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지지 않는 사슬 - 2천7백만 노예들에 침묵하는 세계
케빈 베일스 외 지음, 이병무 옮김 / 다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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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스키너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르포로 구성된 노예제 추적기라면, 이 책은 통계자료와 개념과 국제법과 국제 규약을 가지고 현대판 노예제의 실태를 전한다. 르포가 아닌 보고서에 가깝기 때문에 읽는 '재미'를 따지자면 스키너의 책이 훨씬 앞선다. 하지만 스키너의 책이 미국 정부의 노예제에 대한 입장과 세계 각지 노예 현실 르포를 뒤섞어 산만한 느낌이 드는 데 비해 이 책은 건조하지만 훨씬 짜임새 있다. 학자들의 '보고서'이니 당연한 것 같기도 하지만.

책은 먼저 노예제를 철폐하기 위한 싸움의 역사를 소개하고, 현대의 '노예제'라는 이 낯익고도 낯선 개념에 대한 정의와 다양한 형태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노예제가 글로벌 경제 속에서 어떤 식으로 이윤을 창출하는지 살핀다. 


이어지는 장들은 현대의 노예제가 갖고 있는 특징적인 양상들에 대한 분석이다. 아직 어린 소녀들을 포함한 여성 노예들에게 유독 가해지는 폭력과 고통의 양상, 현대의 노예제에서 인종과 종족과 종교가 미치는 영향, 현대의 노예들을 양산하는 '시스템'인 무력 분쟁과 환경파괴, 그리고 현대판 노예들이 겪고 있는 건강상의 위험(신체적 정신적 위험이 모두 포함된다)과 그 결과들이다.


코트디부아르에는 코코아 농장이 약 80만개가 되며 여기서 전세계 코코아 공급량의 대략 절반이 생산된다. 대개 말리와 같은 인근 가난한 나라 젊은이들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이들 중 일부는 외딴 시골 농장에서 노예로 일한다. 노예를 이용하는 농장이 얼마나 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넉넉히 잡아도 5%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추정된다. 농장주들이 코코아를 도매업자에게 넘길 때 노예들이 재배한 그리 많지 않은 코코아는 '자유' 코코아와 뒤섞이는데 이 둘을 구별할 방법은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 중 하나가 코코아 협약이다. 2001년 체결된 이 협약은 전 세계의 초콜릿 업계, 몇몇 노에제 반대 단체들, 노동조합들과 ILO를 결집시킨다. 이 협약은 전 세계 코코아 재배지역에서 모든 단체 간의 조약으로 기능하며, 한 업계 전체와 노예제 반대운동 간에 맺어진 최초의 조약이다. 이 협약에 따라 국제코코아기구라는 재단이 설립됐다. 재단은 초콜릿 업계로부터 2002~2008년 900만달러 이상을 제공받았다. 재단은 농장들이 노예노동을 인정하고 이를 포기하도록 종용했고, 노예가 발견되면 언제라도 도울 수 있는 보호시설을 준비했다. 이와 별도로 1백만 달러가 ILO에 전달돼 '상업적 농업에서 아동 노동 착취 근절을 위한 서아프리카 프로젝트'가 시행됐다. 업계에서 총 1000만달러를 희사한 셈이다. 

협약에 따라 초콜릿 회사들은 코코아 재배에 아동이나 노예 노동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자발적인 업계의 기준'을 만들기로 합의했지만 아직 합의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게다가 코코아를 사용하는 제품을 만드는 업체 상당수가 협약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선의 길을 찾기 위한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스웨덴의 새 법률에 따르면 성을 파는 것은 합법이지만 그것을 구매하는 것은 불법이다. 성을 구매하는 것만을 범죄로 정한 것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힘의 불균형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다. 의회는 성을 파는 여성과 그것을 사는 남성 사이의 경제적, 사회적 관계를 불평등한 것으로 보고, 여성의 몸을 살 수 있는 남성의 능력은 일종의 남성 우월권으로 간주하여 저항하고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방식은 윤락업소를 합법화하고 정규화해 인신매매 여성에 대한 수요를 줄이고자 한 독일과 네덜란드 법률과 대비된다. 독일에서는 2002년 성매매가 합법화됐는데 노예제를 종식시키는 데에도 일부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유엔은 여전히 독일을 성적 착취를 위한 인신매매 여성들(주로 중부 유럽과 동유럽 출신)이 흘러들어가는 '최상위' 도착지 국가로 지정하고 있다. 

