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29 #시라는별 32
무말랭이
- 김상순
똑 눈 온 거 겉제?
달밤에 살짝 나와서 보면
누가 디라서 뿌려 놓은 눈이라.
달밤에는 냄새도 희미해져서
누가 봐도 소복소복 눈이라.
허, 엄마가 시를 읊소.
시가 뭐꼬?
엄마가 방금 읊은, 그런 게 시요.
내사 그런 건 모르고.
소복소복 눈이 쌓이모
너그가 강생이메로 구불다가
낯이 빨개가 방에 들오면
눈에 묻어 온 산 냄새가
온 방에 퍼지디라.
엄마 진짜 잘한다.
그러면 이 시 좀 갖고 가라이.
짐치매로 치대서 삭혀서 묵든지
더 말리서 물 낋일 때 넣어 무라.
다리서 : 바람에 날려 알곡을 가려서
강생이메로 : 강아지처럼
짐치매로 : 김치처럼
어미 김상순이 입으로 내뱉는 말들은 아들 홍정욱에게 언제나 시로 들렸다. 어미가 툭툭 뱉어내는 시어들 속에는 어미가 살아오는 동안 ˝생짜배기로 몸에 익힌 세상 이치˝와 어미 ˝몸속에 통째로 녹아든 삶의 골짝골짝˝(8쪽)이 깃들어 있었다. 어미만큼은 아니지만 아들도 살아보니 무어라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쓸쓸함과 서러움이 매운 고추 삼킨 마냥 입천장을 얼얼하게 데우는 날이 무시로 찾아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날이면 슬쩍슬쩍 펼쳐 보고 싶어, 그런 날이면 그냥 안겨 보고 싶어 어미의 말들을 받아적기 시작했다.
어미 얼굴 한 번 더 보고 옮겨 쓰고, 어미 소리 한 번 더 듣고 옮겨 쓰기를 거듭하는 아들을 보고 늙은 어미가 말한다.
˝너만 듣고 말지, 말 같지도 않을 것을 어디다 알린다 말이고? 참 별일을 다 한다. 남사스럽게 . . . . . .
내가 살면서 배운 거는 이것뿐이다. / 어디 가서 말하지 마라. 숭본다.˝(150쪽)
김상순이 구술하고 홍정욱이 옮겨 쓴 <<살아 보니 그런 대로 괜찮다>>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남들이 숭본다(흉본다)며 아서라, 말어라 라고 한 어미의 말조차 아들 홍정욱은 그대로 받아썼다. 이 아들은 불효자일까. 그런데 책을 읽어 보니 내가 김상순의 자식이었어도 어미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의 가락들을 잡아다 오선지에 옮겨 그리고 싶겠더라. 구수하고 쫀득하고 재미지고 살가웁다.
안도현 시인은 안도현의 문장들 <<고백>> 5부 ‘시적인 순간‘에 대해 이런 문장을 썼다.
˝시에서 묘사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는 대상의 현상을 생생하게 그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묘사의 생생함이 대상의 본질에 이르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묘사를 통해 대상과 시적 화자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201)
김상순은 묘사, 대상, 현상, 시적 화자 등등의 어려운 말들은 아마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소복이 쌓여 있는 무말랭이들이 달빛을 만나면 누군가 밤사이 뿌려 놓고 간 눈가루가 되고, 눈 쌓인 벌판을 마구 뒹굴던 아이들이 방에 들어오면 ˝눈에 묻어 온 산 냄새가˝ 온 방에 퍼진다고 하는 표현이 묘사가 아니고 무엇일까. ‘무말랭이‘와 ‘눈‘이라는 대상의 본질에 다가가는 생생한 묘사가 아니고 무엇일까.
김상순의 시들은 삭혀 묵고, 끓여 묵기 참 좋다. 온몸 구석구석이 시큰해지고 따스해진다.
홍정욱 작가가 딸이라 내멋대로 착각했네요. 수정했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