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튼로드 - 목화의 도시에서 발견한 세계화의 비밀
에릭 오르세나 지음, 양영란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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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나 멋을 냈는지 기름이 줄줄 흐른다. 프랑스 사람이 쓴 책이라서 그런가,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아메리칸 버티고>만큼이나 감상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좋게 보면 별 다섯 개, 지겹다 오버한다 느끼면 별 2개.
말리에서 미국, 브라질, 이집트, 우즈베키스탄을 오가며 ‘목화의 길’을 따라 세계화를 짚어 가는데, 목화라는 작물을 통해서 본 세계화와 그 속에 얽혀 있는 사람들을 다룬다는 발상은 매우 좋았다. 다만 뜬금없는 상념들이 섞여 재미가 반감됐다. 그나마 현장성이 가미된 부분에서도 자기 자랑(난 이렇게 민감하며 지적이고 세상을 보는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느낌이 많이 났다. 세계화와 민영화 기타 등등 여러 주제를 다루면서 여러 가지 화두를 던지려고는 하는데 일관된 줄기가 없다. 세계화를 냉소하는 노마드인 척 하다가 맨 마지막에 ‘맺는 말’ 하면서 공정무역을 은근슬쩍 깔아뭉개는 것은 또 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촌철살인의 통찰력은 분명 있다. 이 사람은 그냥 멋들어진 여행기에 전념하거나 문명비판 에세이 같은 걸 쓰는 편이 좋은 사람인 듯하다. 풍경의 한 단면을 폼 잔뜩 잡고 묘사하는 부분들은 재미있었다. 저자에겐 미안한 소리이지만 세계화 뒷조사하기는 잠시 뒷전으로 미뤄놓고 저자를 따라 세계의 낯선 풍경을 엿본다 생각하면 재미난 여행기가 될 것 같다.


▶ 소피텔이라는 간판 앞에서 꿈을 꾸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그보다 사정은 훨씬 심각한데, 왜냐하면 ‘소피텔’이라는 상표는 다양성에 증오를 품고 있는 상표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표들은 여행의 기분을 마구 뭉개 놓으려 든다. ‘그 밥에 그 나물’ 식 여행이 평안한 여행의 정점이라고 말하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실상 이것은 죽음의 전초전일 뿐이다. 죽음, 곧 無. 너무 많은 ‘아무것도 없음.’ 당신이 지구의 반쯤은 돌아다녀 보았다고? 그건 환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당신은 지난번에 묵었던 방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방에서 자게 될 테니까. 아무리 애를 써 보아도 소용이 없다. 돛을 올려도 보고, 비행기에서 기차로 바꿔 타 보아도 모두 헛일이다. 우리는 결국 우리에게서 미리 우리의 밤을 빼앗아간 힐튼이니 하야트, 쉐라톤이니 소피텔이니 하는 지루하고 단조로운 새 도시를 떠날 수 없을 것이다. (193쪽)

▶ “아, 저기 검정색 모자 쓴 사람은 카라칼파크 사람. 아마도 송아지를 끌고 버스에 탈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모양입니다. 지금 보는 것처럼 이 사람들은 가축이라면 환장을 하는 사람들이지요. 저쪽은 고려인들이고. 거 참 희한한 일이군요. 저 사람들은 보통 비행기를 타거든요. 돈이 많으니까! 망명 생활 덕분에 득을 좀 보았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 저 사람들은 스탈린한테 감사라도 해야 할 판이에요!”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스탈린이라니! 스탈린이 이 세상 끝 같아 보이는 곳에서 무슨 몹쓸 짓을 했단 말인가? 고려인들은 오래전부터 시베리아의 동쪽 끝에 거주해왔다. 이들의 숫자는 대략 20만 명 쯤 되었다.
... 스탈린은 누군가를 옮겨야 할 때, 가령 1941년 우크라이나에 살던 독일인들이나 터키인들의 경우에도 항상 우즈베키스탄을 생각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희한하지 않은가? (211쪽)

