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
토머스 F. 매든 지음, 권영주 옮김 / 루비박스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십자군에 대해 별반 관심 없는데, 어찌어찌 집에 이 책이 있는 것을 보고 심심풀이 삼아 읽게 됐다. 읽다보니 재미가 있고 저자가 말하려는 바가 분명해서 쑥쑥 넘겼다. 책 원제는 THE NEW CONCISE HISTORY OF THE CRUSADES 인데 한글판에 부제를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로 달아놨다.
제목 장난질이야 흔하다 해도, 이 경우는 좀 심했다. 요즘 ‘이슬람 바로보기’ 같은 흐름이 분명히 있는데 2005년 출판된 책에서 겨우 이따위 19세기 풍의 부제를 달아놓다니. 이 책은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하고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저자가 제목에서 표현한대로, 십자군 역사를 충실하면서도 컴팩트하게 정리해놓은 것이 이 책의 첫 번째 장점이다. 인물평이라든가 전설 따위는 사건 이해에 필요한 정도로만 최소화시켰기 때문에 이 책에선 로망스 같은 것은 냄새도 맡기 힘들다. 전설에서 ‘팩트(fact)’를 가려내 당대의 ‘사실(史實)’ 중심으로 접근한 것이 이 책의 최대 장점이자 특징인데, 저 부제는 완전히 책의 이미지를 구기고 있다.

역사를 볼 때 누구의 ‘편’에서 볼 것인가 하는 점은 본질적인 문제다. 십자군을 누구의 시각에서 바라볼 것인가. 유럽과 이슬람 사이의 십자군 전쟁은 분명 유럽이 ‘일으킨’ 것이지만 일방적인 침략 작전 혹은 어느 한쪽이 가해자(이득을 얻은 자)이고 어느 한쪽이 피해자(손해를 입은 자)인 것은 아니었다.
이 오랜 전쟁은 유럽이 일으킨 것이고, 유럽에 막대한 영향을 두고두고 미쳤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어쨌거나 유럽은 십자군 전쟁에서 패배했고, 다만 이슬람의 유럽 완전정복을 막아냈을 뿐이었다. 유럽은 많은 것을 잃었고(경제적으로 유럽은 손해를 봤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싸움에서 졌지만 십자군의 감수성은 이베리아 반도의 리콩키스타 등으로 나타나는 등 오랜 영향을 미쳤다.

반대로 아랍국과 뒤이은 투르크제국 등 이슬람권에게 십자군 전쟁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으며, 심지어 십자군 전쟁이란 용어를 아는 이들조차 드물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소수민족인 쿠르드족 출신 지도자 살라딘을 부각시킨 것은 오히려 월터 스콧 같은 유럽의 낭만주의자들이었고, 아랍인들에게 살라딘은 19세기 혹은 20세기까지도 잊혀진 인물이었다. 이슬람의 입장에서 보면 십자군 전쟁은 그저 수많은 전쟁들 중 하나에 불과했을 뿐, 어떤 성스런 의미가 있는 대단한 전쟁은 아니었던 셈이다. 아마도 이는 사실일 것이다. 실제 십자군 전쟁에 맞서야 했던 것은 이른바 ‘근동’ 지방 오늘날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 이집트 쪽이었을 뿐이지 이슬람제국의 내륙이었던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는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으니까.
저자가 이 책에서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유럽인들에게 십자군 전쟁은 어떤 것이었나 하는 점이다. 십자군 전쟁은 유럽에게는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고, 이슬람권에는 그저 그런 전쟁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서구지상주의라는 오해를 유발할 소지가 많은 저 부제(저런 식의 ‘십자군전쟁론’이 아직도 통용된다면 유감스럽다)와는 달리, 저자의 시각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유럽의 눈으로 십자군을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유럽의 눈으로 본다고 해서 유럽과 십자군 전쟁을 무작정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 정도로 바보 같은 학자는 아니다. 그저 유럽인들의 눈으로 봤을 때 그 전쟁은 이러저러한 전쟁이었음을 설명하는 데에 치중할 뿐, 무식하고 잔인하고 야만적인 이슬람 식으로 남을 깎아내리진 않는다. 서술 자체는 무미건조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유럽의 눈’으로 보되 ‘당대인의 시각’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십자군의 예루살렘) 입성 후의 혼란 속에 이슬람교도들과 유대인들이 다수 죽임을 당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몸값을 치르고 자유를 살 수 있었거나 성밖으로 추방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예루살렘의 거리마다 무릎까지 차오는 피바다로 뒤덮였다는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과장이었다. 중세 사람들은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현대인들이 그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80쪽)

