뜯고 손바닥 위에 놓았을 때의 기억을, 그 직후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꼭 쥐어 살갗에 붙은 비스킷 가루를 톡톡 털어냈을 때의 기억을. 아, 그렇다. 이야기가 복잡하게 된 건, 나의 그 기억이 단편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참으로 앞뒤의 기억 같은 것에 기대어볼 수 있는 것일까. 실제로 이미 두번째 비스킷은 첫번째 비스킷을 모방하여 앞뒤로 무한하게 기억을 연장하기 시작하고 있지 않은가.
컵 바닥에 동그라미가 되어 남은 커피를 빨아들이듯 소리내어 마시고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서편 창을 향해 걸어갔다.
결국, 첫번째 비스킷이 진정으로 존재했다는 따위는 논증할 수 없는 것이다. …… (나는 테이블을 돌아보았다.) 아직 거기에 놓여 있는 커피잔조차 내 기억 속의 커피잔과는 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같은 것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나 자신 또한 어떻게 같은 것이라고…….
불현듯 나는 불안에 휩싸였다. 그리고 강요하듯이 서둘러 결론을 뒤집었다.
그러나, 그래도 역시 나는 알고 있다. 존재했던 것은 두번째 비스킷이 아니라 첫번째 비스킷이었다는 것을. 첫번째 비스킷의 기억에는 뭔가, 그렇지, 실재감(實在感), 실제로 비스킷에 손을 댔을 때의 그 현실감이 부착되어 있다. 이것은 두번째 비스킷의 기억이 어떻게도 모방할 수 없는 것이다. 현실감이라…… 결국 기억을 보증해주는 건 그런 정도의 것이다.
나는 내 생각이 내린 결론의 허약함에 실망을 느꼈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처음부터 내가 바라던 것이었다.
그랬다. 하지만 이 결론은 나의 그 기억을 긍정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기억에는 다른 어떤 기억에도 지지 않을 현실감이 갖춰져 있었으므로.
창에 다가서니 냉기가 아슴푸레 전해져왔다. 막상 바깥을 내다보는 게 아무래도 망설여졌지만, 마음을 정하고 커튼을 열자 짐작했던 대로 태양이 지금까지보다 더욱 치열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기억이 분명해짐에 따라, 내게는 점점 더 확실하게 그 모습이 눈에 보였다. 내가 내 기억을 의심하겠다는 건가. 그날 이래 태양은 이렇게 계속 쏟아지고 있지 않은가.

나는 전날 벗어 던져놓았던 주름투성이의 바지를 입고, 대충 집어든 스웨터 위에 얇직한 코트를 걸치고 바깥으로 나섰다.
입김이 희다. 차디찬 바람이 떠돌이 고양이인지 뭔지 그런 조그만 짐승처럼 다리 사이를 훑고 달아나며 코트 자락을 과장스럽게 들춰올렸다. 줄곧 쏟아지는 빛이 이런 바람에 전혀 휘둘리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일에서 아직도 범속한 이상함을 발견하는 자신을 또한 이상하게 느꼈다.
시타카모(下鴨) 큰길에서 남쪽을 향해 걸어가자 신경질적으로 가지를 뻗은 단풍나무 아래로 낙엽을 치우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짙푸른 청소복에 하얀 장갑을 끼고 곱슬한 머리를 뒤로 묶은, 사십대 가량의 흔히 볼 수 있는 여인네였다. 나는 갑작스레 불안해졌다. 다가가자 짐작대로 여인은 내 눈앞에서 작은 소리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그 순간, 맑은 물이 뚝 떨어졌다.
곧이어 관광 안내서를 든 남녀 한 쌍이 걸어왔다. 그들도 역시 내 바로 앞에서 똑같은 두 개의 소리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그 소리를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소리. 그것도 종이나 나무 같은 것과는 다른, 이를테면, 그렇다, 인간의 피부처럼 탄력 있는 것이 극한까지 당겨지다 견디지 못해 터져버릴 때 나는, 둔탁하고 불쾌한 소리였다.
