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되오." 단호한 말이었다. 공작을 설득하기 위해 마음을 조종하는 속임수를 쓴다면 모를까, 정면에서 그의 말에 반박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짓임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일단 시도는 해보아야 했다. 설사 그런 행동이 그에게 속임수를 쓰지 않겠다는 것을 자신에게 일깨우는 효과밖에 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샤도우트라." 제시카가 말했다. "프레멘 식 호칭인가요?"
"‘우물물을 푸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들었소. 이곳에서는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이라더군.

"그 사람들을 외모만 보고 판단하지 마시오. 그들에게는 몸속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힘과 건강한 활기가 있소. 아마 지금 우리에게 꼭 맞는 사람들일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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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 자리에서 서서히 한 바퀴를 돌며 그늘이 진 조각들과 벽의 깨어진 틈, 그리고 우묵하게 들어간 창문들을 바라보았다. 전혀 시대에 맞지 않는 이 거대한 홀은 베네 게세리트 학교에 있는 ‘자매의 홀’을 생각나게 했다. 그러나 자매의 홀은 따스한 분위기였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차가운 돌처럼 보일 뿐이었다.

아라킨이라는 이름은 듣기에도 좋았고 전통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카르타그보다 더 작은 도시라 방어를 하기도 그만큼 쉬웠다.

제시카는 자기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두 물건의 포장을 먼저 푼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그러한 행동에 뭔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황제의 혈통보다도 더 황족 같아 보였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공작의 눈길 때문에 반쯤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녀의 옆모습이 드러났다. 공작은 그녀의 아름다움이 단순히 어느 한 가지 특징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학교의 평신도 자매들이 그녀를 ‘말라깽이’라고 불렀다던 바이어들의 얘기를 기억했다. 그러나 그 표현은 지나치게 단순한 것이었다. 제시카는 아트레이데스의 혈통에 제왕처럼 품위 있는 아름다움을 되돌려주었다. 그는 폴이 어머니를 닮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난 칼라단 성의 열쇠를 식당에 걸어놓으려고 여기 왔을 뿐이오."
그녀는 움찔하며 팔을 뻗어 공작을 잡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열쇠를 거는 것, 그 행동에는 뭔가 종지부를 찍는 듯한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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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을 탐사했던 영국 작가 제이 그리피스의 말에 따르면 정글에서는 길을 잃기가 너무나 쉬운데 그것은 길이 금방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글에선 길을 반복해서 걷는 것이 사랑의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올바른 선택을 반복해서 하는 것도 사랑의 행위다.

삶의 해방은 다른 방식으로는 결코 쉽게 오지 않는다. 삶의 해방은 내가 하기로 한 일을 해내면서 온다.

* 내게는 이들이 거의 지상의 작은 신들처럼 보인다(실천하면서 보이는 창조력에 있어서 신에 버금간다는 의미로). 나와 비교하면 확실히 그렇다. 오랜 시간 시사 피디로 살고 있는 내가 앞에서 말한 자연과 인간사회의 복잡한 연결망을 몰랐다고 하면 거짓이다. 그러나 이런 연결망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면서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습관을 바꾸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고 나 역시 습관의 노예다). 그러나 뭐라고 정의하든 간에 결국 삶이란 일생에 걸쳐 우리가 주위에 미친 영향일 뿐이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무엇을 할 힘과 무엇을 하지 않을 힘이 다 있다(그런데 역설적으로 무엇을 하는 순간은 무엇을 하지 않는 순간이고, 무엇을 하지 않는 순간은 무엇을 하는 순간이다). 무엇을 하는 힘과 무엇을 하지 않는 힘, 이 둘을 합하면 능력이다. 그리고 무엇을 하는 힘과 무엇을 하지 않는 힘의 관계를 바꾸는 것을 변신이라고 부른다. 무엇을 하는 힘과 무엇을 하지 않는 힘 사이의 균형을 평화라고 부른다. 이 균형을 잡으면서 우리는 자기 삶의 주체가 된다. 이렇게 마침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게 된다.

자신을 알아가게 되는 과정에는 혜성의 꼬리 같은 것이 필수적으로 붙는다. 선택과 행동이다.

