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만난 지인이 묻는다. "뭔 책을 그렇게 (많이) 읽어요?" 대한민국 평균으로 보자면 분명 많이 읽는 편이긴 하지만 출판업을 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정도로 많이 읽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저 질문이 좀 의아했다. "내가 너무 많이 읽나?" 그런데 알라디너나 책 관련 카페에 보면 한 달에 30권을 읽는 사람도 있기에 그런 생각은 넣어두었는데 이상했다.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SNS의 피드가 온통 책 이야기라 그런 거겠거니, 그래서 남들 눈에는 나도 매일 1권의 책을 읽는 사람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난 그냥 좀 많이 읽는 '편'인 사람일 뿐이다. 대한민국 평균을 알기에 적게 읽는다는 겸손은 떨지 않는다. 대신 책 피드도 너무 자주 올리진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남들 눈을 크게 의식하는 편은 아니지만 또 내가 1일 1책 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건 부담스러우니까. 그런 면에서 알라디너로서의 내 모습이 어쩌면 가장 나 다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지만 읽는 모습이 잘 안 보이는^^
최근에도 그렇게 읽었다. 기억력이 점점 떨어져 책의 내용은 고사하고 책 제목도 며칠 지나면 까먹는 판이라 독서기록 앱을 들춰가며 간단히나마 정리해 본다. 썩 괜찮은 책들을 읽은 것 같은데 기억을 못해서야 원....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하미나
이 책의 제목이나 표지 디자인을 봤을 땐 외국의 소설이나 외국 여성 작가의 삶을 다룬 책이겠거니 하고 단순하게 '궁금'해했다. 그러다 시사인 작년 마지막 호 <행복한 책꽂이>에서 이 책이 상위에 랭크된 것을 보고 그제야 알았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여성들의 삶을 다룬 책이라는 점을. 작가 역시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이 책은 처음 학술적 목적을 두었으며 수많은 인터뷰의 결과물이자 연대의 이야기라는 것을.
읽으면서 내내 미안했다. 농담삼아 칭했던 조울증이나 우울증 이야기들이 누군가에게는 삶을 위협하는 문제일 수도 있었는데 그저 나의 감정기복을 설명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표현했었다. 그런데 범위를 넓게 보면 실제로 나는 가벼운 우울증을 앓고 있었을 것이다. 최소한 20대 내내는. 산후 우울증까지 합친다면 30대 내내도. 지금은 나를 향했던 화살을 남에게 던지는 중이다. 그렇다고 남을 해하는 건 아니니 놀라지 마시길. 하고 싶은 말을 원래도 잘 하는 편이었지만 가족에게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나 자신을 자꾸만 무너지게 하는 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기도 하다. 내 경우는 그랬다. 그래서 이젠 가족들에게도 하고싶은 말을 그냥 한다. 심지어 연도 끊었다. 그건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지만 그래도 남 살리자고 내가 죽을 순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내내 자신을 정당화한다. 언젠가 부부싸움을 하다가 즉흥적으로 내뱉은 말이 어떤 때에는 나를 보호하는 칼이 되기도 한다. "나를 아프게 하는 건 나 자신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라고 했던가.
이 책을 읽으며 세상의 모든 여성들에게 연민의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자부심이 들었다. 나를 비롯해서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은 자신의 삶을 지키고자 적극적으로 노오력한다. 그 점이 너무 대단하다. 그건 노년의 가난한 여성들도 마찬가지이다. 그건 다음 책에서.
[가난의 문법], 소준철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생각했다. 노인들은 차라리 시골에서의 삶이 더 편할 지도 모르겠다고. 우리 엄마는 딸내미의 독설과 사위의 눈칫밥을 먹으며 따신 곳에서 따신 물 쓰고 따신 밥 먹고 살고 있다. 돈은 벌지 않으며, 용돈을 자식에게 받아 아껴가며 산다. 행복하냐 물으면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손주들이 어릴 땐 그들이 자신에게 기대는 모습에 행복했지만 이젠 자신의 몸이 노쇄하여 손주들이 기대기는 커녕 본인 몸 하나도 건사하기가 버겁기 때문이다. 애지중지 키운 손주놈은 사춘기라고 쌀쌀맞기가 그지없다. 그나마 둘째를 늦둥이로 낳아서 그 아이 보며 살고 계신다. 이 책에서 몇 번이고 이야기하는 '노인의 쓸모'에 대한 부분이다. 반면 시골서 농사를 지으시는 시어머니는 고된 농사일과 가사일을 하며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운 집에서 살면서도 자신이 자식들 쌀도 주고 고추가루도 준다는 데에 자부심이 대단하다. 동네에 나가면 몇 십 년간 알고 지낸 사람들과 말도 나누고 밥도 해 먹을 수 있다. 하지만 도시의 노인은 돈이 없으면 다니기도 힘들다. 그래서 그 돈을 벌기 위해 폐지도 줍고 학교 앞에서 교통 봉사도 하고 그런다. 그것도 몸이 건강해야 하지 우리 엄마는 혼자 걷는 것도 힘든데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사실 일은 젊은 날 아빠 몫까지 쎄가 빠지게 했고 그 결과 걷기도 힘든 게 아닌가!
