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미국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유강은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이번 여름에 몇 권의 굵직한 책들을 읽었다. 두께나 분량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내용의 무거움 측면에서 읽은 보람이 있다 싶어 뿌듯한 그런 책들이다. 그 중 가장 탁월했던 것은 파리드 자카리아의 ‘자유의 미래’였고 나머지는 밀턴 프리드먼의 ‘자본주의와 자유’, 브레진스키 ‘제국의 미래’, 문승숙 ‘군사주의에 갇힌 근대’, 그리고 이 책, 후쿠야마의 ‘기로에 선 미국’이었다. 모두 무게가 적잖은 것들인데, 읽고 나서 정리를 제때 제때 하지 않은 탓에 머리 속에서 뒤죽박죽이 되어 두통을 안겨줬던 책들이다.

후쿠야마는 설명할 필요 없이 ‘역사의 종언’의 그 사람이다. 세상엔 그 책을 욕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 말을 인용하고 비판하는 이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은 그 말이 얼마나 위력적인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역사의 종언’을 (후쿠야마가 이미 역사가 끝났다고 말한지 15년이나 지나서) 몇 달 전에야 읽었는데, 왜들 그렇게 후쿠야마 욕을 하는지 솔직히 잘 이해가 안 됐었다. 15년전에 그 책을 읽었더라면 나도 그렇게 욕을 했으려나? ‘역사의 종언’은 헤겔 칸트 어쩌구 하는 철학적이고 학술적인 책이지, 곧이곧대로, 그러니까 ‘문자 그대로’ 역사의 종언이라는 말을 끌어다가 비판하면서 “역사가 뭐 끝났다 그래” 이렇게 단순하게 이야기할 성질의 텍스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어쩌면 후쿠야마를 욕했던 사람들은,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역사의 한 패러다임이 진짜로 끝나는 줄 믿었던, “안 끝나!” 하면서 고집만 부렸던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후쿠야마의 책이 나오고 15년이 지나 읽은 내 눈에, 그 책의 표현들은 좀 예스럽지만 개념들은 오히려 현재진행형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솔직히 나는 그 책이 대단히 마음에 들었고, 다 알아먹지는 못했지만 ‘똑똑한 학자의 똑똑하고 어려운 책’으로 기억에 남았다.


후쿠야마가 새 책을 내놨다고 해서 두말 않고 주문하려고 보니 번역자는 국제문제와 관련해 주로 ‘진보적인’ 책들을 솜씨 있게 번역해왔던 유강은씨다. 이 저자에 이 출판사에 이 번역자는 참 조화로우면서도 안 어울린다 싶었는데, 역시나 기대했던 대로 책은 훌륭했다. 책은 후쿠야마가 본 미국의 현실, 네오컨에 휘둘리다 ‘막 나가버린’ 미국을 담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의 주인공은 네오컨이다. 네오컨은 부시 행정부 들어서고 나서 세간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그 뿌리는 오래됐다. 책은 네오컨이라는 집단이 어떻게 형성됐고 어떻게 해서 세력을 잡았는지, 그러다가 어떻게 막나가서 요모양 요꼴이 됐는지를 집중 조명한다. “나도 한때는 네오컨이 괜찮을 줄 알고 솔깃했는데 지금 보니 너희들 대체 왜그러니. 그렇게 하면 미국 망하고 세계도 망한다니까.” 요지는 이렇다.


후쿠야마는 책에서 네오컨의 뿌리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거명해가며 누구는 진짜 네오컨이지만 누구는 사상으로 봐서 어정쩡하다, 누구는 첨엔 아니었지만 나중엔 주위 사람들 말에 솔깃해져서 네오컨이 됐다 등등으로 좀 거칠게 설명한다. 문체는 다소 공격적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네오컨들은 선악을 판단기준으로 삼던 가치 중심의 옛 좌파들(이 점에서 네오컨은 브레진스키나 키신저같은 정통 보수파와는 태생부터 다르다)이다. 그런 면에서 레이건은 네오컨이었고, 부시는 나중에 네오컨이 된 부류에 속한다. 람보 식의 대결주의, 부시 식의 ‘악의 축’ 운운하는 복음주의 비슷한 공격 성향은 이렇게 해서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들의 관심사는 원래부터 ‘유리하냐 불리하냐’ 하는 전략전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선이냐 악이냐’ 하는 가치 판단의 문제였던 것이다. 


부시와 그 떨거지들이 너무나, 너무나 ‘확신범’처럼 보였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라크전쟁 전에 네오컨이 아닌 아버지 부시 전대통령 쪽에서 레이건주의자들로 구성된 현 부시 행정부에 딴지를 걸었다는 분석과도 맥락이 맞아 떨어진다.


