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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한국사 : 15세기, 조선의 때 이른 절정 - 조선 1 ㅣ 민음 한국사 1
문중양 외 지음, 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월
평점 :
15세기 조선사를 이야기하면서 처음에 '정화'라는 낯선 이름의 명나라 환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마치 점강법처럼 핵심을 말하기 위해 멀리서부터 돌아 들어온다. 한국사 따로 세계사 따로 배우면서 그 둘을 연결짓는데에 번번히 실패했던 나의 지식세계를 알고 있다는 듯이, 다 알고 있으니 다시 시작해보지 않겠냐는 듯이 손을 내미는 듯 하였다.
조선사에 관한 한 내노라하는 학자들이 모여 만든 책이니 그 내용의 무게야 얼마나 무거울 것인가만은 이상하리만치 가독성이 좋다. 개인적으로는 이틀 간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을 기다리며 야심한 밤에연필과 다이어리에 적어가며 읽은 터였는데 보통 그 시각에 책을 읽으면 책 때문에라도 잠을 더 빨리 들지만은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 때문에 잠이 온다거나 그런 적이 없었다. 이 묵직한 책을 읽으면서 말이다. 그 사실이 읽으면서도 내내 신기하였다.
그 까닭을 짚어보자면 15세기 조선사라는 한정된 시기, 즉 태조부터 성종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점이 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한 두 권에 조선사를 다 담았더라면 아무래도 사건은 시시콜콜해지기 보다는 요약과 정리로 그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한 사건의 나열은 딱히 어떤 감정 이입이 생길 여지를 주지 못하는데에 반해 이 책은 그 시시콜콜함으로 인해 마치 소설을 읽는 듯 특정 인물에게 이입이 된다. 학자들이 언제 이렇게 스토리텔링의 힘이 컸단 말인가 의문을 품어봤지만 돌이켜보건대 역사 선생님들은 대체로 이야기꾼이지 않은가! 나 역시도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칠 때만큼은 만담가가 따로 없었다(정말?^^).
두번째 요인으로는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한 것이 아니라 주제와 시간의 흐름을 동시에 고려한 구성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구성 및 편집이 기존이 일반적인 역사서와 오묘하게 다른 점이 신선함을 느끼게 했다. 1장부터 3장까지 목차로만 보자면 시간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주제별로 조선사를 정리한 듯한 느낌이 드는데 실상 읽어보면 시간의 흐름과 딱 일치가 된다. 그 둘을 맞추기 위해 공을 들인 느낌이 들어 독자로서 기분이 참 좋았다. 가령, 2장의 목차를 보자.

보통 시간 흐름에 따라 책을 구성하다보면 왕이 교체되는 시기로 장을 바꾸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이 책은 2장의 1까지가 태종까지의 이야기이고 나머지 네 개의 주제는 모두 세종의 이야기이다. 일반적인 구성이라면 대개 <농업의 왕국>에서 시작할 텐데 그 앞에 <때 이른 절정>이라는 제목을 붙여 태종에서 세종으로 이어지는 조선 전기의 이야기가 사연이 있는 듯한 감정이 들고,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서도 세종 치세가 죽 이어지지 못한 아쉬움이 깊이 들곤 하였다.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을 고려하되 주제를 분명히 하여 내용에 몰입하게 한 점이 그 깊은 밤 나를 귀기울이게한 한 요인이 되었다.
그나저나 세종이 훌륭한 줄은 알았다만 이 책을 읽어보니 훌륭을 넘어 완벽에 가까워 놀랐다. 단호하고 추진력이 있는데 민주적이기까지 하다. 과학이면 과학, 음악이면 음악, 인문학이면 인문학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한글 창제가 세종의 지시에 따른 집현전 학자들에 의한 것이 아닌 세종의 은밀하고 위대한 친제였다는 주장이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오니 도대체 세종의 능력은 어디까지인지 놀랍기만 하였다. 책에 쓰인 바처럼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세종의 업적은 한 명의 국왕이 이룰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 주었(184쪽)던 것이다. 세종 뿐만이 아니다 성종도 단순히 경국대전의 완성과 연산군의 아버지라고만 인식했는데 알고 보니 왕의 자질이 충만한 분이었다. 특히 왕권을 강화하는 그 과정이 사뭇 주도면밀하고 추진력이 있었다. 그래서 여인들에게 인기가 많으셨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처럼 책에서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조선의 왕에 대한 생각을 전복하거나 강화하게 하는 내용들이 매우 힘있게 실려있어 쭉 몰입하게 되었다. 아마 그러한 점이 세번째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마 이 책의 저자들도 추진력과 박력은 성종 못지 않게 갖고 있는 것 같다.
각 장들 사이에 실린 흥미로운 에피소드와 화질 좋은 사진 자료들의 덕도 크다. 하지만 반면 좋은 자료들 때문에 책이 무거워진 것도 있으니 완벽하기는 이 시대에 세종 대왕 만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듯 하다. 조선의 안과 밖을 고르게 다루어주는 점도 좋았고 아마 그 부분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더 많이 다루어줄 것으로 기대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책이 고조선 이전부터 출간이 되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조선사부터 출간이 되어 그 이전이 궁금해도 그냥 아는 지식 내에서 넘어갔다는 점이다. 민음사 카페에서 편집자들이 이 책의 홍보에도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책의 진지함과 달리 홍보글은 무척 유머가 있다. 아울러 책을 읽다 발견된 오탈자를 조심스레 알려드렸더니 고마워해주셔서 참 좋았다. 책에 대한 애정이 아니겠는가. 16세기를 읽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