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통의 물
나희덕 지음 / 창비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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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사람은 반쯤 담겨진 그릇의 물과 같고 지혜로운 사람은 가득 찬 연못의 물과 같다는 말이 있다. 그 말에 비추어 보아도 나는 역시 반 통의 물에 가깝다. 스스로 충만해서 일렁임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일 것이고, 반쯤 모자라 출렁거리고 사는 어리석음이 나는 그다지 싫지 않다. 지금까지 글을 써온 것도 내 속에 채워지지 못한, 또는 잃어버린 절반으로 하여 뒤척인 날들의 기록이 아닐까 싶다.(책머리에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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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7 매일 시읽기 29일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 황인숙 

이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굴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툇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사기그릇의 우유도 핥지 않으리라
가시덤풀 속을 누벼 누벼 
너른 벌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 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 후다닥 달아나겠지
아하하하 
폴짝폴짝 뒤따르리라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 주기만 하리라
그리고 곧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바람은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 버리고 
어두운 벌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 속은 아늑하고 짚단 냄새 훈훈하겠지 
훌쩍 뛰어올라 깊이 웅크리리라 
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찬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 걸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쫓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 


내가 매일 시읽기를 하고 있다고 말하니 한 친구가 아느냐며 알려준 시다. 몰랐다. 시 제목을 듣자마자 내게 떠오른 것은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소이다‘와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였다. 황인숙은 이름을 아는 시인이고, 집 책꽂이에 떡하니 한 권의 시집이 꽂혀 있기도 한데, 이 발랄한 제목의 발랄한 시를 왜 여태 몰랐던가.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는 시인 황인숙의 데뷔 시다. 1984년(어머나 36년 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1988년 출간된 첫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문학과 지성사)에 실려 있다.

나는 이 시를 꿈꾸는 고양이의 저항이자 항거로 읽었다.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는 부뚜막에서의 안락한 삶을 거부한다. 이 고양이는 인간이 던져주는 먹이 핥기를 거부한다. 인간의 손길에 머리 들이미는 짓을 거부한다.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는 툇마루를 박차고 너른 들판을 달리겠다 한다. 이 고양이는 참새떼를 덮치고 들쥐와 뛰어 놀겠다한다. ˝어두운 벌판에 홀로˝ 남아도 어둠을 핥겠다 한다. 아늑한 짚단 속에 쏙 들어가 달빛을 벗하며 잠을 청하겠다 한다.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아. 너는 자연인이 아닌 자연고양이를 꿈꾸는구나. 너의 그 꿈에 내 꿈을 실으마. 함께 달려보자. 너는 물론 앞발사레를 치겠지만.

황인숙의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는 대입에 자주 등장하는 시인가 보다. 입시생들의 질문이 많이 올라와 있고, 친절한 샘들의 상세한 설명도(이른바 칼질) 많이 보인다. 나는 국어 만점이 그렇게나 힘들던데, 지금은 그 이유를 안다. 시를 앞에 놓고 이것이 정답이다 라고 하는
순간 시는 죽는다.

사진은 윤필의 <<야옹이와 흰둥이 1>> 표지. 이 글을 쓰다 급 다시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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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6 매일 시읽기 28일 

밤길 
- 나희덕 

ㅡ 엄마! 저기 보석이 있어요. 
ㅡ 빛난다고 다 보석은 아니란다. 
    저건 깨진 유리 조각일 뿐이야. 