그들이 사라지는 걸까 아니면 내가 사라지는 걸까, 그건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서로 사라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런 일이 언제부터 일어나게 되었는지 생각을 더듬다 나는 문득, 행방을 알 수 없는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사념에 이르렀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나 또한 다른 모든 이들과 똑같았다. 늦건 빠르건 죽음은 내게도 찾아올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역이나 공항의 무빙 워크를 타면서 곧 넘어질 뻔하다가 마지막 선을 넘어 무사히 발을 디뎠을 때, 나도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죽음을 지금처럼 모양 사납게 맞이할지 모른다는 시답잖은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우연히 사고 현장을 맞닥뜨리기라도 하면, 입 가진 사람들이 다 그러듯이, 죽음이란 저렇듯 바로 다음 순간에 덮쳐온다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나는 나의 죽음을 이미 오래 전에 시간 속에서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래를 바라봐도 과거를 돌아봐도, 어디에서도 나의 죽음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죽지 않으리라고 믿은 것인가, 그렇지 않았다. 죽음은 어딘가에 의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건 저 맑은 물소리가 알려주었다. 물방울이 떨어져 닿는 곳, 그곳이 바로 죽음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이를 방법은?
나는 세상에 알려져 있는 자살 수단을 시험해보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그런 방법이 죽음을 가져다 줄 것 같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죽는다는 건 여전히 내게 공포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저 알고 싶을 뿐이었다. 갖가지 사념 끝에, 나의 죽음은 분명 수은 같은, 용해되기 쉬운 금속 비슷한 것이리라고 결론지어보았다. 지금은 아직 액체인 채로 조그맣게 팽창하여 정체되어 있는 상태. 맑은 물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그것이 흩뿌린 죽음의 비말 세례를 받는 것이다. 그들을 만질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스테인리스 바퀴를 은빛으로 반짝이며 앞쪽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려온 소년이 웃는 얼굴만을 선명하게 남기고 사라졌다. 태양은 조금도 그 빛을 멈출 기척이 없다.
……그렇다 해도, 죽음이 시간의 한 점에서 응고되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기묘한 일인가. 시간이 아주 조금만 기울어진다면 금세 언덕길을 굴러 내리듯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에서 나를 향해 흘러들 것이다. ……그러나, 과연 정말 그럴까. 그때 죽음은 내 곁을 그대로 지나쳐 어딘가 내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흘러가버리는 게 아닐까. 아니, 어쩌면 그건 이미 액체 상태 그대로 시간 속에 침투하여 내 발 밑을 적시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뚝 떨어졌다.

북쪽 큰길로 나가다 서쪽으로 길을 돌아서자마자, 성인 오락실에서 막 나온 사내가 하마터면 나와 부딪칠 뻔하다가 직전에 사라졌다. 자동 도어가 한순간 전해준 오락실 안의 소란. 그리고는 그저 예의 불쾌한 소리의 여운만이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한참 걷는데, 이번에는 열 대여섯 명 정도의 백인 관광단체와 마주쳤다. 깃발을 든 안내원 앞을 걸어가는 열 두서너 살 되어 보이는 금발 소년 둘이 그 선두였다.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제법 어른스럽게 보이지만 실은 겨우 초등학생 정도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바로 눈앞에서 갑작스레 모습이 지워졌다. 그리고 새카만 선글라스를 쓴 붉은 얼굴의 중년 사내가 사라지고, 안내원이 사라지고, 그의 얘기에 열심히 귀기울이던 기품 있어 보이는 노부부가 사라지고…… 아버지의 발치에 꼭 붙어 걷던 어린애가, 주근깨투성이의 소녀가, 까다로운 얼굴로 가이드북을 들여다보던 대학생풍의 청년이, 야구모를 쓴 뚱뚱한 사내가, 대열의 맨 끝에서 카메라에 필름을 넣던 허니문의 젊은 남녀가…… 모조리, 똑같은 조그만 소리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나는 침묵의 거리에 우뚝 선 채 아직도 쏟아지고 있는 햇빛에 눈을 던졌다. 그리고 잃어버린 나의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런 의문이 뇌리를 스쳤다. 나의 생의 시간은 이미 직선이기를 중지한 게 아닐까. 어린아이가 뒤엎어버린 장난감 상자처럼 나의 존재는 시간과 공간이 이르는 곳곳에 산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버스 정류장 곁을 지나자, 늘어서 있던 순서대로 세 개의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사라진 뒤에야 나는 누군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황망히 깨달았다.