윤영자라는 가상의 인물, 그러나 도시의 여성 노인을 대표하는,을 통해 가난한 도시 노인이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임을 드러내는 이 책의 구성과 내용은 무척 설득력이 있다. 앞의 책과 마찬가지로 학술적 성격이 포함되어 있다. 역시 노인에게는 돈 걱정 없이 자신의 쓸모를 생가할 수 있도록 사회가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이것은 지금 노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전반의 문제이다. 내가 연금을 타박타박 받는다고 외면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더불어 살아야 할 사람들의 문제이다. 우울증에 걸린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들과 연대해야 한다. 쉽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안다. 같이 사는 남자가 신혼 때 차 앞을 가로막는 리어카에 대고 했던 말에 내 오만 정이 다 떨어졌던 것을 보면 세상에 당장의 이익이 보이지 않는 연대란 결코 쉽지 않은 문제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 제목이 또다시 떠오른다. <부끄러움을 가르칩시다>

[테레즈 데케루], 프랑수아 모리아크
이 책은 독서모임 덕분에 알게 된 책인데 소설을 먼저 읽으면 영화가 보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 영화를 먼저 보았다. 오드리 토투, 너무 아름다운 배우다. 일단 영화에서 한 번 울었다. 인간굴레이자 새장이었던 시댁의 식구들에게 그래도 노오력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피골이 상접한 얼굴 위에 하얗게 분칠을 하며 시누이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테레즈의 심정을 느껴보았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그녀의 처지를 생각하니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래도 영화에서는 테레즈를 사랑하는 베르나르가 느껴져 그에게 안쓰러움이 생겼지만 소설에서 테레즈는 그저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 시대의 여성들은 다 그렇게 가족의 한 사람으로 채워지기 위해 선택되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 삶을 견뎌오다 툭!하고 못 견딤 세포가 터져나오면 그때부턴 본인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외엔 다른 생각이 없는 걸... 내가 죽거나 그가 죽거나...
테레즈 주변에 하미나 작가 같은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이 있었다면 그래도 테레즈는 멋진 다른 방법으로 굴레를 벗어났을 지도 모르겠다. 안은 그런 사람이 못 되었고 테레즈는 혼자였다. 파리에 간 테레즈는 자유롭겠지만 그래도 외로울 것이다. 그 점이 1920년대가 내릴 수 있는 최대한의 결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주어진 불합리한 삶에 적응이 아닌 진화를 시도한 여성들이 있어서 이 더딘 변화가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남편을 독살하려는 시도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 방법이 아니라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나가고 싶다는 그 마음.
모임에 나온 한 회원이 이 소설 속 여주인공이 왜 저런 식으로밖에 행동하지 못하는지 답답했다고 후감을 말했는데 나는 그게 2022년이어도 저런 식이면 매우 적극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여자들의 삶은 아주 간혹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주 더디게 바뀌는 것이니까. 100년 동안 여자들의 삶은 얼마나 바뀌었을지 돌아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여자들이여, 미쳐도 똑똑하게 미치자! 내 처지가 곤란하다고 '빨리 죽어야지'라는 말을 내뱉지 말자. 더 잘 살도록 서로가 잘 살피자. 우리 엄마를 딸인 나는 독설로 공격하지만 주변 손주 친 엄마들이 예뻐해주는 것처럼 주변의 여자들을 잘 살펴주자. 미안해 엄마, 나도 옆집 할머니를 잘 살펴줄게...
어쩌다보니 최근에 읽은 책 중 여성의 삶을 다룬 책이 많다. 내가 여성이기에 그건 어쩔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읽는 중인 책 중에 한국 남성 소설가의 소설집이 한 권 읽는데 작품의 재미나 기법 면에서는 썩 괜찮을 지도 모르지만 소설 안에 흐르는 여성을 묘사하거나 여성을 대상화하는 표현들과 생각들이 매우 거슬려서 억지로 읽는 중이다. 사실 집어던지고 말까 싶기도 한데 진짜 끝까지 그런가 보려고 읽는다. 10년 전의 소설이다. 지금 남성 작가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 변화가 고맙다. 연대는 여자들끼리 하는 게 아니고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하면 되는 거니까. 군대 문화에 대해서 남자들만 연대하는 게 아니라 여자들도 같이 알고 공감해주면 서로 창을 겨누지 않을 텐데, 집안에 키우는 사춘기 녀석 하나도 요즘 친구들이랑 무슨 대화를 하는지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남자 셋에 여자 둘, 사는 집에서도 성별 및 연령 간 연대가 이뤄지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난 멋진 여성이니까 가랑비에 옷 젖듯 접속을 시도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