▶ 묘판의 어마어마한 규모는 공장과 도시가 성장하는 리듬에 따라 앞으로도 한층 확대될 것이며, 이는 자연스럽게 중국의 발전 방식을 다시 한 번 생각하도록 한다. 묘판의 존재는 이제까지 이어진 경제 성장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아직도 살아남은 자연에 대한 절실한 수요를 의미한다.
묘판의 존재는 또한 성급하게 미래로 돌입하고자 하는 욕망을 반영하기도 한다. 미래란 무엇인가? 미래란 이미 나무들이 성장할 대로 성장해버린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고속도로변의 묘판은 인간들로 하여금 시간을 앞당기도록 만든다. 갓 생겨난 신도시에 서른 살 먹은 나무를 심는 것은 이 도시에 어느 정도 나이를 부여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아니, 나이를 먹었다는 환상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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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지리학 - 공간으로 읽는 21세기 세계사
하름 데 블레이 지음, 유나영 옮김 / 천지인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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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괜찮은데, 큰 제목이 좀 지나쳤다. 영어 원제가 말해주듯 이 책의 주제는 ‘지리학은 중요하다’라는 것이다. 이 세상 돌아가는 일을 (특히 미국인들은) 좀 알아야 한다, 그런데 지리적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이 세상 돌아가는 일을 잘 알 수 있다, 하는 것이 저자가 말하는 내용이다. 제목에다가 괜하게 <분노>라는 강한 어감의 단어를 집어넣어놓으니 책에 대한 모종의 이미지가 선입견으로 와 박히는데, 사실 책의 ‘색깔’ 같은 것은 없다. 국제정세를 지리적 공간과 연결지어 정리한 책이다.
저자는 지리학자이지 국제정치 전문가는 아니다. 그래서 국제정치에 대한 분석은 그리 면밀하지는 않다. 하지만 책 많이 읽고 신문기사 많이 읽고 하면서 충실히 정리해(이것만 잘 해도 어느 정도 통찰력은 생긴다고 본다) 알기 쉽게 설명한다는 장점이 있다. ‘신문기사와 지도를 같이 읽는다’라는 컨셉트로 술술 읽어갈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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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게임 -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숨겨진 전쟁
피터 홉커크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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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에서 나온 책치고는 편집이 그래도 그럴듯하다. 이 출판사의 책들은 아직도 ‘운동권 책’ 스타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혐의를 갖고 있었는데, 이 책은 지도도 많고 중간에 사진도 있고... 원본이 충실하기 때문이겠지만 아무튼 내 선입견을 좀 깨뜨려준 것은 사실이다. 옮긴이의 실력이야 정평이 나 있는 바이고.
중앙아시아, 오늘날로 따지면 아프가니스탄-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인도 북부-파키스탄-중국 서부(얼마전 테러가 발생했던 신장위구르 지역)로 이어지는 지역들을 먹으려고 영국과 러시아가 얼마나 박 터지게 고심했던가를 다룬 책이다. 저자는 영국 사람이니 책의 시간은 다분히 ‘반러시아적’이다. 제국주의자들이 지구상 얼마나 많은 원주민들을 무시한채 ‘(자기들이 만든) 지도 상의 공백지대’에 깃발을 꽂으려 애썼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하면 되겠다.
저자는 “이 그레이트 게임에 참여했던 모험가 한명 한명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고 썼는데, 말마따나 탐험가, 군인들의 모험은 흥미진진하다. 책은 <재미는 있다>. 특히 책에서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히바, 부하라, 사마르칸드, 타슈켄트를 다녀온 적이 있는 내겐 이들 오아시스 한국(칸국)의 이야기는 재미있었을 수밖에. 어찌되었든 저자들은 숱한 주민들의 목숨을 벌레만도 못하게 알고 학살을 자행한 영국군(러시아군도 마찬가지이겠지만)의 더듬이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역자 후기에 적힌 대로, 그런 것들을 일일이 지적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고, 아니면 꼼꼼히 지적해가며 반발해가며 읽어야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역시나 우리는 ‘1세계’가 아닌 ‘3세계 출신’이니 말이다. 굳이 눈 흘겨가며 꼽게 보려 노력하지 않더라도, 한눈에 보기에도 저자의 시선은 영국적이다 못해 폭력적이고 제국주의적이다. “영국인들을 죽이는 잔인한 이슬람 원주민들”에 대한 비판은 황당할 정도다.
나야 중앙아시아에 관심이 좀 있으니 그럭저럭 내 짧은 여행 경험을 떠올리며 재미나게 읽었다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 사람들이 영-러 제국주의 탐사경쟁을 이렇게 기나긴 분량으로 자세하게 읽을 필요가 꼭 있을까 싶다. <자료> 차원에서 이런 책이 번역돼 나와 준 것은 고마운 일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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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잡을 벗고, 나는 평화를 선택했다
시린 에바디, 아자데 모아베니 지음, 황지현 옮김 / 황금나침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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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이란의 여성 인권변호사 시린 에바디의 자서전이다. 국내 번역본에는 <히잡을 벗고, 나는 평화를 택했다>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또 아자데 모아베니라는 ‘공저자’의 이름이 표기돼있는 것을 보면 편집이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랜덤하우스에서 나온 영어판으로 읽었는데, 한국어판 책 제목으로 보면 번역자와 기획자의 소양이 조금 부족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우려가 생긴다.
(* 책을 한번 보지도 않고 이런 지적을 하긴 좀 뭣하지만, ‘히잡을 벗고’라는 표현을 버젓이 써놓은 것을 보니 의아스럽다. 히잡이 이슬람 여성들의 머리 쓰개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기는 하지만 보통 이란에서는 몸통을 가리는 ‘차도르’를 많이 쓴다. 영어본에는 모두 ‘차도르’로 돼있는 것 같던데, 쩝. 이란은 이슬람권이지만 아랍어를 쓰지 않기 때문에 좀 다른 어휘들이 많이 나오는데 번역이 어떻게 돼있을지 잘 모르겠다.)