폐차장 앞은 
별을 쏟아놓은 것처럼 환하다 
빛에 이끌려 무작정 달려가려는 아이와 
그 손을 잡아당기는 나의 손, 
손이 자란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 손은 언제부터 알게 된 것일까, 
유리는 유리일 뿐이라는 쓸쓸함과 
한번 깨어지고 나면 더이상 유리일 수 없다는 
두려움을. 예리한 슬픔의 파편을. 
그 유리의 끝이 언젠가 
아이의 실핏줄을 찌르리라는 예감에 
나는 큰 손을 움츠리며 
내 손 안의 여린 손을 다잡아보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모든 게 보석처럼 빛나던 
한 세계의 광휘, 내게도 있었다. 
그러나 누가 붙잡을 수 있으랴, 
상처를 모르는 손이 그리로 달려가는 것을. 
제 슬픔의 빛을 빌려 
어둠을 살아가는 저 유리 조각들을 
보석이 아니라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으랴. 
어떤 손이 어떤 손에게 속삭일 수 있으랴. ​


다시 나희덕. 나희덕의 시를 읽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살면서 한 번쯤 스쳐 지나간 장면이나 생각이 시로 되살아나는 감흥이 일곤 한다. <밤길>이 그렇다.

밤길에 깨진 유리 조각들이 별처럼 흩어져 있다. 세상물정 아는 시인은 그것이 반짝이는 별들이 아니라 아이 손의 ˝실핏줄을˝ 찌를 수 있는 위험물임을 대번에 감지한다. 아이는 모른다. 몰라서 ˝빛에 이끌려 무작정 달려˝갈 수 있다. ˝무작정˝이라는 시어에서 멈칫했다.

‘아는 것이 힘‘일 때도 있지만, ‘모르는 것이 힘‘일 때도 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모르면 아이처럼 ˝무작정˝ 덤빌 수 있다. 그렇게 뛰어들었다 베고, 할퀴고, 채이고, 넘어지고, 구른다. 그런 경험치가 쌓여야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되는 것은 ˝유리는 유리일 뿐이라는 쓸쓸함˝과 ˝한번 깨어지고 나면 더 이상 유리일 수 없다는 두려움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른은 ˝무작정˝ 뭔가를 하기 어렵다. 그 사실이 참 허전하다.

아이들에게 이러면 안 돼, 저러면 안 돼 하는 소리를 많이 하고 살았고, 지금도 하고 산다. 다만 좀 줄였다. 해도 잘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상처를 모르는 손˝에게 상처 입을라 아무리 말로 한들 들리지 않는다. 보여주거나, 경험하게 해주어야 한다.

내 아이들은 지금 ˝보석처럼 빛나˝는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 ˝제 슬픔의 빛을 빌려 어둠을 살아가는˝ ˝유리 조각˝ 같은 어른인 나 또한 ˝보석이 아니라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으랴.˝

사진은 영월 한반도지형. 딸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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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5  매일 시읽기 27일

이런 이유
- 김선우 

그 걸인을 위해 몇 장의 지폐를 남긴 것은 
내가 특별히 착해서가 아닙니다 

하필 빵집 앞에서 
따뜻한 빵을 옆구리에 끼고 나오던 그 순간
건물 주인에게 쫓겨나 3미터쯤 떨어진 담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그를 내 눈이 보았기 때문

어느 생엔가 하필 빵집 앞에서 쫓겨나며 
부푸는 얼음장에 박힌 피 한 방울처럼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없이 적막했던 것만 같고ㅡ

이 돈을 그에게 전해주길 바랍니다 
내가 특별히 착해서가 아니라 
과거를 잘 기억하기 때문

그러니 이 돈은 그에게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나에게 어쩌면 미래의 당신에게 
얼마 안 되는 이 돈을 잘 전해주시길 


다시 김선우. 이 시를 읽자마자 떠오른 문구는 성경 말씀이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 시는 생색 내는 선행이 아닌, 무심한 선행을 이야기한다. 누군가를 도운 것이 ˝내가 특별히 착해서가 아니라˝ 하필 그 순간 내가 그곳에 있었고, 하필 그때 내 주머니에 돈이 있어서였다고.

선행은 돌고돈다. 내 어미는 신세 지면 도움 준 그 사람에게 꼭 갚으려했다. 신세 짐이 말 그대로 짐이 돼버리자 어미는 무신세무보답의 삶을 살아가려 했다. 어미 곁에는 사람이 머물지 못했고 어미는 점점 고립되어 갔다.

