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ond Chance: Three Presidents and the Crisis of American Superpower (Paperback) - Three Presidents and the Crisis of American Superpower
Brzezinski, Zbigniew / Basic Books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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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체스판>, <제국의 선택>이 미국의 세계전략을 포괄적으로 다룬 것들임에 반해 이 책은 포인트를 좀 달리하고 있다. 조지 H 부시-빌 클린턴-조지 W 부시라는 세 명의 ‘냉전 이후 미국 지도자’들을 꼭꼭 씹으면서 대상으로 공과를 평가하고, 앞으로 미국의 대외정책은 어디에 중점을 둬야할지를 짚어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책은 작년에 출간됐는데, 미국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읽을 만 하다. 브레진스키 특유의 ‘큰 틀’에다가, 제법 재미난 인물평까지 담겨 있으니. 저자는 부시1과 클린턴과 부시2를 각각 ‘글로벌 리더 1, 2, 3’이라고 부르는데, 뭐 거부감 가지고 볼 필요는 없다. 냉전 끝난 뒤 세계를 쥐락펴락했던 인물들인 것은 분명하니까.

재미난 것은 부시1에 대한 높은 평가였다. 하와이 동서센터에 있는 모씨와 얘기하다가 의외로 부시1의 외교적 소양을 높이 평가하는 것을 보고 놀랐었는데(이 사람은 오바마 골수 지지자다), 미국 외교가에선 이것이 중평인지도 모르겠다. 민주당 외교안보 원로인 브레진스키도 부시1을 높게 치는 것을 보면.
는, 부시1은 냉전 끝난 뒤 복잡다단한 세상에 ‘폭발’하지 않도록 관리자 노릇을 충실히 잘 했다는 것이다. 책에는 부시1 시절 일어났던 국제정치의 주요 사건들이 쭉 나열돼 있는데, 이 목록들만 봐도 정말 어질어질하다. 시대가 하수상했던지라.

나는 부시1 이라고 하면 걸프전 밖에는 기억이 안 난다. 부시1은 걸프전을 통해 미국이 세계의 주인임을 각인시켰다, 라고 브레진스키는 말한다. 그게 사실인지도 모르겠다(그러나 이 전쟁을 통해 부시1은 미국이 제멋대로 깡패라는 사실도 세계에 각인시켰다). 부시1은 과도기를 관리하는 역할을 잘 해냈지만, 그에겐 비전이 없었다. 그게 가장 큰 실패요인이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클린턴은 집권 1기 때에는 외교에 아무 관심이 없었고, 2기 때에는 ‘세계화’라는 말로 다 해 먹었다. 신문쟁이들 표현을 빌자면 ‘제목 장사’에서는 클린턴을 따라갈 자가 없었던 셈이다. 이것은 대단한 정치감각이다! 그러나 또한 공허하다. 글로벌리더3, 부시2의 경우는- 별로 요약·정리할 필요도 없겠다. 이자가 왜 십자군의 사도가 되어 지구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었는지가 불가사의할 뿐이다.


세 명의 지도자 밑에서 백악관 외교안보 정책 결정과정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설명한 부분은 아주 재미있었다. 요약하면 부시1은 워낙 외교 전문가였기 때문에 대통령이 외교안보라인에 좌~악 지시를 내리는 스타일이었다. 백악관 외교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 국방장관은 주로 대통령 뜻에 따랐다. 반면 클린턴은 외교엔 무지했기 때문에 수하들에게 맡겼다. “아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백악관 외교안보회의를 들여다봤으면 누가 대통령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클린턴 때에는 외교안보라인의 목소리가 컸었다.

부시2는 집권 이듬해에 9·11이 일어나자 머리가 확 돌아버렸는지(물론 이것은 브레진스키의 표현은 아니다) 갑자기 도덕주의(지랄염병) 확신범이 되어 내치보다 외치에 집중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부시2 집권 기간 외교정책 주도권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했다. 능구렁이 체니와 럼즈펠드는 목소리가 컸고, 파월과 라이스는 제 몫을 못 했다.