재미난 지적이다. 저자는 중세인에게 십자군 전쟁이 어떤 것이었나를 설명하는 데에 주력하면서, ‘종교의 시대’에 ‘성전(聖戰)’의 의미가 대단히 컸을 것이라는 점을 유독 강조한다. 맑스주의 역사관이 퍼지면서 20세기 중반까지 십자군 전쟁을 ‘경제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강했지만, 이는 온당치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맑스주의 영향을 받은 서양의 진보적인 역사학자들은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이들이 유산 혹은 봉토를 물려받지 못한 귀족의 둘째 아들이나 기사 계급 실업자들이었다고 주장하는데, 당대인들의 종교적 세계관으로 봤을 때에 십자군 전쟁은 분명한 성전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반론이다. 십자군은 스콧 같은 소설가들이 바라본 세련된 아랍 군주와 과격한 유럽 기사의 싸움도 아니었고, 19세기 민족주의자들이 예찬했던 것 같은 ‘유럽의 로망스’도 아니었으며, 20세기 좌파들이 말하는 것 같은 ‘유럽 실업자들이 벌인 싸움판’도 아니었다, 그것은 중세 기독교 유럽인들의 성전이었지만 후대를 거치며 여러 차례 해석의 변화를 거친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그럼 저자의 말대로 철저히 ‘유럽의, 유럽에 의한, 유럽을 위한’ 전쟁이었던 십자군의 진실을 지금에 와서 파헤쳐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책의 서문은 역시나 9·11을 끌어당기고 있다. 유럽은 중세에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고, 근세 이후 십자군 전쟁의 재판(再版)으로 제국주의 침략을 감행했다, 그러니까 이슬람도 거기 맞선 성전을 일으켜 십자군과 싸워야 한다- 이것은 오사마 빈라덴 류의 시각이다.
십자군 전쟁을 끌어다 이리 붙이고 저리 둘러대는 세력이 많고 그들 사이에 싸움(테러가 됐든 ‘테러와의 전쟁’이 됐든)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21세기 지구인 모두를 둘러싼 현실이다. 그러나 실제 십자군 전쟁은 유럽의 전쟁이었으며 별나게 멋진 전쟁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유달리 저질스런 전쟁도 아니었다, 20세기 시리아와 이라크 독재자가 뒤늦게 살라딘 흉내를 냈었지만 실상 아랍 이슬람권에서는 십자군 전쟁에 대단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왔다, 십자군 전쟁이란 말이 모종의 은유로 통용되고는 있지만 역사는 냉정하게 보아야 한다, 낭만도 증오도 모두 일단 가라앉히고 역사를 볼 필요가 있다. 책은 문체가 냉랭해 재미가 없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또한 흥미로웠다. 저자가 뒤에서 혹평을 하고 있는 제임스 레스턴의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과는 또다른 재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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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맘 2007-10-04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김태권님의 <십자군이야기>를 읽고 있는 중이라서 일까요? 더 와 닿아요.
제가 읽고 있는 책과는 또다른 느낌이 있을듯...

딸기야놀러가자 2007-10-05 07:29   좋아요 0 | URL
아, 그 책도 인기가 많던데... 저는 1권만 읽었는데, 그 책하고는 아무래도 분위기가 다르지만
둘다 재미있어요 ^^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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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은 재생지로 된 작고 두껍지 않은 책인데 내용은 크고 넓다.
제목이 너무나 직설적이어서 상상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책은 미국 출신 사회운동가 겸 저술가 더글러스 러미스가 일본에 살면서 일본 사람들에게 이러저러하게 살아보자, 하고 지적하고 제안하는 형식으로 돼 있다.

일본어 문체로 돼 있어서 거기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겐 다소 생소한 말투로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지적하는 내용과 제안도 일본적이지만, 우리 또한 새겨들어야만 하는 내용임에는 틀림없다. 아니, 사실은 “개같이 벌으렸다, 돈만 벌어라” 하는 식의 사고방식은 일본보다 우리가 훨씬 심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본주의 성장지상주의에 빠져 일로매진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한국이 일본은 물론 미국도 제치고 1등할 것 같다. 그러니까 '20대 80' 중 잘나가는 20 말고 못난이 80이라도 그럭저럭 먹고살 여지가 있는 일본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들어야 할 내용이다.

