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리나 강의 다리 대산세계문학총서 39
이보 안드리치 지음, 김지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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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작가가 그려낸 조국의 풍경.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책은 대작(大作)이다. 옛 투르크 제국의 이교도 전사 예니체리들의 징집에서부터 드리나강의 강물은 눈물과 뒤섞인다. 투르크 제국의 위인이 된 인물의 애향심 덕에 세워진 웅장한 다리는 건설에서부터 피와 땀과 눈물과 잔혹함의 혼합물이었다.

주인공은 드리나강의 다리다. 책은 다리를 중심으로 명멸해가는 제국들과 시대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도 지속되는 민중들의 삶을 그린다. 고난의 행렬이라 할만한 그 땅의 역사를 마치 어떤 드라마도 없다는 듯, 역사의 잔인함과 연속성을 비웃기라도 하듯 너무나 담담하게 묘사하는 까닭에 책 읽는 동안 지루하고 허무했다. 그리고 다 읽고 나서는 마음이 무거워지고, 가슴 속에 무언가가 들어차는 기분. 대작이 주는 효과다. 보스니아 땅의 역사는 어쩌면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어려운 시대 고난의 시대를 살아오지도 않았는데, 드리나 강변 소도시 비셰그라드 사람들의 신산한 삶이 눈 앞에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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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류독감 - 전염병의 사회적 생산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정병선 옮김 / 돌베개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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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먹거리 국면’이 곧 들이닥칠 거라는 사실도 모른 채 출장 도중 읽을 책 중 하나로 이걸 골라갔었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책은 국내에도 여럿 나와 있지만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재미난 주제를 잘 잡는 것 같다. AI란 것이 지금 유행하는 H5N1 바이러스형 뿐 아니라 여러 종류가 있고 또 역사도 오래됐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들여다보는 데에는 도움이 됐다. H5N1형이 퍼지는 과정에 대해서도 정리가 잘 돼있다.

출판사 쪽이 제법 머리가 좋은 모양이다. ‘조류독감’이라고만 하면 안 팔릴 것이라 생각했는지, ‘전염병의 사회적 생산’이라는 말을 제목에 덧붙였다. 하지만 원제는 ‘우리 문앞의 괴물: 조류독감의 지구적 위협’ 정도로만 돼있다. 한국어판 부제는 약간의 과대포장이라고 봐야 할듯. AI와 가금류 대량생산의 메커니즘이 곧바로 연결되는 것 같지는 않다. 너무 포괄적이고 비약적인 연결이랄까. 광우병과 대량생산의 연결고리와 달리, AI와 대량생산의 연결고리는 약하기 때문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식으로 친다면 ‘모든 질병은 세계화의 산물’이라는 극히 일반적인(그래서 별반 도움도 안 되는) 얘기가 되고 말 것 같다.

실제 본문에는 AI의 확산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그리 상세한 설명이 나와 있지 않다. 오히려 “미국은 AI 백신이 너무너무너무너무 부족하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지라, 뒷부분 태반은 읽으나마나 했던 셈이 됐다. 그리고 AI의 위험성에 대해선 과장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싶다. AI로 지구상 10억 이상의 인구가 죽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 근거는 ‘외삽법으로 추산했을 때’라고만 되어있으니 이것은 숫자 장난이 되기 쉽다.

너무 드라마틱하게 쓰려고 애쓴 탓에 오히려 못 미더워 보인 구석이 있지만 어쨌든 재미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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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zanga62 2008-07-16 0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서 조류독감 발병 매커니즘을 면밀히 드러내지는 못했더라도
철새들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는 조류독감이 대량밀집 사육되어 면역력이 떨어지고,
유전자가 획일화된 축산가금류에서 발병확산되는 것은 맞는 것 아닌지요..

백신에 초점을 맞춘 것은 저도 좀 그렇습니다..

