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역사
스벤 린드크비스트 지음, 김남섭 옮김 / 한겨레출판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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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폭격의 역사’에서 20세기의 가공할 폭격들 뒤에 숨겨진 인종주의의 얼굴을 보여주며 묵시록과 같은 어두운 미래상을 그려보였던 스벤 린드크비스트가, 이번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과거로의 여행을 치른다. 이 여행은 즐기며 구경하며 가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상처내며 치러내야하는 그런 여행이다.

 

알제리 내륙에서 남쪽으로 접경한 니제르 북단까지 이어지는 북아프리카 ‘사막의 길’이 린드크비스트의 경로다. 조셉 콘라드의 ‘어둠의 한가운데’를 화두 삼아 린드크비스트는 19세기, 20세기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지 점령이 어떻게 철저한 야만을 생산해냈는지를 재구성해낸다.
아프리카인들을 유럽인들이 얼마나 끔찍하게 초토화시켰는지 더 말해 무엇하랴 만은, 저자의 여행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유대인 학살로 대표되는 20세기 유럽 한복판에서 벌어진 야만적인 사건이 허공에서 떨어져내린 것이 아니라는 것, 유럽인들이 인정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부인하고 있는, 오늘날까지도 감추려고 하고 있는 그들 자신의 과거에서 배태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유럽인들은 나치즘을 다각도로 규명하려 하면서도 나치즘의 논리야말로 자신들이 아프리카에서 펼쳤던 ‘절멸의 논리’에 입각한 것이라는 점은 끊임없이 부인하고 있다. “야수들을 절멸하라”는 근대 인종주의와 사회진화론의 논리로 영국인, 프랑스인, 스웨덴인, 벨기에인들이 아프리카의 한 부족 한 부족을 절멸시켜가는 동안 독일에서는 그것을 본뜬 ‘레벤스라움(생활공간)’이라는 개념이 싹텄다. 내 살 곳을 만들려면, 내 살 곳을 늘려 남을 이기려면 남의 살 곳을 빼앗아야 하고, 열등한 야수들은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어버린다는 개념. 그것이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동유럽 점령의 기본 발상이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모래바람 날리는 북아프리카의 사막길과 유럽 옛 식민지 점령군의 잔혹하기 짝이 없는 만행들을 교차시키며 유럽 식민주의와 인종 대학살의 고리들을 파헤친다. ‘폭격의 역사’ 만큼이나 우울하고, 끔찍한, 그렇지만 대면해야 할 진실. 정복하기는커녕 남의 식민지가 되었던 나라에서 남들의 악행을 곱씹어봐야 뭐하나 할 수도 있지만, 바로 그런 ‘우리’를 향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박노자라는 사람이 질문을 던진다. “과연 과거인가?”
“피해자도 가해자도 ‘영원한 현재가 돼버린 과거’의 외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 식민지 전쟁은 이제 ‘영광스러운 문명화 작업’이나 ‘열등 인종의 제압’이 아닌 ‘더러운 전쟁’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타인종, 타문화를 ‘야수’로 보는 의식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추천의 글) 그리고 박노자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 등을 거론하면서 인종주의적 학살의 참극을 경고한다. 그러니 어쩌나. 우리에게도 ‘가해자’라는 꼬리표가 터럭 한끝이라도 붙을 수밖에 없는 것을.
유럽이라면 사족을 못쓰는(이런 표현이 좀 심하다면 ‘유럽을 애호하는’으로 바꿔줄 수도 있다) 사람들이 한둘인가. 유럽에 가서 멋들어진 궁전에 조각상들 보고 좋아라 하는 한국인들이 거의 대부분 아니던가. 올림픽대교 가운데 첨탑위의 흉물스런 조각상을 보면, 그것을 올려놓느라 헬기를 탔다가 추락해 숨진 조종사 2명의 목숨 값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유럽 그 나라들 ‘낭만과 문화’를 수십만 수백만 명의 목숨 값으로 환산해 보는 데에 익숙지 않다. 우리 뿐 아니라 누구든 그럴 것이다.