 

“그것은 좋은 이상일지는 모르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돈을 벌어야 한다”라든가, “싫어도 직업이기 때문에 별 도리가 없다” 등등, 이와 같은 상투적은 말들은 소득으로 이어지는 것만이 현실성이 있다는 경제발전론의 발상이다. 나는 이러한 발상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기 위해서 이 제목을 선택하였다. 경제발전론=소득배증론(所得倍增論)이 사회의 상식이 되어있는 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그밖의 다른 테마에 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학용어를 빌려 말하면, 경제발전론은 현대사회 속의 사고장해(思考障害)라고 부를 수 있을만큼 사람의 사고력을 억압하는 힘을 갖고 있다. (7쪽)


러미스가 사람들의 경계와 각성을 끌어내고자 애쓰는 부분은, “경제의 파이를 키우자”라는 성장 일변도의 생각에 관한 것이다. 파이를 키우자, 그러니까 파이가 커질 때까지는 파업도 말고 인권 환경 여성 인권 노동 복지 문화 이런 거 떠들지 말고, 배 채울 때까지 일단 기다려라, 그런 논리 말이다. 성장이 되면 우리는 저절로 인권 환경 여성 노동 복지 우선국가가 될까? 성장이 안 되면 ‘배부른 자들이나 하는 소리’는 신경 써서는 안 될 일인가? 어쩌면 우리는 다종다양한 목소리와 가치관을 ‘배부른 자들의 소리’로 치부해온 탓에 여지껏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언제나 배가 고프고 옆구리가 결리고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고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원론적으로 말을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게 다 배부른 소리야”라는 말로 맞받아쳐서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을 순환논법에 빠지게 만들고, 어떤 사람들은 “말은 맞지만 어떻게 할수 있나”고 체념한다. 러미스는 그런 식의 논리구조에 ‘타이타닉 현실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많은 사람들은 현실을 타이타닉호처럼 ‘전진하지 않으면 가라앉는 체제’로 보고 있다고, 오늘날의 현실주의는 ‘멈추거나 늦추면 가라앉고야 만다는 논리에 입각한 타이타닉 현실주의’(17쪽)라고.

 

그럼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의 주장은 생각을 바꾸자는 것, 그리고 체제를 바꾸자는 것이다. ‘발전’(development)은 어원으로 따져보면 가려진 것, 감춰진 것을 풀어 꺼낸다는 것인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남쪽(저개발 세계)을 까뒤집어 속도전으로 뛰어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북쪽(개발된 세계)을 다시 좀 오므리고 늦춰서 가치관 바로잡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껏 사람들이 일 중독과 소비 중독, 두 가지 중독에 빠져 있는데 인간을 다시 보통 인간으로 돌아오게 해서 값이 매겨져 있지 않은 즐거움, 사고파는 일과 관계없는 즐거움을 되찾게 만드는 일(107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대항발전’이라 이름붙였다. 좀 추상적이고 몽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조금은 좋아진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맞아 맞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세상이 숨통이 트이고, 사고파는 일과 관계없는 즐거움이 많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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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10-01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도착한 책이에요. 이번에도 당장 볼 것 같지 않다는 게 문제지만 꼭 볼거야요^^;;;

딸기야놀러가자 2007-10-01 21:35   좋아요 0 | URL
분량이 많지 않고 내용도 비교적 명확해서, 생각보다 쉽게 읽을 수 있을거야.
어쩌면 나보다는 마노아가 더 좋아할만한 내용이 아닐까 싶은데. :P
 
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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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일조선인’이라고 나서는 사람만이 재일조선인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늘 자신은 누구인가 자문하는 존재가 재일조선인이다. 재일조선인이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그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온갖 식민주의적 관계를 고려하면 이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을 포함한 전체야말로 재일조선인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128쪽)

 

1992년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읽을 때 너무 슬프고 마음 아프고 두렵고 충격적이었던,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외로운 떠돌이가 이번엔 세계화 시대의 제1 화두가 된 ‘디아스포라’라는 담론으로 무장을 하고 나타나서, 더 근사하고 다소 스타일리시하게 떠돌이의 아픔을 전한다.

