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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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어제>>를 몇 시간만에 다 읽었다. 이로써 한국에 출간된 이 작가의 책은 다 읽은 셈.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워낙 강렬해 이후 세 작품에선 큰 감흥을 못 느꼈다. 순서를 달리 읽었다면 느낌이 달랐을까. 아무튼,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첫 작품을 능가하는 작품을 쓰지 못하는 것에 자괴감은 느끼지 않았을까.

<<어제>>를 읽으면서 왠지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지망생이자 공장노동자인 주인공 토비아스 호르바츠가 내게는 작가의 분신처럼 보였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사춘기 소년 같고 답답하기만 한 호르바츠가 대체 어떤 답을 찾을지 궁금해하며 읽었는데, 마지막 문장에서, 아! 하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어제는 내내 무척 아름다웠다. 숲속의 음악, 내 머리칼 사이와 너의 내민 두 손 속의 바람, 그리고 태양이 있었기 때문에." 

소설에 들어가기 전 문장이다. 지나간 시간들은 왜 아름다워 보일까. <<어제>>에 묘사된 오늘은 전혀, 조금도, 눈꼽만치도 아름답지 않다. 인생이 너~~~~무 구질구질해 보인다. 망명자들의 삶이 다 그러했을까만, 어쨌든 읽는 내내 고구마를 삼키는 마냥 목이 멨다. 꺽꺽. 

이 책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들은 이것이었다.

베리는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죽었음이 판명되었다. / 로베르는 욕조에서 동맥을 끊고 죽었다. / 알베르는 "너희는 내 똥이나 먹어라"라고 우리말로 적은 쪽지를 남기고 목매달아 죽었다. / 마그다는 감자와 당근 껍질을 까고 나서 바닥에 앉아 가스벨브를 열고 오븐에 머리를 밀어넣은 채 죽었다. (60-61쪽) 

이들의 죽음은 과연 자살 시도의 결과였을까. 그보다는 "저는 다만 쉬고 싶었을 뿐입니다."(17쪽) 라는 주인공의 말처럼, 더는 이 삶을 지속하고 싶지 않은 피곤함 그리고 무력감의 결과 같았다. 

헝가리 혁명의 여파를 피해 스물한 살의 나이로 갓난아이를 안고 국경을 넘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2011년 스위스 뇌샤텔의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76세였다. 


이제 나에게는 희망이라곤 거의 없다. 전에는 그것을 찾아서 끊임없이 이동했다. 나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을? 나도 몰랐다. 그러나 인생은 있는 그대로의 것,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인생은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이어야 했고 나는 그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찾아다녔다. / 나는 이제 기다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방안에서 의자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 바깥세상에는 그럴듯한 어떤 인생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 P41

저녁에 공장을 나서면 장을 보고 저녁 먹을 시간밖에 없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공장에 나오려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내가 일을 하기 위해 사는 것인지 살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인지 자문한다. - P47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무엇이든 해보려고 시도했다. 무력감이 감정 중에 제일 무서운 것이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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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27 12:5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와 신기하네요 저는 방금 ‘문맹‘ 리뷰 썼는데 ㅎㅎ 전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만큼은 아니어도 ‘어제‘도 나름 좋았었어요, 근데 ‘거짓말‘이 워낙 엄청나서 ^^ 책읽기님의 기분이 뭔지 알거 같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4-28 09:42   좋아요 3 | URL
ㅋ 맞아요. 거의 같은 시간대에 리뷰를 올린 듯했죠. 저도 <어제> 나쁘지 않아요. 근데 요즘 좀 우울 모드라 책을 읽는 동안 주인공이랑 같이 다운돼 미치는 줄 알았슴요.^^;;;

미미 2021-04-27 13:0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강렬함에 있어선 <존재의 세가지..>가 최고인듯. 각 작품 어떤 순서로 쓰였는지 찾아봐야 겠어요.🤔

행복한책읽기 2021-04-28 09:43   좋아요 3 | URL
그럼 지는 미미님이 찾아봐 주는 순서 낼름 받아먹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ㅎㅎㅎ

초딩 2021-04-27 20: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존재의 세가지
그것을 넘을 작품을 쓸 필요도 없을 만큼
그 책은 충분히 강렬한 것 같습니다 ㅎㅎ
어제는 그래도 보고는 싶네요 :-)

행복한책읽기 2021-04-28 09:45   좋아요 3 | URL
초딩님. 우문현답이심요. ‘뛰어넘을 작품을 쓸 필요도 없을 만큼 충분히 강렬하다‘에 오른손 번쩍!! ^^ 크리스토프 작품은 국내 출간된 게 몇 권 없으니 무조건 다 읽는 걸루다 ^^

붕붕툐툐 2021-04-27 22: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냥 기대를 놓고 읽어야겠어요. 그럴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작가잖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4-28 09:49   좋아요 3 | URL
맞아요 맞아요. 충분히 매력적인 작가에요. 저는 이분이 그 많은 일 겪고도 저 나이까지 살아내신 것에 감탄했어요. 어쩌면 어린아이 같기만 한 문체를 고수한 것은, 늦게 배운 외국어로 쓰는 탓도 있겠지만 마주하기 힘든 사건들과 거리 두기를 하고 싶어서이기도 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