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 개정판
강화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0920

​ <인지 공간> 김초엽/ 문학동네 ​

‘차이를 지우지 않아야 세상은 더 풍요로울 수 있다‘ 

<한겨레21>이 사랑한 작가 21인의 인터뷰를 실은 <한겨례21>통권2호에서 가장 관심이 갔던 작가가 스물일곱 살의 젊은 작가 김초엽이었다. 나는 SF를 그닥 즐겨 읽지 않는 독자이지만 인터뷰를 읽으면서 이 젊은이가 풀어내는 공상과학 이야기가 궁금해졌고 구매욕구까지 일어났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2020 제11회)을 구매한 이유는 김초엽 작가의 수상작 <인지 공간>이 여기에만 실려 있기 때문이었다. 여러 작품들 중 이 작품을 가장 먼저 읽고 싶었던 이유는 청각장애인이기도 한 작가가 ‘인지‘ 장애를 얘기하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는 나의 예상을 빗겨갔다. 작가는 ˝대놓고 장애를 은유적으로 썼˝다고 인터뷰에서 말했지만 내게는 이브의 장애가 ˝대놓고 장애˝로 읽히지는 않았다. 아쉬웠다. 작가 말대로 내가 ˝장애를 읽어내는 관점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작가의 은유가 빗나가서인지 잘 판단이 안 선다.

그럼에도 이야기 자체는 재미있다. 기억될 가치가 있는 지식이란 무엇인가. 개인적인 기억은 기록되지 말아야 하는가. 기록의 결정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조지 오웰의 명언이 떠올랐다. ˝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도 통제한다. 그리고 현재를 통제하는 자가 과거를 통제한다.˝ 

누구보다 약한 몸과 인지 능력을 지닌 이브(가장 낮은 자)가 차이를 잊게 하는 격자 구조의 ‘인지 공간‘에 맞선다는 설정이 마음에 든다. 개별적인 기억은 소중하다. 기억이 아름다운지, 가치 있는지, 그것에 대한 결정권도, 기억의 간직에 대한 통제권도 자기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 이브는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그래도 난 절대 안 잊을 거야. 이걸 . . . . . . 전부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어.˝(159) 
˝물론 나도 때가 되면 배우겠지. 내 말은, 격자는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라고. 다들 저게 우리의 모든 지식이자 생각이라고 여기는 것 같은데, 저기 인지 공간이 있고 아직 거기 진입하지 않았다고 해서, 지금 우리가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니잖아. 난 지금도 바쁘게 생각하고 있어.˝ (160) ​

차이를 지우지 않아야 세상은 더 풍요로울 수 있다. 작가는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
˝공동 인지 공간을 거닐면서도 각자의 스피어를 통해 진리에 대한 다른 해석을 하게 될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분열이 아니라 더 많은 종류의 진실을 만들어내는 다른 방법일 수도 있다.˝(179) ​

김초엽 작가는 논픽션 집필을 위해 장애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꼭 기억해두어야겠기에 그가 설명한 장애학을 옮겨 본다. 

˝몸의 손상이 장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손상과 상호작용하는 사회적 구조가 장애를 만든다.˝ (<한겨레21>통권 2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통의 행복
아마미야 마미.기시 마사히코 지음, 나희영 옮김 / 포도밭출판사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0901 
《보통의 행복》  아마미야 마미.기시 마사히코/ 나희영 옮김/ 포도밭출판사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을 읽고 너무 좋아서 이 저자의 책을 올해 다 읽어보겠다는 야무진 생각을 한 바 있다. 화성봉담도서관에서 《보통의 행복》과 《거리의 인생》을 대출했다. 코로나 19 3차 창궐이 있기 전에. 도서관은 다시 문을 닫았다. 꺼이. <<보통의 행복>>을 먼저 읽은 까닭은 짧아서.^^ 겨우 154페이지. 몰입해 읽지 않아도 두어 시간이면 다 읽는다.