책에는 ‘추방당한 자의 시선’이란 부제가 붙어있는데, 책의 포맷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와 비슷하다. 떠돌이(이 책에서는 ‘디아스포라’)가 한국 일본 유럽의 박물관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떠돌이의 눈에 비친 미술을 논하는 것. 달라진 것이 있다면 20세기 중후반 한반도의 현실(북에는 수령국가, 남에는 독재국가) 때문에 내적으로 외적으로 아픔을 겪은 청년의 넋두리 같았던 전작이 21세기에 와서 ‘디아스포라’라는 프레임을 얻었다는 것, 15년 전 ‘서양미술순례’의 저자가 어깨 늘어지고 창백한 청년 같은 느낌이었다면 ‘디아스포라 기행’의 저자는 나름대로 이름을 얻어 일본의 방송사가 다큐멘터리 기행을 맡길 정도의 유명인사가 되어 숨길래도 숨길 수 없는 명사(名士) 분위기가 글에서 묻어난다는 것.


서경식이 책에서 지적하듯이 세상도 시대도 상전벽해가 되어 광주에서 재일조선인 작가들의 작품전이 열릴 지경이 되었으니, 저런 변화가 있는 것도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그리고 15년 세월 동안 독자인 나도 변했다. ‘서양미술순례’ 때에 캄뷰세스왕의 재판 그림과 옆구리 뚫린 예수상 앞에서 시큰한 감정으로 상처를 달래고 있던 재일조선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아팠다. 지금도 서경식의 글은 마음이 아프다. 어째서 이 사람은 상처 입은 그림들, 상처 입은 조각들만을 찾아다녀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특유의(서경식 특유의, 라기보다는 일본어 특유의) 잔잔하게 흘러가는 문체를 따라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자니 15년 전과 비슷한 맥락에서 마음이 아프고, 15년 전과 다른 맥락에서 조금 마음이 불편하다. 좋은 책에 굳이 트집을 잡는 것 아닐까 싶기는 하지만, 내 눈에는 서경식도 역시나 ‘주류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서경식이 한국과 일본 얘기를 하지만 결국은 ‘유럽기행’이다. 왜 아우슈비츠를 자꾸만 떠올리나요, 라고 물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디아스포라라 부르는 사람과 유대인의 연결은 1차원적으로 보일 정도로 직접적인 연결 아닌가. 요는,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은 유럽적이고 유대적이라는 얘기다.

여전히 고상한 디아스포라의 눈에는 잘츠부르크와 츠바이크가 보일 뿐,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앞부분에 잠시 책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나 인도네시아 난민은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그들에겐 미술관에 전시돼 있을만한 ‘고상’하고 ‘유명’한 문화가 없기 때문이고, 일본 방송들이 돈 써가며 서경식같은 내레이터를 데리고 취재를 다닐만한 문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까놓고 말하자면 '디아스포라 서경식'은 그 모든 우울과 아픔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가리워져 눈에조차 들지 못하는 자이니치(재일조선인)'은 아니다. 디아스포라도 아닌 주제에 다만 무식해서 서양 음악이나 미술 따위 잘 모르는 나같은 자가 머라머라 말하기엔, 그의 취향은 고상하고 우아하다.

내 눈이 꼬인 걸까? 꼬인 것 맞다. 15년 전엔 유대인 학살당한 얘기만 해도 불쌍하고 인간 세상이 처참해 보이고 했는데, 지금은 눈이 꼬여서 유대인 학살 얘기 들으면 “자기들도 당해봤다며 팔레스타인에서 남들 학살하니 이스라엘도 참” 이런 생각이 더 많이 든다. 나는 눈도 꼬이고 귀도 꼬여서, 재일조선인 문제와 코리안 디아스포라 얘기에 고개를 주억이다가도 누가 잘츠부르크 유대인 이런 얘기하면 “아랍 얘기는 왜 빼놔” 하면서 거슬려한다. 그래서 서경식의 글도 마음이 불편했다.


