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뒤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9
애니타 브루크너 지음, 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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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위치는 애니타 브루크너가 살았던 그 시대에서부터 어쩌면 이리 한 발 짝도 더 나아가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디스 호프에 대해 현재의 나는 많은 공감을 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서 공감을 했듯이.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가장 큰 계기도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이름을 별명으로 갖고 있는 여성 작가 이디스 호프의 모습은 결국 이 책의 저자 애니타 브루크너의 모습이기도 했고, 이 책의 독자인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버지니아 울프 - 애니타 브루크너 - 이디스 호프 - 나'로 흐르는 전류들을 고스란히 느끼는 시간이었다.

 

안타깝게도 문학 속의 섬세하고 예민한 여성들의 애인은 왜 다들 가정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속상하다.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 아니에르노의 [단순한 열정],그리고 이 소설 [호텔 뒤락]까지 그토록 지고지순하고 섬세한 여인들의 사랑을 받는 이가 왜 하필 그녀들에게만 지고지순할 수는 없는 남의 남자들인지, 그 때문에 그녀들이 얼마나 마음 아픈 사랑을 해야하는지를 생각하면 말할 수 없이 속이 상한다. 하지만 또 그 불균형한 사랑에 매력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순전히 독자로서만 말이다.

 

내가 보기에 이디스 호프는 앞의 두 소설의 여주인공들보다는 정상적이다. 집착하지도 않고 남들이 보기엔 오히려 남자들에게 무심한 정도이지 병적인 모습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정이 있는 남자 데이비드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뒤로한 채 결혼도 하려고 했다. '사랑과 전쟁'의 관점에서 보자면 남자의 가정을 파탄 내어서라도 그 남자를 쟁취하겠지만 아마 이디스의 성격으로는 요새 태어났더라도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저 안락한 삶을 보장하는 무미건조한 결혼 생활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결혼없는 사랑도, 사랑없는 결혼도 그녀는 선택할 수 없었다. 많은 고민이 되었다. 나라고 해도 별 다를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호텔 뒤락으로 나를 보내버린 퍼넬러피가 고마울 지경이다. 이상하리만치 공주병이 심각한 여든이 다된 퓨지 부인과 시녀병처럼 보이는 그녀의 딸 제니퍼에게 좀 시달리고, 거식증에 걸린 모니카와 커피한 잔 마시는 것이 차라리 낫지 그 고민의 상황을 스스로 헤쳐갈 만큼 우리(이디스와 나)는 강단있지 못하다.

 

이 이상한 삶의 막간이 불편하긴 했어도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할 필요에서 그녀를 해방시켜주긴 했다. 그리고 이 순간 바닥에 돌이 깔린 기분 좋은 야외식당에서, 정말 유별난 성격이지만 통찰력 있는 한 남자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깊이 고민해봐야 할 일들을 잠시 잊게 해 주었다. (188쪽)

 

문제는 이 남자 네빌 씨이다. 이디스를 사랑하지도, 이디스가 사랑하지도 않는 이 남자. 결혼에 대해 상당히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 남자는 이디스의 일과 결혼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하마터면 이디스를 또다른 문제 상황에 갇히게 할 뻔한 아주 위험한 남자이다. 사실 네빌 씨의 결혼관에 어느 정도는 동의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의 사랑없는 결혼에 대한 굳은 의지는 무척 위태로워보였다. 어쩌면 그 역시 호텔 뒤락, 그 이상의 장소에 가서 생각을 달리 할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디스가 다시 자신의 작은 집으로 돌아가 현실을 피하지 않고 기꺼운 마음으로 돌파하려하는 모습은 무척 반갑다. 왠지 나도 그런 상황이 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녀와 함께 시들시들했던 것과 달리 이번엔 그녀의 건강한 발전에 정신이 번쩍 들며 용기(?)를 내어볼 것 같다. 그녀를 숨기지도, 그녀의 일을 제한하지도, 그녀의 사랑을 위축되게 하지도, 그녀를 거부하거나 무시하지도 않을 사랑과 결혼하는 것에 당당해지길 응원해본다. 그나 저나 나도 머리 복잡할 때 퓨지 부인 구경이나 하며 있을 '호텔 뒤락'같은 장소 누가 보내주면 좋겠다. 계절이 바뀔 정도라....생각만 해도 숨통이 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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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10-2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좋은 책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그렇게혜윰 2013-10-28 21:19   좋아요 0 | URL
덤덤한 듯 한데 여운이 있는 소설이네요. 하지만 무엇보다 한 계절만이라도 현실을 떠나 있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