이 책은 여성의 자의식을 주제로 글을 쓰는 작가 아마미야 마미와 사회학자 기사 마사히코의 대담집이다. 작가와 사회학자가 만나 무슨 거대
담론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현 일본 사회의 문제점들을 묵직하지 않게, 유쾌하게 이야기한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아마이야 마미는 자기 주장이 뚜렷한 발랄한 사람 같고, 기사 마사히코는 농담이란 걸 잘 할 것 같지 않은 유형의 인물 같다.

약간 반대 성향의 두 사람이 만나 짚고 가는 여러 주제는 일본도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는 사회라는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젠더 문제만큼은 우리나라 쪽이 여러 발 앞서 있는 듯하다. 가령 이런 대화,

요즘도 부인이 ˝일하고 싶어˝라고 하면 남편이 ˝일하는 건 좋은데 저녁밥은 해 둬˝라고 말하잖아요.(기시) / 그건 부드러운 편이죠. ˝가사를 등한시했다가는 용서 없어˝라고 하는 경우도 있어요.(아마미야 95) ​

만약 내 옆지기가 이런 말을 했다가는 ‘용서 없다.‘^^;;

이 책은 목차의 제목들이 마음에 든다. 소제목만 읽어도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짐작이 된다. 그렇지만 본문을 읽는 게 훨씬 유쾌하고 유익하다. 무게는 가벼우나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은 책이다. 오히려 짧은 대담 안에 고개가 끄덕여지고, 덩달아 웃게 되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들이 적잖게 등장한다.

‘보통의 행복‘에 대하여
- 그런데 끝까지 파고들면 우리들의 욕망은 굉장히 뻔해요. 엄청난 집착을 가진 사람만 욕망이 있는 게 아니라 보통 사람도 욕망이 있는데, 사실 의외로 온건해요. 특별한 미인이 되지 않아도, 그렇게 부자가 되지 않아도 좋고요. 평범하고 아담한 곳에서 그럭저럭 살아나가기를 바라죠. 많은 사람이 타자의 욕망을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에 욕망도 평균치에 가깝게 온건해지는 거죠. / 그래서 보통의 행복을 얻는다면, 거기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타자의 욕망의 모방이라 완전한 만족은 영원히 불가능하지만, 반대로 보면 타자의 모방이기에 그만큼 ‘개성적‘인 욕망이 아니어도 그럭저럭 만족할 수 있는 건지도 몰라요.(기시 22) ​

‘커뮤니케이션‘에 대하여 
- 사람에게 뭔가를 말하는 것으로 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생각지 못한 반응을 얻는다거나, 생각의 실마리를 얻는다거나, 이야기하던 중에 자기 생각이 정리된다거나, 단순히 격려를 받기도 하고 때로 용기를 얻는 일도 있다.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세계는 풍요로워진다. 자신의 세계도, 타인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이 책이 그러한 대화의 계기가 된다면 많이 기쁘겠다.(아마미야 152) ​

적어도 나에게는 이들의 대화를 듣는 재미와 유익함이 있었다. 아미미야 마미에게 알려줄 수 없어 아쉽다.^^ 일본에서는 이 작가의 책이 꽤 출간된 듯한데,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은 《보통의 행복》과 《방에서 느긋한 생활》(알에이치코리아) 뿐이다. 두 번째 책은 코로나 시대에 어울리는 제목으로 읽힌다. 독자평이 괜찮다. 예약을 해두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엇이든 가능하다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0817 

<<무엇이든 가능하다 Anything is possible>>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정연희 옮김/문학동네

소설을 좋아하는 내가 올해 완독한 첫 소설
경기도 화성 봉담으로 이사온 지 6개월 만에 봉담도서관(얼마 전에야 부분 개관)에서 대출한 첫 책(구매 욕구를 당기는 책)

이 책을 절반쯤 읽었을 때 머리 위로 둥둥 떠다닌 나의 문장이 있었다.
​​
‘인간은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다.‘
‘괜찮지 않을 때는 목놓아 울어도 된다. 그래도 괜찮다.‘

드문드문 무시로 등장인물들 때문에 마음이 울컥해지거나 눈시울이 불거지곤 했다. 등장인물들 때문이라지만 실은 그들에게서 나를 보았기 때문이리라.