“부모가 모두 나이지리아인인 잉카 쇼니바레는 1962년 런던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런던과 라고스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 우리는 대부분 그 천의 선명한 색깔과 무늬를 보고 의심 없이 ‘아프리카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것이 쇼니바레의 작품에 되풀이해 나타나는 테마다. 이런 천의 색과 무늬는 인도네시아에서 기원한 납염이 그 종주국인 네덜란드를 거쳐 유럽으로 유입되고 맨체스터에서 영국인이 디자인한 것이 다시 아프리카로 수출된 것이라고 한다. 원재료인 면화는 인도산이거나 동아프리카산이다. 곧 우리들이 ‘아프리카적’이라고 생각하는 색과 무늬의 이미지는 사실 근대 식민지배의 과정에서 종주국에서 생산된 뒤 식민지에 강요돼온 것이다.” (158쪽)


관심을 끄는 포인트이기는 한데... 책에 잉카 쇼니바레 ‘정사와 간통’ 사진이 나와 있는데 ‘그 천의 선명한 색깔과 무늬를 보고 의심 없이 아프리카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그런 작품은 아니다. 아프리카를 한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 아프리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프리카 것인가 보다 착각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잉카 쇼니바레의 다른 작품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는데, 역시나 내 눈에는 아프리카적임을 가장하여 서구의 침범을 노골적으로 풍자한 작품들에 가까워 보였다.)
아프리카인의 아픔을 얘기하려면 아프리카에도 조금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았을텐데. 역시나, 꼬인 눈으로 보아 그런 것일까. 어쨌든 책은 우리가 읽어야 할, 알아야 할, 관심 가져야 할 내용들을 담고 있고 좋은 책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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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7-07-2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의 꼬인 눈이 반갑습니다.

딸기야놀러가자 2007-07-23 11:25   좋아요 0 | URL
앗 혹시 블루님도 그렇게 느꼈나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너무 꼬인반응만 보인것같아서 마음 속으로 좀 그랬거든요

드팀전 2007-07-23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런 접근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미국의 9.11테러가 났을때..왜 너희들이 더 많이 죽인 이라크는 생각하지 않니 되물을 수는 있습니다..그러나 그런 구도로만 문제에 접근하면 폭력적인 순환만 지속됩니다.(미국의 죄가 더 크다는 것을 모르는바도 아니고 부인하지도 않습니다) 아우슈비츠만 떠올리고 팔레스타인은 떠올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디아스포라라는 소외층을 영토주의적 의미로 다시 분할하는 방식입니다.이 문제가 근대적 폭력구조의 전세계적 난민형성사 관점에서 봐지길 바랍니다.물론 디아스포라들의 역사 역시 동일성을 갖지도 않고 문화적으로 계급적으로 다르겠지만 말이지요...
프레모 레비가 상징하는 바는 보편적인 의미로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요.그것을 이스라엘이냐 유대인이냐의 문제로만 독해하는 것에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언젠가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일본제국주의에 분노하는 것과 히로시마 피폭희생자들에게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딸기야놀러가자 2007-07-23 15:4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그렇다고 쳐도, 저는 약자를 지향한다면서 결국은 서구지향적인 모습이 좀 짜증났던 거예요.

딸기야놀러가자 2007-07-24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서, 다시 댓글 답니다. 제 댓글이 너무 성의없게 들렸을까봐...

드팀전님, 저는요, 드팀전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에 꼭 반대를 하는 건 아닙니다만,
아우슈비츠를 떠올리는 사람에겐 누구에게든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알고 있느냐"고 묻고 싶고, 또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우슈비츠가 '보이는 디아스포라'라면 팔레스타인은 '보이지 않는 디아스포라'를 상징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것이 위의 리뷰에서 언급한 서경식의 글에 나온 것처럼,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늘 자신은 누구인가 자문하는 존재"를 발견하는 과정이고,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그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온갖 식민주의적 관계"를 포착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앞에서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비롯해 '근대적 폭력구조가 낳은 전세계적 난민 형성사'를 가려버리는 것은, 디아스포라의 다양한 부분 즉 가려진 부분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의 무지라고 생각해요. 누가 어떻게 어디서 왜 뿌리뽑혀 살아가고 있는지 구체적인 다양성들을 보지 못하면서 "디아스포라가 있다는 것은 나도 알아"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구체적인 지식이 없이 '담론'만 아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아우슈비츠를 이야기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에 대해선 모르고 있지 않나요. "팔레스타인인들이 핍박받는 건 알아"라고 말들은 하지만, 실상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아우슈비츠를 모두들 알지만 당장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이스라엘에 의해 대량학살된 난민캠프 이름을 대라면 몇 명이나 댈 수 있을까요?
결국은 그런 것이 '가려진 디아스포라'의 진실이고, 그 가려진 부분들을 보려고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예요. 그 과정이 곧 '보편적 의미'로 다가가는 길이라고 생각하고요.
 