페터 한트케는 타인의 뿌리를 뽑는 것은 범죄 중에서도 가장 잔악한 범죄이나 자신의 뿌리를 뽑는 일은 가장 위대한 성취라고 했다.

이 지경까지 왔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살아갈 지구를 위해서라도 다르게 살기를 선택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우리가 지금 선택한 사랑의 행위들은 우리가 죽은 뒤에도, 아주 오래된 사랑이 있었다는 증거로 영원히 살아남을 텐데.

그래서 이런 질문이 남는다. 우리의 사랑 이야기에 무엇이 빠져 있는가? 우리의 사랑에 무엇이 없어서는 안 되는가? 너를 위한 나의 변신이다. 나는 너를 위해 나를 바꿀 것이다!

곧 죽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난 그게 참 낯설게 느껴진다. 난 이기적인 놈이라 그저 글을 계속 더 쓰고 싶을 뿐이다. 글 덕분에 내 맘속에 따듯한 빛이 자리 잡는가 하면, 글 덕분에 난 황금빛 대기 속으로 훌쩍 솟구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내가 얼마나 더 계속할 수 있을까? 마냥 계속하는 건 옳지 않다. 염병, 죽음은 연료 탱크 속 휘발유다. 우리에겐 죽음이 필요하다. 내게도 필요하고, 네게도 필요하다. 우리가 너무 오래 머물면 여긴 쓰레기로 꽉 찬다.
? 찰스 부코스키,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18

레이첼 카슨은 어려서부터 글을 쓰고 싶어 했다. 그녀에게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생명이었다. 레이첼은 열아홉 살 때 실험실 동료에게 이런 말을 했다. "생물학을 공부하면서 쓸 거리가 생겼어." 생명은 그녀에게 단어를 줬다. 그녀만의 목소리를 줬다. 그녀는 과학을 시처럼 쓸 줄 알았고 그녀의 글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어떤 부분에서인가는 숨을 죽였다. 글을 읽는 동안 아름다움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녀의 글에는 마치 죽은 뒤 하늘로 높이높이 떠오르는 인어공주의 영혼을 닮은 수정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

레이첼은 별장으로 이사오면서 도로시 프리먼과 스탠리 프리먼 부부를 만나게 된다. 프리먼 부부는 『우리를 둘러싼 바다』를 번갈아가면서 큰 목소리로 낭독할 정도로 좋아했고 레이첼이 이웃으로 이사를 온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레이첼과 프리먼 부부가 처음 만날 날, 초저녁의 햇살은 늦게까지 빛나고 달은 부지런히 썰물을 당겨 올렸다.

레이첼과 도로시는 같은 것을 사랑했다. 자연, 바다, 고양이. 레이첼은 다시 만나면 도로시를 조수 웅덩이, 즉 썰물의 세계에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썰물 때 드러난 조수 웅덩이를 지켜보는 것은 레이첼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우정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세계로 사람들을 초대하곤 했다.

친구와 함께 가고 싶은 모래언덕과 산마르크 솔숲은 혼자 가기에도 분명 좋은 곳일 것이다. 마린은 모래언덕과 솔숲의 일부이다. 모래언덕과 솔숲이 그의 일부이듯이. 마린은 모래언덕과 솔숲에 제대로 가치를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직 살아 있는 동안 인간들끼리 나눠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나랑 모래언덕도 안 가보고 산마르코 솔숲도 안 가보고 자네가 어떻게 나를 좋아한다 하겠는가"의 레이첼 카슨 버전이 조수 웅덩이다. 레이첼도 마린처럼 살아 있는 동안 나눠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레이첼 카슨은 이 반딧불이 이야기로 ‘경이로움’이라는 어린이책을 만들려고 했다. 그녀는 경이로움이야말로 권태와 피로, 무기력, 소외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착한 요정 같은 단어라고 생각했고, 어른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경이의 감정’을 알려주길 바랐다. 카슨의 이 말은 진리다. 호기심과 열정, 감탄, 깜짝 놀라는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시로 길을 잃을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첼은 도로시를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받은 생애 최고의 사랑스러운 선물로 여기게 되었고 그런 일이 자신의 인생에 일어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경탄과 기쁨이 밀려오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바다는 그녀에게 책의 성공과 사람들의 인정을 안겨주었지만, 도로시를 데려다줬기 때문에 특별히 더, 더, 더 소중한 것이 되었다.