‘유럽 문명’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사하라를 종단할 필요는 없지만, 생각도 안 해보고 있다가 남의 통렬한 비판을 들으면 “너무 심하게 말하지 마” 하면서 반사적으로 방어하게 되기 십상이다. 그런 방어벽을 깨야한다는 것을 책은 줄기차게 일깨워준다.

여행을 하다 보면, 특히 내전을 치렀던 지역이나 학살이 자행된 독재국가 같은 곳을 지나가게 되면 공기가 너무 무겁거나 핏빛이어서 얼굴을 돌리고 싶을 때가 있다. 서울 바닥에서 나고 자란 풍요의 세대, 나같은 사람에게 그런 곳으로의 여행은 사실 회피하고 싶은 진실일 뿐이다. 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역사의 끔찍한 부스러기들과 대면할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두껍지 않은 이 책자에 나오는 잔혹한 사실들을 읽는 것만도 마음 불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 마음 불편함 쯤은 과감히 누르고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메시지다.

 




   
  사하라는 여느 때와 다름없다. 강한 소독약 냄새, 기름칠을 하지 않아 끼익끼익 소리나는 문의 경첩, 반쯤 찢어진 블라인드, 다리 하나가 너무 짧아 흔들거리는 테이블, 그리고 테이블 표면과 베개와 세면기 위에 얇게 덮여 있는 모래가 너무나도 낯이 익다.
...하얀 기둥과 현관, 하얀 뾰족탑과 갓돌은 외벽이 불그스레한 갈색 진흙인 도심의 건물들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블레드 에 수단’, 즉 흑인들의 나라라는 말을 따라 수단 양식, 곧 흑인 양식이라 불린다. 사실 이것은 1900년에 열린 파리 대박람회를 위해 프랑스인들이 창조한 상상 속의 양식인데, 그 뒤 이곳 사하라에 이식되었다. 현대식 건물들은 국제적 양식의 회색 콘크리트이다. (34~35쪽)
 
   

 

   
 

1887년 스코틀랜드의 외과의 던롭은 어린 아들의 자전거에 공기 고무 튜브를 장착한다는 착상을 떠올렸다. 이 자전거 타이어는 1888년에 특허 출원되었다. 그후 몇 년 동안 고무 수요가 증가하였다. 바로 이것이 콩고 체제의 야만화가 확대된 이유였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트 2세의 대리인들은 대가를 조금도 지불하지 않고 원주민들로부터 노동력과 고무와 상아를 징발하였다. 거부하면 마을이 불타고 아이들이 살해되었으며 손이 잘렸다.

이런 방식으로 처음에는 이윤이 극적으로 증가되었다. 이윤은 무엇보다도 브뤼셀을 지금도 꼴사납게 만들고 있는 셍캉트네르 아케이드, 라에켄 궁, 아르덴 성 같은 흉측한 몇몇 기념물을 건립하는데 사용되었다. 오늘날 그 누구도 이 기념물들이 얼마나 많은 손의 절단을 초래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60쪽)

 
   

 

   
  사막에는 녹슬게 할 습기가 없으므로 수많은 폐차들이 그곳에 영원히 서 있다. 사자 모래 언덕은 차량의 진정한 공동묘지다. 보통 세단으로 사막을 건너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스포츠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종종 여기서 끝난다.
바람과 모래는 곧 모든 페인트를 벗겨내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래 언덕이 예전에 죽은 낙타의 뼈들을 묻듯이 차의 뼈대를 묻지 않으면, 종국에는 금속이 마모되고 말 것이다. (153쪽)
 
   

 

   
 