에바디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듣던 때가 기억에 생생하다. 에바디를 소개하는 기사를 썼고, 그 다음날에는 ‘에바디가 차도르를 쓰지 않고 기자회견을 했다는 이유로 보수파들의 공격을 받았다’는 기사를 썼다. 이란 사회의 단면은 늘 그런 것이었을까.
주변 사람들에게 늘 이야기하지만, 나는 한번 가보지도 않은 이란이라는 나라에 말도 안 되는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이란에 대한 이야기다. 이란의 역사, 이란의 여성들, 이란의 이슬람, 이란의 혁명, 이란의 억압과 인권탄압에 대한 이야기. 시작은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에바디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뒤이어 나오는 것은 민족주의자였던 모사데크 정권의 붕괴(<감히> 석유산업을 국유화한 모사데크 총리는 CIA의 도움을 얻은 레자 샤의 쿠데타로 축출됐다)와, 파흘라비 왕조의 독재 같은 정치적인 진행과정들이다.
에바디의 표현을 빌면, 1979년의 이슬람 혁명은 그보다 10여년 전 미국이 모사데크 정권을 뒤엎어버린데 대한 이란인들의 ‘조금 뒤늦은 반발’이었다. 이런 역사의 진행과정은 2차 대전 이후 지구상 곳곳에서 일반화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민족주의 정권이 세워지고, CIA 혹은 미군이 직접 개입해서 민족주의 정권을 뒤엎은 뒤 독재정권을 세우고, 독재정권에 지치고 지친 국민들이 반발해 새 정권을 만들고... 다행히 여기서 ‘악의 사이클’이 끝나면 괜찮은데, 처음부터 또다시 이 과정에 반복되면 진정 불운이다.

다시 에바디의 회고록으로 돌아가면- 이슬람 혁명이 일어났다. 그저 우리 사회가 그랬던 만큼,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한 대부분의 사회가 그랬던 딱 그 정도만큼 ‘가부장적’이었던 이란에서 에바디는 테헤란국립대학을 졸업하고 법관이 되었다. 그리고 샤를 비판하는 공개성명에 자기 이름을 쓰는, 딱 그 정도로 ‘혁명’에 동참했다. 뒤이은 이야기는 극적이다. 이슬람 혁명은 여성 판사 에바디를 법정에서 내몰았다. 혁명은 어떻게 사람을 배반하는가, 그 뼈아픈 스토리는 이란 이슬람 혁명에만 국한된 일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모든 혁명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혁명의 수레바퀴를 밀었던 사람들을 치이고 지나며 그렇게 배반을 하는 것이 아닐까.
배반당한 혁명. 이란인들은 이라크와의 전쟁, 혁명 보수파들의 탄압에 치이고 깔리고 피를 흘린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의 격랑에 빠져 침잠해 들어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에바디 같은 사람이 있었으니까. 반정부 인사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준 군사조직의 폭력을 폭로한 악바르 간지 같은 언론인(만일 에바디가 노벨평화상을 받지 않았다면 이 사람이 받지 않았을까)이 있었으니까. 에바디는 무자헤딘 할크(인민무자헤딘-이란의 무장 이슬람조직)의 선전물을 뿌렸다는 이유만으로 나이어린 시동생이 사형당하는 아픔을 겪는다. 험난한 일상은 두 아이의 엄마를, 똑똑하고 적극적이었던 전직 여성법관을 투사로 만들었다.