"바닷속에서조차 제 힘만으로 살아가는 생명체는 없다는, 움직일 수 없는 진리"를 공유한 두 사람의 관계는 죽는 날까지 아름답고 건설적이었다.

1955년 레이첼은 도로시에게 "저와 제가 창조하려고 애쓰는 것까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느낌이 너무나 벅차다"고 편지를 보냈다.

아무도 꿈꾸지 않으면 그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아요. 하지만 누군가 골똘하게 생각하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물론 저는 정신세계를 공유하는 친애하는 두 벗에게 손을 내밀 작정입니다. 이런 꿈을 꾼다는 게 정말 신나지 않아요?"*20
* 그때 카슨이 본 것은 스트로부스 소나무와 해안선이었다.

이런 꿈을 꿀 줄 아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이런 꿈을 꿀 줄 아는 것이야말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의 삶이다.

우리는 보통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이 없음에 낙담한다. 그러나 신비로운 꿈을 꾸는 사람들은 자아를 넘어선 어떤 것을 생각한다. 제일 잘하는 것이 아니라 제일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 그 일을 한다. 그때 꿈의 주소, 꿈의 목적지는 돈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충분한 돈에 대한 꿈은 있지만 충분한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대동소이하다. 대체로 꿈의 주소는 풍족한 소비다. 짐작컨대 ‘세련됨’이라는 이름의 화려한(‘개성 넘치는’ 혹은‘독특한’ 혹은‘자기만의’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라이프스타일은 1960년대 이래 우리 꿈의 목적지가 되었다.
그녀는 책을 팔아서 숲을 사고 싶어 했다.

『우리를 둘러싼 바다』는 출간되자마자 이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사방에서 우호적인 반응이 쏟아졌는데 그때 카슨의 머릿속에 막연히 떠오른 생각은 "내가 어떤 일을 했다"기보다 "나를 통해서 어떤 일인가가 일어났다" 같은 것이었다. 해안 숲 보존을 위한 프로젝트를 염두에 둘 무렵 레이첼은 "작가는 무슨 일인가 일어나게 만드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녀 삶의 예언자가 되었다. 그녀는 곧 무슨 일인가 일어나게 하는 매개자가 될 참이었다. 1957년이 되자 뜻밖의 소송 건이 신문에 떠들썩하게 보도되기 시작했다. 이 소송에도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깔려 있다.
* 오늘날 글쓰기를 자기표현이나 힐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레이첼 카슨의 이 생각은 낯설 것이다.

그녀는 과거의 사고방식을, 특히 그것이 소중한 것일수록 버리기 어렵다고 말했는데 그 버리기 어려운 소중한 과거의 사고방식이란 바로 "자연은 위로가 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자연은 대체로 인간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영원하리라고 믿으면 위로가 됩니다. 인간은 숲을 파괴하고 둑으로 개울을 막을 수는 있지만, 그렇더라도 구름과 비와 바람은 신에게 귀속된 것이기에.

또 생명체는 신이 어떤 과정을 점지해주더라도 시간과 더불어 흘러가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다소 위로가 됩니다. 그 흐름 속의 일개 방울에 지나지 않는 존재, 즉 우리 인간들이 그 흐름을 방해한다 해도 말입니다.

그리고 물리적 환경이 생명체를 어떻게 주조한다 해도 그 생명체는 환경을 극적으로 변화시킬, 더군다나 파괴시킬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면 또한 위로가 됩니다.21

그녀가 도로시에게 편지를 쓰던 날 하필이면 라디오에서는 미국 최초로 우주선을 발사한다는 내용을 보도하고 있었다. 1939년 다섯 살짜리 칼 세이건을 매료시킨, ‘내일의 세계’라는 주제로 열린 뉴욕세계박람회에서 아인슈타인이 우주선이 뭔지 7백 자 이내로 설명해달라는 주문을 받은 지 20년 만의 일이었다.