1904년 남서 아프리카에서 독일인들은 미국인 영국인 및 기타 유럽인들이 19세기 내내 발휘해왔던 기술, ‘열등문화’ 인종의 절멸을 재촉하는 기술을 습득했음을 보여주었다. 북아메리카의 사례를 쫓아 헤레로인(남서 아프리카인)을 보호구역으로 쫓아냈고, 그들의 목초지는 독일인 이주민들과 식민회사가 접수했다. 헤레로족이 저항하자 아돌프 레브레흐트 폰 트로타 장군은 1904년10월에 헤레로인들을 절멸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독일 국경 내에서 발견되는 모든 헤레로족은 무장 여부에 관계없이 사살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헤레로족은 폭력 때문에 죽은 게 아니었다. 독일인들은 그들을 사막으로 몰아내고 국경을 봉쇄했을 뿐이었다.
...우기가 시작되자 독일 경비병들은 마른 웅덩이 주위에 쓰러져 있는 해골들을 발견했다. 이 웅덩이는 깊이가 7~15미터에 이르렀고, 헤레로족이 부질없이 물을 찾으려고 판 것이었다. 인종 전체, 약 8만명의 인간들이 사막에서 죽었다. 겨우 몇천 명만 남아서 독일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중노동형에 처해졌다.

그리하여 1896년 쿠바의 스페인 사람들이 고안하고, 미국인들이 영어화하고, 보어 전쟁 동안 영국인들이 다시 사용한 ‘강제 노동수용소’라는 말이 독일 언어와 정치에 들어오게 되었다. (230~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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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의 역사 - 수니파 시아파 쿠르드족의 각축 살림지식총서 269
공일주 지음 / 살림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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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지식총서’를 읽은 것은 처음인데, 이것만 그런지 다른 것들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엉성하다. 고유명사가 전혀 통일돼있지 않고 표기법도 제각각인데다가 문법상 맞지 않는 구절들도 그대로 들어가 있어서 편집자가 대체 존재하기나 했었는지 의심스럽다.

책 내용은, 작은 책 안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한 까닭에 어지간히 이라크 문제에 관심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면 이해하기가 좀 힘들 것 같다. 고유명사가 이렇게 줄줄이 나오는데 한국 독자들 귀에 익은 이름도 아니고, 그나마도 표기가 한 페이지 안에서조차 다르니. 너무 개괄적이어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어놓은 것 아닐까.

저자인 요르단의 공일주 박사는 만나본 적이 있는데, 짧은 만남에서 내 나름으로는 제법 소중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짧은 책에 ‘기대’를 했다 하긴 뭣하지만 책은 너무 담담하고 너무 간략하다. 시공디스커버리처럼 화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시리즈의 다른 테마들은 대개 한정적인데 이라크, 이란 같은 낯선 곳들은 출판사 쪽에서 너무 우습게 생각한 것 아니었을까? ‘이라크의 역사’ ‘페르시아 문화’ 같은 것들이 들어있는 걸 보면 말이다. 축구, 월드컵과 관련해서만 해도 몇권씩 시리즈에 넣으면서 메소포타미아 7000년 역사를 95쪽 안에 우겨넣은 것은 좀 심했다.

편집자의 ‘가치관’에 굳이 시비를 걸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의 ‘가치’가 어째 좀 의심스럽단 얘기다. 그나마 이라크 역사에 대한 책이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것도 이라크전 이후의 일이니 이 정도면 그래도 기특하다고 해야 하나. 중동 관련 책들을 볼땐 항상 이게 딜레마다. 평가 대상이 너무 적어 평가를 하기조차 미안하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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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22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값이 싸다고 내용까지 싸서야 ㅋㅋ 얼마전에 살림지식총서 읽은적이 있는데(안토니 가우디) 그건 괜찮았어요 딸기님 ^^

딸기 2007-06-22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래요? 이런 시리즈를 만드는 건 참 좋은 시도 같은데...
그럼 이 책이 유독 좀 떨어지는 모양이군요. 정확히 말하면 내용이 맘에 안 들거나 하는 것은 아닌데, 표기 문제는 너무 심해요.

Solpu 2008-08-31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류(교정상의 실수)도 상당히 많아보여요. 필자도 문제지만 이런 건 정말 편집자의 문제....
 