책에는 이란의 여러 단면이 등장한다. 이슬람 혁명 전 그런대로 서구적인 분위기가 넘쳤던 메흐라바드의 거리, 온몸을 둘러 싸매고 즐기는 겨울스포츠라는 이유 때문에 스키가 여성들에게도 허용됐다는 에피소드, 작은 분수가 놓인 테헤란 중류층 가정집의 마당 풍경, 아무리 극악한 혁명정부일지라도 최소한 선거의 유효성만은 보장해 주었던 이란 신정체제의 독특한 특성, 그리하여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투표권을 가진 대졸 여성들’을 양산해낸 체제 등등. 그런 스케치들을 접하는 것만 해도 책을 읽은 보람이 있었다.

이란은 어디로 갈까. 책이 출간된 2004년까지만 해도, 비록 한계가 많긴 했지만 이란에서는 시대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무하마드 하타미 대통령의 개혁파 정부가 집권하고 있었다. 1997년 하타미 정권의 등장은 지구촌에 쇼크를 먹인 일대 사건이었다. 그 후로 8년, 하타미 대통령의 연임이 끝난 뒤 치러진 2005년 대선에서는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라는 수구보수파가 압승해 또다시 세계에 충격을 안겨줬다.
이란이라는 나라, 지금의 모습이 어쨌든 정말 크고(크기도 크고 문명의 깊이도 깊고) 저력 있는 나라이긴 한 모양이다. 그 강고한 탄압 속에서 에바디 같은 여성들이 목숨 건 싸움을 하는 나라. 책을 읽는 동안 여러 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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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수찌와 버마 군부 - 45년 자유 투쟁의 역사
버틸 린트너 지음, 이희영 옮김 / 아시아네트워크(asia network)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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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버마의 역사와 반식민 투쟁, 군부독재와 민주화 투쟁 등을 읽기 쉽게 정리한 책 정도로 보면 되겠다.
아웅산 수찌라는 인물의 ‘신화’에 도전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쓴 것 같은데, 딱히 수찌가 ‘이래서 문제다’ 라고 할만한 부분은 안 보인다. 수찌가 오랫동안 정치활동이 금지된 채 집 안에만 갇혀 있다보니 정치적 역량을 키울 기회를 못 가진 데다 외돌토리처럼 개인 수양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얘기인데, 그걸 수찌가 모자라기 때문 혹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 보긴 힘들 것 같다. 말 그대로 상황이 그러한 걸 어떡하란 말인가. 그것은 수찌의 잘못이 아니라 군부 정권의 잘못이다.

잘못이 누구에게 있든, 아무튼 수찌가 자칫 버마 민주화 운동의 장애(까지는 아니더라도 ‘벽’ 정도?)가 될 수도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버마에 한번 가보지도 않은 나는, 그렇다고 수찌가 없는 편이 나은지, 지금이 수찌를 비판해야 할 시점인지를 잘 모르겠다.
버마 민주화운동가 마웅저씨 만났을 때에도 ‘수찌라는 인물의 한계’에 대해 물어봤는데, 버마 사람들도 그런 것은 다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수찌가 수퍼우먼이 되어 버마의 ‘민주화 이후’까지 책임져줄 거라고 생각하며 기대를 거는 이들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저 수찌는 민주화를 상징하는 ‘구심점’일 뿐이라고, 그리고 그 구심점이 있는 편이 물론 없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라고.

아직은 버마에서 ‘민주화 이후’를 생각하기엔 이른 것 같다. 버마인들이 얘기하는 8888항쟁도 올해로 20주년이 되었지만 탄슈웨 독재정권은 끄떡 없어 보인다. 사이클론 나르기스 때문에 그 난리를 치고 100만명이 죽었네 이재민이 되었네 하지만 여전히 버마가 자랑하는 ‘블러디 루비’는 팔려나간다니. 미국과 서방처럼 ‘중국 탓’을 해야 하려나?

세상 어떤 독재도 ‘끝’이 없을 정도로 강고하진 않다. 피노체트도, 박정희도, 사담 후세인도, 모두 ‘끝장’을 봤다. 그러므로 역사에 대한 낙관론을 가지고서 ‘버마에도 민주주의의 꽃이 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비록 겉보기엔 균열이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작년 양곤에서 벌어진 승려들의 항쟁과 나르기스로 인한 타격 등을 거치면서 버마 군정이 온전히 강고하게 남아있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 시대’를 열어가는 것은 수찌가 아니라 버마 민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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