해야 할 일이 뭔지 알면서도 손을 놓고 있다면 제게 미래의 평화는 없을 겁니다. […] 이 중차대한 일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용기 있게 발언하는 것은 제 의무이자 가장 깊은 의미의 특권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양심은 보통 ‘눈을 뜬다’는 말과 같이 사용된다. ‘전에는 왜 이것을 몰랐지?’ 같은 뜨거운 각성이 있고, 이 깨달음에서 고통과 전율이 복잡하게 얽힌 창조성이 폭발한다.

도로시는 레이첼의 베개 밑에 레이첼에게 늘 위안을 주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적은 쪽지를 넣어두었다.

모래 가루에서 세상을 보고
야생화에서 하늘을 보네
우리의 손바닥에서 영원을 보고
한 시간 속에서 영원을 보네24

썰물 때 드러나는 작은 따개비와 조개껍질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생명 전체의 위대함을 배웠던 카슨을 이만큼 잘 설명할 수 있는 시도 드물 것이다.

레이첼은 자신에게 죽음을 포함한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덜 집착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제부터 그녀의 삶은 죽음 일보 직전의 초연함과 지혜가 될 터였다. 그녀는 하기로 계획했던 일을 계속했다.

지난여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지 않고는 지빠귀의 노랫소리를 다시는 행복한 기분으로 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어젯밤 모든 새와 모든 생물과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스러운 것들에 대한 생각이 깊은 행복감과 함께 물밀듯이 찾아왔어요. 지금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으니까요. 나는 그 책을 완성할 수 있었어요. 그 책은 이제 자신만의 생명을 갖게 되었어요.25

그녀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해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만족감을 표현하는 서사가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무엇이 그녀에게 만족감을 줬나 찬찬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레이첼 카슨은 암의 위험을 경고하는 글을 쓰는 동안 정작 자신은 암을 앓게 되었다. 그런데도 "지금껏 어떤 것도 제가 포기하도록 심지어 포기할까 하고 한번쯤 생각해보도록 만들지는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백 번쯤 포기할까 생각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고 해도 인간적으로 감동할 마당에 말이다.

첫 번째 이유는 양심일 것이다("해야 할 일이 뭔지 알면서도 손을 놓고 있다면 제게 미래의 평화는 없을 겁니다"). 그녀는 자신(자신의 양심)을 저버리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가 있다. 1957년 최초의 살충제 소송을 제기한 사람들은 레이첼 카슨에게 워싱턴에 살면서 도움을 줄 누군가를 찾아달라고 청했다. 카슨은 그들에게 도움이 될 누군가를 찾는 과정에서 그 ‘누군가’가 바로 자신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누군가가 되어가는 과정이 『침묵의 봄』을 쓰는 과정이다. 『침묵의 봄』을 쓰는 일은 그녀의 거의 모든 시간과 전적인 헌신을 요구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다’ 혹은 ‘어떤 사람으로 보인다’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어간다’의 삶을 살았다.

우리는 죽기 때문에 모든 것이 덧없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죽기 때문에 숭고해질 수도, 죽기 때문에 다른 생명체의 죽음을 절절하게 느낄 수도 있다. 우리의 삶은 생물학적 ‘사실’과 인간적 ‘가치’ 사이 어딘가에, 간밤에 꾼 꿈의 흔적처럼 흐릿하고 신비롭게 묻어 있다.

우리가 향하는 곳이 죽음만은 아니다. 우리가 향하는 곳은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우리는 인생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 스스로를 맞춰가고, 그 방법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이 되어가고 자기 자신을 향해 다가갈 수 있다. 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혼란을 겪는 대신 자신을 실현해냈다.

우리가 오직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 있다고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문명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과 모든 생명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이토록 비극적으로 간과된 시대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기술을 통해 자연 세계와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 불필요한 파괴와 고통을 묵인하며 우리는 인간으로서 우리의 명성을 땅에 떨어뜨리고 있습니다.26

『침묵의 봄』에는 자연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수많은 사례들이 적혀 있다. 자연과 사람은 깊게 연결되어 있다. 문제는 그 연결고리가 죽음의 연결고리라는 점이다. 모두 인간의 욕망이 저지른 일의 결과다.

레이첼은 도로시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우리는 행복해질 거예요.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사랑스러운 것들, 해돋이와 해넘이, 만에 비치는 달빛, 음악, 좋은 책, 지빠귀의 노랫소리, 지나가는 야생 거위의 울음소리를 함께 즐길 겁니다.27

깊은 고통 속에서도 이런 아름다운 생각이 솟구쳐 올랐다.