익히 짐작할 수 있듯, 선악의 판단이 끝났다며 역사의 종말까지 선언했던 후쿠야마가 네오컨들에게서 돌아선 데에서는 이라크 전쟁과 그 뒤의 상황이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널리 알려진 대로, 새뮤얼 헌팅턴이나 크리스토퍼 히첸스가 이라크전에 쌍수 들어 환영한 것과 달리 후쿠야마는 처음부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었다)


네오컨들은 이라크에 자신들이 생각하는 선한 정권, 미국적이고 민주적인 정권을 세워 세상을 안전하고 아름답게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요즘 막나가버린 짜가 네오컨들은 길을 잘못 들어섰다. 


“1990년대에 이루어진 미국 군사기술의 성공은 군사 개입이 언제나 걸프 전쟁이나 코소보 전쟁처럼 깔끔하고 값싸게 진행될 수 있다는 환상을 낳았다. 이라크 전쟁은 이런 형태의 가볍고 기동력이 있는 전쟁의 한계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현존하는 거의 모든 재래식 군사력을 파괴할 수는 있지만 장기적인 반란에 맞서 싸우는 데에는 특별한 이점이 전혀 없는 것이다. 통합정밀직격탄과 TV 유도형 대전차 미사일은 반란자와 비전투원을 구별하지 못하며 병사들에게 아랍어를 가르치지도 못한다.”(58쪽)


그래서 럼즈펠드 류가 이끄는 이라크 전쟁은 실패했다. 더불어 네오컨의 ‘체제 변경’(레짐 체인지) 전략도 실패했다. 백악관을 자기네편으로 끌어들인 네오컨이 너무 오만해져서 상황을 잘못 판단했기 때문이다.


“(네오컨의 대부인) 스트라우스식으로 이해된 정치 체제는 공식적인 제도나 권력 구조만을 의지하지 않는다. 정치 체제는 그것의 토대가 되는 사회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사회에 의해 형성된다.”(50쪽). “스트라우스도 고대의 정치철학자들도, 민주주의가 기본적인 정치 체제여서 일단 독재를 제거하면 사회가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로 되돌아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51쪽).


그런데 네오컨들은 무식하게도, 후세인을 없애면 이라크가 ‘민주화’ 될 줄 알았다. 왜 그랬을까? 세상 사람들 다 ‘불가능하다’ ‘쉽지 않을 것이다’ 했는데 왜 백악관의 그 자들은 착각의 늪에 빠졌던 것일까? 후쿠야마의 시각에 따르면, 네오컨들은 과거부터 ‘소수파’였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과 정말 비슷하다.


“냉전 기간 신보수주의자들은 멸시받는 소수 집단의 지위에 익숙해졌다. 그들은 인습적인 지식에 도전하면서 베를린 장벽의 붕괴 등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해결책을 추구하는 데에도 익숙해졌다. 공산주의의 갑작스런 붕괴는 이런 생각들의 정당성을 많은 부분 입증했으며, 1989년 이후에 이런 생각은 분명한 주류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감 속에 ‘우리 대 그들’이라는 유대감을 강화했다. 2001년 권력의 자리에 돌아온 국방부와 부통령실의 전쟁 주창자들은 자신들과 견해를 같이하지 않는 사람들을 지나치게 불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끼리끼리 소수파로 뭉쳐 세상에 맞섰던 선(善)의 수호자(누구 맘대로;;)들은 자신들만이 옳다며 배타주의를 더욱 고수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들이 세계 최강 미국의 권력을 손에 쥐고 남의 나라에 폭탄을 퍼부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다. “손에 망치만 든 사람에게는 모든 문제가 못처럼 보인다는 말처럼” 그들은 단단한 힘만을 생각하다가 부드러운 힘은 아예 잊어버렸다. 


“어느 누구도 원칙적으로 부드러운 힘의 사용에 반대하지 않았다. 단지 그것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88쪽)


남의 나라 아수라장 만들어 수만명 죽음으로 내몬 자들에 대한 평가 치고는, 후쿠야마의 평은 참으로 우스꽝스럽다. 분석은 잘하는데 나쁜 놈이 나쁜 이유는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고 좋은 일을 제대로 잘 못해서라고 하는 꼴이다.