정치생태학
데이비드 벨 외 편, 정규호 외 옮김 / 당대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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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학’에서 파생되어 나온 듯한 제목에서 보이듯, 통상의 ‘환경론자들’보다 더 ‘좌파적’인 관점에서 생태위기를 바라보고 대안을 모색한 책. 캐나다 학자들 위주로 되어있는 탓인지 캐나다 사례가 많은데, 좌파들 으레 그렇듯 붕 뜬 얘기가 없지 않았다. 옮긴이는 ‘생태적 상상력과 급진적 실천의 결합’이라고 추켜올렸는데 읽는 중간중간, 그리고 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좌우 가르지 말고 구체적으로 알고 앞장서서 실천하는 것이 생태위기에 맞서는 방법 아닌가” 하는 것이다.

환경 위기는 글로벌 자본주의 때문이니깐 착취에 맞서는 것과 생태위기에 맞서는 것을 병행해야 한다! 환경위기가 꼭 글로벌 자본주의 때문일까? 두 개는 연관성이 있지만, 그 연관성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순 없다. 전체주의적인 설명은 이제 그만! 어떤 면에서는 이 책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정말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들려주는 반다나 시바의 책을 읽는 편이 더 나을 듯. 환경운동 문제점이야 많겠지만, ‘좌파적 관점이 없어!’ 하고서 비판하는 것은 꼴불견이다. 좌우 따지다가 환경 파괴된 측면도 있지 않나? 책이 근 10년 전(1998년)에 나온 것이다 보니 환경 이슈 흐름에서 좀 뒤쳐진 듯한 부분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가 없지는 않았고, 간혹 많이 재미있는 부분들도 있었다. 로드니 페퍼 ‘세계정의, 탄소배출권 계획과 지구관리청’의 경우 존 롤즈 정의론을 바탕으로 글로벌 생태위기 시대의 지구 윤리를 모색한다. 페퍼가 이야기하는 틀은 (1)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안전과 생존권이 충족돼야 한다는 것 (2) 기본적 자유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 (3) 평등한 기회와 민주주의 원리 (4) 사회적 약자들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평등’을 조절할 수도 있다는 것(‘수정된 차등의 원리’)이다. 이런 틀들을 좀 숙지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크 루츠의 ‘지구기후변화’는 기존 생태론에서 ▲과학중심주의 ▲시장만능주의 ▲지구적 관점 일변도라는 점을 비판한다. 이 부분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나부터도 저런 함정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환경 문제가 과학과, 돈과 얽혀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참 본질적이면서 어렵다. 요샌 글로벌한 차원에서 지구온난화 얘기하는 것이 대세이고 또 글로벌한 시각이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적인 차원에서의 관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결국 구체적으로 '사람들'을 생각해야만 한다는 의미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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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발명과 근대 이산의 책 43
윤상인.박규태 외 지음 / 이산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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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실망했다. 이산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 지금까지 만족도가 굉장히 높았기 때문에 이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라면 당연히 내용이 알차겠거니, 생각하고 책을 펼쳤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번 것은, 영 기대에 못 미친다. 하필이면 이 출판사에서 내놓은 그 많은 책들 중에 유독 한국 학자들이 쓴 책이 평균선 아래여서 기분이 더 찝찝하다.
그 뿐일까, 이 책은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BK21’에 참여한 학자들이 자기네들 성과를 중심으로 뼈대를 잡고 거기에 관련 분야 학자들의 글을 더 붙인 것이라 하는데, BK21이라는 세금 많이 들어간 사업의 실적이 이 정도라면 이걸 어떻게 보아야 하나? 그 지원금 잘못된 데로도 많이 들어갔다는데 그나마 그 지원금 받아 이 정도 실적이라도 내놓았으니 칭찬해줘야 하는 것인지, 한국 대학 교수들의 수준이 이러저러 하다는 것에 새삼 실망을 해야 하는 것인지.