스웨덴은 소비 부문에서 성매매와 인신매매 수요를 없애고자 한다. 독일과 네덜란드는 그와 달리 인신매매범을 체포함으로써 공급체계 내에서 노예들로 운영되는 성매매를 줄이고자 한다. 현 시점에서는 어던 접근방식이 실효를 거둘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미얀마 정부의 노예 이용에는 경제적 기능이 있다. 미얀마에는 국가 주도 노에제가 거의 20년 동안 널리 퍼져 있어서, 오늘날 아태 지역에 존재하는 국가 주도 노예제 피해자 200만명 중 상당수가 미얀마인이다. 1990년 군부 정권 집권 뒤 요직에 앉은 장성들은 나라를 개인 사업체처럼 운영했다. 노예들이 임금 한푼 못 받고 나무를 베고 광물을 캐고 길을 닦고 기간시설을 건설했다. 그 중 많은 수가 인종적, 종교적 소수민 출신으로 무장 민족단체의 지원줄을 끊으려는 정부의 의도에 따라 노예화됐다. 1990년대 이후 미얀마에서는 인신매매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여성 수천명이 인신매매돼 태국에서 강제 성매매에 종사하고, 남녀 성인과 아이들이 중국, 방글라데시, 말레이시아, 한국, 마카오로 팔려가성 착취를 당하거나 가정부로 일하거나 강제노동에 투입된다.

미국 정부는 인권 침해에 대한 대응으로 미얀마에 제재를 가했지만 미국 업계는 미얀마 군사정권의 전략을 용인해 비난을 받는다. 군사정권이 진행한 사업 중 하나는 미국 석유회사 우노칼, 프랑스 토탈, 태국 회사 PTT익스플로레이션 랜드 프로덕션(태국 정부가 일부 지분 소유)과 제휴해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 사업은 수천 명의 노예화된 노동자들을 이용했다. 

미얀마 정권은 아동병사를 징집하기도 했다. 수단 정부와 달리 미얀마 정권은 이런 관행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2003년 당시 정부군에는 아동 7만명이 존재했고 일부는 열한살 밖에 되지 않았다. 그 해 모집된 신병 중 40퍼센트가 아동이었다. 
파이프라인 사업에서는 현대 노예제의 또 하나의 요소가 드러난다. 환경파괴다. 노예들은 정부의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면서 미얀마의 산림을 파괴했다. 그러자 이제 이 사업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은 마을 주민들이 노예 신세로 전락할 위험에 처한다. 정부가 노예를 동원해 나무를 벌목하면 티크 숲은 파괴된다. 그리고 목재 판매로 얻은 수익은 땅 파괴에 반대하는 소수민족들을 공격하는데 필요한 자금으로 쓰인다. 인권 침해가 곧 환경 침해로 이어지며, 그 역도 성립하는 것이다.


남아시아 강제 성매매 여성 중 많은 수가 어린 나이에 인신매매된다. 에이즈에 걸릴까봐 사춘기 이전의 어린 여자아이를 찾는 남성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미성년 소녀들은 생물학적인 이유 때문에 보호기구 없이 성관계를 가질 경우 외상을 입거나 성병에 감염될 가능성이 특히 크다.

어린 여성의 경우, 생식기 내부에 형성된 점막질 표면의 영역이 얇고 덜 성숙해 외상이나 감염 위험이 높다. 게다가 강제 삽입이 이뤄지는 난폭한 성행위는 작고 덜 성숙한 질과 자궁경부에 외상을 입히기 더더욱 쉽다. 게다가 알코올과 같은 가벼운 수렴성 용액으로 질 세척을 해 질을 건조시킬 것을 강요받기도 한다. 건조된 질 점막은 약한 충격에도 찢어지기 쉽다. 이로 인해 성명에 걸리기 쉬워지고 HIV에 감염될 위험성 또한 커진다. 성병에 감염된 성매매 아동들은 HIV에 감염될 확률이 4배로 높아진다.