뒷부분 ‘그래서 미국은 어떻게 해야 되나’ 하는 쪽은 대략 민주당 주장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 어찌 됐든 책은 재미있었고, 미국 네오컨들에 대해 알려주는 점이 많았고, 구구절절 설득력 있는 이야기들(각론 측면에서)과 못돼먹은 생각(전체적으로)이 잘도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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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10-05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는 어려운 책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리뷰를 써주세요. 그리고 적절한 비유로 읽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지요. 리뷰가 맛있었어요^^

딸기 2007-10-05 17:21   좋아요 0 | URL
마노아 혹시 내일(토요일)도 일하니?
나 우리 딸 데리고 시내에서 놀 것 같은데, 마노아랑 만나볼까 해서.
너무 늦게 말했나... ^^;;

마노아 2007-10-05 19:07   좋아요 0 | URL
아앗, 이럴 수가! 내일 일이 있어요. 흑흑...
멀리 진주에서 지인이 올라와서 같이 뮤지컬 보기로 했거든요. 우웅.. 아쉬워요(>_<)
아가도 볼 수 있는 기회인데..ㅠ.ㅠ

icaru 2007-10-05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잘 읽었습니다. ^^

딸기 2007-10-05 17:2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이카루님. ^^

딸기 2007-10-06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 역시나 내가 너무 늦게 즉흥적으로 얘기를 했구나. :)
시간은 많으니깐, 10월 가기 전에 꼭 만나자.

마립간 2007-10-19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부를 저의 서재 페이퍼에 올립니다.

딸기 2007-10-19 17:41   좋아요 0 | URL
넵. :)

maynard 2014-02-14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오콘이 노무현정권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다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린 첨 들어본다.
노무현정권이 남의 나라 침략해서 그 나라를 반식민지 비슷하게 만들려했나?
아니면 누구처럼 국민을 기만해서 나라돈을 도적질을 했나?
네오콘들은 오히려 우리나라의 뉴라이트와 유사하다고 할 수있지 않나?
그 이름과 근원도 유사하다.네오콘은 신보수,뉴라이트는 신우익인데 그들의근본이 얼치기 좌파라는 점까지 유사하다. 그러나 그들의 이념은 사실 좌파 우파를 떠나 오로지인간의 이기심과 물질숭배,힘(군사력,경제력)만이 유일한 가치판단의 척도가되는 천박한 역사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고 더우기 미국의 네오콘과는 달리 한국의 이익보다는 외세의 이익(엄밀히 말한다면 외세에 기생하는 자신들의 이익)을 더 우선시하는 매국적 집단이니 더더욱 한심하다.
위 서평이 오른 시점이 2007년. 아직 뉴라이트가 발톱을 드러낸 시기가 아니라 서평자가 잘 인식을 못했겠지만 지금 다시 서평을 쓴다면 그 내용이 달라질까?

남성일 2023-05-09 22:2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동의합니다. ^^
 
십자군 -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
토머스 F. 매든 지음, 권영주 옮김 / 루비박스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십자군에 대해 별반 관심 없는데, 어찌어찌 집에 이 책이 있는 것을 보고 심심풀이 삼아 읽게 됐다. 읽다보니 재미가 있고 저자가 말하려는 바가 분명해서 쑥쑥 넘겼다. 책 원제는 THE NEW CONCISE HISTORY OF THE CRUSADES 인데 한글판에 부제를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로 달아놨다.
제목 장난질이야 흔하다 해도, 이 경우는 좀 심했다. 요즘 ‘이슬람 바로보기’ 같은 흐름이 분명히 있는데 2005년 출판된 책에서 겨우 이따위 19세기 풍의 부제를 달아놓다니. 이 책은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하고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저자가 제목에서 표현한대로, 십자군 역사를 충실하면서도 컴팩트하게 정리해놓은 것이 이 책의 첫 번째 장점이다. 인물평이라든가 전설 따위는 사건 이해에 필요한 정도로만 최소화시켰기 때문에 이 책에선 로망스 같은 것은 냄새도 맡기 힘들다. 전설에서 ‘팩트(fact)’를 가려내 당대의 ‘사실(史實)’ 중심으로 접근한 것이 이 책의 최대 장점이자 특징인데, 저 부제는 완전히 책의 이미지를 구기고 있다.

역사를 볼 때 누구의 ‘편’에서 볼 것인가 하는 점은 본질적인 문제다. 십자군을 누구의 시각에서 바라볼 것인가. 유럽과 이슬람 사이의 십자군 전쟁은 분명 유럽이 ‘일으킨’ 것이지만 일방적인 침략 작전 혹은 어느 한쪽이 가해자(이득을 얻은 자)이고 어느 한쪽이 피해자(손해를 입은 자)인 것은 아니었다.
이 오랜 전쟁은 유럽이 일으킨 것이고, 유럽에 막대한 영향을 두고두고 미쳤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어쨌거나 유럽은 십자군 전쟁에서 패배했고, 다만 이슬람의 유럽 완전정복을 막아냈을 뿐이었다. 유럽은 많은 것을 잃었고(경제적으로 유럽은 손해를 봤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싸움에서 졌지만 십자군의 감수성은 이베리아 반도의 리콩키스타 등으로 나타나는 등 오랜 영향을 미쳤다.