딸기 2008-07-16 20:56   좋아요 0 | URL
저도 동의합니다. ^^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우석훈 지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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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국 출장 가기 전 FTA에 대해 뭐라도 좀 알고 가야겠다 싶어서 부랴부랴 책꽂이를 뒤져 골라든 책이 이해영 교수 <낯선 식민지, 한미 FTA>와 이 책이었다. 국내에서 FTA 반대의 이론적 근거가 된 것이 아마도 쌍을 이루는 이 두 책이 아닐까 싶다. ‘낯선 식민지’의 경우 구국의 일념과도 같은 충심은 느껴지지만 좀 감정적인데다 ‘나라 망한다’로 일관된 주장이어서 다소 설득력이 더 떨어졌다. 우석훈씨 책은 조목조목 정리는 잘 돼 있는데, 독설도 좋지만 너무 비비꼬아서 ‘나라 망한다면서 말장난 하나’ 싶은 반감도 적잖이 들었다.

FTA로 나라가 망할지, 나라가 완존 도약을 해 선진국(참 이노무 선진국 주문은 수십년을 울궈먹어도 지치지들 않는지)이 될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는 있어야 하고, ‘최악의 경우’ 어떻게 될 것인지 비관적인 예측도 반드시 해보기는 해야한다. 그런 면에서 노무현 정부나 이메가 정부나 그놈이 그놈이란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지만...

암튼 이 책은 바로 그 ‘최악의 경우’에 대한 예측을 하고 있다. 이 분 말씀하는 대로 “꼭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는 생각 안 한다. 하지만 귀담아 들어야 하는 경고 정도로 생각하고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 이해영 교수 책은 협상의 세세한 항목들을 설명하면서 제도적 분석을 하고 있는데, 거기 비하면 이 책은 좀더 개괄적으로 협상이 추후 한국경제에 미칠 영향을 내다본다. 글로벌한 차원의 분석이 좀더 많이 들어가 있다고 할까.

노동력의 ‘인적 이전’의 중요성을 얘기한 부분 등 잘 몰랐거나 생각해보지 못했던 내용들을 짚어주어, 재미도 있고 도움도 많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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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만원 이하 소득 가정은 이민 가라

한미 FTA가 국민경제에 미치는 충격을 생각해 본다면, 최소한 4인 가족 기준으로 연소득 6000만원 이하의 국민들에게 한국 땅은 ‘지옥’이 된다.


▷EU 방식과 나프타 방식의 결정적 차이

EU 방식과 나프타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노동력의 국가간 이전을 포함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나”이다. EU와는 달리 ‘노동력의 국가간 이전’을 나프타에서는 제외하고 있다. 북미지역에서 진행된 경제통합은 상품과 자본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였지만,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까지 허용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이런 ‘작은 차이’가 두 가지 통합방식을 각각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화하게 만들었다. EU의 경우는 체코와 헝가리 등 구 동구권 국가들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중요한 논란거리가 되었고, 최근에는 터키와 같은 ‘변방의 유럽국가’를 받아들이면서 물질과 인력 사이에 조화를 만드는 것이 본질적인 논의사항이 된 것이다.

‘인적 이동의 자유’라는 요소를 순전히 조직 진화론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강한 국가가 약한 국가를 억누르는 방식으로 협상을 진행시키고, 또 통합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약한 나라를 무력화시키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즉 미리 의도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일종의 안전장치로 작동하는 셈이다. 만약 동구 국가 시민들이 파리나 베를린으로 대거 이동해서 끊임없이 노동시장에 저가 노동력으로 공급된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 것인가? 통합의 경제적 사회적 근간이 흔들리게 된다는 점을 금방 상상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유럽 국가에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가라도 통합을 통해 사회가 붕괴되거나 기본 체제가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여러 가지 배려를 하고 지원책을 만들게 된다. ‘착취’ 혹은 ‘기생’이 아니라 ‘공생’ 관계로 경제협력을 전환시키는 장치가 바로 ‘노동력의 이동’이다.