“글로벌리더1은 경험 많고 능숙한 외교관이었지만, 역사의 전환기를 맞아 과감히 비전을 보여주지를 못했다. 글로벌리더2는 명민하고 미래지향적이었으나 미국의 힘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전략적 일관성이 부족했다. 글로벌리더3은 내면에서 우러나온 강력한 본능(strong gut instincts)을 갖고 있었지만 세계가 얼마나 복잡한지를 몰랐고 쉽게 도그마에 빠졌다.”


그리하여, 브레진스키가 매긴 세 지도자 최종 성적표는:



(부시2, 너는 F학점이라구!)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 미국이 무얼 어떻게 해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겠다. 브레진스키는 미국의 파워를 영원무궁토록 유지하기 위해(물론 이런 표현은 안 쓴다, 왜냐하면 이 자는 현실주의자이니까) 다음번 대통령이 뭘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서도 충고를 잊지 않는다. 미국을 위해서, 라고 하지만 들을만한 충고다. 미국이 하는 짓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니 남의 일이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당장 이라크 정책에서(뒤에 보론 격으로 이라크 정책 관련 제언이 실려 있다), 미국은 공개적으로, 명확하게, 이른 시일 안에 철군할 것임을 명시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며칠 전 미국과 이라크 정부 간 ‘철군 협상’이 타결됐다. 구체적인 시일을 못 박지는 않았지만 2011년까지는 나가도록 한 것 같다. 두 번째, 이라크 철군을 비롯한 결정은 이라크 지도부와 합의하에 이뤄져야 하며 이를 만방에 알려야 한다는 것. 브레진스키는 이라크 전쟁이 미국을 얼마나 큰 불신에 빠뜨렸는지를 아는 것 같다.

위기를 잘 헤쳐, 미국이 글로벌 리더십으로 지구 지배를 다시 굳힐 수 있게 할 ‘두 번째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글로벌리더 4’가 버락 오바마가 될지, 존 매케인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들 중 누가 되든, 군림할 기회 말고 공존할 기회를 찾아줬으면 하는 것이 62억명의 바램인데... 미국 넘들도 그걸 알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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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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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달동네는 사라졌나? 아직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달동네를 지나쳐본지 오래된 것을 보면, 이젠 달동네는 서울의 풍경에서 거의 지워진 것 같다. 그 많던 달동네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모두 ‘개발’되고 ‘발전’ 해서 중산층이 되어 아파트로 이사 갔을까.

이렇게 쓰고 나니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88올림픽을 앞두고 이뤄진 달동네 제거작전, 서초동 꽃동네 비닐하우스촌을, 시대의 변화를 무색케 하던 봉천동 달동네, 봉천동 야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대학 후배의 얼굴(1970년대가 아니고 1990년대였다), 취재 차 찾아갔던 가리봉동의 쪽방들(세기의 전환을 코앞에 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인왕산 능선 밑 어지럽게 빨래가 널려있던 판잣집들(사라진 줄 알았던 이곳의 판잣집 동네를 다시 본 것은 2005년이었다).

사실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한국의 달동네들은 그나마 양호하다. 난민들의 거주가 수십년 단위로 길어지면서 사실상 거대한 슬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린 아프리카의 난민촌들에 가본 적 있다. 나는 케냐 나이로비 주변의 악명 높은 슬럼가 시장(그 유명한 키베라 슬럼은 가보지 못했지만)에도 가보았다. 민병대들의 저항의 무대가 된 바그다드의 사드르 시티에서는 골목 초입을 기웃거리다가 ‘무서워서’ 도망치듯 빠져나온 경험도 있다.

풍경들은 서로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후배가 보여준 사진들 속 방글라데시의 판잣집들과 내 머리 속 어릴 적 우리 동네, 보르네오섬의 강변 마을과 외신 사진에서 본 뭄바이의 다라비 슬럼 같은 곳들은 거개는 비슷한 이미지다. 도시와 가난의 결합, 슬럼.