반대로 아랍국과 뒤이은 투르크제국 등 이슬람권에게 십자군 전쟁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으며, 심지어 십자군 전쟁이란 용어를 아는 이들조차 드물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소수민족인 쿠르드족 출신 지도자 살라딘을 부각시킨 것은 오히려 월터 스콧 같은 유럽의 낭만주의자들이었고, 아랍인들에게 살라딘은 19세기 혹은 20세기까지도 잊혀진 인물이었다. 이슬람의 입장에서 보면 십자군 전쟁은 그저 수많은 전쟁들 중 하나에 불과했을 뿐, 어떤 성스런 의미가 있는 대단한 전쟁은 아니었던 셈이다. 아마도 이는 사실일 것이다. 실제 십자군 전쟁에 맞서야 했던 것은 이른바 ‘근동’ 지방 오늘날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 이집트 쪽이었을 뿐이지 이슬람제국의 내륙이었던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는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으니까.
저자가 이 책에서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유럽인들에게 십자군 전쟁은 어떤 것이었나 하는 점이다. 십자군 전쟁은 유럽에게는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고, 이슬람권에는 그저 그런 전쟁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서구지상주의라는 오해를 유발할 소지가 많은 저 부제(저런 식의 ‘십자군전쟁론’이 아직도 통용된다면 유감스럽다)와는 달리, 저자의 시각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유럽의 눈으로 십자군을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유럽의 눈으로 본다고 해서 유럽과 십자군 전쟁을 무작정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 정도로 바보 같은 학자는 아니다. 그저 유럽인들의 눈으로 봤을 때 그 전쟁은 이러저러한 전쟁이었음을 설명하는 데에 치중할 뿐, 무식하고 잔인하고 야만적인 이슬람 식으로 남을 깎아내리진 않는다. 서술 자체는 무미건조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유럽의 눈’으로 보되 ‘당대인의 시각’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십자군의 예루살렘) 입성 후의 혼란 속에 이슬람교도들과 유대인들이 다수 죽임을 당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몸값을 치르고 자유를 살 수 있었거나 성밖으로 추방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예루살렘의 거리마다 무릎까지 차오는 피바다로 뒤덮였다는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과장이었다. 중세 사람들은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현대인들이 그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80쪽)

재미난 지적이다. 저자는 중세인에게 십자군 전쟁이 어떤 것이었나를 설명하는 데에 주력하면서, ‘종교의 시대’에 ‘성전(聖戰)’의 의미가 대단히 컸을 것이라는 점을 유독 강조한다. 맑스주의 역사관이 퍼지면서 20세기 중반까지 십자군 전쟁을 ‘경제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강했지만, 이는 온당치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맑스주의 영향을 받은 서양의 진보적인 역사학자들은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이들이 유산 혹은 봉토를 물려받지 못한 귀족의 둘째 아들이나 기사 계급 실업자들이었다고 주장하는데, 당대인들의 종교적 세계관으로 봤을 때에 십자군 전쟁은 분명한 성전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반론이다. 십자군은 스콧 같은 소설가들이 바라본 세련된 아랍 군주와 과격한 유럽 기사의 싸움도 아니었고, 19세기 민족주의자들이 예찬했던 것 같은 ‘유럽의 로망스’도 아니었으며, 20세기 좌파들이 말하는 것 같은 ‘유럽 실업자들이 벌인 싸움판’도 아니었다, 그것은 중세 기독교 유럽인들의 성전이었지만 후대를 거치며 여러 차례 해석의 변화를 거친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그럼 저자의 말대로 철저히 ‘유럽의, 유럽에 의한, 유럽을 위한’ 전쟁이었던 십자군의 진실을 지금에 와서 파헤쳐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책의 서문은 역시나 9·11을 끌어당기고 있다. 유럽은 중세에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고, 근세 이후 십자군 전쟁의 재판(再版)으로 제국주의 침략을 감행했다, 그러니까 이슬람도 거기 맞선 성전을 일으켜 십자군과 싸워야 한다- 이것은 오사마 빈라덴 류의 시각이다.
십자군 전쟁을 끌어다 이리 붙이고 저리 둘러대는 세력이 많고 그들 사이에 싸움(테러가 됐든 ‘테러와의 전쟁’이 됐든)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21세기 지구인 모두를 둘러싼 현실이다. 그러나 실제 십자군 전쟁은 유럽의 전쟁이었으며 별나게 멋진 전쟁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유달리 저질스런 전쟁도 아니었다, 20세기 시리아와 이라크 독재자가 뒤늦게 살라딘 흉내를 냈었지만 실상 아랍 이슬람권에서는 십자군 전쟁에 대단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왔다, 십자군 전쟁이란 말이 모종의 은유로 통용되고는 있지만 역사는 냉정하게 보아야 한다, 낭만도 증오도 모두 일단 가라앉히고 역사를 볼 필요가 있다. 책은 문체가 냉랭해 재미가 없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또한 흥미로웠다. 저자가 뒤에서 혹평을 하고 있는 제임스 레스턴의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과는 또다른 재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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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맘 2007-10-04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김태권님의 <십자군이야기>를 읽고 있는 중이라서 일까요? 더 와 닿아요.
제가 읽고 있는 책과는 또다른 느낌이 있을듯...

