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지지 않는 사슬 - 2천7백만 노예들에 침묵하는 세계
케빈 베일스 외 지음, 이병무 옮김 / 다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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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스키너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르포로 구성된 노예제 추적기라면, 이 책은 통계자료와 개념과 국제법과 국제 규약을 가지고 현대판 노예제의 실태를 전한다. 르포가 아닌 보고서에 가깝기 때문에 읽는 '재미'를 따지자면 스키너의 책이 훨씬 앞선다. 하지만 스키너의 책이 미국 정부의 노예제에 대한 입장과 세계 각지 노예 현실 르포를 뒤섞어 산만한 느낌이 드는 데 비해 이 책은 건조하지만 훨씬 짜임새 있다. 학자들의 '보고서'이니 당연한 것 같기도 하지만.

책은 먼저 노예제를 철폐하기 위한 싸움의 역사를 소개하고, 현대의 '노예제'라는 이 낯익고도 낯선 개념에 대한 정의와 다양한 형태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노예제가 글로벌 경제 속에서 어떤 식으로 이윤을 창출하는지 살핀다. 


이어지는 장들은 현대의 노예제가 갖고 있는 특징적인 양상들에 대한 분석이다. 아직 어린 소녀들을 포함한 여성 노예들에게 유독 가해지는 폭력과 고통의 양상, 현대의 노예제에서 인종과 종족과 종교가 미치는 영향, 현대의 노예들을 양산하는 '시스템'인 무력 분쟁과 환경파괴, 그리고 현대판 노예들이 겪고 있는 건강상의 위험(신체적 정신적 위험이 모두 포함된다)과 그 결과들이다.


코트디부아르에는 코코아 농장이 약 80만개가 되며 여기서 전세계 코코아 공급량의 대략 절반이 생산된다. 대개 말리와 같은 인근 가난한 나라 젊은이들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이들 중 일부는 외딴 시골 농장에서 노예로 일한다. 노예를 이용하는 농장이 얼마나 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넉넉히 잡아도 5%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추정된다. 농장주들이 코코아를 도매업자에게 넘길 때 노예들이 재배한 그리 많지 않은 코코아는 '자유' 코코아와 뒤섞이는데 이 둘을 구별할 방법은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 중 하나가 코코아 협약이다. 2001년 체결된 이 협약은 전 세계의 초콜릿 업계, 몇몇 노에제 반대 단체들, 노동조합들과 ILO를 결집시킨다. 이 협약은 전 세계 코코아 재배지역에서 모든 단체 간의 조약으로 기능하며, 한 업계 전체와 노예제 반대운동 간에 맺어진 최초의 조약이다. 이 협약에 따라 국제코코아기구라는 재단이 설립됐다. 재단은 초콜릿 업계로부터 2002~2008년 900만달러 이상을 제공받았다. 재단은 농장들이 노예노동을 인정하고 이를 포기하도록 종용했고, 노예가 발견되면 언제라도 도울 수 있는 보호시설을 준비했다. 이와 별도로 1백만 달러가 ILO에 전달돼 '상업적 농업에서 아동 노동 착취 근절을 위한 서아프리카 프로젝트'가 시행됐다. 업계에서 총 1000만달러를 희사한 셈이다. 

협약에 따라 초콜릿 회사들은 코코아 재배에 아동이나 노예 노동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자발적인 업계의 기준'을 만들기로 합의했지만 아직 합의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게다가 코코아를 사용하는 제품을 만드는 업체 상당수가 협약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선의 길을 찾기 위한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스웨덴의 새 법률에 따르면 성을 파는 것은 합법이지만 그것을 구매하는 것은 불법이다. 성을 구매하는 것만을 범죄로 정한 것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힘의 불균형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다. 의회는 성을 파는 여성과 그것을 사는 남성 사이의 경제적, 사회적 관계를 불평등한 것으로 보고, 여성의 몸을 살 수 있는 남성의 능력은 일종의 남성 우월권으로 간주하여 저항하고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방식은 윤락업소를 합법화하고 정규화해 인신매매 여성에 대한 수요를 줄이고자 한 독일과 네덜란드 법률과 대비된다. 독일에서는 2002년 성매매가 합법화됐는데 노예제를 종식시키는 데에도 일부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유엔은 여전히 독일을 성적 착취를 위한 인신매매 여성들(주로 중부 유럽과 동유럽 출신)이 흘러들어가는 '최상위' 도착지 국가로 지정하고 있다. 

스웨덴은 소비 부문에서 성매매와 인신매매 수요를 없애고자 한다. 독일과 네덜란드는 그와 달리 인신매매범을 체포함으로써 공급체계 내에서 노예들로 운영되는 성매매를 줄이고자 한다. 현 시점에서는 어던 접근방식이 실효를 거둘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미얀마 정부의 노예 이용에는 경제적 기능이 있다. 미얀마에는 국가 주도 노에제가 거의 20년 동안 널리 퍼져 있어서, 오늘날 아태 지역에 존재하는 국가 주도 노예제 피해자 200만명 중 상당수가 미얀마인이다. 1990년 군부 정권 집권 뒤 요직에 앉은 장성들은 나라를 개인 사업체처럼 운영했다. 노예들이 임금 한푼 못 받고 나무를 베고 광물을 캐고 길을 닦고 기간시설을 건설했다. 그 중 많은 수가 인종적, 종교적 소수민 출신으로 무장 민족단체의 지원줄을 끊으려는 정부의 의도에 따라 노예화됐다. 1990년대 이후 미얀마에서는 인신매매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여성 수천명이 인신매매돼 태국에서 강제 성매매에 종사하고, 남녀 성인과 아이들이 중국, 방글라데시, 말레이시아, 한국, 마카오로 팔려가성 착취를 당하거나 가정부로 일하거나 강제노동에 투입된다.