하기는, 싸잡아 ‘한국과 외국의 수준차이’라고 하면 좀 억울할 수도 있겠다. 감동하며 읽었던 이산의 책들, 그냥 ‘외국 학자들’이 아니라 조너선 스펜스, 윌리엄 맥닐 급의 세계 초초일류 학자들 것이었으니 단순비교하기엔 무리가 없지 않다. 뭐 따지고 보면 이 책이 한국 학자들의 책 중에 최악인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산의 다른 책들과 비교할 때 별점이 많이 떨어진다(불행 중 다행인 것인지 이 책은 이산 책들 중에 유일하게 내가 돈 주고 산 것이 아니라 얻어온 것이다).
책은 한양대 일본언어문화학부 교수들이 BK21 ‘근대 일본의 국민국가 형성과 인문학의 역할’이라는 사업과제로 했던 연구를 토대로 기획됐다고 한다. 문학, 종교, 미술, 음악, 번역, 고고학 등 여러 분야에서 일본의 ‘근대화’ 작업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살핀다. 논문들은 제각각이다. 어떤 글은 일본 학자 글을 거의 짜깁기 한 수준이고, 어떤 글은 석사학위 논문처럼 딱 쓰는 사람 자기자신만을 위한 ‘아는척하기용’ 글이고, 어떤 글은 자다 봉창두드리며 염불하는 글이고, 어떤 글은 일본어로 발표했던 논문을 한국어로 다시 옮겨놓은 것이고, 어떤 글은 일본 재단 지원받아 연구한 뒤 일본 식민주의 칭찬하며 일본에서 발표했다가 여기 다시 실은 글이다. 중간중간 재미있는 대목도 있지만 어떤 글은 대체 누구 읽으라고 썼는지 모르겠고, 어떤 글은 읽으나 마나다. 나같은 사람 말고, 일본에 대해 전공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라면 혹시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어쩌면 이런 수준들은 책의 총론에 해당하는 머리말에서부터 예측됐던 것이었다. 대표저자가 머리말에서 인용한 책들이 거개는 일본 전공자도 아닌 내가 이미 읽은 것들이었다. ‘2차 사료’라는 얘기다. 에릭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과 거기서 파생된 후지타니 다카시 ‘화려한 군주’,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의 ‘번역과 일본의 근대’, 니시카와 나가오 ‘국민이라는 괴물’ 같은 류의 책들을 ‘사료’라고 인용을 해놓으니, 그 책들을 ‘교양서적’으로 읽었던 독자로서는 학자들 수준에 뜨악한 반응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연구’를 해서 일반인들에게 쉽게 풀어 설명해주는 것이 학자들이 일반인용 책을 내는 이유일진대, 이미 외국 학자들이 쉽게 풀어 써놓은 것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세금 받아 연구한 겁니다” 하니깐 당혹스럽다.
물론 이 책에 인용된 사료들 중엔 나 같은 일반인들은 전혀 모르는 사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책의 토대가 되는 ‘일본의 발명과 근대’라는 틀 자체에서 홉스봄 ‘만들어진 전통’ 수준을 넘어서려는 새로운 문제의식이나 시도가 안 느껴져 실망스러웠다. 분야별 각론에서는 ‘전통의 발명’이라는 개념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문학에서는 이러저러하게 전통을 발명해 군국주의로 갔다’ ‘미술에서도 이러저러하게 전통을 억지로 발명했다’ ‘음악에서도 일본은 이러저러하게 근대를 발명했다’ 하는 것 같아 거북살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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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와 그 불만 - 前세계은행 부총재 스티글리츠의 세계화 비판
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 송철복 옮김 / 세종연구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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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에 예일대 교수가 된 것을 시작으로 프린스턴, 옥스퍼드, 스탠퍼드 등등 미국과 영국의 ‘명문대’ 교수 자리를 돌았던 조지프 스티글리츠. 클린턴 때에는 미국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정말 쟁쟁한 경력이지만, 스티글리츠는 어찌 보면 경제학자로서보다는 ‘IMF(국제통화기금) 비판가’로 더 평판이 높다. 세계은행 부총재 겸 수석 경제학자로서 스티글리츠가 주로 했던 일은 1990년대 말 아시아 금융위기 같은 금융시스템 문제에 대응했던 IMF의 조치를 비판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IMF 모르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세계은행과 함께 이른바 ‘브레튼우즈 체제’를 움직이며 온 세상 힘없는 나라들한테(가끔은 중간 규모로 힘있는 나라들 한테도) 감놔라 배놔라 팔다리 잘라라 창자를 빼놔라 하던 이 무소불위의 권력기관, 참 무서운 조직이다.