딸기 2007-10-05 07:29   좋아요 0 | URL
아, 그 책도 인기가 많던데... 저는 1권만 읽었는데, 그 책하고는 아무래도 분위기가 다르지만
둘다 재미있어요 ^^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은 재생지로 된 작고 두껍지 않은 책인데 내용은 크고 넓다.
제목이 너무나 직설적이어서 상상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책은 미국 출신 사회운동가 겸 저술가 더글러스 러미스가 일본에 살면서 일본 사람들에게 이러저러하게 살아보자, 하고 지적하고 제안하는 형식으로 돼 있다.

일본어 문체로 돼 있어서 거기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겐 다소 생소한 말투로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지적하는 내용과 제안도 일본적이지만, 우리 또한 새겨들어야만 하는 내용임에는 틀림없다. 아니, 사실은 “개같이 벌으렸다, 돈만 벌어라” 하는 식의 사고방식은 일본보다 우리가 훨씬 심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본주의 성장지상주의에 빠져 일로매진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한국이 일본은 물론 미국도 제치고 1등할 것 같다. 그러니까 '20대 80' 중 잘나가는 20 말고 못난이 80이라도 그럭저럭 먹고살 여지가 있는 일본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들어야 할 내용이다.

 

“그것은 좋은 이상일지는 모르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돈을 벌어야 한다”라든가, “싫어도 직업이기 때문에 별 도리가 없다” 등등, 이와 같은 상투적은 말들은 소득으로 이어지는 것만이 현실성이 있다는 경제발전론의 발상이다. 나는 이러한 발상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기 위해서 이 제목을 선택하였다. 경제발전론=소득배증론(所得倍增論)이 사회의 상식이 되어있는 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그밖의 다른 테마에 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학용어를 빌려 말하면, 경제발전론은 현대사회 속의 사고장해(思考障害)라고 부를 수 있을만큼 사람의 사고력을 억압하는 힘을 갖고 있다. (7쪽)


러미스가 사람들의 경계와 각성을 끌어내고자 애쓰는 부분은, “경제의 파이를 키우자”라는 성장 일변도의 생각에 관한 것이다. 파이를 키우자, 그러니까 파이가 커질 때까지는 파업도 말고 인권 환경 여성 인권 노동 복지 문화 이런 거 떠들지 말고, 배 채울 때까지 일단 기다려라, 그런 논리 말이다. 성장이 되면 우리는 저절로 인권 환경 여성 노동 복지 우선국가가 될까? 성장이 안 되면 ‘배부른 자들이나 하는 소리’는 신경 써서는 안 될 일인가? 어쩌면 우리는 다종다양한 목소리와 가치관을 ‘배부른 자들의 소리’로 치부해온 탓에 여지껏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언제나 배가 고프고 옆구리가 결리고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고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원론적으로 말을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게 다 배부른 소리야”라는 말로 맞받아쳐서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을 순환논법에 빠지게 만들고, 어떤 사람들은 “말은 맞지만 어떻게 할수 있나”고 체념한다. 러미스는 그런 식의 논리구조에 ‘타이타닉 현실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많은 사람들은 현실을 타이타닉호처럼 ‘전진하지 않으면 가라앉는 체제’로 보고 있다고, 오늘날의 현실주의는 ‘멈추거나 늦추면 가라앉고야 만다는 논리에 입각한 타이타닉 현실주의’(17쪽)라고.