저자는 오늘날 제3세계 도시들의 ‘전형적 풍경’이 돼버리다시피 한 대규모 슬럼들이 “전 지구적 정치 위기, 즉 1970년대 후반의 채무위기와 뒤이은 1980년대 국제통화기금 IMF 주도의 제3세계 경제 구조조정의 유산”이라고 지적한다. 산업이 성장하면서 농촌 주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밀려들어 노동자가 되고 도시 슬럼을 형성하는 방식의 ‘선진국형 슬럼화’ 현상과는 분명히 다른 현상이라는 것. 오늘날 제3세계 슬럼의 주민들은 농촌에서 얻지 못할 무언가를 얻기 위해 도시로 온 것이라기보다는, 농촌에서의 삶의 기반을 잃은 탓에 등떼밀려 도시로 나오게 된 사람들이라는 얘기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슬럼의 확대는 필연적이며, 세계의 도시들이 늘어나고 규모가 커지는 것과 슬럼의 확대는 동전의 양면이 된다. 아니, 메가시티의 출현은 그 자체로 슬럼의 확대 덕에 가능한 것이다. 지난 2월 “올해 전세계 인구 중 도시 거주자가 절반을 넘어설 것”이라는 보고서를 낸 바 있다. 유엔은 2050년이 되면 세계 인구의 70%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도시 거주민들의 과반수는 슬럼에 사는 빈민들일 것이다.

“미래의 도시는 이전 세대 도시계획 전문가들이 상상했던 것처럼 유리와 강철로 이루어진 도시가 아니라, 손으로 찍어낸 벽돌, 지푸라기, 재활용 플라스틱, 시멘트 덩어리, 나뭇조각 등으로 지어진 도시다. 21세기의 도시 세계는 공해와 배설물과 부패로 둘러싸여 덕지덕지 들러붙은 슬럼 도시일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슬럼에 살고 있는 10억 주민은 9000년 전 도시생활 여명기에 세워진 아나톨리아 정착촌 차탈회위크의 튼튼한 진흙집 잔해를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돌아볼 것이다.” (33쪽)

어긋난 약속들, 도둑맞은 꿈들. 무단점유(스쿼팅)와 게이티드 커뮤니티. 이 둘은 글로벌 경제에 통합된 지구촌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주거형태의 두 극단으로 나타난다. 보르네오의 판잣집과 자카르타의 주상복합 아파트들, 요하네스버그 외곽의 거대한 빈민촌과 철조망 처진 블록들. 요즘 한국에서도 ‘타운하우스’가 유행한다던데. 지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가장 먼저 읽었던 <조류독감>의 경우 그다지 ‘일류 저술’은 아니었음에도, 아무튼 시각과 소재가 재미나고 요즘 시류에 맞을뿐더러 (시류를 다루는 일을 하는) 나의 관심사와도 당연히 맞아떨어지는 탓에 마이크 데이비스의 책을 자꾸 읽게 된다. 굳이 같은 저자의 여러 책을 놓고 품평을 하자면, <조류독감>과 <빈곤의 역사><슬럼> 중에서는 역시 <조류독감>이 가장 떨어지는 편이었던 듯. <빈곤의 역사>는 역사학자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연관된 사건을 밀도 있게 추적한 것이었다. <슬럼>은 중언부언이 좀 있고 전문성이 떨어지지만 슬럼이라는 테마에 맞춰 도시 빈곤/주거 문제/정책적 대안/신자유주의 기구들의 훼방 등등을 종합적으로 살피고 있다. 글로벌화 시대의 빈곤문제를 핵심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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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정병선 옮김 / 이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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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거창하게 붙였는데, 실제로는 원제 그대로 ‘빅토리아 후기 즉 19세기 말 엘니뇨로 인해 벌어진 범지구적 차원의 기근’을 집중 조명한 책. 따라서 ‘빈곤의 역사’라고까지 할 것은 없고, ‘빅토리아 후기 기근으로 본 환경재앙’ 정도로 읽어주면 될 것 같다.

재미있었다. 중국, 인도, 브라질을 중심으로 엘니뇨와 대규모 환경파괴, 식민통치의 범죄적 양상과 그로 인한 19세기 말 초유의 대기근을 살피고 있는데, 저자 스스로 말했듯 ‘기근의 정치생태학’이라고 보면 된다. 요는, 가혹한 식민통치(중국의 경우 완전한 식민지는 아니었지만 서구의 압박 속에 제국이 제 기능을 잃었다는 점에서 맥락은 같다고 본다) 속에 우리가 오늘날 ‘제3세계’ 바꿔 말하면 ‘못 사는 나라들’이라고 부르는 지역들이 무대책으로 글로벌 경제구조에 통합됐다는 것이다.

