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 초판본 완역판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강미경 옮김 / 느낌이있는책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제대로 된 풍자이다. 인간이 곧 돼지이고, 돼지가 곧 인간의 모습을 하는 것 그리고 후이넘(말)의 격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야만스러운 야후(인간)의 모습 모두 아주 제대로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돼지와 같고 말보다 못하다는데 그보다 심한 모욕은 없다만 읽는 내내 그렇지 않다고 애써 반박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동물 농장 - 조지 오웰 / 문학동네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 느낌이 있는 책

     

우선, 이 책의 표지가 조지오웰급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비가 내리는 배경은 돼지의 위치(물리적, 사회적)를 도드라지게 해 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조지오웰급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풍향계의 약자의 배치이다. NEWS로 묘하게 틀어놓은 방향! 아!! 볼수록 매력있다. 돼지 주제에 뉴스라니! 하! 감탄스럽다! 

 

"---인간은 생산은 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유일한 동물이요. ---그런데도 모든 동물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소.---." (13쪽)

 

그렇다. 인간은 알을 낳는 것도 아니고 우유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고 가죽을 내놓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자신들은 취하기만 할 뿐 다른 동물들에게 아무 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가끔 사랑을 제공한다는 이도 있으나 그것 역시 제공이라고 하기엔 이득이 너무 크다. 개인적으로 모든 동물은 평등해야 했어야 한다는 생각을 메이저 영감을 통해 처음 해 보는 것 같다. 인간이 모든 동물의 우위에 있는 것, 그거 누가 정한걸까? 난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배워서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인간을 모든 동물의 우위에 스스로 올려놓고 산다. 동물의 왕인 호랑이가 콧방귀를 낄 노릇이군.

 

왼쪽의 저 돼지들의 혁명과 달리 <걸리버 여행기>에서 인간 세상을 풍자하는 것은 돼지나 말이 아닌 사람이다. 여행을 좋아했던 한 남자가 16년의 특별한 여행을 통해 인간보다 추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것을 사실 그대로 알리고자 썼다는 책. 인간의 입에서 소인국, 거인국, 후이넘의 나라를 동경하고 존경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은 다른 동물들에게 듣는 말보다 강했다.  

 

타락한 인간과 반대편에 있는 탁월한 네발짐승, 즉 후이넘들의 미덕이 내 눈을 밝혀 주고 이해의 폭을 넓혀준 결과, 인간의 행동과 욕망들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인간의 명예를 내세울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379쪽)

 

탐욕스럽고, 야비하고, 자신의 이성을 나쁜 일에만 쓰고자 하는 비인격적인 모습이 가장 사람다운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 걸리버는 거울을 보는 순간 가장 치욕스럽다. 자신이 야후(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신의 종족 본성에 역함을 느끼게되는 그 시간이 우리에게 전혀 없는 걸까? 수많은 다툼들과 범죄들이 역겹다는 건 작가가 살았던 그 때보다 더 심해진 것 같다.

 아무튼 상이 변했다. 혁명을 통해 농장은 돼지들의 것이 되었고 그들에겐 자유가 있었고 풍족함과 여유로움, 민주적인 절차가 보장되는 듯 했다.이름도 <동물 농장>. 동물이 주인이 된 농장이다.

 

일곱 계명

1. 두 발로 걷는 자는 누구나 적이다.

2. 네 발로 걷는 자 또는 날개를 가진 자는 누구나 친구이다.

3.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된다.

4.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

5. 어떤 동물도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6.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된다.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고 나면 결국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가지게 되면 돼지도 두 발로 걷게 하고 침대에서 자게 하며, 더 평등한 몇몇 동물이 되게 한다.

 

힘없고 선량한 동물들은 권력을 가진 지도자들을 믿고 따르지만 결국, 그들은 점점 굶주리고, 속고, 버려진다. 그들이 노동한 대가는 더 평등한 몇몇 동물들이 취하게 되고, 그들이 그리워한 자유 역시 그 돼지들의 차지이다. 풍향계 위에 올라가서 새로운 소식이라며 거드름을 피우고 사기를 치는 모습에 분통해 하지만 이미 한참을 속은 뒤이다. 이름도 <매너 농장>으로 바뀌지 않는가.

 

벤저민이 믿었던 단 한 가지 "풍차가 있든 없든 삶이란 언제나처럼 고생스러울 것"이라는 항목만이 유효할 뿐이다. 어리석은 우리들이여, 권력을 차지한 채 언제나 새로운 소식이라며 우리를 현혹하는 돼지들을 조심할 지어다. 그것은 아주 인간적인 더럽게 인간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걸리버가 처음부터 인간에 대해 역겨움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릴리풋(소인국)이나 브로브당나그(거인국), 라퓨타 등에 갔을 때는 자신과 다른 존재들에 대한 넓은 이해를 하는 좀더 나은 인간의 모습이었다. 영국인으로서의 품위도 가지고 있었고 자긍심도 있었다. 각 지역의 특색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유연하나 태도가 있었지만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았고 영국에서의 삶도 별 탈없이 살 수 있었다.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인 걸리버는 동시에 당시로서도 무척 깨어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생각은 지금 세상에 태어나도 전혀 구닥다리같지 않다. 오히려 지금 세상에서도 매우 파격적이다.

 

모든 자녀들은 부모가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것에 대해 보답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어야 할 여러 가지 고달픈 일들을 생각해 볼 때, 자녀 입장에서는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것이 그렇게 고맙게 여겨야 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모 입장에서도 사랑의 결합을 할 때는 자녀가 아닌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75쪽)

 

이런 그이기에 후이넘의 나라에 가서도 그들을 존경할 수 있었던 것이지 일반적인 사람은 아마 후이넘은 후이넘이고 야후는 야후고 인간은 인간이라고 합리화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걸리버가 서술한 후이넘과 야후의 극단적인 대비는 독자에게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게 했다. 진화론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야후와 같다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야후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란 말이야? 지금 우리는 그 야후에서 좀더 사기꾼 기질이 보태어진 악질 야후이고? 어떻게 그걸 쉽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거참, 인간의 본성이란 알고 싶어지지 않는다.

  두 작품은 모두 성추설에서 시작한다. 인간의 본성은 추하다. <걸리버 여행기>는 여기에 한 발 더 얹어서 가뜩이나 추한 본성에 이성이 자리하면서 더 추해졌다고 말한다. 정말, 이렇게 자기혐오를 하면서 살아야 할까? 비참하다.

  그러니 그 추함이 사라진 아름다운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덕을 쌓은 거란 말인가? 내가 후이넘까지는 아니더라도 <동물 농장>의 선량한 동물들만큼은 가치있어야 할 텐데, 아무 것도 자신할 수 없는 것이니 제발 자신을 먼저 돌아보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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