멸망하는 국가 - 다치바나 다카시의 일본 사회 진단과 전망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열대림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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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도 번역돼 있는 여러 가지 책을 쓴 저널리스트라고 하는데, 다른 저서는 본 적이 없고 나는 이 것이 처음이었다. 내 호감도 기준으로 별점을 주자면 3개에서 4개 사이, 그런데 3개에 가까운 쪽이 될 것 같다. 작년 상반기, 그러니까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가 일본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에 봤으면 훨씬 재미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고이즈미 이후’를 예측하는데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포스트 고이즈미 시대를 제대로 잘 예측했느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고이즈미가 절대로 안 물러나고 암장군으로 맹활약하거나 재집권할 것이라며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놨는데, 온몸으로 사무라이스러움을 증언하듯 고이즈미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뒤로한 채 떠났다. ‘장기적인 예측’도 아니고, 당장 몇 달 뒤 일어날 총선 이후를 전망하면서 책까지 내놨는데 이렇게 틀려버리면 곤란하지. 저자가 인터넷 잡지에 실었던 에세이들을 묶은 거라고는 하지만, 그 생명력이 다만 몇 달도 못 갈 내용을 하드커버로 사서 읽을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책에서 저자가 다루는 굵직한 테마들은 일본을 뒤흔들었던 라이브도어 사건, 여성천황제를 둘러싼 논란, 야스쿠니 참배와 개헌 문제, 고이즈미의 ‘우정개혁’ 깜짝쇼, 포스트 고이즈미 정계 시나리오 같은 것들이다. 거기에 곁다리로 저널리스트 입장에서 오늘날 일본 언론의 얄팍함을 질타하는 에세이몇편과 이라크 파병 문제 같은 것들을 붙였다.
중요한 테마들이 시의성 위주로 되어있는 거라서 ‘사후에 읽기’엔 좀 그랬다. 그렇다고 후일담이라 할만큼 지나간 것은 또 아니니 말이다. 라이브도어 뒷이야기들은 재미있기는 했는데, 마침 일본 문제를 뒤적여야만 했던 나같은 사람들 말고 한국의 보통 사람들에겐 쓸데없는 얘기가 될 것 같다.

우익들을 비판한 부분은 절절이 옳은 것도 많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몹시 마음 불편했던 부분이 적지 않았다. 첫째, 여성천황 문제를 보자. 이 책의 저자는 나름 유명한 저널리스트라 하고, 책 전반에 나타나있는 생각들도 상식적 합리적인 것 같다. 발로 뛴 에세이들을 보면 훌륭한 저널리스트이자 지식인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여성을 천황으로 삼아도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여성을 금지시키는 것은 넌센스이고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는 성차별의 잔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금지조항은 당연히 없애야 한단 말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의견은 교묘하다. “국민들이 여성천황을 반대하지 않으니, 황실 규정을 고쳐 여성천황을 용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성천황에 찬성하는, 아니 ‘반대하지 않는’ 근거다. 야스쿠니 문제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저자의 의견은 “중국과 한국이 싫어하니 참배하면 안 된다”이다. 야스쿠니 문제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래서 찝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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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10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라리 핵심을 집어 확 미움을 받고 확 존경을 받든가 하지, 애매하게 빠져나가는 태도는...영 찝찝하군요.

딸기야놀러가자 2007-07-11 0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반적으로 '괜찮은' 내용인데도, 저런 것들이 마음에 걸려요.
옳다, 아니다 판단하지 않고 '괜찮다, 안 괜찮다'로 판단하는 식.
남을 때리고 핍박해서 안 되는 이유는, '그렇게 하면 안 되기' 때문인 거죠. '그러면 욕먹으니까'가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거지요. 그런데 이 책은 좀 그런 식이었어요.
 
야만의 역사
스벤 린드크비스트 지음, 김남섭 옮김 / 한겨레출판 / 2003년 4월
평점 :
절판


‘폭격의 역사’에서 20세기의 가공할 폭격들 뒤에 숨겨진 인종주의의 얼굴을 보여주며 묵시록과 같은 어두운 미래상을 그려보였던 스벤 린드크비스트가, 이번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과거로의 여행을 치른다. 이 여행은 즐기며 구경하며 가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상처내며 치러내야하는 그런 여행이다.