▷차라리 ‘완전한 경제통합’이 낫다

그런데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협정에는 ‘인적 이동’을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경제적 이득만을 챙겨가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된다. 미국은 국경에 새로운 장벽을 치는 것, 혹은 군대를 투입시키는 것만으로 멕시코 경제의 붕괴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떠안지 않고 안전하게 이익만 챙길 수 있다.

노동력의 이전을 제외하는 ‘약한 수준의 통합’이라는 장치 하나가, 실제로 상품과 자본 관계에서는 충분한 이득을 취하면서도 노동력이라는 부담을 떠안지 않는, 쉽게 말해 ‘일방적으로 이득을 보는’ 비대칭적 관계를 형성한 셈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의 극히 일부에서 주장하는 바, ‘어설프게 FTA를 추진할 것이라면 차라리 미국의 52번째 주가 되는 협상을 추진하라’는 주장이 게임이론이라는 시각에서는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한미 FTA에 하나의 옵션, ‘노동자의 자유로운 취업을 보장’하는 장치를 집어넣는다면, 역설적이지만 지나치게 강력한 한미 FTA를 통해 한국 경제와 주권이 회북 불가능하게 붕괴되는 것을 제어하는 안전판이 될 수 있다.

▷APEC 망친 노무현

APEC은 개도국을 포함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국가들이 참여하는 아주 느슨한 공동체였다. 미국은 아시아라는 거대한 경제권역에 속한 국가들끼리 조기 개방에 관한 논의를 힘있게 진행해주길 기대했지만, 중국 인도 말레이시아 등이 ‘눈 시퍼렇게 뜨고’ 참여하는 상황이라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큰 돈은 아니지만 일본이 여러 분야에서 자금과 기술을 제공하고 역내 국가들이 상호 지원하는 ‘아주 즐거운 계모임’으로 APEC은 부드럽게 발전하고 있었다.

이 상호공동체를 다시 ‘차가운 세계화’의 반열로 돌려놓은 것은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제주선언’이었다. 이 ‘역사에 남을 바보 같은 선언’ 이후로 APEC은 윈-윈 하는 협력체에서 살벌한 검투장으로 변질됐다.

▷무역협정을 다루는 한미 의회의 시스템 차이

원칙적으로 미국은 상원과 하원이라는 두 개의 국회가 동등한 권한을 보유한 채 별도로 작동한다. 이런 종류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은 주로 상원이다. 수많은 외교적 문제 뿐 아니라 협상과정에 참여하는 상원은 특별법을 제정하거나 청문회 절차를 만들고 사전에 권고안을 채택하는 등, 국회가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장치들을 다양하게 고안하면서 적절하게 개입하고 협상의 한 주체로 실질적으로 협상에 참여한다.

상원이 이렇게 국회의원 개개인이 스스로 헌법기관처럼 움직이는 한편 하원의원들은 연대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생산이 중요한 지역의 하원의원들 혹은 섬유업과 관련된 지역의 의원들이 연게해서 특정 주에 일정한 내부 입법을 해서 미리 대비하라는 권고안을 채택하는 등 협상과정에 간접적으로 참여한다.

시스템으로만 비교하면 한국 국회도 이런 일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통상문제에 대한 영웅적 활동의 전통이 약해서 그런지 한국 국회는 잘 움직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외교부의 폭주 과정에서 정부가 국회의 운신의 폭이 좁다는 점을 악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게 실제로 정치문제로 직접 폭발한 경우는 2005년7월 쌀 협상에서의 이면계약에 관한 문제였다.

다른 종류의 이면 계약을 정부가 했는지 안 했는지 국회가 알 수가 없다면 ‘조인’ 절차와 관련된 입법부의 견제기능이라는 것은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말로 이런 일이 있다면 을사늑약 같은 일이 발생할 때 또 멍청히 당하게 된다.