지금 지구상에 '노예'로 불려야 마땅한 사람들이 2700만명이나 존재한다는 기본 '팩트'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스키너의 책을 비롯해 노예제에 대한 대부분의 글들이 다 마찬가지다. 지구상에 유사 이래 이렇게 많은 노예들이 존재한 적은 없었다. 지구상에 지금처럼 인구 자체가 많았던 적이 없었으니까. 

이 책의 저자들은 "노예의 수는 유례 없이 많지만 노예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적다"고 말한다. 현대의 경제에서 사실 인간의 노동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다.
 목화 따위를 키우는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노예 노동력을 동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전세계 목화 시장 규모에서 노예 노동력으로 생산된 목화의 비중은 굉장히 적다. 이를 테면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가 그토록 많은 까닭은?

핵심은, 노예를 구하고 부리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사상 유례없이 낮아졌다는 것이다. 유럽 각국이 노예무역에 매달릴 때에 비해, 지금의 노예들은 운반비를 비롯한 모든 비용이 턱없이 적게 들어간다! 세상에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사람 수가 너무 많기 때문, 사람 값이 그만큼 싸졌기 때문이다. 비록 비중은 얼마 안 되지만, 워낙 노예가 싸기 때문에 이 싼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노예를 부리는 이점이 생긴다.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노예제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작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값싸고 양 많은(!) 노예들을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 책의 요지다.


공급망의 모든 단계에 있는 이들이 제품 생산에서 노예제를 이용하지 않기로 한다면 노예 착취 농장이나 의류공장에 노예제 반대 활동가들을 파견하는 것은 쉬워진다. 코코아 협약은 업계가 인권단체, 소비자단체, 노동조합과 협조하면 노예제를 사라지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예는 마틴 기타 회사다. 이 회사는 환경단체들과 협조해 최고급 기타 제작에 필요한 마호가니 나무를 노예 없이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벌목하도록 하고 있다. 이 사안은 벌목장에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한 것이다.

또다른 예로 러그마크 재단(책에는 러그마크 재단으로 나와 있으나 지금은 '굿 위브 인터내셔널'로 바뀌었음)을 들 수 있다. 1994년 설립된 국제 자선단체인 이 재단은 남아시아 카펫 공장들을 조사해 인증서를 발부한다. 인증을 신청할 때 제조업자들은 열네 살 이하의 아동은 고용하지 않으며 성인 직조공들에게 최저임금을 보장할 것임을 약속한다. 가내 공장의 경우 보조자로 고용된 아이들이 정규교육을 받게 해야 하며 직기 소유주 자신의 아이들만 일할 수 있다. 
러그마크 라벨에는 고유의 일련번호가 부착돼 어떤 카펫이든 제조된 직기에서부터 매장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유럽과 미주의 카펫 수입회사들은 카펫 가격의 약 1%를 러그마크 재단에 지불한다. 이 돈은 카펫업계에서 노예로 일하다 해방된 아이들을 위한 학교와 재활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데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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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 칠레, 또 다른 9.11
살바도르 아옌데.파블로 네루다 외 지음, 정인환 옮김 / 서해문집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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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피노체트의 쿠데타군에 숨지기 전, 마지막 방송 연설에서 했던 말이다. <칠레, 또 다른 9·11>(서해문집)에는 아옌데의 저 말이 붙어 있다.


"라디오 마가야네스는 곧 끊어질 것이고, 차갑게 식은 금속 장치에 갇혀 제 목소리는 더 이상 여러분들에게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계속 귀를 기울이고 있겠지요. 저는 언제까지나 여러분들 곁에 있을 겁니다. 적어도 이 나라를 사랑하는 존엄성 있는 사람들에게는 제가 기억으로 남을 겁니다. 

민중은 스스로를 지켜야 합니다. 스스로를 희생해서는 안 됩니다. 민중은 무너지거나 총탄세례에 쓰러져서는 안 됩니다. 아무도 민중에게 굴욕을 줄 수는 없습니다. 