두 갈래 길 사이에 자리잡은 찻집 창 너머로 한 남자와 여자가 격앙된 몸짓으로 말다툼을 하는 것이 보였다. 옆 자리에서는 신문을 펼친 회사원풍의 사내가 흥미진진한 듯 이따금 그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쇼핑백을 든 임산부가 찻집 앞을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길에는 자동차가 태연스레 달리고 있었다.
나는 ꡐ불가해(不可解)한ꡑ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율했다. 나도 모르게 떠오른 그 말에 의해,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 갑자기 빠른 속도로 접근한 것만 같았다. 되묶을 수 없는 무언가의 실을 풀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비로소 무언가를 해결한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신호등이 켜진 건널목을 지나 북쪽 큰길 다리에 이르자, 나는 오른쪽으로 꺾어 복판에 가로수가 이어진 길을 한동안 걸었다.
소나무 가로수는 이미 잎이 시들었고, 앞쪽에는 줄기가 가느다란 벌거벗은 벚나무가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문득 그중 한 그루의 나무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성긴 깃털에 덮인 이상한 형태의 살덩어리가 보였다. 흘러내린 피가 검게 변색하여 굳어 있었다.
죽은 비둘기였다. 무언가에 뜯기기라도 한 듯 난폭하게 거꾸로 선 깃털이 내게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미풍에 흔들리고 있었다. 살이 썩어들어서 깃털 뿌리 쪽이 느슨해진 탓일까. 깃털 한 올 한 올이 모두 제멋대로의 방향을 향하여 흔들리고 있었다. 끝으로 갈수록 털의 폭이 넓어지고 푸른빛을 띤 회백색은 엷게 흐려져, 연로초(蓮鷺草) 꽃잎처럼 보였다. 깃털 두세 개가 주위에 흩어져 있었다.
살아 있을 때는 그토록 유연하게 다듬어져 있던 깃털이 죽어버리면 이렇게 되는 것인가, 나는 아연했다. 훼손된 섬세함은 도리어 육신의 중대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제껏 없던 초조한 분노감마저 느껴져 도망치듯 강둑길로 내려서는데, 어쩐 까닭인지 눈앞에 마주 바라보고 있을 때에는 전혀 깨닫지 못했던 시체 목줄기 부분의 선명한 초록빛이 집요하게 뇌리에 어른거렸다.
그리고 또, 물이 뚝 떨어졌다.

강둑길을 가로질러, 돌들을 콘크리트로 굳혀놓은 강가에 앉았다.
추위 탓인지 강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평소에 곧잘 보이던, 개를 산보시키러 온 주부, 조깅하는 젊은 사람들의 모습도 없었다. 단풍 철도 이미 끝난 지 오래였다. 북쪽 큰길에 걸린 다리며 북산대교, 북산대로 쪽에서는 끊임없이 자동차가 오가고, 그 풍경은 아까 지났던 벚나무 가로수 길과 연결되어 바깥세계와 완전히 격절(隔絶)되어버린 듯한, 널따란 하나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가모가와(鴨川) 수면에 햇빛이 쏟아지는 모습은 참으로 굉장했다. 어느 쪽을 건너다보아도 강은 정시(正視)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허공에 가득 찼던 빛이 그 모습을 투영하며 녹아들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수면에 떠올랐다 차례차례 결합하면서 점점 퍼져가는 걸까.
해체되어 평면 위에서 다시 숨을 헐떡이는 태양. 인간이 고정시킨 강 안에 몸을 담아 흘러가는 태양.