정부가 국회를 속이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면 사실상 순순히 속아주는 것 외에 방법이 별로 없다. 청문회라는 장치가 있기는 하지만 그걸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몇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국회 왕따 만들기

핵심은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다’에서 국회가 ‘외부’에 해당하느냐라는 문제이다. ‘담당관’이라는 관점에서는 국회의원과 국회 사무국의 통외통위 담당관들은 모두 정부 직제절차에서 담당관에 해당한다. 외교부의 폭주는 원래 국회가 막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국회 비준권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이다. 따라서 협상문도 공개하지 않는 상황은 군사행위로 비유하자면 친위쿠데타에 해당한다. 자국 국회에 “당신들은 외부”라면서 협상안을 감추는 나라가 대한민국 외에 또 존재할까.

더 이상한 것은 비공개의 이유가 ‘미국의 요구’라는 점이다. 미국은 국회의원은 물론이고 각종 협회를 통해서 주요 업체로부터 체계적인 의견서를 받아들고 본협상에 임한다. 미국의 철강협회나 자동차협회, 심지어는 풍력발전협회와 이들과 협력관계에 있는 로펌의 변호사들이 실질적으로 한국의 협상초안을 집어삼킬 듯 꼼꼼히 살펴보았을 것이다. 심지어 한국에 있는 미국 기업들도 이미 보았을지도 모르는 한국의 초안의 기본 내용들을 한국 국회의원들에게 안 보여주겠다는게 말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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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08-06-14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들어와서 좋은 글...잘 읽고 갑니다...세상 돌아가는 것이..근심...근심...

딸기 2008-06-16 14:42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거짓된 진실 - 계급.인종.젠더를 관통하는 증오의 문화
데릭 젠슨 지음, 이현정 옮김 / 아고라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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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읽는 데에 좀 시간이 걸렸다. 날마다 초등 1학년 꼼꼼이 옆에 앉아 이 책을 보는데, 그림책 읽는 어린 딸과 모녀가 나란히 같이 앉아 독서를 하는 다정한 풍경엔 어울리지 않는 책이다. 가끔씩 꼼꼼이는 엄마가 무슨 책을 읽나 쳐다보면서 “거짓된 진실?”하고 제목을 읽어보는데, 책 내용은 표지에 적혀있는대로 ‘계급·인종·젠더를 관통하는 증오의 문화’를 다룬 것이니,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아이에게 쉽게 설명해줄만한 차원은 아니다.
워낙 엽기적인 스토리를 끔찍해하는 차에 ‘증오의 문화’를 파헤친 책이라 해서 내심 위축된 채로 책장을 펼쳤다. 첫머리부터 심상치는 않았다. 1918년 미국 조지아주 발도스타라는 곳에서 ‘감히 남편을 죽인 백인들을 상대로 복수를 선언했던 겁대가리 없는 흑인 임신부’가 어찌나 처참하게 집단린치로 고문을 당하고 살해됐던지, 세기가 바뀌어 2001년 남미의 콜롬비아 알토나야라는 곳에서 부활절 주말에 ‘암살대’라 불리던 사람들에게 마흔명 남성들과 여성들이 얼마나 끔찍하게 살해당했는지.


“이 책의 짜임새와 방향은 이들의 죽음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 죽음들의 관계를 꿰고 있는 실이 무엇인지 이해하고자 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경제 체제와 증오의 관계는 정확히 무엇인가? 경제와 인종 간에 관계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관계인가? 우리 문화의 파괴적 행위를 깊이 파고들면 만나게 되는 여성에 대한 혐오는 또 어떤가? 어떤 형태의 잔학 행위를 용이하게 하는, 심지어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사회·경제적 조건이 있는가? 이 책을 쓰면서 내가 탐구하고 싶었던 것은 인식에 관한 것이다. 또는 인식의 결핍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저자 서문)

출발점은 ‘증오’다. 사실 우리는 그것이 어떤 형태의 증오인지, 심지어는 증오인지 아닌지조차 알지 못한다. 홀로코스트에 동참했던 ‘학살기술자’ 혹은 ‘학살관료’들은 유대인 하나하나를 증오했던가?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프란체스코 피사로가 잉카제국의 마지막 황제 아타왈파를 죽일 적에 그를 증오했던가? 혜진, 예슬이를 죽인 범죄자는 두 어린 소녀를 증오했었나? 혹은 효순, 미선양을 압살한 미군병사들은 한국의 소녀들을 증오했었나?