착취당하다 보니 인프라가 무너지고, 토양 침식 등 환경재앙의 요인들이 축적되고, 드디어 강력한 엘니뇨가 들이닥치자 수백만, 수천만이 굶어죽는 일이 일어났다. 기근은 어느 시대에건 있었다지만 1870~1900년의 대지진은 규모 면에서 엄청났다, 하지만 기근은 정치경제적 요인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단순히 식량이 부족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식량은 부족하지 않았는데 식민 모국에 이것저것 다 빼앗기다 보니 식량 수급이 잘 안 돼서 그런 일이 생겼다는 것.

중요한 점이라고 한다면, 당시의 대기근이 결국 그 지역들의 정치-경제-인구구조를 모두 왜곡시켰고, 결국 그 나라들을 오늘날의 제3세계로 만들었다는 것. 저자는 중국 인도 브라질을 주로 분석했는데 이 나라들은 오늘날 브릭스(BRICs)니 뭐니 해서 ‘신흥 경제대국’들로 각광받는 나라들이다. 이 세 나라야 ‘운 좋게도’ 땅덩이가 크고 가진 자산이 많아서 다시 기가 살아나고 있는지 모르지만, 세 나라가 아닌 중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의 제3세계 빈국들을 놓고 보면 저자의 통찰력을 부인할 수 없다.

책은 또 당시의 기근이 식민지로 전락한 지역들에서 ‘천년왕국 운동’과 같이 보편적인 양상을 띠는 저항운동을 촉발했던 것, 남아프리카에서 줄루 왕국이 식민세력에 맞서 이긴 뒤에 기근 때문에 스러지면서 네덜란드계(보어인)가 어부지리 격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 아프리카에서 굶주림으로 인한 인구 이동이 벌어지면서 촌락들이 붕괴되고 서방에 손쉽게 노예로 잡혀갈 수 있었던 것 등등, 당시에는 예측할 수 없었지만 후대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친 기근의 파급효과들을 조명하는 데에도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다만, 첫머리에서부터 야심만만하게 ‘기근의 연결고리’로 지목한 엔소(엘니뇨 남방진동)의 역학 관계에 대해서는 오히려 이렇다할 결론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는 저자의 문제라기보다는 엘니뇨의 작용이 워낙 불가측적인데다가 인위적 지구온난화와 엘니뇨의 관계에 대해 학계에서도 이견이 많기 때문이겠지만.

결국 문제는 굶주림이다. 빅토리아 후기에서 한 세기가 지나갔어도 기근은 여전히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의 목숨을 죄고 있다. 지난세기 후반 이후의 기근은 거의 다 아프리카에서 일어났다 하더라도, 우리에겐 지금 당장 주린 배를 안고 죽어가는 이북의 동포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긴급구호의 대상에서도 제외되곤 하는, 엄격한 의미의 기근(다수의 아사자가 발생하는)이 아닌 아프리카 곳곳의 ‘만성적 대규모 영양실조’ 현상도 심각하다. 기근을 어찌 할까. 기근의 해법은 정치에 있다는데.