미국 정부는 인권 침해에 대한 대응으로 미얀마에 제재를 가했지만 미국 업계는 미얀마 군사정권의 전략을 용인해 비난을 받는다. 군사정권이 진행한 사업 중 하나는 미국 석유회사 우노칼, 프랑스 토탈, 태국 회사 PTT익스플로레이션 랜드 프로덕션(태국 정부가 일부 지분 소유)과 제휴해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 사업은 수천 명의 노예화된 노동자들을 이용했다. 

미얀마 정권은 아동병사를 징집하기도 했다. 수단 정부와 달리 미얀마 정권은 이런 관행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2003년 당시 정부군에는 아동 7만명이 존재했고 일부는 열한살 밖에 되지 않았다. 그 해 모집된 신병 중 40퍼센트가 아동이었다. 
파이프라인 사업에서는 현대 노예제의 또 하나의 요소가 드러난다. 환경파괴다. 노예들은 정부의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면서 미얀마의 산림을 파괴했다. 그러자 이제 이 사업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은 마을 주민들이 노예 신세로 전락할 위험에 처한다. 정부가 노예를 동원해 나무를 벌목하면 티크 숲은 파괴된다. 그리고 목재 판매로 얻은 수익은 땅 파괴에 반대하는 소수민족들을 공격하는데 필요한 자금으로 쓰인다. 인권 침해가 곧 환경 침해로 이어지며, 그 역도 성립하는 것이다.


남아시아 강제 성매매 여성 중 많은 수가 어린 나이에 인신매매된다. 에이즈에 걸릴까봐 사춘기 이전의 어린 여자아이를 찾는 남성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미성년 소녀들은 생물학적인 이유 때문에 보호기구 없이 성관계를 가질 경우 외상을 입거나 성병에 감염될 가능성이 특히 크다.

어린 여성의 경우, 생식기 내부에 형성된 점막질 표면의 영역이 얇고 덜 성숙해 외상이나 감염 위험이 높다. 게다가 강제 삽입이 이뤄지는 난폭한 성행위는 작고 덜 성숙한 질과 자궁경부에 외상을 입히기 더더욱 쉽다. 게다가 알코올과 같은 가벼운 수렴성 용액으로 질 세척을 해 질을 건조시킬 것을 강요받기도 한다. 건조된 질 점막은 약한 충격에도 찢어지기 쉽다. 이로 인해 성명에 걸리기 쉬워지고 HIV에 감염될 위험성 또한 커진다. 성병에 감염된 성매매 아동들은 HIV에 감염될 확률이 4배로 높아진다.


지금 지구상에 '노예'로 불려야 마땅한 사람들이 2700만명이나 존재한다는 기본 '팩트'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스키너의 책을 비롯해 노예제에 대한 대부분의 글들이 다 마찬가지다. 지구상에 유사 이래 이렇게 많은 노예들이 존재한 적은 없었다. 지구상에 지금처럼 인구 자체가 많았던 적이 없었으니까. 

이 책의 저자들은 "노예의 수는 유례 없이 많지만 노예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적다"고 말한다. 현대의 경제에서 사실 인간의 노동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다.
 목화 따위를 키우는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노예 노동력을 동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전세계 목화 시장 규모에서 노예 노동력으로 생산된 목화의 비중은 굉장히 적다. 이를 테면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가 그토록 많은 까닭은?

핵심은, 노예를 구하고 부리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사상 유례없이 낮아졌다는 것이다. 유럽 각국이 노예무역에 매달릴 때에 비해, 지금의 노예들은 운반비를 비롯한 모든 비용이 턱없이 적게 들어간다! 세상에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사람 수가 너무 많기 때문, 사람 값이 그만큼 싸졌기 때문이다. 비록 비중은 얼마 안 되지만, 워낙 노예가 싸기 때문에 이 싼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노예를 부리는 이점이 생긴다.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노예제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작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값싸고 양 많은(!) 노예들을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 책의 요지다.


공급망의 모든 단계에 있는 이들이 제품 생산에서 노예제를 이용하지 않기로 한다면 노예 착취 농장이나 의류공장에 노예제 반대 활동가들을 파견하는 것은 쉬워진다. 코코아 협약은 업계가 인권단체, 소비자단체, 노동조합과 협조하면 노예제를 사라지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예는 마틴 기타 회사다. 이 회사는 환경단체들과 협조해 최고급 기타 제작에 필요한 마호가니 나무를 노예 없이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벌목하도록 하고 있다. 이 사안은 벌목장에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한 것이다.

또다른 예로 러그마크 재단(책에는 러그마크 재단으로 나와 있으나 지금은 '굿 위브 인터내셔널'로 바뀌었음)을 들 수 있다. 1994년 설립된 국제 자선단체인 이 재단은 남아시아 카펫 공장들을 조사해 인증서를 발부한다. 인증을 신청할 때 제조업자들은 열네 살 이하의 아동은 고용하지 않으며 성인 직조공들에게 최저임금을 보장할 것임을 약속한다. 가내 공장의 경우 보조자로 고용된 아이들이 정규교육을 받게 해야 하며 직기 소유주 자신의 아이들만 일할 수 있다. 
러그마크 라벨에는 고유의 일련번호가 부착돼 어떤 카펫이든 제조된 직기에서부터 매장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유럽과 미주의 카펫 수입회사들은 카펫 가격의 약 1%를 러그마크 재단에 지불한다. 이 돈은 카펫업계에서 노예로 일하다 해방된 아이들을 위한 학교와 재활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데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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