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30 나는 느린학습자의 엄마입니다 1
알라딘 서재를 기웃거리고부터 가장 의아했던 것이 '페이퍼'라는 것이었다. 100자평은 말 그대로 100자평이고, 리뷰는 100자평을 100배쯤 늘인 독자평인 건 알겠는데, 페이퍼? 이것은 무엇인가? 내가 알아챈 한 가지는 페이퍼는 리뷰와 달린 여러 권의 책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알라딘 페이퍼의 세계는 놀라웠다. 책 읽고 글 쓰는 호모페이퍼들. 누구는 삶과 책을 잇는 생활 글쓰기의 달인이고, 누구는 AI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지적풀을 가진 달인이고, 누구는 지구상의 온갖 책을 섭렵해 강의를 하는 달인이고, 누구는 통통 튀면서도 수려하기 짝이 없는 문장력을 가진 달인이고, 누구는 세계문학 접수를 실천해 나가는 달인이고 등등등. 사실 친구 신청을 하지 않고 있는 달인들도 많다. 그들의 서재를 기웃거리면 넘 비교돼서 자꾸 주눅이 든다. 넌 이 나이 되도록 뭐했니? 책 좋다고 그렇게 떠들고 다녔으면서 아는 게 뭐니? 그런 맘이 드는 것이 아닌가. 꺼이~~~~
그러다 슬그머니 고개를 쳐든 생각 하나. 나는 이런 페이퍼를 써볼까. 어차피 한 번은 정리를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 그 정리를 알라딘 서재에다 해봐?
나는 좀 특별한 아이를 키운다. '특별하다'는 건 똑똑하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평균적인 아이들과는 좀 다르다는 뜻이다. 학계에서는 우리집 어린이 같은 아이를 '경계선 지능' 이나 '느린 학습자'라고 명명한다. 우리집 어린이가 또래보다 발달이 느리고 주의력 결핍에 충동적이며 과잉행동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남자아이들은 어릴 때 대개들 그러하고 크면서 좋아진다는 말을 나는 믿었다. 그러나 과잉행동은 나이가 들수록 줄어들었지만 주의력 결핍이나 기억력과 인지력은 나아지지 않았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이 어린이가 초등학교 1학년 들어 지능검사를 비롯한 각종 검사를 받아본 후였다.
나에게 독서는 뭐니뭐니해도 '유희'다. 즐겁지 않다면 책을 읽을 이유가 그닥 없었다. 그러나 아이 문제는 좀 달랐다. 나는 머릿속의 세계가 나와는 너무나 다른 이 아이를 이해해야 했고, 이해하고 싶었다. 책은 내 아이에 대한 이해를 도운 길잡이들 중 하나이다. 그런 책들을 이 페이퍼에 담으려 한다.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는 잘 쓴 소설이지만 아주 불편한 글이다. 작가의 의도는 우리가 구축한 행복이란 것이 모래성처럼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행복으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문학적 장치로 '다섯째 아이'를 착안한 듯한데,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계속 등장하는 "비정상"이라는 말에 온몸이 떨렸다. 무엇보다 "비정상"이라는 그 아이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이 너무 무섭고 화나고 안타까웠다. 내가 아는 한, 다섯째 아이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졌지만 그 에너지를 조절할 인지력은 가지지 못한 아이이다. 그러니까 바람직한 도움이 필요할 뿐인 장애 아이를 괴물로 취급한 것. 행복 댐에 구멍이 뚫린 것은 아이 때문이 아니라 그 태도 때문이었다. 태어나는 아이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장애를 가진 것이 불편의 요소이긴 하나 죄악은 아니다. 그리고 불편함은 장애인보다 비장애인이 더 크게 느낀다. 왜냐하면 무엇이 어떠해야 한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은 거기서 시작된다. 아이가 다른가. 그러면 다르게 대하라. 같기를 바라지 마라.
올해 초 온 가족이 <<포레스트 검프>를 보았다. 무려 26년 전 개봉작. 범상치 않은 아들과 살다 보니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바보라고 놀릴 때면 포레스트가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하는 말. "엄마 말이, 바보는 지능이 좀 낮은 것뿐이래요." 포레스트의 IQ는 75다. 헐. 우리집 어린이보다 높다니. 아무튼 우리집 어린이는 포레스트와 비슷한데 겉모습만으로는 이 어린이가 더 똘똘해 보인다. 포레스트는 용감하고 현명한 엄마가 있어, 달리기를 잘해, 운동 신경이 좋아, 운명의 신이 늘 붙어다녀 억만장자가 된다. 이렇게 부러울 수가.
"여보, 우리 아들도 억만장자가 될 수 있을까?"(아들이 들었다)
"엄마, 뭐가? 뭐가 되라고?"
"으응. 억만장자."
"뭐? 엉망장자? 날더러 엉망장자가 되라고?"
"아니아니, 엉망장자가 아니고 억만장자. 따라해봐. 억 만 장 자."