예전엔 나도 어미의 생각을 따라 신세 진만큼 보답하려 애썼다. 그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어느날 현타처럼 깨달아버렸다.

선행은 돌고돈다. 반백년을 사는 동안 헤아릴 수 없는 도움을 받고 살았다. 도움의 형태도 다양했다. 밥이기도, 돈이기도, 집이기도, 말이기도, 품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 모든 걸 ˝도움의 손길˝이라 통칭한다.

시인처럼 나 역시 그 시절들을 잘 기억했다가 내가 할 수 있는 손길을 건넨다. 그리고 가능한 내가 한 일을 잊는다. 내가 그럴 수 있는 건 ˝말할 수 없이 적막했던˝ 그 어느 때 정말 별거 아닌 듯이, 옛다, 하며 불쑥 손 내밀어 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다.

선행은 돌고돈다. 선행은 무심히 행할 때 더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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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4 매일 시읽기 26일

오메 단풍 들것네(1935)
 -김영랑(1903-1950)

˝오-메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메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메 단풍 들것네.˝


오늘도 김선우의 시를 올리려다 마음이 변했다. 경기도서 충북 단양까지 내려오는 동안 바라다 보인 차창 밖 풍경에 딱 떠오른 시구,
˝오~~~메 단풍 들겄네.˝

김영랑은 내게 교과서 시인이다. 교과서 시인은 교과목에 들어 시험을 치게 했다는 이유로 독자들의 외면을 당하곤 한다. 시를 가슴으로
느끼기보다 머리로 이해하기 급급하게 만드는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일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시에 칼질을 하는 건 죄악이라며 모르는 낱말 뜻을 제외하곤 일체의 칼질(그러니까 참고서 설명)을 거부한 국어샘이 있었다.
우리는 칼질 대신 시를 읽고 감상을 적었다. 나의 감상. 선생님의 감상. 수업 방식은 신선했고 수업 내용은 지루하지 않았다. 물론 이 방식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중간고사 후 학부모들 전에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고 국어샘은 입시 교육을 적절히(최소로 적당히) 가미해 수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국어샘이 입시 교육에도 양보하지 않았던 한 가지는 시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읽은 후 감상을 쓰게 한 것이었다. 2년간의 수업 동안 우리는 시,
수필, 자서전, 소설까지 다 써봤다. 물론 뭘 썼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내 문학 사랑의 몇 할은 이 선생님의 공이다.

단풍 나들이길에 떠오른 김영랑의 시. 나는 삶의 어느 때고 시가 이렇게 불쑥불쑥 떠오르기를 바란다. 시구들이 내 머릿속과 마음속에서
흘러다니기를 바란다. 출렁출렁, 찰랑찰랑, 술렁술렁, 살랑살랑. 강물처럼. 음악처럼.

교과서 시인을 교과 밖에서 만나면 더 내밀하면서 친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전남 강진에서 유복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김영랑은 열네 살
어린나이에 혼인 후 1년 반만에 부인과 사별했다고 한다. 그런 탓도 있었는지 누이와의 우애가 깊었다고.

‘오 메 단풍 들것네 ‘는 어느 가을날, 장독대 가까이 한 그루 감나무에서 떨어진 감잎을 보고 일어난 풍경이자 시인의 단상이다. 추석이
낼모래인 걸 보니 ˝골 붉은˝ 감잎은 붉은 기가 반쯤 든 잎 같다. 단풍이 옴팡 들기 전, 누이는 할일이 많고 걱정도 적잖다. 몸도 마음도
분주한 누이를 시인이 놀리듯, 달래듯, 나를 보라며 누이의 말을 고대로 외쳐준다. ˝오 메 단풍들것네˝

가을이다. 
잎꽃들이 피는 계절. 
다채로운 색의 계절. 
저 꽃들을 보라. 
오 메 단풍 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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