엘리자베스 스트라우스의 작품을 처음 접한 먼 나라 독자로서 말하건대, 나는 이 저자의 애독자가 될 것 같다. 그녀의 다른 작품들을 더 읽어 보고 싶어졌으니까.

미국 일리노이주 앰개시를 배경으로 총 아홉 편의 이야기로 구성된 이 소설 속에는 상처 입은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상처의 종류와 정도는 저마다 다르지만, 어린 시절 또는 젊은 시절의 상처라는 공통점이 있다. 가난과 부모와 타인과 국가가 입힌 상처들이다.

세상에 나서 상처 없는 삶을 살다 죽는 일은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는다. 생채기든 피투성이든 크고작은 상처를 입고 산다. 그런 일이 누군가에게는 밥 먹는 일보다 더 자주 일어날 수도 있다. 마음의 상처는, 내가 입었다고 인지하지 못한 경우에는 치유가 잘 되지 않는다. 인지했을 때에도 치유가 쉽지는 않다. 치유가 되건 말건 죽지 않는 한 살아야 한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상처들을 껴안고 ˝모두 그 시간을 버티며 통과했다.˝(11) 나는 이 문장에서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간파했다. 그것을 어떻게 풀어낼까 궁금했는데, 책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을 만큼 서술이 매력적이었다.

이 소설은 미처 다 자라지 못한 어른아이들의 이야기다. 어른이 되지 못했지만, 어른이고 싶어 애를 쓰는 이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내가 이 나이에 이르고 보니(쉰둘. 여전히 낯선 나이. 앞으로 먹는 나이는 계속 낯설 듯하다) 어른다운 어른이 무엇인지, 그런 어른이 될 수 있기나 한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십대와 이십 때만큼은 아니지만 인생의 많은 것이 여전히 혼란스럽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다. 더 절망스러운 것은 이 나이에 이르고 보니 죽을 때까지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는 것이다. 꺼이~~~~~
​​
˝그는(토미 거프틸) 나이가 들수록ㅡ그는 이미 나이가 들었다ㅡ자신이 선과 악의 이 혼란스러운 다툼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어쩌면 인간은 애초에 이 지구상에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더 잘 알게 되었다.˝(22)

​그럼에도, 불확실한 어른이 어른스러울 때가 있다. 중년의 패티 나이슬리가 열다섯 살의 사춘기 소녀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말을 할 때처럼. ˝나한테 너를ㅡ다른 사람을ㅡ쓰레기라고 부를 권리는 없어. / 물론 화가 났지. 네가 내게 정말로 무례하게 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나한테 그 말을 할 권리가 주어지는 건 아냐.˝(81)

또한 전쟁에 참전했다 인간으로서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다는 죄책감에 스스로의 삶도 자식들의 삶도 돌보지 않은 아버지 때문에 힘들어하는 애어른 피트에게 동네어른 토미 거프틸이 자신의 생각을 담담히 말할 때처럼. ˝자책한다는 것. 음, 자책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ㅡ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한 일에 대해 미안해할 수 있다는 것ㅡ그것이 우리를 계속 인간이게 해주지.˝(41)

미안해하다는 것, 자책한다는 것,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 그것들은 우리를 어른답게 성장하게 하는 마음들이기도 하다.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저릿저릿하면서도 행복했다. 다른 나라에 사는 이들의 이야기지만 살아온 시간이 살아갈 시간보다 많은, 나와 비슷한 이들의 이야기라는 공감대가 컸다. 무엇보다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에게 연민이 정이 불쑥불쑥 솟구쳤다.

˝진입로로 접어들던 패티는 나갈 때 켜두었던 불빛을 보았고, 그 순간 루시 바턴의 책이 패티를 이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랬다. 책이 그녀를 이해한 것이었다.˝ (80) ​

내가 책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성의 권리 옹호 고전의세계 리커버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지음, 문수현 옮김 / 책세상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0808

<<여성의 권리 옹호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 문수현 옮김 / 책세상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는 언젠가 한 번은 읽어 보아야지 하는 책이었다. 여성 문제에 아주 민감한 편은 아닌 사람인지라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과 관련이 있어 드디어 구매해 띄엄띄엄 읽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마크 트웨인이 고전에 대해 정의한 명언이 떠올랐다.