엄청난 내면의 증오를 갖고 있지 않은 다음에야 도저히 저지를 수 있을 성 싶지 않은 살상을 보면서 넘쳐나는 증오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일단은 저 질문들에 답하기 이전에, 그것을 ‘증오’라 부르기로 하자. 그 엽기적인 살상, 특히 대규모로 혹은 빈번하게 저질러지는 그런 살상을 ‘증오범죄’라고 부르기로 하자. 인종차별, 흑인 린치, 강간, 홀로코스트, 인디언 학살,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지금 우리 사회, 우리 글로벌 시스템의 바탕이 된 근대의 형성 과정에서 증오범죄의 주요 가해자는 ‘서구 백인 남성’이었다. 저자는 증오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자기 자신도 포함되는 ‘서구 백인 남성집단’의 증오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입에 담기도 끔찍한 범죄들의 리스트를 훑어본 저자가 내린 결론은 현 세계 사회·경제체제를 특징짓는 범죄의 바탕에 깔린 증오감정이 결코 개인적인 현상이라든가 개인의 신체적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우리 사회체제의 일부이자 근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더 나아가 증오의 사회학, 증오범죄의 메커니즘이야말로 (서구에서 시작돼 이미 지구를 장악해버린) 우리 ‘문명’의 특징이라고 결론짓는다.


그 ‘문명’은 서구적 근대성과 일신교의 문명, 다양성을 말살시키고 끝없는 확장으로 지구를 정복해가는 문명, 불필요한 인간들(그리고 자연들)을 제거하는 생산 지상주의 문명이다. 이 문명에서 ‘생산’ ‘효율성’은 절대적인 명령이 되며 방해되는 것 혹은 불필요한 것들은 가차 없이 제거된다.

유대인들이 하나하나 이름과 얼굴을 가진 사람이 아닌 살덩이 지방덩어리로 분리됐듯, 그들을 죽인 이들이 그저 관료적 몸짓 하나로 살인을 저지를 수 있었듯, 미군이 이라크 어린이들의 얼굴 따위를 떠올리는 대신 일련번호를 붙인 시설물들에 스위치 한 방으로 폭격을 가할 수 있었듯이, 우리 문명은 구체성을 죽이고 추상화시킴으로써 범죄를 범죄 아닌 것으로 만들고 학살 명령을 모든 이들에게 내면화시킨다.

그 희생자들은 감옥국가 미국의 곳곳에 들어선 교도소의 재소자들, 서부로의 확장 과정에서 절멸된 인디언, 흑인 노예들이다. ‘워블리’라 불렸던 지난 세기 초반의 좌파 노동자들, 유니언 카바이드사의 독극물 누출로 무참히 죽어간 인도 보팔의 노동자들, 지금도 노예노동에 내몰리는 제3세계의 빈민들도 그 희생자들이다. 문명은 희생자 없이는 지탱되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 자연까지 생산이라는 이름 하에 일렬종대로 늘어서도록 만들어 지구를 해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모든 사람들/자연은 모두 홀로코스트적 문명이라는 이 하나의 시스템에 의한 희생자들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생산이라는 명제는 결국 몇 안되는 부자들만을 위한 것인데도 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자동차회사, 화학제품 회사, 석유회사들이 내놓는 물건들 속엔 우리가 세금이나 공공의료비용으로 때워야 하는 ‘숨겨진 사회적 비용’이 너무 많이 숨어있는데도 우리는 그저 속고만 산다. 어쩌면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지금은 제 나름의 아메리칸 드림에 취해 속고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이 홀로코스트적 문명에 휩쓸려가는 수많은 필부필부들이 ‘허위 계약’에 속고 있는 것이라 주장한다.

