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7 매일 시읽기 29일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 황인숙
이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굴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툇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사기그릇의 우유도 핥지 않으리라
가시덤풀 속을 누벼 누벼
너른 벌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 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 후다닥 달아나겠지
아하하하
폴짝폴짝 뒤따르리라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 주기만 하리라
그리고 곧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바람은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 버리고
어두운 벌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 속은 아늑하고 짚단 냄새 훈훈하겠지
훌쩍 뛰어올라 깊이 웅크리리라
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찬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 걸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쫓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
내가 매일 시읽기를 하고 있다고 말하니 한 친구가 아느냐며 알려준 시다. 몰랐다. 시 제목을 듣자마자 내게 떠오른 것은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소이다‘와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였다. 황인숙은 이름을 아는 시인이고, 집 책꽂이에 떡하니 한 권의 시집이 꽂혀 있기도 한데, 이 발랄한 제목의 발랄한 시를 왜 여태 몰랐던가.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는 시인 황인숙의 데뷔 시다. 1984년(어머나 36년 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1988년 출간된 첫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문학과 지성사)에 실려 있다.
나는 이 시를 꿈꾸는 고양이의 저항이자 항거로 읽었다.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는 부뚜막에서의 안락한 삶을 거부한다. 이 고양이는 인간이 던져주는 먹이 핥기를 거부한다. 인간의 손길에 머리 들이미는 짓을 거부한다.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는 툇마루를 박차고 너른 들판을 달리겠다 한다. 이 고양이는 참새떼를 덮치고 들쥐와 뛰어 놀겠다한다. ˝어두운 벌판에 홀로˝ 남아도 어둠을 핥겠다 한다. 아늑한 짚단 속에 쏙 들어가 달빛을 벗하며 잠을 청하겠다 한다.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아. 너는 자연인이 아닌 자연고양이를 꿈꾸는구나. 너의 그 꿈에 내 꿈을 실으마. 함께 달려보자. 너는 물론 앞발사레를 치겠지만.
황인숙의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는 대입에 자주 등장하는 시인가 보다. 입시생들의 질문이 많이 올라와 있고, 친절한 샘들의 상세한 설명도(이른바 칼질) 많이 보인다. 나는 국어 만점이 그렇게나 힘들던데, 지금은 그 이유를 안다. 시를 앞에 놓고 이것이 정답이다 라고 하는
순간 시는 죽는다.
사진은 윤필의 <<야옹이와 흰둥이 1>> 표지. 이 글을 쓰다 급 다시 읽고 싶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