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아침
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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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으로 음각하고 음악으로 메우는 그 밤에.

- [세상의 모든 아침], 파스칼 키냐르, 문학과지성사, 2013

 

 

"오빠는 꼭 길고, 복잡하고, 인물도 많은 러시안 소설 같아요." 오늘 본 영화 [러시안 소설] 속 대사이다. 대사처럼 길고, 복잡하고, 인물도 많은 이 영화에는 두 남자가 ‘따로 또 함께’ 완성한 소설이 나오는데 소설이 사람만의 작품이 아니었듯, 인생 또한 한 사람만의 인생이 아니라는 메시지가 느껴졌다. 결국 ‘ 함께’라는 낱말만이 떠오른다. 그 답을 얻기 위해 신효는 죽음에서 깨어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러 오가면서 소설 [세상의 모든 아침]을 읽었다. 영화를 본 직후라 그런지 두 작품이 오버랩 되었다. ‘1650년 봄, 생트 콜롱브 부인이 죽었다.’로 시작하는 소설은 영화와는 달리 짧고, 단순하고, 인물도 적지만 영화가 그러했듯 ‘함께’라는 낱말을 떠오르게 했다. 영화 [러시안 소설]이 소설을 통해 ‘함께’ 인생을 완성했듯이 소설 [세상의 모든 아침]은 음악을 통해 ‘함께’ 삶을 완성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파스칼 키냐르의 작품을 처음 읽는 것이라 그가 어떤 작품 세계를 가지고 있는지 바르게 이해한 건가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누군가 이 책을 읽다보면 귀에서 음악 소리가 들릴 거라고 했는데 그 말만은 확실했다. 영화가 활자로 영상의 여백을 메웠듯이 이 소설은 활자 사이를 음악이 메우고 있는 듯 했다. 그뿐 아니라 묘사가 세밀하지도 않았는데 표지의 그림처럼 은밀한 그들의 오두막이 그려지기도 했다. 표지의 그림이 아침인 것에 반해 내가 그린 그림은 밤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아내가 살아있을 때 생트 콜롱브는 애정 표현에 인색했다. 하지만 밤에 문득 찾아온 아내의 영혼을 위해선 몇 번이고 비올라 다 감바를 무릎 사이에 끼고 기꺼이 연주할 수 있다. 아내의 영혼이 곁에 올 때에만 감정적으로 불타오르는 그의 모습이 마음 아프다. 하지만 어쨌든 그 순간만큼은 그들은 ‘함께’이다. 그게 소중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음악을 통해 나누는 것이다. 그 밤에 그들은 침묵으로 음각했던 사랑을 음악으로 메우는 것이다.

“내 슬픔을 형언할 수가 없소. 당신의 그런 질책도 어쩌면 당연해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말로는 표현되지 않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소......” (79쪽)

“그것은 어려운 일일세. 음악은 말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저 거기 있는 거라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반드시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지. 음악이 왕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는가?” (118쪽)

 

그는 함께 연주하던 큰딸도 잃었다. 말의 빈자리는 음악이 채울 수 있었지만 ‘함께’였던 음악이 혼자가 될 때의 빈자리는 말로 채울 수 없는 모양이다. 마들렌을 잃은 상실감 역시 침묵으로 표현되며 죽기 전에 함께 심었던 꽃들과 나무들을 보살필 뿐이다. 이제는 조만간 음악 자체를 잃게 될 것이다. 죽음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음악을 잃게 된다는 상실감은 침묵마저 깨뜨리고 죽음마저 미루게 한다. 생트 콜롱브 가의 음악은 언어 그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음악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밤마다 스승의 음악이 침묵을 깨뜨리길 바라며 기다린 3년이 지난 어느 밤에 평생 다른 길을 걸었던 그들은 첫 수업이자 마지막 수업을 통해 처음으로 ‘함께’ 운다. 죽음을 앞두고 함께 운다는 행위의 크기를 가늠할 수가 없다.

 

“자넨 방금 내 한숨 소리를 들었겠지? 나는 곧 죽네. 내 예술도 나와 함께. 내 닭들과 거위들만 날 아쉬워하겠지. 죽은 자들을 깨울 하나, 아니 두 곡조를 자네에게 맡김세. 자!” (120쪽)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에서 시작된 소설 [세상의 모든 아침]은 아내의 죽음에서 딸의 죽음을 거쳐 자신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상실감을 음악으로 승화시킨다. 침묵했던 사랑은 음악으로 표현되고, 함께였던 음악은 또 다른 누군가와 함께 하는 음악이 된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112쪽)지만 마레와 마지막 음악 수업을 한 다음날 아침은 특히나 그럴 것 같다. 말보다 깊은 음악, 그리고 혼자보다 ‘함께’가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테니 말이다. 내 삶을 들여다본다. 내 삶은 무엇을 통해 ‘함께’ 완성될 수 있을 것인가? 소설을, 음악을 삶의 도구로 가진 신효와 생트 콜롱브가 부럽다. 내가 가진 도구가 그들처럼 예술이라면 얼마나 삶이 아름답고 풍성할까 싶은 마음도 들지만 중요한 것은 내 세상의 모든 아침도 다시 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특별히 더 아름답게 밝아올 날 하루쯤 꿈꾸는 것으로 책읽기를 마친다.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이 밤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고민도 함께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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