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03 #시라는별 33
제 길
- 김상순
요새 아아들은 똑똑하고 말도 잘 듣제?
흐흐. 아아들이야 언제나 그렇지요 뭐.
니는 아이들이 말 안 들어도 넘 아아들을 니 맘대로 할라고 하지 마라이.
내 맘대로 안 하요. 그게 내 맘대로 되는 일도 아니고요.
내 말 함 들어봐라. 나도 들은 이야기다만.
무슨 이야기를 하실라꼬?
예전에 책만 피면 조불고(졸고) 깨면 항칠하는 (낙서하는) 아아가 있더란다. 선생이 불러내서 궁디를 때리고 벌을 안 세웠겠나. 그 아아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자세히 보니 손꾸락으로 눈물을 찍어서 그림을 그리더란다. 산도 그리고, 새도 그리고.
요새도 그런 아아들이 있소. 벌 세우기도 겁나요.
그래서 선생이 썽이 나서 멀캤단다. 에라이 망할 넘아, 니는 그림이나 그리서 묵고 살아라! 그카니, 세상에! 그 아아가 울음을 뚝 그치고 헤죽 웃음서, 예! 카더란다.
흐흐. 그래서 그 아아는 우찌 됐는고요?
그건 내사 모르지. 모르긴 해도 글로 벌어먹고 살아겠나? 꿩 새끼 제 길 간다고, 제 길이 다 있는 긴데.
그게 뭔 말이오?
모르는 것도 많다. 꿩 새끼를 데려다 닭장에서 키워 봐라. 틈만 나면 산으로 내빼지. 그게 닭장에서 살겠나? 죽지. 본디부터 다른 넘인데.
어미 김상순의 입말을 옮겨 쓴 홍정욱은 초등학교 교사이다. 저자 소개에 따르면 홍정욱은 틈만 나면 아이들과 산과 들과 강을 다니고 방학이면 전국의 강을 따라 걷는다고 한다.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집 <<꼭꼭 씹으면 뭐든지 달다>>를 비롯해 몇 권의 책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이 분 책은 몽땅 읽고 싶어졌다.
1937년생 김상순은 이런 역사를 지닌 분이다. ˝학교 문턱은 넘어 보지도 못하고, 스무 살에 아무것도 없는 남편에게 시집 와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아이 다섯을 낳아 키웠고, 둘째딸을 사고로 잃고, 63년을 함께 산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평생을 흙과 더불어 살았다.˝
그런데 학교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는 김상순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너무나 재밌고 무쟈게 웃긴다. 특히 김상순이 들려주는 스포츠 중계는 캐스터들이 수업료 들고 가서 김상순에게 한 수 배워 오라고 하고 싶을 만큼 찰지게 생생하다.글자화된 입말들이 강물처럼 넘실거리고 경상도 사투리가 야물딱지게 구수해 자꾸만 소리 내 읽게 된다. 내 고향말이이서 입에 착착 감긴다.
김상순은 ˝우리 겉은 뒷글도 배우지 못한 늙은이 말이 어디 쓸데가 있다고?˝ ˝다 늙은 우리 이야기를 어디다 쓰겠노?˝라고 말했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 어디에서도 씨잘데기 없는 말을 발견하지 못했다. 김상순의 이야기는 평생을 흙과 더불어 산 자의 해학과 혜안으로 넘쳐난다. 삶의 지혜라는 모종을 땅에 심어 기르고 거둔 듯하다. 배움의 눈과 맘을 지닌 자에게는 세상 모든 곳이 학교다.
교사 아들에게 넘의 자식 니 맘대로 할려고 들지 말라면서, 그 까닭을 김상순은 기가 막힌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꿩 새끼를 닭장에서 키워 봐라. 틈만 나면 산으로 내빼지. 그게 닭장에서 살겠나? 죽지. 본디부터 다른 넘인데.˝
아동심리학자들과 상담사들이 흔히 말하는 ‘자존감 상실‘보다 훨씬 강력하고 훨씬 설득력 있는 한마디. ˝죽지.˝ 아이들을 죽이지 않고 잘 살게 하는 길은 꿩 새끼는 꿩 새끼로, 닭 새끼는 닭 새끼로 자라게 해주는 것이다.
˝오월은 푸르고 어린이는 자란다. 나무처럼 자란다. 숲을 이루게 해주자.˝(<<어린이라는 세계>> 2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