 

그럼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의 주장은 생각을 바꾸자는 것, 그리고 체제를 바꾸자는 것이다. ‘발전’(development)은 어원으로 따져보면 가려진 것, 감춰진 것을 풀어 꺼낸다는 것인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남쪽(저개발 세계)을 까뒤집어 속도전으로 뛰어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북쪽(개발된 세계)을 다시 좀 오므리고 늦춰서 가치관 바로잡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껏 사람들이 일 중독과 소비 중독, 두 가지 중독에 빠져 있는데 인간을 다시 보통 인간으로 돌아오게 해서 값이 매겨져 있지 않은 즐거움, 사고파는 일과 관계없는 즐거움을 되찾게 만드는 일(107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대항발전’이라 이름붙였다. 좀 추상적이고 몽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조금은 좋아진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맞아 맞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세상이 숨통이 트이고, 사고파는 일과 관계없는 즐거움이 많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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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10-01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도착한 책이에요. 이번에도 당장 볼 것 같지 않다는 게 문제지만 꼭 볼거야요^^;;;

딸기 2007-10-01 21:35   좋아요 0 | URL
분량이 많지 않고 내용도 비교적 명확해서, 생각보다 쉽게 읽을 수 있을거야.
어쩌면 나보다는 마노아가 더 좋아할만한 내용이 아닐까 싶은데. :P
 
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재일조선인’이라고 나서는 사람만이 재일조선인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늘 자신은 누구인가 자문하는 존재가 재일조선인이다. 재일조선인이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그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온갖 식민주의적 관계를 고려하면 이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을 포함한 전체야말로 재일조선인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128쪽)

 

1992년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읽을 때 너무 슬프고 마음 아프고 두렵고 충격적이었던,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외로운 떠돌이가 이번엔 세계화 시대의 제1 화두가 된 ‘디아스포라’라는 담론으로 무장을 하고 나타나서, 더 근사하고 다소 스타일리시하게 떠돌이의 아픔을 전한다.

책에는 ‘추방당한 자의 시선’이란 부제가 붙어있는데, 책의 포맷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와 비슷하다. 떠돌이(이 책에서는 ‘디아스포라’)가 한국 일본 유럽의 박물관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떠돌이의 눈에 비친 미술을 논하는 것. 달라진 것이 있다면 20세기 중후반 한반도의 현실(북에는 수령국가, 남에는 독재국가) 때문에 내적으로 외적으로 아픔을 겪은 청년의 넋두리 같았던 전작이 21세기에 와서 ‘디아스포라’라는 프레임을 얻었다는 것, 15년 전 ‘서양미술순례’의 저자가 어깨 늘어지고 창백한 청년 같은 느낌이었다면 ‘디아스포라 기행’의 저자는 나름대로 이름을 얻어 일본의 방송사가 다큐멘터리 기행을 맡길 정도의 유명인사가 되어 숨길래도 숨길 수 없는 명사(名士) 분위기가 글에서 묻어난다는 것.


서경식이 책에서 지적하듯이 세상도 시대도 상전벽해가 되어 광주에서 재일조선인 작가들의 작품전이 열릴 지경이 되었으니, 저런 변화가 있는 것도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그리고 15년 세월 동안 독자인 나도 변했다. ‘서양미술순례’ 때에 캄뷰세스왕의 재판 그림과 옆구리 뚫린 예수상 앞에서 시큰한 감정으로 상처를 달래고 있던 재일조선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아팠다. 지금도 서경식의 글은 마음이 아프다. 어째서 이 사람은 상처 입은 그림들, 상처 입은 조각들만을 찾아다녀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특유의(서경식 특유의, 라기보다는 일본어 특유의) 잔잔하게 흘러가는 문체를 따라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자니 15년 전과 비슷한 맥락에서 마음이 아프고, 15년 전과 다른 맥락에서 조금 마음이 불편하다. 좋은 책에 굳이 트집을 잡는 것 아닐까 싶기는 하지만, 내 눈에는 서경식도 역시나 ‘주류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서경식이 한국과 일본 얘기를 하지만 결국은 ‘유럽기행’이다. 왜 아우슈비츠를 자꾸만 떠올리나요, 라고 물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디아스포라라 부르는 사람과 유대인의 연결은 1차원적으로 보일 정도로 직접적인 연결 아닌가. 요는,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은 유럽적이고 유대적이라는 얘기다.

여전히 고상한 디아스포라의 눈에는 잘츠부르크와 츠바이크가 보일 뿐,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앞부분에 잠시 책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나 인도네시아 난민은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그들에겐 미술관에 전시돼 있을만한 ‘고상’하고 ‘유명’한 문화가 없기 때문이고, 일본 방송들이 돈 써가며 서경식같은 내레이터를 데리고 취재를 다닐만한 문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까놓고 말하자면 '디아스포라 서경식'은 그 모든 우울과 아픔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가리워져 눈에조차 들지 못하는 자이니치(재일조선인)'은 아니다. 디아스포라도 아닌 주제에 다만 무식해서 서양 음악이나 미술 따위 잘 모르는 나같은 자가 머라머라 말하기엔, 그의 취향은 고상하고 우아하다.

