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구효서 작가의 소설을 몇 편 연달아 읽었고, 그 깊고 넓은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었다. 하지만 내가 정작 제일 먼저 작가의 소설을 읽게 된 것은 바로 [별명의 달인]을 비롯한 그의 단편들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별명의 달인]이란 이름을 걸고 이번에 신간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나온다 나온다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알리미 문자를 받고 보니 설렌다.

 

<목차>

 

바소 콘티누오 ‥‥‥‥‥‥『현대문학』 2011년 2월호
별명의 달인 ‥‥‥‥‥‥『세계의 문학』 2010년 겨울호
모란꽃 ‥‥‥‥‥‥『문학동네』 2008년 가을호
6431-워딩.hwp ‥‥‥‥‥‥『학산문학』 2012년 봄호
산딸나무가 있는 풍경 ‥‥‥‥‥‥『대산문화』 2012년 봄호
화양연화 ‥‥‥‥‥‥『문학나무』2011년 겨울호
저 좀 봐줘요 ‥‥‥‥‥‥『현대문학』 2012년 7월호
나뭇가지에 앉은 새 ‥‥‥‥‥‥『현대문학』 2009년 12월호

 

 

우와 이 센스 있는 목차 좀 보게! 목차에 이렇게 발표지면이 실려있다니!

 

구효서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깊이와 넓이(이것은 오래 글을 쓰신 소설의 달인들의 소설을 읽다보면 대부분 느끼게 된다.)보다 글에서 느껴지는 세련되고 젊은 감각이었다.  다른 소설들을 읽어보아도 토속과 고귀함을 넘나들고 안정과 실험을 동시에 한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런 다양한 시도들이 작가의 글을 늙지 않게 하는 힘이겠구나 싶다.  마치 이 소설 속에 멋스러움과 가당찮음의 경계([6431.hwp])라는 말이 나오는데 구효서의 소설이 그 둘을 동시에 오간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일단, 읽은 바 각각의 작품에 대한 짧은 후감과 밑줄 친 것들을 올려본다. 더불어 한 번 더 읽게 될텐데 그후 리뷰를 남겨보길 스스로에게 바라본다. 막연한 듯 선명하고, 길을 보여주는 듯 슬쩍 감추는 통에 사실 재주없는 글로서 정리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다만, 그 단단한 느낌을 품고 있을 뿐이다.

 

<바소 콘티누오>를 읽다보면 마주본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꼭 마주보아야 마주보는 것인가 하는 생각, 같이 하고 있다면 그것이 마주본다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 이를테면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같은.

두 사람에게 오랫동안 익숙한 것이다. 그렇게, 함께하는 응시의 순간들이 모여 세월이라는 시간의 숲을 이루었다. 숲은 길어지고 우거지고 깊어졌으나 등뒤 풍경으로만 저물어갈 뿐, 그들은 그것을 뒤돌아보지 않는다. 나란히 앞을 바라보는 사이 배경의 숲은 저 홀로 그윽해질 뿐이다.

 

<별명의 달인>을 읽으면서는 타인에 대한 내 마음대로의 이미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가 만들어버린 타인의 이미지에 대한 강박,,,없을까? 분명 있을 것이다.

와이프 별명이 베아트리체였어.

라즈니시가 말했다.

애칭이었지. 물론 내가 지어준. 와이프도 나름 그걸 소중하게 여기며 지금껏 살아왔다고 믿었는데 어느 날 나한테 말하더군.

라즈니시 입술에 옅은 미소 같은 게 스쳤다. 그렇게 한동안 말이 없었다.

뭐랬는데?

그가 물었다.

웃기지 마셔. 나, 베아트리체 아니거덩!

 

<모란꽃>은 내가 여자라 그런지 삶을 살수록 공허한 느낌이 드는 탓인지 다음 문장에 공감하며 몰입했다.

 어쩌면 어떤 실체와 맞닥뜨리고 싶었을 것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지금껏, 나와 동떨어져 있었으니까. 무엇 하나 나와 착 붙어 있질 않았다. 늘 거리감이 있었고, 비켜났고, 부유하는 듯했고, 비위가 상했고, 불명확했다. 애착을 못 느꼈다. 그랬으면서, 그랬기 때문에, 바로 이거다! 라는 기분을 언제나 목말라 했다. 어딘가에 내 진짜 삶이 준비돼 있는데 길을 잘못 들어 그곳을 못 찾고 있을 뿐이라 생각하면 애가 탔다. ------집이 점점 가까워졌다. 뒤돌아, 왔던 길로 가버리고 싶었다. 어딘가에 있을 내 별로.

 

<6431-워딩.hwp>은 왠지 구효서 소설가가 소설과 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나에겐 말과 글이 따로일 수 없다. 허공 중에 흩어지되 무시로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거듭 뜻을 일깨우는 게 형의 말이라면, 내 말은 언제든 다시 들춰볼 수 있는 글이된다. 그렇게 지금껏 적은 글이 6430개의 파일로 남았다.

말의 궤적이었다. 지나온 자국으로서의 궤적이 아니라, 내 삶이 나아가고자 했던 이정표로서의 궤적.

 

<산딸나무가 있는 풍경>은 좁은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혈연 뿐이겠는가 우리가 누군가를 배제하는 일이. 그들은 그자리에서 튀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하는 만큼의 삶을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그 모호한 거리를 두면서 말이다.

말이 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품고 산딸나무는 새 자리에, 있을 수 있을 만큼 서 있을 것이다. 당신은 새집에서 살 만큼 살 것이다. 나는 마을을 오르내리며 기념관의 지붕과 마당과 산딸나무를 바라볼 것이다. 개울은 원래 그랬다는 듯 흐를 것이고, 은백양 잎은 바람에 하얗게 뒤집힐 것이다. 정화백의 그림처럼.

 

사랑에 대한 기억으로는 <화양연화>에 나오는 '넌 정말 나와 너무 똑같아서 슬프다'라는 구절이 추억에 젖게 한하다. 그런 사랑,,,

 

<저 좀 봐줘요>는 다른 작품들과 사뭇 다른 느낌이 들기도 했다. 몽환적이기도 하고, 은비라는 존재가 신비롭기도 하다. 이국적이기도 하고 토속적이기도 한 느낌이 공존하는 단편이었다. 소설이지만 어떤 영상이 펼쳐지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는 삶의 피로감이랄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했다.

재주와 웃음은 의도된 분망 뒤의 허약함까지 다 감추진 못했다. 마침내 태평양 끝까지 다다르고야 만 고단함. 더이상 오갈 수 없는 교착. 누나는 사이판 동북단 반자이 절벽 위에 표표히 옷자락 나부끼며 홀로 서 있는 거였다.

 

이미 많은 팬들이 있는 구효서 작가이지만 만약 작가의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소설집으로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 <바소 콘티누오>가 재밌다면 <랩소디 인 베를린>을 읽어보면 좋겠고,  <산딸나무가 있는 풍경>이나 <저 좀 바줘요>가 재밌다면 <라디오 라디오>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나도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어본 것은 아니라 권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이지만 시작은 [별명의 달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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