우리의 진정한 출발점은 어디일까. 저자가 제안하는 것은 ‘문명 바로보기’다. 거짓된 진실을 보는 것, ‘그들이 우리에게 믿도록 만들었던 허위계약의 진실들’을 보는 것.

책은 다소 끔찍하면서도, 지지부진 중언부언이 많고 가끔은 기행문에다가 에세이 스타일까지 섞여 있어 긴장감이 떨어졌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중언부언이 많다 싶기도 하고, 내용과 관련해서도 홀로코스트적 문명의 끔찍한 증오범죄들을 결론적으론 기후변화 쪽으로 유도해가는 것 같아서 다소 비약이 있다는 듯한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당신이 범죄라고 생각 않고 당연한 권리라 생각했던 것에 대해 누군가가 범죄라는 이름을 씌운다면, 당신은 그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흑인을 목매달고 불태운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않겠는가."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지금 우리가 범죄라는 생각없이 저지르는 자연에 대한 홀로코스트 또한 범죄라고, 이를 부인하려는 우리의 마음 또한 흑인들을 린치한 사람들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불편한 진실'이다.
증오범죄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범죄들의 메커니즘,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있는 더 크고 더 조직적이고 더 경제적인 ‘문명이라는 이름의 범죄’를 직시하기 위해서라면 이 책은 훌륭한 출발점이 될 것 같다. 그 다음은? 그건 잘 모르겠다. 우리는 눈을 떠 문명의 범죄를 직시하고 이 문명을 거부해야 하는 것인지, 대안의 문명은 어떤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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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가 세계를 바꾼다
니혼게이자이신문사 지음, 강신규 옮김 / 가나북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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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구’라는 키워드로 변화하는 세계상과 다가올 미래를 그려내보인다. 책 표지에 ‘인구문제를 통해 미래 세계의 혁명적 변화를 예측한 충격적인 보고서!’라면서 느낌표까지 쿵 찍어놨는데, 책은 쉽게 읽히면서도 재미있다. 책 모양도, 표지도 예쁘고.

인구구조가 사회를 바꾼다, 어느 나라는 인구가 폭발 지경이고 어느 나라는 고령화 때문에 골치 아프다, 이런 사실쯤이야 뭐 이젠 상식이 됐으니 그리 충격적이진 않다. 하지만 책에 나와 있는 것은 아주 구체적인 자료들이어서 생생하고 재미있다.
예를 들자면 종교·종파별 인구 구성의 변화가 레바논 정정에 미치는 영향, 자살대국 러시아의 현실, 두바이의 차이나타운, 미국 내의 인구 이동과 정치적 역학관계의 변화,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느끼는 차이나 파워에 대한 경계심 같은 것들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당장 현실화되고 있는 것들이어서 책 윗부분 접어놓고 밑줄 쳐가며 읽었다. 화폐 단위를 모두 원화로 환산해 표기한 것이라든가 한국 부분에 대한 설명을 충실히 보충한 것 등 출판사·번역자의 세심한 배려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2004년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존 케리를 ‘게리 하트’라고 적어놓은 것 따위의 사소하지만 어이없는 실수들이 보였고, 이미 인용 가치가 없어져버린(해마다 경신되는 지수라든지) 통계치들도 여럿 있었다. 신문 기획기사 시리즈를 묶어놓은 글의 한계이자 장점이랄까, 간단명료하고 이해하기 쉬워 좋은 대신 너무 짧고 간략하면서도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는 부분도 있었다. 번역도 자연스럽게 하려고 애는 썼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정교하지가 못하다.