 ▷ 알렉산더 드 발은 이렇게 쓰고 있다. “어떤 사태를 누가 ‘기근’이라고 규정하느냐는, 사회 내부 및 사회들 사이의 권력관계 문제다.” 그는 대규모 기아 사태가 기근 정의의 필요조건이라는 맬서스주의적 관념을 거부한다. 굶주림, 빈곤, 사회 붕괴 등 더 광범위한 의미의 스펙트럼을 지지하는 것이다. 기근에 대한 아프리카인들의 전통적 이해방식이 바로 이렇다. 이들은 영양실조와 기근, 가난과 기아의 말뜻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근으로 공인된 곳에는 원조를 쏟아 부으면서 전 세계 유아사망률의 절반을 차지하는 만성 영양실조는 냉담하게 무시해버리는 부국들의 윤리적 계산법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 문제는 가난한 농민 수천만 명이 끔찍하게 죽었다는 게 아니라, 19세기 경제사에 대한 전통적 지식과 상당히 모순되는 이유와 방식으로 그들이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노동력과 생산물이 런던을 중심으로 한 세계경제에 징발되던 특정 시기(1870~1914년)에 열대 지방의 인류가 겪어야만 했던 운명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근대 세계체제’의 외부가 아니라, 바로 그 근대 세계의 경제와 정치 구조에 강제로 통합당하는 과정에서 수백만명이 죽었다. 그들은 자유 경쟁 자본주의의 황금시대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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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전 지구적 통합의 역사
나얀 찬다 지음, 유인선 옮김 / 모티브북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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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해 주고픈 책이다. 이렇게 열심히 썼다는 자체만으로. 책 겉모양도 훌륭하고, 이 정도면 ‘고전’ 급은 아니어도 이것저것 묶어놓은(‘짜깁기’라고 하면 좀 비하하는 감이 있으니까 이런 표현으로 바꾼다) 책으로는 꽤 괜찮다.
목차를 보면 알수 있겠지만, 제목 그대로 ‘세계화, 전지구적 통합의 역사’를 한눈에 훑어보려는 사람에겐 훌륭한 1차 교과서가 될 수 있겠다. 아니, ‘2차 도서’들을 안 읽고 그냥 이 한권으로 세계화의 기나긴 역사를 정리하고 만족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더욱 더 요긴할 것 같다(그러고 보니 요즘엔 세계화를 근대 이전으로 소급해서 바라보는 시각이 유행인 것 같다).


1차, 2차 도서 운운한 것은 이 책이 말 그대로 ‘정리요약본’이기 때문이다. 책은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DNA의 이주경로를 살피고(브라이언 사이키스의 <이브의 일곱 딸들>과 루이 카발리-스포르차의 <유전자 사람 그리고 언어>) 중세 유라시아의 무역상들의 행로와 부(富)의 이동을 개괄한 뒤(안드레 군더 프랑크 <리오리엔트>) ‘인도의 콜센터’로 대표되는 세계화의 현장(토머스 프리드먼 <세계는 평평하다>)을 짚어간다.
중간 중간 세균 이야기(윌리엄 맥닐 <전염병의 세계사>와 재러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도 나오고 무기 이야기도 나오고, 사회문화적 측면도 간간이 짚어준다. 읽기 지루하지도 않고 분량도 ‘적당히 방대하면서 적당히 요약본인’ 수준이니까 참 좋다.


그런데 굳이 저렇게 내가 괄호 열고 내가 읽은 책들 이름을 넣어가며 잘난 척을 한 것은, 저 괄호 속의 책을 읽은 사람들에겐 이 책이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기 언급한 책들을 읽고나서는, 그 뒤에 읽은 책들 상당수가 재미 없어져버렸다. 돌고 도는 참고문헌의 목록이 이젠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 책은 잘 정리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내겐 별로 뼈다귀를 건질 게 없는 책이 돼버렸다. 내용이 참신하면 뼈다귀를 건지고 사례가 방대하면 살붙이들을 건지는데, 이 책은 정리요약본이니 반찬거리도 많이 건지진 못했다. 책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냥 나는 그랬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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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나 강의 다리 대산세계문학총서 39
이보 안드리치 지음, 김지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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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작가가 그려낸 조국의 풍경.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책은 대작(大作)이다. 옛 투르크 제국의 이교도 전사 예니체리들의 징집에서부터 드리나강의 강물은 눈물과 뒤섞인다. 투르크 제국의 위인이 된 인물의 애향심 덕에 세워진 웅장한 다리는 건설에서부터 피와 땀과 눈물과 잔혹함의 혼합물이었다.

주인공은 드리나강의 다리다. 책은 다리를 중심으로 명멸해가는 제국들과 시대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도 지속되는 민중들의 삶을 그린다. 고난의 행렬이라 할만한 그 땅의 역사를 마치 어떤 드라마도 없다는 듯, 역사의 잔인함과 연속성을 비웃기라도 하듯 너무나 담담하게 묘사하는 까닭에 책 읽는 동안 지루하고 허무했다. 그리고 다 읽고 나서는 마음이 무거워지고, 가슴 속에 무언가가 들어차는 기분. 대작이 주는 효과다. 보스니아 땅의 역사는 어쩌면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어려운 시대 고난의 시대를 살아오지도 않았는데, 드리나 강변 소도시 비셰그라드 사람들의 신산한 삶이 눈 앞에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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