˝고전이란, 사람들이 칭송은 하지만 절대 읽지 않는 책(Classicㅡa book which people praise and don‘t
read)˝

이 책의 출간연도는 1792년이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228년 전. 책세상 번역본은 총 13장으로 구성된 원본 중 7장만 선별 번역했다. 완역본으로는 2008년 한길사에서 출간한 것을 2014년 연암사에서 출간한 개정판(손영미 옮김)이 있다.

재미로 읽을 만한 책은 아니지만 이제라도 뒤적거려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었다. 재미를 넘어 당대 여성 지식인의 여권, 나아가 인권 의식에 대한 혁명성과 한계성을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권리 옹호>>는 독일 사회주의의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아우구스트 베벨의 <<여성론>>(1879),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 2의 성>>(1949)과 더불어 서구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헌 중 하나로 꼽힌다. 남성에게는 이성, 자유, 평등을, 여성에게는 순결, 아름다움, 순종 등을 권고하던 당대의 계몽사상가들, 특히 루소를 비판하기 위해 쓰인 것이 바로 <<여성의 권리 옹호>>이다. 최초의 페미니즘 저서로 꼽히는 이 책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를 논하는 선을 넘어 인류 전체의 발전으로 논의를 확장함으로써 계몽사상의 남성 편향성을 극복하고 공적인 영역을 보완하는 균형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9 옮긴이의 ‘들어가는 말‘ 중)

순결, 아름다움, 순종은 21세기인 현재도 여성에게는 여전히 권고되는 덕목들로 보인다. 남자들에게 순결하라, 순종하라,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나는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최근 정의당의 한 의원이 원피스 차림으로 국회에 등원한 일을 놓고 일어난 논란. 내 눈에는 신선하고 아름답게만 보이던데, 어떤 이들(특히 남성 의원들)에겐 국회 권위(그것이 있기는 했던 걸까?)에 대한 불복종으로 비친 듯하다. 그녀는 순종하지 않았다. 그래서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나아진 것은 그만큼의 응원과 격려도 곁들여졌다는 것이 울스턴크래프트가 살았던 시대와 달라진 점이리라.

울스턴크래프트는 신체 조건의 차이를 제외하고 남녀의 정신에 우위가 있을 수 없고,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똑같이 향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당한 말씀이건만 이런 발언조차 당시에는 혁명적이었다. 아담의 갈비뼈에서 탄생한 존재 주제에 어디 감히 남성과 동등하다고 주장하느냐고, 생각과 행동이 시대에 앞선 자들은 시대에 순응해 사는 이들보다 삶이 더 녹록치 않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삶도 그랬던 것 같다. 유부남 화가와의 스캔들, 사생아를 낳은 미혼모. 두 번의 자살 시도. 산욕열로 인한 갑작스런 죽음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셸리를 낳고 열흘 후 죽었다)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고작 서른여덟 해를 살았다. 그녀는 스스로를 ˝닦인 길을 밟아가기 위해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이 책을 통해 그녀가 이루고자 했던 선진 세상을 조금 엿보았다. 그녀의 꿈은 현재진행중이다.

여성 교육 개선의 하나로 소년소녀가 같은 과목을 배우도록 할 것, 국가 재원으로 교육을 시킬 것(와우. 무상교육), 재산의 소유와 관리에서 여성들에게도 평등한 권리를 줄 것(평등주의적 결혼법 주창), 중산계급 뿐 아니라 노동자계급까지 아우르는 보통선거를 실시할 것, 부부간의 관계는 평등하고 독립적일 것 등등.