이 나라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칠레를 믿고 칠레의 운명을 믿습니다. 반역자들이 기승을 부리면 또 다른 이들이 이 어둡고 비통한 순간을 극복해낼 것입니다. 그렇게 알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머잖아 드넓은 길이 열리고, 자유를 찾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그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아옌데의 고별연설 일부분이다. 책에서 옮겨온 것은 아니고, 이태전 올린 포스팅에서 가져왔다.  이번에는 책에 실린 1971년 아옌데의 연설에 담긴 '각오'를 옮겨본다.


"칠레혁명을 지켜내겠습니다. 인민의 정부를 방어해내겠습니다. 그게 바로 인민들이 제게 부여해준 과업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들은 제게 총탄을 퍼붓지 않고는, 인민의 과업을 완수하고자 하는 저를 막을 수 없습니다."


아옌데가 산티아고의 어느 경기장에서, 쿠바 대표단을 환송하며 했던 말이라고 한다.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의장은 아옌데가 쿠데타군과 맞서 싸우다 숨진 뒤(압도적인 군사력에 맞서 싸우던 아옌데가 마지막 순간에'자살'한 것으로 거의 결론났지만 그 점은 중요하지 않다), 아바나에서 연설하며 아옌데의 이 말을 인용했다. 


"총탄을 퍼붓지 않고는, 인민의 과업을 완수하고자 하는 저를 막을 수 없습니다"라 했던 아옌데는 스스로의 예언대로 적들의 총탄에 숨졌다. 그 날은 1973년 9월 11일이었다. 그날의 참사를 뒤에서 조종하고 죄악을 저지른 미국이 뉴욕에서 뜻밖의 보복을 당하기 28년 전 벌어진 일이었다. 


책은 '9·11 이전의 9·11'에 대한 아리엘 도르프만의 글, 아옌데의 마지막 연설, 아옌데의 딸 베아트리스가 전하는 아버지와의 작별 순간, 파블로 네루다의 처절한 싯구와 네루다의 아내 마틸데가 전하는 '시인의 죽음' 등으로 구성돼 있다. 칠레 쿠데타와 미 제국주의에 대한 카스트로의 통렬한 비판도 나온다. 


아옌데 집권 전부터 시작된 미국-칠레군부의 혁명 전복 공작을 연표로 정리한데다가, 옮긴이인 한겨레신문 정인환 기자의 칠레 취재 뒷얘기가 함께 실려 있어 얇으면서도 튼실하다. 카피라이트를 보니 도르프만 이름으로 돼있는데, 국내에선 도르프만으로는 약하다고 생각했는지 '살바도르 아옌데, 파블로 네루다 외 지음'이라 돼 있다.


아침저녁 출퇴근길에 나누어 읽었다. 빅토르 하라가 남긴 시, 그의 아내 조안 하라가 재구성해 전하는 빅토르 하라의 마지막 일주일을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읽는 것은 힘들었다. 언제 눈물이 쏟아질지 모르니까. 하지만 이런 글을, 카페에 앉아 유유자적 읽을 수도 없지 않은가. "공포를 노래할 수밖에 없을 때 노래란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라는 시인의 절규를, "살아 있어 느끼는 공포 죽어가며 느끼는 공포/너무나 많은 순간 속 나를 본다/저 무한의 순간 침묵과 비명이 내 노래의 끝이다"라고 외치는 빅토르 하라의 마지막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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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는 프랑스 박물관인가 - 문화재 약탈과 반환의 역사
이보아 지음 / 민연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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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 문화재 논란에 대해 쉬우면서도 개념 있게 설명한다. 엘긴 마블스, 로제타스톤으로 시작되는 고대 유적·유물, 나치의 치밀한 문화재 약탈·파괴공작, 약탈 문화재를 둘러싼 ‘문화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대립, 그리고 외규장곽 도서를 비롯한 한국의 빼앗긴 문화재 실태와 반환운동에 대해서까지 폭넓게 다뤘다. 약탈 문화재 그림들과 유명 박물관에 대한 설명들이 곁들여져 있어 읽을거리 겸 볼거리가 된다. 단점이 있다면, 저자가 자기 박사논문을 풀어서 좀 손쉽게 책으로 만들었다는 느낌. 어떤 때는 ‘보론’ 해가면서 학술서적 쓰듯이 했고, 어떤 때는 ‘미술 읽어주는 여자’ 식으로 편안히 썼다. 그래도 내용은 꽤 알차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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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미래 - 총.달러 그 이후... 제국은 무엇으로 세계를 지배하는가?
에이미 추아 지음, 이순희 옮김 / 비아북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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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부터 읽기 시작해서 한동안 책장을 덮어두고 있다가 얼마 전 마음잡고 다시 펼쳤다. 결국 이 책이 2010년에 처음으로 읽은 책이 되어버렸다. 별로 의미 없는 짓이긴 하지만, 나는 해마다 그 해 처음으로 독서기록장에 남길 책을 나름 선별하는 습성이 있다. 내가 올해 첫 책으로 삼고 싶었던 것은 이 책은 아니었다. 벌써 1년도 넘게 조금씩 읽고 있는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를 첫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제국의 미래>가 생각보다 술술 읽혀서 순서가 바뀌었다. 