"아하! 엉 망 장 장!"(깨갱)
내 아들과 비슷한 성향의 아이를 키우는 동생이 "언니, 우리 아이들은 이 부류에 드는 것 같아"라면서 내게 권해준 책이었다. 경계선 지능 아이들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연구해온 저자는 이런 아이들에 대한 정의와 발달적 특성, 인지력 향상 및 학습지도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정말로 고마운 책이다. 경계선 지능에 드는 아이들의 비율의 의외로 높다. 대략 13~14%이다.
경계선 지능은 미국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편린(DSM-IV)에서 "경계선 지적 기능(Borderline Intellectual Function: BIF)"으로 분류한 것으로 통상 경계선 지능으로 줄여서 부르고 있다. DSM-IV는 "경계선 지능"을 표준화 지능검사를 실시하여 IQ 70~85 사이에 속하는 아동들로 정의하였다. 실제로는 IQ 70~79 사이의 지능을 나타내는 경우를 경계선 지적 수준이라고 해석한다(K-WISC 3 지침서, p187)(16쪽)
저자는 5년 뒤 연구 성과를 더 많이 담은 또 한 권의 책을 출간한다. <<경계선 지능과 부모>>에서 저자는 경계선 지능 아이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들은 교육이 필요한 아이들이다. 배움이 느려 누구나 쉽게 가르칠 순 없지만 자극을 줘서 잠재능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야 하는 아이들이다. 따라서 특별한 교육이 필요하다. . . . . . . 경계선 지능을 가진 아이들은 분명 장애는 아닐지라도 방임하거나 매우 나쁜 환경에 노출되면 지적 장애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26쪽)
이 두 권의 책은 일선 교사들(초등학교, 중학교)이 글을 읽을 줄 모르는 학생들, 글자는 읽어도 의미를 모르는 학생들을 찾아내 그들에게 적합한 특별 교육을 기록한 학교 현장 탐사 보고서이다. 학교 속 문맹자들을 유형별로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았다. 이 두 선생님의 문제 의식과 탐구 정신과 실천 의지는 감탄과 감사를 절로 불러일으킨다. 두 교사는 그림책 읽기를 통해 아이들의 문맹 탈출을 시도하는데, 효과 만점이다. 나는 이 두 권의 책을 연달아 읽고 우리집 어린이가 받고 있던 구몬 학습을 때려치웠다. 1년을 배웠는데도 한글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이 두 선생님이 학생들을 가르친 방법을 우리집 어린이에게 적용해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아이와 그림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오랜 작업 끝에 이 어린이는 드디어 2학년 말쯤 한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5학년이 된 이 어린이는 책을 좋아하며 소리 내지 않고 속으로 읽기가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물론 문해력의 길은 여전히 멀다.
"읽고 쓰기를 가르치는 것은 공교육의 영역이다. 글자를 모르는 아이의 한글 교육은 부모와 가정이 아니라 학교와 교사의 역할이다. 국가 교육과정에 한글은 초등학교 1학년 과정에서 가르치도록 명시하고 있다. 부모는 국가와 학교, 그리고 교사를 믿고 자녀를 학교에 보낸다. 만약 학교가, 교사가 이러한 믿음을 저버리고 아이가 한글을 익히지 못한 상태를 방치한다면 이는 약속위반이요, 공교육의 붕괴를 뜻한다."(<<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 11쪽)
홍인재 선생님과 엄훈 선생님이 제시한 문제 해결 방안을 내가 아이에게 적용한 첫 번째 책이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아들과 이 책을 한 달 동안 읽었다. 이 책은 일단 이야기가 재미있다. 아이들은 똥 얘기라면 사족을 못 쓴다. 게다가 복수극이다. 통변의 통쾌함을 가져다준다. 이 책에는 여러 동물이 등장하고 그들이 누는 똥의 생김새와 똥 누는 소리는 저마다 다르다. 모양과 색깔과 소리에 대한 인지를 끌어낼 수 있다. 그런데 이 얇은 동화책을 한 달 동안이나 읽었다고? 그렇다. 처음에 내용을 읽어 주며 같이 웃는다. 독서는 유희가 우선이니까. 두 번째 읽을 때는 차례와 상관없이 등장 동물들을 불러낸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경계선 지능을 가진 아이들은 스스로 기억하는 능력이 모자라 이 작업을 거치지 않으면 읽어준 것을 대부분 까먹기 때문이다. 다음 번엔 등장한 차례대로 동물들을 소환한다. 순서 개념을 넣어 주기 위해서다. 여러 번 읽어 주어야 순서대로 말한다. 다음에는 동물마다의 똥 모양을 이야기한다. 그 다음에는 똥 누는 소리를 이야기한다. 이것 역시 기억하기까지 오래 걸린다. 다음에는 범인이 누구인지, 그 범인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묻는다. 복수를 끝냈을 때 두더지가 뭐라고 말했는지, 왜 그렇게 말했을지 이야기해 본다. 그리고 마지막 하일라이트. 이 책의 내용으로 일인극을 펼쳐 보인다. 이것은 우리집 어린이가 연기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5학년이 된 이 어린이는 지금도 공룡 흉내 내기를 엄청 좋아하고 엄청 잘한다. 그리하여 이 어린이는 지금도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를 달달달 외우신다.
To be continued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