내 눈이 꼬인 걸까? 꼬인 것 맞다. 15년 전엔 유대인 학살당한 얘기만 해도 불쌍하고 인간 세상이 처참해 보이고 했는데, 지금은 눈이 꼬여서 유대인 학살 얘기 들으면 “자기들도 당해봤다며 팔레스타인에서 남들 학살하니 이스라엘도 참” 이런 생각이 더 많이 든다. 나는 눈도 꼬이고 귀도 꼬여서, 재일조선인 문제와 코리안 디아스포라 얘기에 고개를 주억이다가도 누가 잘츠부르크 유대인 이런 얘기하면 “아랍 얘기는 왜 빼놔” 하면서 거슬려한다. 그래서 서경식의 글도 마음이 불편했다.


“부모가 모두 나이지리아인인 잉카 쇼니바레는 1962년 런던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런던과 라고스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 우리는 대부분 그 천의 선명한 색깔과 무늬를 보고 의심 없이 ‘아프리카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것이 쇼니바레의 작품에 되풀이해 나타나는 테마다. 이런 천의 색과 무늬는 인도네시아에서 기원한 납염이 그 종주국인 네덜란드를 거쳐 유럽으로 유입되고 맨체스터에서 영국인이 디자인한 것이 다시 아프리카로 수출된 것이라고 한다. 원재료인 면화는 인도산이거나 동아프리카산이다. 곧 우리들이 ‘아프리카적’이라고 생각하는 색과 무늬의 이미지는 사실 근대 식민지배의 과정에서 종주국에서 생산된 뒤 식민지에 강요돼온 것이다.” (158쪽)


관심을 끄는 포인트이기는 한데... 책에 잉카 쇼니바레 ‘정사와 간통’ 사진이 나와 있는데 ‘그 천의 선명한 색깔과 무늬를 보고 의심 없이 아프리카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그런 작품은 아니다. 아프리카를 한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 아프리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프리카 것인가 보다 착각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잉카 쇼니바레의 다른 작품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는데, 역시나 내 눈에는 아프리카적임을 가장하여 서구의 침범을 노골적으로 풍자한 작품들에 가까워 보였다.)
아프리카인의 아픔을 얘기하려면 아프리카에도 조금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았을텐데. 역시나, 꼬인 눈으로 보아 그런 것일까. 어쨌든 책은 우리가 읽어야 할, 알아야 할, 관심 가져야 할 내용들을 담고 있고 좋은 책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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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7-07-2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의 꼬인 눈이 반갑습니다.

딸기 2007-07-23 11:25   좋아요 0 | URL
앗 혹시 블루님도 그렇게 느꼈나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너무 꼬인반응만 보인것같아서 마음 속으로 좀 그랬거든요

드팀전 2007-07-23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런 접근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미국의 9.11테러가 났을때..왜 너희들이 더 많이 죽인 이라크는 생각하지 않니 되물을 수는 있습니다..그러나 그런 구도로만 문제에 접근하면 폭력적인 순환만 지속됩니다.(미국의 죄가 더 크다는 것을 모르는바도 아니고 부인하지도 않습니다) 아우슈비츠만 떠올리고 팔레스타인은 떠올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디아스포라라는 소외층을 영토주의적 의미로 다시 분할하는 방식입니다.이 문제가 근대적 폭력구조의 전세계적 난민형성사 관점에서 봐지길 바랍니다.물론 디아스포라들의 역사 역시 동일성을 갖지도 않고 문화적으로 계급적으로 다르겠지만 말이지요...
프레모 레비가 상징하는 바는 보편적인 의미로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요.그것을 이스라엘이냐 유대인이냐의 문제로만 독해하는 것에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언젠가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일본제국주의에 분노하는 것과 히로시마 피폭희생자들에게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딸기 2007-07-23 15:4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그렇다고 쳐도, 저는 약자를 지향한다면서 결국은 서구지향적인 모습이 좀 짜증났던 거예요.

딸기 2007-07-24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서, 다시 댓글 답니다. 제 댓글이 너무 성의없게 들렸을까봐...