 

알제리 내륙에서 남쪽으로 접경한 니제르 북단까지 이어지는 북아프리카 ‘사막의 길’이 린드크비스트의 경로다. 조셉 콘라드의 ‘어둠의 한가운데’를 화두 삼아 린드크비스트는 19세기, 20세기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지 점령이 어떻게 철저한 야만을 생산해냈는지를 재구성해낸다.
아프리카인들을 유럽인들이 얼마나 끔찍하게 초토화시켰는지 더 말해 무엇하랴 만은, 저자의 여행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유대인 학살로 대표되는 20세기 유럽 한복판에서 벌어진 야만적인 사건이 허공에서 떨어져내린 것이 아니라는 것, 유럽인들이 인정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부인하고 있는, 오늘날까지도 감추려고 하고 있는 그들 자신의 과거에서 배태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유럽인들은 나치즘을 다각도로 규명하려 하면서도 나치즘의 논리야말로 자신들이 아프리카에서 펼쳤던 ‘절멸의 논리’에 입각한 것이라는 점은 끊임없이 부인하고 있다. “야수들을 절멸하라”는 근대 인종주의와 사회진화론의 논리로 영국인, 프랑스인, 스웨덴인, 벨기에인들이 아프리카의 한 부족 한 부족을 절멸시켜가는 동안 독일에서는 그것을 본뜬 ‘레벤스라움(생활공간)’이라는 개념이 싹텄다. 내 살 곳을 만들려면, 내 살 곳을 늘려 남을 이기려면 남의 살 곳을 빼앗아야 하고, 열등한 야수들은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어버린다는 개념. 그것이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동유럽 점령의 기본 발상이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모래바람 날리는 북아프리카의 사막길과 유럽 옛 식민지 점령군의 잔혹하기 짝이 없는 만행들을 교차시키며 유럽 식민주의와 인종 대학살의 고리들을 파헤친다. ‘폭격의 역사’ 만큼이나 우울하고, 끔찍한, 그렇지만 대면해야 할 진실. 정복하기는커녕 남의 식민지가 되었던 나라에서 남들의 악행을 곱씹어봐야 뭐하나 할 수도 있지만, 바로 그런 ‘우리’를 향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박노자라는 사람이 질문을 던진다. “과연 과거인가?”
“피해자도 가해자도 ‘영원한 현재가 돼버린 과거’의 외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 식민지 전쟁은 이제 ‘영광스러운 문명화 작업’이나 ‘열등 인종의 제압’이 아닌 ‘더러운 전쟁’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타인종, 타문화를 ‘야수’로 보는 의식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추천의 글) 그리고 박노자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 등을 거론하면서 인종주의적 학살의 참극을 경고한다. 그러니 어쩌나. 우리에게도 ‘가해자’라는 꼬리표가 터럭 한끝이라도 붙을 수밖에 없는 것을.
유럽이라면 사족을 못쓰는(이런 표현이 좀 심하다면 ‘유럽을 애호하는’으로 바꿔줄 수도 있다) 사람들이 한둘인가. 유럽에 가서 멋들어진 궁전에 조각상들 보고 좋아라 하는 한국인들이 거의 대부분 아니던가. 올림픽대교 가운데 첨탑위의 흉물스런 조각상을 보면, 그것을 올려놓느라 헬기를 탔다가 추락해 숨진 조종사 2명의 목숨 값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유럽 그 나라들 ‘낭만과 문화’를 수십만 수백만 명의 목숨 값으로 환산해 보는 데에 익숙지 않다. 우리 뿐 아니라 누구든 그럴 것이다.

‘유럽 문명’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사하라를 종단할 필요는 없지만, 생각도 안 해보고 있다가 남의 통렬한 비판을 들으면 “너무 심하게 말하지 마” 하면서 반사적으로 방어하게 되기 십상이다. 그런 방어벽을 깨야한다는 것을 책은 줄기차게 일깨워준다.

여행을 하다 보면, 특히 내전을 치렀던 지역이나 학살이 자행된 독재국가 같은 곳을 지나가게 되면 공기가 너무 무겁거나 핏빛이어서 얼굴을 돌리고 싶을 때가 있다. 서울 바닥에서 나고 자란 풍요의 세대, 나같은 사람에게 그런 곳으로의 여행은 사실 회피하고 싶은 진실일 뿐이다. 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역사의 끔찍한 부스러기들과 대면할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두껍지 않은 이 책자에 나오는 잔혹한 사실들을 읽는 것만도 마음 불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 마음 불편함 쯤은 과감히 누르고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메시지다.