▷ 이스라엘 인구는 700만명이 채 안되지만 하닷에셀 병원 같은 체외수정센터가 10곳 정도 있다. 영국 더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인구 1인당 불임치료시설 숫자가 세게 1위다. 신생아에서 차지하는 체외수정아 비율은 한국과 일본이 각각 1.4, 1.0%인데 비해 이스라엘은 5.0%에 이른다. 이스라엘 정부는 유대인 인구를 늘리기 위한 대책을 세웠고 그 중 하나가 불임치료였다. 다른 나라에서는 불임을 개인적인 문제로 여기지만 이스라엘에서는 국가 문제로 받아들여 적극 대처하고 있다. 둘째아이까지는 평균 2000만원 정도 드는 체외수정 비용 전액을 정부가 부담하는 것이다.

▷ 레바논 정부 요직 배분 기준은 프랑스 통치 시대인 1932년에 취합된 종파별 인구 통계였다. 최신 수치가 밝혀지면 대립이 격화될 것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인구 통계수치를 밝히는 것은 금지돼 있다. 그러나 1932년에 50%를 차지하던 기독교도는 지금은 30%대 아래로 출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이슬람 수니파에 이어 세 번째이던 시아파가 지금은 약 40%로 가장 많다. 인구에 걸맞은 정치적 권리를 얻지 못한 불만 때문에 시아파 주민들은 헤즈볼라를 광적으로 지지하게 되었고, 그로써 이스라엘과 충돌을 빚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뒤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레바논으로 도피했다. 60년 동안 난민들의 거주지는 텐트에서 빌딩으로 바뀌었고, 주민 대다수가 팔레스타인을 모르는 제2, 제3 세대가 되었다. 그들은 취직과 부동산 구입에 제한을 받고 참정권도 없는 것이 아이러니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레바논이 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까닭이 있다. 대부분 수니파인 난민은 수가 약 40만명으로 늘었다. 그들에게 참정권을 준다면 이 또한 인구통계를 보완하지 않은채 겨우 유지해오던 정치적 균형을 무너뜨릴 것이다.

▷ 프랑스의 지스카르 데스탱 전대통령은 “유럽 헌법은 터키 같은 대국을 가정하여 성립돼 있지 않다”면서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에 제동을 걸었다. 만약 터키가 유럽연합에 가입한다면 터키는 의사결정과정에서 독일과 똑같은 14% 가까운 투표권을 지게 되며, 유럽의회에서 12%의 의석을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 유엔의 통계에 따르면 인도의 인구는 2035년에 이르면 중국을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라선다. 2050년에는 15억명을 넘어선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동남아 전체 인구와 거의 맞먹는 인구가 늘어난다는 계산이 나온다. 똑같은 브릭스 국가인 중국과 러시아가 직면한 저출산·고령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 러시아 인구는 2050년에는 지금의 1억4000만명에서 1억명 안팎으로 줄어들 것이다. 노동인구는 2025년까지 계속 줄어들 것으로 예상한다. 2012~18년 사이에 노동인구가 가장 많이 줄어들 것이며, 그때는 해마다 약 100만명 이상 줄어들 것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동국인’ 이민을 유도하고 있다. 동국인은 본래 러시아에 있던 민족, 러시아어를 말하는 사람 등의 의미로 통한다. 이민 수용의 1순위는 재외 러시아인, 2순위는 슬라브 민족인 우크라이나인과 벨로루시인 등이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가장 부족한 인력은 단순노동 인력이다. 자국 경제가 발전한 만큼 우크라이나인 등이 러시아에 들어오는 일은 많지 않을 것이고 들어온다면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 등 중앙아시아 이민이 주류를 이룰 수 밖에 없다.

▷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 시내에서 약 10km 떨어진 곳에 수백여 개의 컨테이너 박스 사이로 ‘사호 시장 Four Tiger Market’이라고 적힌 커다란 간판이 나타난다. 바로 중국 이민자들이 모여 형성한 헝가리 내 차이나타운이다. 이곳은 원래 부다페스트로 유입되는 수입 물품을 일시 보관하는 일종의 물류기지였지만 중국 베트남 등지에서 온 이민자들이 컨테이너 박스를 상점으로 전용하면서 거대 시장으로 변했다.
인구 200만명의 부다페스트에는 현재 4만명이 넘는 중국인이 살고 있다. 동유럽에서 가장 큰 차이나타운을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천안문 사태를 전후해 이곳으로 들어왔다. 헝가리 정부가 1988년부터 중국인의 입국 비자를 면제해 주었기 때문이다. 1991년 한 해에만 2만1000여 명의 중국인이 헝가리로 이주했다는 게 헝가리 이민국 관리자의 설명이다.