이 책은 술술 읽힌다. ‘찾아보기’까지 포함하면 558쪽, 하드커버의 두꺼운 책이지만 저자 후기부터 찾아보기에 이르는 뒷부분 곁다리들을 빼고 나면 본문은 477쪽 분량이다. 요즘 책들 다 그렇듯이 글씨는 크고 줄 간격은 넓고 글자들이 ‘공간을 넓게 쓰는 플레이’를 하고 있다.
물리적인 밀도 뿐 아니라 내용의 밀도도 낮다. 술술 읽히는 것은 그 때문이며, 다 읽고 나서도 ‘대작을 읽었다’는 뿌듯함을 주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저자는 중국계 미국인이다. 중국인의 ‘혈통’임과 미국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한다. 하버드대 로스쿨을 나와 법학교수를 하고 있는 미국인 이민자 2세로서 저자는 미국이라는 ‘현대의 제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한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에서부터 로마, 중국(당), 몽골, 스페인, 네덜란드, 오스만, 명(明), 무굴, 영국에 이르는 과거의 제국들을 살펴보며 그들이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동력과 쇠망하게 된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미국에 시사하는 바를 살핀다.

저자는 ‘세계적인 패권국가로 취급할 나라 혹은 제국’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그 나라의 권력은 동시대의 경쟁국들이 장악한 권력을 분명히 능가해야 한다. 또한 그 나라는 지구상의 그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경제력, 혹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한 그 나라는 단순히 특정한 한 지방 혹은 지역에서의 우위라는 테두리를 넘어서서 지구상의 방대한 구역과 방대한 인구에 대해서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그런 제국들이 커나갈 수 있었던 핵심적인 요인은 ‘관용’이었다는 것이 책의 요지다. 여기서의 관용은 현대의 인도주의적 관용 개념하고는 다르다. 저자가 최초의 패권국가로 꼽은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이 인도주의자, 인종평등주의자였겠는가. 그들은 전략적으로 인종, 종교, 혹은 민족에 상관 없이 관용적인 모습을 보였다. 인재를 등용하고 돈 벌 길을 열어 주어 그들의 두뇌를 제국의 두뇌로 삼은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관용은 이런 거다. 차별 없는 너그러움이 아니라, 두뇌와 기술을 쓸 수 있게 마당을 열어주는 것. 그렇게 해서 피정복민들을 제국의 동력으로 만든 것이 성공요인이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관용은 인종, 종교, 민족, 언어 등 여러 면에서 이질적인 개인이나 집단이 그 사회에 참여하고 공존하면서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자유를 일컫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관용에는 존중이 포함되지 않는다. (중략) 요컨대 이 책의 핵심적인 개념은 ‘상대적인’ 관용이다.”

사람들(두뇌와 기술)은 상대적으로 관용적인 나라로 흘러들어간다. 관용이 없어져 지배 분파의 배타주의가 강해지고 이민족을 핍박하게 되는 순간 제국은 쇠락의 길로 들어선다.

