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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사과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5월
평점 :
황금 사과, 너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 황금 사과, 김경욱, 문학동네, 2002
사과의 계절이다. 서양의 기독교에서는 인류 최초의 음식이고,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들만이 가질 수 있었던 고귀한 물질이었다. 가을빛을 가득 담고서야 열매를 획득할 수 있었던 시대를 지나 지금은 사시사철 돈만 있다면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과일이 되었다. 탐할 수 없었던 것조차도 모두 득할 수 있는 시대에 이제 와서 ‘황금 사과’를 들먹인 이유는 무엇일까? 독자를 파리스 삼아 베르송은 속권인가, 교권인가, 이단인가를 심판해 보라는 에리스의 주문 같은 것일까? 1998년 7월 12일 파리의 소르본 대학 도서관 고문헌실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더 멀고 낯선 1298년 프랑스 베르송의 주교 피에르의 죽음으로 나를 데려가 ‘황금 사과’를 손에 쥐어 준다. ‘나’의 손을 따라 ‘-말하자면, 이것은 내 젊은 날 우연히 만났던 어느 요리사에 대한 이야기이다.(22쪽)’라는 문장을 읽으면서부터 오로지 심판은 독자의 몫이다. 작가는 이 책을 텍스트라고 규정함으로서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겹쳐 읽으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사건 하나 질문 하나는 <황금 사과>이기 이전에 <장미의 이름>에도 해당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오로지 <황금 사과>만 읽었기에 내가 가진 이 의문들은 <장미의 이름>이 아닌 <황금 사과> 그 안에서만 유효하다. 그러하므로 내게 이 책은 당연히, 텍스트가 아니라 작품이다. 지금 내 손엔 작가가 쥐어준 ‘황금 사과’가 쥐어 있다. 이 사과를 누구에게 건넬 것인가? 나는 파리스처럼 감언이설에 넘어가 사과를 특정한 누군가에게 건넬 생각이 없다. 다만 이것을 텍스트가 끝날 때까지 꼭 쥐고 있음으로써 그들을 압박할 생각이다. 그리고 때때로 그들을 심판하고 ‘재앙’을 선물하여 조롱할 생각이다.
프랑스 베르송은 교황청과 프랑스 국왕 모두가 자신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특수한 지역이다. 주교가 죽었으니 다음 주교를 뽑아야할 터, 교황청은 교황청의 사람으로 국왕은 국왕의 사람으로 거기에 레이몽 부주교는 자신을 차기 주교로 삼고 싶다. 꼴사나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현재 각 지역의 수장이라는 사람들이 한 사람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잇속에 열을 올리는 모습은 윌리엄이나 제롬, 토마스 못지않게 내가 봐도 참 꼴사납다. 윌리엄의 말처럼 ‘모두들 의로움보다는 이로움을 좇는’ 모습이었다. 이 꼴사나움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을까? 나는 그들에게 페스트를 선물하기로 했다. 윌리엄이 글로 쓰기도 민망할 정도의 막말이 오가는 참사회의 소란을 막은 것은 토마스 사제의 등장이었다.
“그러니까, 사인이 바로……페스트가 틀림없다고……판정을 내렸습니다.”
이 말에 이어 교권과 속권은 마치 육탄전을 벌이며 국회 의사당을 폭언과 폭력으로 물들였다가도 금세 허허실실 웃으며 국회를 나오는 국회의원들의 모습만큼이나 익숙하게 서로 사죄하며 악수를 나눈다.
질베르 영주의 돈 자랑 만찬 역시 참사회 못지않게 비웃음 거리었다. 자신의 권력을 교황청에게 과시하며 차기 주교를 자신들의 측근으로 선출하려는 그 속셈을 모르는 이는 없었지만 눈앞의 음식에 넋을 잃은 교회 사람들의 모습은 보는 내가 비참해졌다. 그래서 이번엔 그들에게 인육 파이를 선물하기로 했다. 자신의 만찬에 오른 음식이 인육 파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질베르 영주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자신이 주억주억 먹은 그 파이가 인육 파이임을 알고 난 교회 사람들의 속은 어떠했을까? 고소하다. 그러나 재앙을 해결하는 그들의 모습은 놀라웠다. 장과 로제 그리고 마리를 살인자가 아닌 이단으로 몰고 가는 데에 힘을 합쳤던 교권과 속권의 모습은 서로 으르렁 거리다가 막강한 적수가 나타났을 때 언제 그랬냐는 듯 연합하여 흠집 내기를 하는 정치권의 모습을 닮았다. 황금 사과는 여전히 내 손에 있다, 그들에겐 결코 쥐어줄 수 없다.
교권과 속권 외에 이단이라 불리는 한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나는 황금 사과를 이 무리에게 줄 것인가? 피에르 주교와 제롬 사제, 윌리엄의 아버지는 이단이라 불리는 무리였던 것인가? 윌리엄이 혼란을 느꼈던 것만큼 나 역시도 혼란을 느꼈다. 그러다 결국 ‘황금 사과’는 처음에 마음먹었던 것처럼 아무에게도 주지 않기로 했다. 다만, 이단으로 처형된 푸줏간 사람들과 이단으로 몰린 사람들을 조롱하지는 않기로 했다. 피에르와 로제, 제롬의 마지막 모습은 비열하지 않았으므로. 조롱은 탐하지 말아야 할 것을 탐한 자들을 위한 것이므로.
파리스는 황금사과를 아프로디테에게 바치고 헬레네를 얻었다. 이로 인해 트로이는 짓밟히고 말았다. 탐할 수 없었던 것을 탐했던 탓에 일어난 일이다. 탐할 수 없었던 것을 탐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에게 무시로 주어지는 황금 사과들이 맛을 보아도 되는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해 본다. 사과의 계절이다. 계절이 사라지는 지금, 이 계절을 사과의 계절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에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 아직은, 이 계절을 사과의 계절이라고 부를 수 있어 다행이다. 아직은, 우리의 삶을 삶이라 부를 수 있어 다행이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던 ‘황금 사과’를 마지막 장을 읽으며 다시 1998년 7월 12일 파리의 소르본 대학 도서관 고문헌실로 돌려놓았고 그 뒤는 ‘나’에게 맡겼다. ‘나’가 읽었다던 프란체스코 회의 어느 수도사가 지었다는 시편을 따라 나도 한 번 물어본다.
황금 사과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어디에서 누구의 마음을 욕망으로 물들이고 있는 걸까?
어떤 이의 용맹함과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과 고귀함과 빼어남과 지성을 앗아가고 있는가?
*모두들 아시겠지만 제목은 김경주 시인의 시집을 차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