이 책에서 내가 실소를 터뜨리며 가장 재미있게 읽은 구절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편들 역시 그들의 내조자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너무 크게 자란 아이들일뿐이다.˝(41 ‘너무 크게 자란 아이들‘ 무릎을 쳤다)

˝그녀의 남편이 연인이기를 멈출 때ㅡ그 시간은 필연적으로 오게 된다ㅡ남편을 기쁘게 하려는 그녀의 욕망은 활기를 잃거나 비참함의 근원이 된다. 그리고 아마도 모든 열정들 중 가장 덧없는 것인 사랑은 질투 혹은 허영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52 푸하. 결혼도 해보지 않은 처자가 이렇게 된다는 걸 어찌 알았을까)

˝여성의 지성을 확대함으로써 여성의 정신을 강화하라. 그러면 맹목적인 복종은 종식될 것이다. 그러나 권력은 언제나 맹목적인 복종을 얻고자 하기 때문에 독재자들과 관능주의자들이 여성들을 어둠 속에 묶어두고자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45 울스턴은 줄곧 ‘맹목‘을 경계한다. ‘깨어나라‘는 뜻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 지음, 김경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0719 

‘무의미한 인생의 의미‘

이 책을 구매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줄 여겼더니, 알라딘 이력을 뒤져보니 올 초였다. 완독을 하기까지 6개월이 넘게 걸린 셈. 지인의 추천으로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 소장용이라는 느낌에 중고로 구매했는데, 어제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책을 덮으며 든 생각은, 역시 사길 잘했어였다. 추천한 지인은 뒤로 갈수록 별로라고 했지만 나는 끝까지 좋았다. 기시 마사히코의 다른 책들을 더 들여다보고 싶을 만큼.

이 책을 읽고 다시 확인한 점은, 내가 이런 류의 담담한 문체를 정말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나란 사람은 정작 호들갑을 떠는 부류에 가까운데, 왠일인지 글은 너무 유려하거나 화려하기보다 담백하거나 심지어 건조한 문체 쪽이 더 끌린다. 바꾸어 말하면, 시시콜콜 구구절절 휘황찬란 미사여구, 이런 글들을 칭송하기는 하나 아주 선호하지는 않는 듯.

아무튼, 기시 마사히코의 글은 수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사색에 사색을 거듭하게 만드는 동력을 지니고 있다. 그에게는 학자들이 곧잘 빠져드는 ‘학자연‘하는 잘난 척이 없어 보인다. 그의 글에는 어려운 용어들과 이해할 수 없는 문장으로 지적 우위를 자랑질하는 허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참 마음에 든다. 글이 어렵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술술 읽히지만도 않는다. 그의 문구들은 읽고 나서 쉬어 가는 템포를 던져 준다. 너도 이런 생각 해봤니? 못 해 봤으면 한 번 해볼래? 라고 묻고 있는 듯하다. 그의 글은 생각하고 그 생각을 글로 옮겨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들이 많았다. 오늘은 그 중 하나를 써보려 한다.

정확히 반백 살이 넘은 후로, 전에 없이 인생의 허무함을 자주 느낀다. 더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 살아봤자 무슨 기쁨이 있을까, 더 산다고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해낼까. 자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실현해 보려 한 때가 딱 한 번 있었다. 어떤 계기로 딱 접었다.
지금은 ‘자살‘을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삶을 더영위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 자꾸 고개를 쳐들 뿐. 이 책의 저자 기시 마사히코는 나보다 두 살이 많은 67년생이다. 그가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을 쓴 것은 2013년과 2014년으로 반백 년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때였다. 무수한 인생들, 특히 거리의 인생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쓰는 일을 업으로 삼아온 저자가 50년이 채 되지 않은 자신의 인생과 50년보다 짧거나 긴 여러 인생의 면면을 들여다보고 걸러낸 생각을 말한다.

˝되풀이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누구나 자기실현의 가능성이 있다든가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적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 오히려 우리 인생은 몇 번이나 기술한 것처럼,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단지 시간만 흘러가는 듯한, 그런 인생이다. 우리 대다수는 배신당한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 자신이라는 것은 태반이 ‘이럴 리 없었던‘ 자신이다.˝(191)

‘이럴 리 없었던‘ 자신.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혹은 스무 살이 넘어서도 우리는 ‘어떤‘ 자신을 꿈꾼다. 그 꿈대로 살고 있는 사람은 정말로 거의 없는 듯하다. 또한 하나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그 꿈대로 삶이 나아가지도 않는다. 일류 대학만 가면, 대기업에 취직만 하면, 고시에
합격만 하면, 결혼만 하면, 아이만 낳으면, 내 집만 생기면 등등등. 그런 것들이 다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문제는 삶이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 살고 또 살아야 한다. ‘이럴 리 없었던‘ 자신과 더불어.