 




   
  사하라는 여느 때와 다름없다. 강한 소독약 냄새, 기름칠을 하지 않아 끼익끼익 소리나는 문의 경첩, 반쯤 찢어진 블라인드, 다리 하나가 너무 짧아 흔들거리는 테이블, 그리고 테이블 표면과 베개와 세면기 위에 얇게 덮여 있는 모래가 너무나도 낯이 익다.
...하얀 기둥과 현관, 하얀 뾰족탑과 갓돌은 외벽이 불그스레한 갈색 진흙인 도심의 건물들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블레드 에 수단’, 즉 흑인들의 나라라는 말을 따라 수단 양식, 곧 흑인 양식이라 불린다. 사실 이것은 1900년에 열린 파리 대박람회를 위해 프랑스인들이 창조한 상상 속의 양식인데, 그 뒤 이곳 사하라에 이식되었다. 현대식 건물들은 국제적 양식의 회색 콘크리트이다. (34~35쪽)
 
   

 

   
 

1887년 스코틀랜드의 외과의 던롭은 어린 아들의 자전거에 공기 고무 튜브를 장착한다는 착상을 떠올렸다. 이 자전거 타이어는 1888년에 특허 출원되었다. 그후 몇 년 동안 고무 수요가 증가하였다. 바로 이것이 콩고 체제의 야만화가 확대된 이유였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트 2세의 대리인들은 대가를 조금도 지불하지 않고 원주민들로부터 노동력과 고무와 상아를 징발하였다. 거부하면 마을이 불타고 아이들이 살해되었으며 손이 잘렸다.

이런 방식으로 처음에는 이윤이 극적으로 증가되었다. 이윤은 무엇보다도 브뤼셀을 지금도 꼴사납게 만들고 있는 셍캉트네르 아케이드, 라에켄 궁, 아르덴 성 같은 흉측한 몇몇 기념물을 건립하는데 사용되었다. 오늘날 그 누구도 이 기념물들이 얼마나 많은 손의 절단을 초래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60쪽)

 
   

 

   
  사막에는 녹슬게 할 습기가 없으므로 수많은 폐차들이 그곳에 영원히 서 있다. 사자 모래 언덕은 차량의 진정한 공동묘지다. 보통 세단으로 사막을 건너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스포츠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종종 여기서 끝난다.
바람과 모래는 곧 모든 페인트를 벗겨내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래 언덕이 예전에 죽은 낙타의 뼈들을 묻듯이 차의 뼈대를 묻지 않으면, 종국에는 금속이 마모되고 말 것이다. (153쪽)
 
   

 

   
 

1904년 남서 아프리카에서 독일인들은 미국인 영국인 및 기타 유럽인들이 19세기 내내 발휘해왔던 기술, ‘열등문화’ 인종의 절멸을 재촉하는 기술을 습득했음을 보여주었다. 북아메리카의 사례를 쫓아 헤레로인(남서 아프리카인)을 보호구역으로 쫓아냈고, 그들의 목초지는 독일인 이주민들과 식민회사가 접수했다. 헤레로족이 저항하자 아돌프 레브레흐트 폰 트로타 장군은 1904년10월에 헤레로인들을 절멸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독일 국경 내에서 발견되는 모든 헤레로족은 무장 여부에 관계없이 사살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헤레로족은 폭력 때문에 죽은 게 아니었다. 독일인들은 그들을 사막으로 몰아내고 국경을 봉쇄했을 뿐이었다.
...우기가 시작되자 독일 경비병들은 마른 웅덩이 주위에 쓰러져 있는 해골들을 발견했다. 이 웅덩이는 깊이가 7~15미터에 이르렀고, 헤레로족이 부질없이 물을 찾으려고 판 것이었다. 인종 전체, 약 8만명의 인간들이 사막에서 죽었다. 겨우 몇천 명만 남아서 독일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중노동형에 처해졌다.

그리하여 1896년 쿠바의 스페인 사람들이 고안하고, 미국인들이 영어화하고, 보어 전쟁 동안 영국인들이 다시 사용한 ‘강제 노동수용소’라는 말이 독일 언어와 정치에 들어오게 되었다. (230~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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