케이스스터디라고 하는데, 과거의 제국들로 꼽은 나라가 8곳이나 된다. 사례는 많지만 깊지는 않다. 역사학자가 아닌 사람이 남들의 역사연구를 바탕으로 논지를 펼치다보니 새로운 사례들이나 학술적으로 눈길을 끄는 내용보다는 ‘다 알려진 내용’을 중심으로 주장을 전개했다. 니얼 퍼거슨의 <COLOSSUS>나 세계체제를 다룬 책들에서 흔히 보던 내용을 논거로 들어서, 읽는 동안 새로운 디테일을 습득하는 잔 재미는 없었다. 그래서 동어반복이 심하다고 느끼게 되고, 그런 부분들을 슥슥 지나가다보니 책장이 마구 넘어갔다.

충분히 새겨들을만한 논지이긴 한데, 가장 중요한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제국이 관용을 잃어 쇠락하는 것인가, 아니면 제국이 쇠락해지다보니 관용이 없어지고 배타적이 되는 것인가?
저자가 예로 든 몽골의 경우 지배자들의 내분과 능력부족 등 여러 요인들 때문에 제국이 흔들리게 됐다. 그러자 “중국에 거주하는 쿠빌라이 칸의 자손들은 자신들이 ‘지나치게 중국화’되어 허약해졌다는 판단을 내렸다.” 사례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도 관용을 잃는 것과 제국이 쇠락하는 것은 선후관계가 뒤죽박죽 섞여 있는 문제일 것이다. 즉 관용이 사라져 제국이 망하는 측면도 있고, 제국이 쇠락하다보니 반작용으로 배타적이 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요새는 ‘미국은 제국이며 제국이어야 한다’는, 이 책과 비슷한 논지의 책들이 눈에 많이 보인다. 이 책의 저자도 재수 없는 니얼 퍼거슨 류하고 맥락을 같이 한다. 미국을 사랑하는 이민2세의 충정이라고만 해두자. 9.11 이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배타적이 되고, 이민자들에게 문 닫아걸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러니 현대의 제국인 미국의 ‘관용 상실’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미국이 관용을 잃으면 안 된다고, 온 세상에 더 문을 열어젖히고 세계 모든 곳에서 몰려드는 이민자들을 받아 예전처럼 미국이 두뇌로 삼으라고 말한다.

내가 궁금한 것은, 첫째 미국이 지난 10년간 보여준 배타적인 태도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걸은 것인가, 혹은 그 배타적인 모습이 ‘이미 쇠락이 시작된 데에서’ 나온 반작용인가 하는 것이다.
미국 제국의 쇠망을 말하는 이들은 많다. 대테러전 이전부터 제국의 주기(週期)를 들어 쇠망을 우려한 논자들은 빼고, 대테러전 이후 미국의 옹고집을 보며 쇠락을 경고한 사람들도 많다. 즉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작태만을 놓고 걱정한 사람들이라면 오바마가 일방주의를 다자주의로 돌리겠다고 최소한 말로나마 선언하는 것을 보면서 미국이 제국의 지위를 유지할 의지와 능력과 유연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앞날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으려면, 미국이 아닌 유라시아 변두리 땅에서 책을 읽는 사람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있으려면 앞날을 예견케 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할 터인데 말이다.

두 번째로, 한국은 어떤가 하는 점이다. 한국도 ‘미국의 관용’의 덕을 보았고, 미국의 관용에 기대어 우러르고 혜택 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이들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얼마나 익숙한가.

제국이 되기 위해서 관용을 키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전략적이든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관용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공동체가 성장하게 만든다. 제국 뿐 아니라 모든 사회는 관용(다자주의, 개방주의)이라는 토대에서 자란다. 제국의 관용만 이야기한 이 책을 읽으면서 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제국만이 관용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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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left 2010-01-31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저자의 전작인 [불타는 세계]를 읽었었는데요.. 뭐랄까, 순진한건지 아니면 스스로 미국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건지,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미국적인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볼까 싶더군요. "우리는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데 왜 사람들은 미국을 싫어할까", "또 미국이 그렇게 싫다면서 왜 다들 미국으로 이민을 못 와서 안달일까" 이런 걸로 고민하는걸 보고 있으려니 참.. -_-

딸기야놀러가자 2010-01-31 23:52   좋아요 0 | URL
이민자로서, 그런 모종의 '강박관념'을 느끼나봐요. 저도 약간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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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송빠르고, 디자인 이쁩니다. 근데 이거 샀더니 자꾸 넷북이 사고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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