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0 #시라는별 59
대설(大雪)
- 안도현
상사화 구근을 몇 얻어다가 담 밑에 묻고 난 다음날,
눈이 내린다
그리하여 내 두근거림은 더 커졌다
꽃대가 뿌리 속에 숨어서 쌔근쌔근 숨쉬는 소리
방안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누웠어도 들린다
너를 생각하면서부터
나는 뜨거워졌다
몸살 앓는 머리맡에 눈은
겹겹으로, 내려, 쌓인다.
선운사에 다녀왔다. 새해맞이 건달산 해돋이 산행, 6월의 광교산 산행 이후 3개월 만의 가족 나들이였다. 선운사가 자리한 선운산에는 옆지기가 즐겨 찾는 암벽이 있다. 오른팔 힘줄이 끊어져 클라이머들이 오르는 모습을 구경이나 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건만, 가고 싶은 마음에 나를 꼬드겼다.
ㅡ 여보, 이맘때 선운사 상사화가 활짝 핀대?
ㅡ 상사화?
ㅡ 상사화 몰라? 붉은 꽃인데, 선운사에 이 꽃이 흐드러지게 펴서 아마도 당신, 꺼뻑 죽을 걸.
꺼뻑 죽을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선운사 상사화, 아니 정확하게 말해 꽃무릇 군락지는 장관이었다. 상사화와 꽃무릇은 같은 듯하지만 다른 꽃이라고 한다. 꽃이 먼저 피고 잎이 다음에 나오는 것은 같지만, 상사화는 8월~9월, 꽃무릇은 9월~10월에 꽃이 핀다. 꽃무릇에 관한 설명으로는 안도현 시인의 글만큼 상세하면서도 간결한 것이 없을 듯하다.
[꽃무릇은 나무 그늘이나 축축한 땅에서 잘 자라는데, 한자 이름은 석산(石蒜). 9월 중순께 30~50cm 꽃대가 올라와 그 머리에 열흘 정도 붉은 꽃이 핀다. 꽃이 지고 나면 꽃대가 곧 쓰러진다. 10월에 수선화 이파리 같은 푸른 잎이 나와 눈을 맞으며 겨울을 보내게 된다.
잎은 이듬해 5월 누렇게 시들어 사라진다. 잎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에서 여름을 보낸다. 그러다가 9월 초에 땅을 뚫고 한 뼘쯤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은 잎을 보지 못한다. 상사화와 생리가 닮았다. 서로 그리워하기만 할 뿐 만나지 못하는 연애! 꽃무릇은 수선화과, 상사화속이지만 상사화와는 구별해야 한다. 몇해 전 이른 봄에 황동규 선생께 몇 뿌리를 캐드린 적이 있는데, 나중에 여쭈어보니 죽고 말았다고 말씀하셨다. 잎이 사라져버린 걸 죽은 것으로 착각하셨던 모양이다. 꽃무릇은 한개의 암술과 여섯 개의 수술이 빨갛게 화관의 장식처럼 달려 있다. 나비들이 수분을 도와주러 오기도 한다. 특이한 것은 꽃을 피우되 열매는 맺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식물들은 오랜 옛날부터 씨앗으로 종을 퍼뜨리는 대신에 알뿌리로 번식하는 게 쉬워 그것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세상 사람들아, 꽃무릇을 보지 말고 가을이라고 말하지 말라. 9월이 가기 전에 고창 선운사로 당장 떠나라.] ( 『안도현의 발견』 중)
안도현 시인이 시 절필을 선언하고 8년만에 출간한 최근 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제3부 <식물도감>에도 꽃무릇이 등장한다.
[꽃무릇 이파리 저마다 푸른 치마를 펼치고
내리는 눈을 받는다.]
초록 꽃대 위에 피어오른 붉디붉은 꽃들이야 두말할 것 없이 아름답지만, 나는 열흘간의 만개를 위해 추운 겨울날 ˝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받는 푸른 ˝이파리˝들과 ˝뿌리 속에 숨어서 쌔근쌔근 숨쉬는˝ 꽃대들에게 눈길을 보내고 시구를 선사한 시인의 마음씀이 더 좋았다.
2021년 9월 18일 토요일. 초가을 하늘은 변함없이 열일을 했고, 선운사 꽃무릇은 어김없이 흐드러지게 폈으며, 고창의 밤은 별과 달과 풀벌레 소리로 가족탑에 추억돌 하나를 얹어 주었다.
다시, 풍성한 한가위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