점점 더 쏟아지는 햇빛의 비말은 나를 거의 미치게 하였다. 끊임없이 쏟아지고 또 쏟아진다는 것이 표현하기 힘든 압박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광경에는 음악 같은 것이 있었다. 절대적으로 단조로운 음악이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단조로움으로 듣는 이의 감각에 이상을 일으키게 하고, 쉴새없이 변화의 환각을 어른거리게 하는 음악이었다. 나는 내 청각이, 들릴 리 없는 그 소리를 향하여 맹렬하게 수렴되고 무한히 확장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찢어져라 고막이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흐르는 강물 소리는 난폭하게 뒤로 제쳐졌다. 자동차의 소음도 이제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침묵이 육박해올수록 귀는 초조감을 더해간다. 소리 건너편에 침묵이 없는 것과 똑같이 침묵 건너편에 소리가 없다는 것을 청각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귀를 기울이면 아주 작은 소리를 포착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이 침묵으로부터도 소리가 들려올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청각은 갈 곳을 잃었다. 기댈 곳도 없이 방황하였다.
시각도 괴이할 만큼 예민해졌다.
눈은, 빛이 물에 닿는 순간을 집요하게 쫓았다. 추처럼 좌우로 흔들리면서 뱃구레부터 강의 수면에 닿고 두세 번 돌다 천천히 흘러가는 것. 비스듬히 쓰윽 떨어져와 가장자리부터 물에 젖고 흐름에 이끌려 급하게 스러져 흘러가는 것. 한 조각 한 조각이 수면에 접촉하는 순간. 빛에 녹아 사라지는 순간.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눈부신 빛 속의 환영에 지나지 않았다. 선 없는 선, 형태 없는 형태였다. 시각은 어디에도 가 닿지 못했다. 침묵 속의 소리와 똑같이, 더듬어 닿은 끝에는 그저 널린 빛뿐이었다.
각각의 감각은 파탄을 향한 맹목적 충동에 홀려 있었다. 착란을 일으키고, 서로의 영역을 침식하며 섞여들었다. 나는 그 민감함에 놀랐다. 나 자신보다 훨씬 빠르게 그것들은 벌써 나아가야만 할 장소를 알고 있었으므로.
음영(陰影)을 모조리 삼켜버려 호수면처럼 태연스럽게 가득 넘치는 그 빛의 띠에, 긴 간격을 두고 몇 겹이나 층을 만들며 이어진 강바닥이 자꾸만 물결을 만들어 보냈다. 제한 없이 난반사하는 자디잔 물결들은 짙은 청색이라고도 깊은 초록이라고도 할 살빛을 밑에 깔고 점차로 파문을 넓혀 철썩이면서 가장 밝은 빛 속으로 사라져갔다. 물새는 거기에서 거무스레 희미한 그림자가 되어 뛰놀고 있었다. 강의 수면에 날아 내려와 그때마다 그렇게 그림자가 되었다가 튀쳐날면서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그 광경은 죽음과 부활을 둘러싼 불사조의 생을 두루마리 그림으로 만들어 보여주는 것 같았다.
눈을 한번 꽉 감았더니 나의 시계(視界)는 피 세례를 받은 듯 붉게 물들었다. 일순 빛이 물러나고 강의 흐름이 확실하게 보였다. 느닷없이 떠오른 색채와 곡선에 나는 여인의 긴 머리채를 떠올렸고 그 살결을 생각했다. 그 모습들은 눈을 깜빡일 때마다 희미해지며, 다시금 되돌아와 시계에 퍼져가는 강 수면의 빛 속으로 사라져갔다.
내가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은 보기를 원한 것은…….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른 겨울 하늘 한켠에서 기억 속의 태양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빛을 가득 흩뿌리며 멀어져가던 저 거대한 태양의 환각. 빛이 흩어진다. 흩어진다. 눈〔雪〕조차도 하늘을 등지면 먼지처럼 보이건만. 이 빛의 아름다움은, 그리고 이 슬픔은.
……일어서려고 땅바닥에 손을 짚었을 때, 돌연 건너편 강둑에서 목걸이를 두르지 않은 개 한 마리가 구르듯 달려 내려왔다. 개는 강둑을 달려 강가로 미끄러져 내려오더니 미친 듯이 강에 뛰어들어 조금 거칠고 길다란 털을 물에 흠씬 적시며 몸을 흔들어댔다.
음식물 찌꺼기에 더럽혀진 그 몸뚱이가 점점 빛에 젖어들어갔다.
