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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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 괜찮은 거니?>

 

   

  그 나이엔 흔들리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그 나이엔 까칠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그 나이엔 아프지 않은 것이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 난 그 나이에 흔들리지 않았고 까칠하지 않았고 아프지 않았다. 주어진 삶에 순응했고,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기에 그렇게 사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서른이 훌쩍 넘은 이 나이에 흔들리고 까칠하고 아픈 것인가 보다. 그러하기에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 한스 기벤라트를 만난 것이 무척 기쁘다. 남들보다 늦게 이 작품을 만나는 것이지만 내 경우엔 지금 만나는 것이 훨씬 더 큰 힘과 격려, 위로가 되었다.

 

“아버지는 그리스어를 하나도 모르잖아요!”

   한스가 시험을 망쳤다고 생각한 후 아버지의 꾸지람에 대해 쏘아붙인 저 말은 당시에는 꾸중에 대한 항변이었을지 모르지만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보아도 아버지는 정말 아무 것도 몰랐다. 아들이 얼마나 지쳐있는지, 아들이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 아들이 얼마나 벗어나고 싶어하는지 말이다. 그런 아버지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곳이 바로 학교이다. 헤르만 헤세는 소설 속에서 당시의 학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숨기지 않는다.

교사의 의무와 국가가 교사에게 맡긴 직무는 소년들의 거친 힘과 자연의 욕망을 제어해 뿌리부터 송두리째 뽑아버리고, 그 대신 국가가 인정하는 차분하고 절도 있는 이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59쪽)

평소 별생각 없이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죽은 학생을 보면 모든 생명과 젊음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잠시나마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다.

(110쪽)

  섬뜩한 문장이지만 어린 한스는 이런 학교와 교사의 역할에 충실했다. 장난을 치러 쏘다니지도, 수업시간에 웃지도, 낚시를 하지도 않으며 공부에 매진한다. 2등이 아닌 1등 학생이 되기 위한 한스의 노력은 우리가 학창시절 사실은 우리의 목표가 아닌 부모님과 선생님의 목표인 대학 진입을 위해 매일 구부리고 앉아 공부를 했어야 하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대학에 가면 모든 것이 자유라고 우리를 세뇌시킨 많은 말들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있다. 집을 떠난 한스와 우리의 아름다운 시절, 그것만큼 허무한 꿈이 어디있을까. 우리는 참 잘도 속았다. 모두가 같은 욕망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을 바보같이 알지 못했다.

 

"아, 우리도 저런 구름이 될 수 있다면!"

   한스의 마음 속에 남의 욕망이 대신 들어있었다면, 하일너의 마음 속에는 자신만의 영혼이 들어있다. 남의 욕망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남들이 인정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만의 영혼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는 열등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자신의 영혼을 가진 하일너는 퇴학을 당하고서도 '어엿한 한 남자'가 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한스는 두 마음을 모두 품은 채 방황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언제까지 어린 기벤라트일 수는 없다는 것을 몰랐던 것일까? 언젠가는 스스로의 가치를 스스로 찾기를 바라는 때가 온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는 것일까? 더이상 어리지 않은 한스의 무기력하고 다소 환각적인 행동들을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파왔다. 가장 예민하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시절, 한스가 구름이 되고자 하는 꿈을 꿀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무지막지하게 몰아댄 망아지는 길에 쓰러져 이제 쓸모가 없어진 것이(141쪽)라는 말이 듣기에 무척 냉정한 말이지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말이 되어버렸다. 무엇 때문에 한스를 무지막지하게 몰아댔는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우리의 아이들을 그리고 자신을 무지막지하게 몰아대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아,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의 아름다운 시절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어린 한 시절 늘 행복감에 젖어 고무줄 놀이를 하고, 말타기를 하고 숨바꼭질을 하고 "선영아 놀자!"라고 집앞에서 코를 빼고 부르던 기억이 있는데 다 어디로 간 걸까. 한 번 깨우쳐진 영혼은 다시 우둔해지지 않았다. 한스의 마음과 정신은 개선되는 것 없이 아파만 갔다. 헤세의 말처럼 '건강한 삶은 모두 나름의 내용과 목표를 갖고 있지만 한스 기벤라트는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다.(162쪽)'

  죽음조차 동경의 대상이 되던 때에 사랑이라도 건강하게 와 주었다면 어쩌면 한스는 하일너처럼 '어엿한 한 남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자신이 살고 있는 지금을 아름다운 시절로 만들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표현할 힘도 용기도 없던 한스의 불행은 이미 정해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기계공보다는 서기가 어울릴 것 같았던 한스가 기계공을 선택했던 것부터가 내심 많이 불안했다. 죽고 싶었지만 젊은 까닭으로 스스로 죽지 못했던 그가 결국 바로 그 젊은 나이에 죽어야만 했던 모든 원인이 마음 아프다. 한스가 그 지경이 되는 걸 도와준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는 이가 구둣방 주인만은 아닐 터이기에.

 

  수레바퀴 아래 깔려도 빠져나올 방법은 있고, 살아날 방법도 있다. 만에 하나 수레바퀴 아래 깔리더라도 그것을 헤쳐나올 힘을 기르도록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 오직 수레바퀴 아래 깔리지 않는 방법만 알려준다. 그것이 한스가 살았던 당시의 교육이고, 이는 지금의 교육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 대학에 가건, 진로를 스스로 결정하여 자신을 빛나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고 그저 좋은 대학에 가는 방법인 성적만 올리라고 한다. 청소년 시절 '수레바퀴 아래서'는 진로를 결정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책일 수 있지만 그 보다 곱절의 나이를 먹은 지금 '수레바퀴 아래서'는 삶의 가치를 새삼 깨우쳐 주는 소설이다. 내가 사는 삶의 질과 내 삶의 정체성에 대한 가치를 생각해보며 한편으로는 힘과 격려를, 다른 한 편으로는 위로를 받는다. 내 삶, 괜찮은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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