그럼 왜 살아야 하지. 삶의 의미를 찾으려 들면 더욱 수렁이고 더욱 미로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되도록 ‘의미‘ 따위 묻지 않는다. 그냥 산다. 강물처럼 시간은 흐르니까.

˝우리 인생에는 결여되어 있는 것이 적지 않다. 우리는 대단한 천재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며, 완전한 육체도 아니다. 보잘것없는 자신과 죽을 때까지 함께 지내야 한다. / 우리는 우리가 놓인 이 처지를 어떤 벌을 받았다거나 누구의 탓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이 자신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어떤 벌을 받는 것도 아니고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무의미한 우연이다. 그리고 우리는 무의미한 우연으로 인해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신으로 존재하다가 죽어 가는 수밖에 없다. 다른 인생을 선택하기는 불가능하다. / 여기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214)

˝무의미한 우연˝이지만 그럼에도 이 인생에 실낱 같은 의미가 있을 수도 있음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언제나 내 머리 한구석을 차지하는 생각이 있다. 우리의 무의미한 인생이 자기는 전혀 알 수 없는 어딘가 멀고 높은 곳에서,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195)

엄마가 계신 요양원에 날마다 아내를 보러 오시는 어르신이 있다. 그 아내분은 우리 엄마보다 훨씬 젊은데 치매가 일찍 오셨고 치매 속도도 빨라 언어와 운동 감각을 거의 잃고 온종일 누워 계신다. 요양원은 경기도 양주 장흥. 어르신이 사는 곳은 경기도 남양주다. 자차를 쓰지 않고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해 두 시간이 걸려 요양원에 오신다. 어르신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다. 어르신은 점심 시간에 맞춰 요양원에 당도해 아내와 점심을 함께 먹고(도시락을 싸 오신다) 한 시간 넘게 말 없는 아내 곁에 앉아 계시다 집으로 돌아가신다. 어느 날엔가, 날마다 오는 것이 힘들지 않으시냐고 어르신께 물었다. 어르신의 대답은 이랬다.

˝집에서 돌보던 때에 비하면 전혀 안힘들어요.(어르신은 늘 존대어를 썼다) 내가 다리 성해서 날마다 다닐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아내가 날 못 알아보고 내가 다녀갈 줄도 모르지만, 그게 어떤 때는 마음 아프지만, 괜찮아, 내가 알아보고, 내가 기억하면 되지. 내가 오래도록 기억해야지 하고 생각한답니다. 그러면 다리에 힘이 생겨요.˝

나는 어르신의 말에 눈과 가슴이 동시에 뜨거워졌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렇다. 내 어미는 아직 나를 알아보지만, 내가 다년간 사실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아직 아프지 않은, 병이 들지 않은 이들은 말한다. 저렇게 되기 전에 죽었으면 좋겠다고. 나도 그렇다. 저리 사는 내 어미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날마다 아내에게 다녀가는 어르신이 한 말처럼 내게도 어느 날 그런 깨달음이 왔다. 엄마의 저런 삶조차 하나의 삶이라고. 삶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엄마가 기억하지 못하면 내가 기억하면 된다고. 나 또한 기억을 잃으면 내 자식이, 자식 아닌 다른 누군가가 엄마를 돌본 나를 기억해 줄 거라고. 삶의 기억은 그렇게 순환되는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하루 스물네 시간 중 엄마가 환히 웃는 시간은 고작 15분이 될까 말까 하지만, 그것조차 금세 까먹지만, 엄마의 이 삶도 기꺼이 껴안게 되었다. 또한 아직 멀쩡하다는 인간들이 잘 저지르는 시건방진 동정과 안쓰러움에서 약간 놓여날 수 있었다.

기시 마사히코의 책은 내게 이런 이야기와 사색을 떠올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래서 행복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