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랑은 너무너무 엉뚱해 중국 아동문학 100년 대표선 7
탕쑤란 지음, 김순화 옮김 / 보림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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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들을 가리킬 때 흔히 쓰이는 표현 중 하나가 '영악하다'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예전과 달리 지식의 양과 깊이가 어른에 뒤지지 않고 오히려 더 뛰어난 경우도 있어 어른들의 조언이나 충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아이들이 지혜로워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순수함을 잃었을 뿐이다.

 

 

'뻔랑'이라는 이름의 뜻이 '바보 늑대'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표지의 저 귀여운 녀석이 너구리가 아니라 늑대라는 것을 알아봤을텐데 그러지 못했다. 어린 아들은 얼굴만 보고 쥐라고 했다가 꼬리를 보라고 했더니 그래도 늑대라는 대답을 해낸다. 며칠 전 본 그림책 덕분인가 늑대라고 다 무서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세상 때가 더 묻어 더 영악해진 나보단 더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동화는 뻔랑을 중심으로 가족의 이야기가 반, 뻔랑과 친구들의 이야기가 반을 이룬다. 표지의 밝은 느낌도 그렇고 제목도 재밌어 아직 아들이 읽을 나이가 아닌데도 아들은 표지만이라도 좋으니 이 책을 쳐다보는 것을 좋아하다 결국은 읽어달래서 부분부분 읽어주고 있는데 흥미로워하더니 문득 작도 뻔랑네 집을 만들겠다고 나선다.

뻔랑네 가족은 뻔랑의 이름을 '뻔랑'이라고 지을 만큼 바보에 가까운 가족이다. 그것은 숲속마을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유달리 그들의 순박함은 상식을 넘는 수준이다. 가령, 책에 나온 구절 때문에 강도에게 알아서 돈을 베풀고, '나'라는 답을 원하는 퀴즈의 답을 제각각 구해내는 모습을 보며 다소 어이없기도 하지만 바로 그러한 그들의 순수함이 강도들을 뉘우치고 하고 더 행복한 삶에 대한 답을 얻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으니 그들의 바보스러움은 사랑스러움과 동의어가 된다. 되려 그들을 이용하려했던 염소 할아버지나 찍찍이의 영악함에 거부감이 생긴다. 하지만 우리는 뻔랑네 가족의 순수함에서 멀어져 영악함에 얼마나 많이 가까워져 있던가를 생각하면 그저 웃지만은 못할 노릇이다.

 

꼬리를 빠르게 자라게 한다고 땅에 묻고 성장촉진제를 주자고 할 만큼 황당하고 어리석어보이는 바보 늑대이지만 뻔랑 가족의 모습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행복을 알게 해준다. 거짓말을 좀더 한다면 지프차를 한 대 선물받을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달로 이사를 가는 것보다 현재 살고 있는 숲속마을을 더 사랑하며 살고자 한다. 자신의 집이 명명백백한대도 불구하고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의심이 든다면 함부로 취하지 않는다. 씨앗의 종류가 궁금하지만 그것이 나무가 되어 확인할 때까지 기다릴 줄 안다. 그 모든 것을 기쁜 마음으로 행한다.

 

한 편의 얇은 동화이지만 어른인 내가 읽는 것이 아이가 읽는 것 이상으로 큰 작용이 생긴다. '바보'라는 캐릭터가 유난히 사랑을 받았던 어느 한 시절에 못지 않게 바보 캐릭터가 사랑을 받는 요즘이다. 아마 두 시절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사람들이 마음의 여유가 급격히 줄어드는 시절이라던가 하는. 바야흐로 바보가 그리운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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