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침대에 누워 있으면 참 좋다. 유난히 햇살이 잘 들어오는 때에 눈을 감고 있으면 햇살이 날 품어주는 것처럼 그렇게 편안하고 달콤하다. 침대는 그런 곳이다. 한 번 쯤 누구나 바라 보지 않았을까, 이 침대에서 하루 종일 뒹굴기만 하며 보내고 싶다는 생각. 일상의 무언가가 피곤할 때 침대라는 안식처에서 오로지 나를 위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 해 보지 않았을까? 침대는 그런 곳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어릴 적 드라마를 보며 꿈꾸던 그런 삶은 아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무런 거부감도 없이 받아들인 것일까? 사실 맬컴처럼 한 번쯤 저항을 해 볼 법도 하거늘 왜 우리는 쳇바퀴 돌듯 누구나 같이 돌아가는 그 힘겨운 삶을 어른의 삶이려니 그저 받아들이기만 했을까? 침대에서 7484일을 산 남자, 누워서 먹고 자고 하느라 몸무게가 635킬로그램까지 불어난 그 남자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한심한지 돌아보게 된다. 비록 그와 함께 산 가족들은 멜컴의 말과 달리 구원은 커녕 파괴되었을지 몰라도 <침대> 속의 맬컴의 주변에서 한 동안 함께한 독자들은 조만간 구원받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이 문장은 책 속에서 두 번(세어본 것이 아니므로 그 이상일 수도 있다.) 반복된다. 처음 읽었을 땐 허공에 있는 말처럼 잡히지 않더니 두 번째 읽었을 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노마 비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끝까지 바라봐주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죽지 않게 침대에서 끌어내고 밥을 굶겨 우리가 정상이라고 부르는 삶 속으로 끌고 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건 사람을 살릴 수는 있어도 어쩌면 사랑은 아닐 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루와 맬컴의 어머니가 사랑하는 방식도 노마 비와 같았다. 그 방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나'의 삶은 질투와 결핍으로 똘똘 뭉친 어쩌면 침대 위의 형보다 더 불행한 삶이었을 것이다.

 

형이 침대에서 산 7484일 동안 형은 당당했고 행복했다. 그 곁에서 불행한 것은 동생인 '나'였다. 다른 사람과 다른 삶을 살면서도 스스로 위축되지 않은 채 그 생활을 즐겼던 형에 비해, 동생은 형이 받는 헌신적인 사랑에 대한 질투와 결핍을 느껴야 했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세상 모든 사람들의 부정적 관심을 받아야하는 형에 대한 질투와 결핍이라니!

 

우리 대부분은 맬컴이 아닌 동생이다. 내 삶을 부던히 열심히 살고 있는데도 그렇게 행복하질 않다. 맬컴만큼은 커녕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의 삶도 전적으로 그에 맞춰버린 어머니와 노마 비, 루 만큼도. 어쩌면 루의 아버지나 맬컴의 아버지 만큼도 특별할 게 없는 삶이다. 아마 그 삶 속에서 행복해하고 특별한 삶을 영위했다면 맬컴의 침대 생활은 더 일찍 끝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누워서 가만히 있으며 보아도 서서 돌아다니는 젊은이의 삶이 그리 행복해보이지도 특별해보이지도 않으니 굳이 일어서서 남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갈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것에 일면 공감이 가기도 한다. 우리는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

 

우리가 침대에 눕는 순간, 꿈이 우리를 부른다. 꿈 속에서 나는 특별한 사랑을 하기도 하고, 색다른 곳에 가기도 한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손을 잡고 있기도 하다. 달콤하다. 꿈에서 깨어 침대에서 일어난 우리는 매일 같은 사람들과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음식을 먹으며 같은 이야기를 나눈다. 한숨 난다. 맬컴이 우리를 구원할 지도 모르겠다. 내일 아침엔 좀더 색다른 옷을 입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잠시 침대에 더 누워있을 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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