세계은행이나 IMF나 그게 그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두 기구는 생겨난 목적이 다르다. 세계은행은 세계 각국 ‘개발’을 돕기 위한 은행이고 IMF는 여러 나라들 재정 안정을 도우려고 급할 때 돈 빌려주는 기금이다. 극도로 단순화시키자면 그래도 세계은행은 남 잘살게 돕는 좋은일 좀 하는 기구이고(조지 W 부시가 미국 말아먹고 나서는 세계은행도 완전히 상놈이 됐지만), IMF는 돈꿔주고 유세 떠는 빚쟁이다.

빚쟁이 중에서도 아주 제일 고약한 빚쟁이가 IMF다. 빚 받아내려는 건 좋은데, 남의 나라 기업들 죽여라 없애라, 사람들 밥줄 잘라라, 시장 열고 미국 물건이니 영화니 받아들여라, 주문이 많아도 이만저만 많은게 아니다.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IMF 겪어봤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다 안다(꼴통 언론들과 시장 찬양론자들 중엔 아직까지 모르는 자들도 있는 것 같다만). 그래서 IMF의 구제금융이라는 것 한번 받아본 나라 사람들에게 이 기구 이름 알파벳 석자는 몬스터급 위력을 가지며, 공포의 상징이 되곤 한다. 그 무섭다는 사채업자들도 일가족 망하게 하는 걸로 끝인데 IMF라는 이 놈들은 수십만명 수백만명 밥줄 끊는 짓을 아주 예사로 한다.


세계은행에서 옆집 IMF 하는 짓을 꼼꼼히 들여다본 스티글리츠는 참견쟁이 빚쟁이가 아주 성질 더럽고 남 망하게 하는데 선수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됐다. 이 책은 IMF가 남의 나라 재정 살리겠다고 해대는 짓이 어찌나 어이가 없는지, 어떻게 남의 나라 경제를 오히려 망치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리는지에 대한 관찰 기록이다. 에티오피아, 태국, 인도네시아, 러시아, 라틴아메리카에서 IMF는 그 나라들 재정 튼튼히 해준다며 아주 초토화를 시켜놨다. 정말 필요한 조치는 안 하고, 무리한 요구에 엄한 짓만 해서 개도국 숱한 인민을 도탄에 빠뜨렸다.

왜 그런가. 어느 나라 경제가 불안정해서 대책을 만들고 돈을 풀어 시행을 해야겠다 하는 필요가 있을 때 IMF와 해당국 정부는 진단을 잘 해서 원인을 찾아내고, 고칠 것들 순서를 잘 정하고, 그 나라 사람들 되도록 안 다치고 정치 불안도 안 생기게 차근차근 해야 한다. 그러려면 사람들 정서라든가 성장 동력이라든가 그 동네 사정도 알아야 하고 가장 잘 맞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도 해봐야 한다. 제일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돕는게 상책이고, 자기네들끼리 동력을 잘 찾아가게끔 가장 잘 돕는 방법을 찾아내 그걸 해줘야 한다.


IMF는 그렇지 않았다. 남의 나라 돕는다고 하는데 목적이 좀 불순하다. 내놓고 하는 말과 달리 이 기구 속셈은 미국 부자들, 금융회사들 돕는 쪽에 더 목적이 있는 것 같다. 금융회사들 높은 자리 있는 사람들이 IMF에서 한자리 꿰어 차는 식으로 자리 나눠먹기를 하니, IMF가 월스트리트 큰손들 손아귀에서 놀아나지 않을 수 없다.