▷ 지금 미국에서는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이 가속화되고 있다. 애리조나 주는 지난 10년 동안 인구가 40%나 늘어났다. 반대로 중서부 노스다코나 주와 동부 웨스트버지니아 주는 인구가 줄어들었다. 철의 마을로 알려진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시의 인구는 이미 1940년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미국의 인구지도는 서고동저·남고북저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에 따라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 세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연방 하원의 주별 의석 배분은 각 주의 인구 비율을 기준 삼아 10년마다 조정되기 때문에 이대로라면 인구 비율이 낮아지는 뉴잉글랜드 각 주의 의석 수는 줄어든다.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는 “이래도 가면 중앙에서 행사할 수 있는 발언권이 줄어들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확산되고 있다.
인구이동으로 말미암아 정당의 세력균형이 크게 변화할 수도 있다. “정치의 중심이 선벨트 Sun belt 로 이동한다”. 미시건 주립대학의 윌리엄 프레이 교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1972년에는 북동부 스노 Snow 벨트와 남·서부 선벨트가 거의 비슷한 숫자였지만 2030년이 되면 선벨트가 스노벨트보다 1.7배 많은 수준이 된다.

▷ 이라크에서는 1980년대만 하더라도 이집트인 노동자가 200만명이 넘었지만 지금은 거의 다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이라크 사람들조차 요르단 등 이웃나라로 빠져나가면서 노동 수요의 균형이 크게 무너졌다. 요르단에 살고 있는 이라크 사람은 어림잡아 40만명 정도이다.
아흐람 정치전략연구소가 어림잡는 아랍 각국의 실질 실업률은 이라크 66%, 팔레스타인 55%, 알제리 38%, 이집트 30%이다.

▷ 중국 저장성은 상하이 시 남쪽에 있으며, 윈저우 시는 저장성 내에서도 중간 규모에 속하는 도시로 동중국해를 바라보고 있다. 인구가 약 750만명인데 그중 150만명이 고향을 떠나 살고 있다. 중국인들은 윈저우 사람들에게 ‘돈밖에 모른다’는 부정적인 이미지와 ‘장사를 잘한다’는 존경의 이미지를 동시에 품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윈저우 사람들은 부동산 투기로 주목을 받았다.
인구이동은 중국의 경제 발전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중국의 경우 태어나 자란 곳을 떠나 사는 사람이 1억4700만명(2005년)에 달할 정도다. 특히 윈저우 사람들의 ‘떠돌아다니는 버릇’은 이미 1950년대부터 시작됐다. 농사를 짓는 데 적합한 토지가 적은데다 대만과 가까웠기 때문에 국가에서 경제 지원도 해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장사를 하러 떠난 것이다.
윈저우 만으로 흘러드는 구강을 지나면 시 경계 서쪽에 베이안춘(北岸村)이라는 마을이 있다. 중국의 농촌에서 고령자만 눈의 띄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베이안춘 젊은이들은 다른 마을과는 달리 여권을 가지고 마을을 떠난다. 가는 곳은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등 다양하다.


▷ 도시화가 진전될수록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식용육 가운데 특히 판매가 늘어난 것이 종교적 금기 대상이 되지 않는 새고기였다. 금기사항이 없는 중국에서는 소·돼지·양도 소비량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식육 수요가 늘어난다는 것은 세계의 가축·식육 업계에 커다란 비즈니스 기회일 수도 있지만 사료를 조달하는 문제는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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