드팀전님, 저는요, 드팀전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에 꼭 반대를 하는 건 아닙니다만,
아우슈비츠를 떠올리는 사람에겐 누구에게든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알고 있느냐"고 묻고 싶고, 또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우슈비츠가 '보이는 디아스포라'라면 팔레스타인은 '보이지 않는 디아스포라'를 상징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것이 위의 리뷰에서 언급한 서경식의 글에 나온 것처럼,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늘 자신은 누구인가 자문하는 존재"를 발견하는 과정이고,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그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온갖 식민주의적 관계"를 포착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앞에서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비롯해 '근대적 폭력구조가 낳은 전세계적 난민 형성사'를 가려버리는 것은, 디아스포라의 다양한 부분 즉 가려진 부분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의 무지라고 생각해요. 누가 어떻게 어디서 왜 뿌리뽑혀 살아가고 있는지 구체적인 다양성들을 보지 못하면서 "디아스포라가 있다는 것은 나도 알아"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구체적인 지식이 없이 '담론'만 아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아우슈비츠를 이야기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에 대해선 모르고 있지 않나요. "팔레스타인인들이 핍박받는 건 알아"라고 말들은 하지만, 실상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아우슈비츠를 모두들 알지만 당장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이스라엘에 의해 대량학살된 난민캠프 이름을 대라면 몇 명이나 댈 수 있을까요?
결국은 그런 것이 '가려진 디아스포라'의 진실이고, 그 가려진 부분들을 보려고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예요. 그 과정이 곧 '보편적 의미'로 다가가는 길이라고 생각하고요.
 
멸망하는 국가 - 다치바나 다카시의 일본 사회 진단과 전망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열대림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국내에도 번역돼 있는 여러 가지 책을 쓴 저널리스트라고 하는데, 다른 저서는 본 적이 없고 나는 이 것이 처음이었다. 내 호감도 기준으로 별점을 주자면 3개에서 4개 사이, 그런데 3개에 가까운 쪽이 될 것 같다. 작년 상반기, 그러니까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가 일본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에 봤으면 훨씬 재미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고이즈미 이후’를 예측하는데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포스트 고이즈미 시대를 제대로 잘 예측했느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고이즈미가 절대로 안 물러나고 암장군으로 맹활약하거나 재집권할 것이라며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놨는데, 온몸으로 사무라이스러움을 증언하듯 고이즈미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뒤로한 채 떠났다. ‘장기적인 예측’도 아니고, 당장 몇 달 뒤 일어날 총선 이후를 전망하면서 책까지 내놨는데 이렇게 틀려버리면 곤란하지. 저자가 인터넷 잡지에 실었던 에세이들을 묶은 거라고는 하지만, 그 생명력이 다만 몇 달도 못 갈 내용을 하드커버로 사서 읽을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책에서 저자가 다루는 굵직한 테마들은 일본을 뒤흔들었던 라이브도어 사건, 여성천황제를 둘러싼 논란, 야스쿠니 참배와 개헌 문제, 고이즈미의 ‘우정개혁’ 깜짝쇼, 포스트 고이즈미 정계 시나리오 같은 것들이다. 거기에 곁다리로 저널리스트 입장에서 오늘날 일본 언론의 얄팍함을 질타하는 에세이몇편과 이라크 파병 문제 같은 것들을 붙였다.
중요한 테마들이 시의성 위주로 되어있는 거라서 ‘사후에 읽기’엔 좀 그랬다. 그렇다고 후일담이라 할만큼 지나간 것은 또 아니니 말이다. 라이브도어 뒷이야기들은 재미있기는 했는데, 마침 일본 문제를 뒤적여야만 했던 나같은 사람들 말고 한국의 보통 사람들에겐 쓸데없는 얘기가 될 것 같다.

우익들을 비판한 부분은 절절이 옳은 것도 많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몹시 마음 불편했던 부분이 적지 않았다. 첫째, 여성천황 문제를 보자. 이 책의 저자는 나름 유명한 저널리스트라 하고, 책 전반에 나타나있는 생각들도 상식적 합리적인 것 같다. 발로 뛴 에세이들을 보면 훌륭한 저널리스트이자 지식인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여성을 천황으로 삼아도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여성을 금지시키는 것은 넌센스이고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는 성차별의 잔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금지조항은 당연히 없애야 한단 말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의견은 교묘하다. “국민들이 여성천황을 반대하지 않으니, 황실 규정을 고쳐 여성천황을 용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성천황에 찬성하는, 아니 ‘반대하지 않는’ 근거다. 야스쿠니 문제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저자의 의견은 “중국과 한국이 싫어하니 참배하면 안 된다”이다. 야스쿠니 문제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래서 찝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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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10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라리 핵심을 집어 확 미움을 받고 확 존경을 받든가 하지, 애매하게 빠져나가는 태도는...영 찝찝하군요.

딸기 2007-07-11 0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반적으로 '괜찮은' 내용인데도, 저런 것들이 마음에 걸려요.
옳다, 아니다 판단하지 않고 '괜찮다, 안 괜찮다'로 판단하는 식.
남을 때리고 핍박해서 안 되는 이유는, '그렇게 하면 안 되기' 때문인 거죠. '그러면 욕먹으니까'가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거지요. 그런데 이 책은 좀 그런 식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