머리만 왜곡된 것이 아니라 손발도 왜곡돼 있다. 관료주의다.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나라 일에 주문만 잔뜩 하니까 그 나라 사정과 안 맞고, 일이 제대로 안 된다. 서류 하나 놓고 이리저리 돌리면서 돈 빌어쓰는 나라들에는 “무조건 빨리 하라”고 한다. 뭘? 기업 팔고 사람 자르는 짓 말이다. 기본적으로 IMF의 발상은 ‘시장에 맡기는 게 최고’라는 것에 기대고 있다. 거기다가 오만방자하기까지 하다. 아시아 금융위기 때 일본이 돈 내겠다고 했고 아시아개발은행(ADB)도 나서려고 했는데 IMF가 막았다. 돈 빌려주는 그 막대한 권력을 남들하곤 나누지 않겠다고 하고, 그것을 워싱턴이 밀어주니까 지역에 맞는 해결책 따위는 발 붙일 자리가 없다. 스티글리츠는 자기가 지켜본 것들을 토대로 IMF의 이런저런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IMF 구제금융 받은 나라들이 그렇다고 몽땅 망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한국 경제가 지금 샌드위치니 뭐니 해서 어렵다고 하지만 한국은 구제금융에서 금방 빠져나온 경이적인 복원력을 보여준 나라다. 말레이시아도 마찬가지다. 두 나라가, 아시아 금융위기 겪은 다른 나라들보다 원래 경제가 더 튼튼했다는 것도 있지만, 유독 회복이 빨랐던 것에 대해서도 스티글리츠 나름의 진단이 있다. “IMF가 시키는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장하준이 ‘한국식(박정희식) 국가주도형 경제개발’을 많이 칭찬하는데, 스티글리츠는 ‘한국식(김대중식) 국가주도형 위기극복’을 많이 칭찬한다. 말레이시아도 마찬가지로 마하티르 모하마드라는 고집쟁이가 있었기 때문에 IMF가 시키는대로 안 하고 자기 할 말 다 해가며 경제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고 스티글리츠는 말한다.

박정희인지 김대중인지 우선 제쳐놓고, 장하준 얘기와 스티글리츠 얘기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첫째는 월스트리트와 워싱턴에 휘둘리는 국제기구나 세계화론자들 시키는 대로 하지 말아야 경제가 더 잘 된다는 것, 둘째는 뭐든지 시장에 맡겨놓지 말고 정부가 필요한 만큼 개입과 주도를 해가면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들 몽땅 팔아치우지 않고 공적자금 투입해 살릴 건 살리고 우리나라 기업들끼리 빅딜하게 하고 했던 것이 잘한 거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담이지만 그때 우리나라 언론들은 무엇을 했던가를 돌아보면 우스꽝스럽다. 스티글리츠가 비판한 짓들, IMF가 시키는 짓들 왜 빨리 안 하냐고 무식하게 정부를 ‘조져댄’ 것은 우리나라 언론들이었다. 거기에 대면 우리나라 관료들은 다행히도 기자들보다는 훨씬 똑똑했다)


제프리 삭스의 책을 이미 읽은 뒤라, 비슷한 테마를 가진 책을 또 읽다보니 아무래도 맛이 좀 떨어졌다. 제프리 삭스가 세계 빈곤 문제를 열정을 가지고 들여다보고 도움을 호소한다면, 스티글리츠는 그런 빈곤 문제를 악화시킨 IMF을 훨씬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책 자체는 트집 잡을 구석들이 좀 있다. 번역이 안 좋고 반복이 심하다. 하지만 논지가 명확하고, 한국 사례를 비롯해 동아시아 경제위기 당시 IMF 구제금융 뒷이야기들은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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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5-23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재밌게 읽었어요. 심각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