ꡒ아아, 너에게도…….ꡓ
다시, 물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이것 역시 하나의 기억이었다. 참으로 하잘것없는 하나의 기억일 뿐이었다. 이 기억을 회상하면서, 나는 다른 많은 기억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이 기억을 살아보았다. 강둑을 따라 북쪽을 향해 올라가 계속 거리를 걸었다. 부디 이 기억이 오늘의 기억이기를, 바로 조금 전까지의 기억이기를 믿으려 했다. 넘쳐나는 수많은 기억 속에서 이 기억이야말로 지금의 내게 가장 가까운 과거의 기억이기를 믿으려 했다. 물론 무모한 노력이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었다. 가령 그렇게 믿을 수 있다 해도 그 믿음에 대체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을 것인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오늘의 기억이건 어제의 기억이건, 백 년, 천 년 전의 기억이건, 얼마나 먼 옛날인지도 알 수 없는 저 태양의 기억이건. 그것은 모두 같은 기억들이다. 더구나 시간 속에서 허망하게 표류를 계속하는 고독한 기억이다. 그렇다, 어쩌면 이 순간조차도.
북산대로로 나와 서쪽으로 향하다 호리가와(堀川)에 들어서기 전에 남쪽으로 꺾어져 주택가로 들어가 동쪽으로 향하고, 북쪽으로 향하고, 서쪽으로 향하고…… 그러기를 끝없이 거듭하다 도중 어딘가에서 시바타케(柴竹) 거리로 나가고 그리고 다시…….
어리석은 방황이 나를 조금씩 무엇인가로 가까이 다가가게 하였다. 그것은 물론 구체적인 장소 따위가 아니었다. 차라리 어디에도 도달하지 않고 계속 걷는 것이야말로 그 ꡐ무엇인가ꡑ의 존재를 내게 열어 보여주고 있었다. 귓전에 조그만 소리만을 남기고 시계에서 사람들이 사라져갔다. 세계는 빛의 색채를 부여받고 막 허물을 벗은 한여름 매미처럼 무구(無垢)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존재가―그렇다, 이제는 더이상 의심할 것도 없이, ꡐ나라는 존재가ꡑ 점점 과거로 방출되어가는 것이었다. 이 순간의 나의 존재, 아아, 그렇게 말을 떨구자마자 이미 그것은 하나의 위험한 기억이다. 생각을 미처 마무리하기도 전에 기억이 되어 멀어져가는 것이다.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아니 의식하는 것조차도 그것을 따라잡을 수 없다. 나의 존재, 포착조차 할 수 없는 존재. 나는 그저 조각조각 흩어진 한 무리의 기억에 쫓겨 다니는 무엇인가이다. 실 끊어진 구슬들처럼 과거로 산산이 흩어져가는 무엇인가이다. 그것들을…… 그렇다, 그 기억이라 이름 붙여진 내 존재의 단편을 허망하게 모아들여 어떻게든 이어붙여보려 하는 무엇인가이다. 얼마나 많은 것을 줍지 못했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잘못 주워들었는가.
맑은 물은 수없이 떨어지고 점점 그 간격을 좁혀간다. 떨어졌다. 다시, 뚝 떨어졌다.

잎을 떨군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걷는 걸음이 다시 북산대교로 돌아왔다. 거기에서 무언가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중앙 가로수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마지막 불가사의와 만났다. 가모가와 강변의 고요하게 이어진 벚나무 가로수 속 한줄기 가느다란 나무 아래, 조그맣게, 네모 반듯하게, 계절 잃은 벚꽃잎이 떨어져 쌓여 있었던 것이다.
분명 나는 그렇게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꽃잎이 아니었다. 다가가 보니, 누군지 모를 여인의 복숭앗빛 손수건이었다. 급히 다가든 내 발길이 일으킨 바람이 아주 조금 그 가장자리를 스치자, ꡐ언젠가 보았던ꡑ 비둘기 시체가 얼핏 깃털을 내보였다. 손수건은 다시 천천히 펄럭이며 그것을 덮었다…….

태양은 아직도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이따금 가만히 흔들리는 손수건을 바라보면서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아래, 지금도 쓰러져 누운…… 쓰러져 누워 있을 터인 비둘기의 시체를 생각하며.
맑은 물은 이제 쉴새없이 내 등뒤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히라노 게이치로
1975년 생 1999년 첫소설 <<일식>> 아쿠다가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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