그녀와 세상을 연결해주는 끈은 언제나 사랑이었다. 그 사랑 안에는 달빛, 지빠귀의 울음소리도 있지만 "서로가 서로를 위해 살아가는 기쁨"을 함께 누렸던 도로시가 있었다. 둘의 사랑 이야기에는 인내와 헌신이 있고 둘이 누린 추억과 기쁨이 있다.

우리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나는 우리의 사랑이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우리의 사랑은 평온하게, 우리가 함께한 모든 소중한 기억들과 함께 조용한 그늘에 보관될 겁니다. 다시 이 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만 하고 싶어요. 사랑해요. 지금도 그리고 항상.

그녀가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내일 아침에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두려움에 떨며 썼던 편지를 레이첼 사망 직후 도로시가 발견했다. 이 편지를 발견한 도로시의 마음이 어땠을까 상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내게도 레이첼의 목소리가, 너무나 부드러운, 그녀의 것임이 틀림없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사랑하는 당신, 심장 발작이 일어나 내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그 편이 내게 얼마나 쉬울지를 생각해주세요. 사랑하는 이들을 남기고 가는 일이 몹시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내가 떠나는 일이 슬프지는 않아요. 얼마 전에 나는 늦게까지 서재에 앉아 베토벤을 들으면서 진정한 평온함과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당신, 내가 이 모든 시간 동안 당신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 잊지 말아주세요.
레이첼.30

바닷가에 서 있노라면, 밀물과 썰물을 느끼고 있노라면, 바닷물이 드러내는 거대한 늪지에 짙게 드리워진 안개를 호흡하노라면,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 동안 대륙의 해안선을 따라 비행을 계속하고 있는 해안 새들을 바라보노라면, 노쇠한 뱀장어와 어린 오징어가 바다로 미끄러지듯 헤엄치는 광경을 지켜보노라면, 지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그렇듯 자연은 거의 영원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저질러놓고 나중에 수습하자는 태도야말로 재앙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아무리 파괴해도
강물은 변함없이 투명하게 찰랑거릴 것이고
소나무, 매화 향기는 숲을 물들일 것이고
물고기들은 엄청나게 많은 알을 낳을 것이고
조개껍질은 빛날 것이고
아이들은 모래사장에서 모래성을 쌓을 것이고
가끔은 신기한 어떤 것
이를테면 불가사리나 예쁜 조개껍질을 보석처럼 손에 들고
"엄마. 내가 뭘 찾았나 봐" 뛰어올 것이고
바닷바람은 짭조름한 소금 맛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줄 것이고
여행자들은 해변가 카페에서 황금빛 맥주를 마실 것이고
커다란 팔딱거리는 새우는 노릇노릇 구워질 것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장엄한 노을이 백미러에 비칠 것이고
행복, 자유, 사랑, 풍요라는 말 또한 금빛으로 빛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파괴해도
소는 초록 언덕에 누워 평화롭고도 부드럽게 음매 울 것이고
콘도르는 안데스의 노래를 부를 것이고
높은 산맥 이마에 매달린 만년설은 우리의 눈을 시원하게 해줄 것이고
아마존의 불구덩이에서도 아기 새들은 쑥쑥 자랄 것이고
불타는 지옥에서도 꽃은 필 것이고
그 꽃은 희망의 상징이 될 것이고
지느러미가 잘린 채 살아남은 돌고래 또한 희망의 상징이 될 것이고
우리는 자연의 꺼지지 않는 생명력에 감동할 것이고
태풍이 지나가면 또 맑은 날이 오듯
우리도 그처럼 살기 위해 심호흡을 하면서 애를 쓸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파괴해도
달과 별과 태양과 우주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을 알기에
우리는 오로지 하루 왔다 가는 관광객처럼 자연에게 위로를 구한다
아무것도 해준 것 없으면서
자연을 위안을 생산하는 공장처럼 들락거리면서
즐거운 나의 흔적, 쓰레기를 남겨두고
모든 것을 인내하는 사람에게 무관심하듯
우리는 자연에게 무관심하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저녁이 있기에
멸종동물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수많은 저녁놀이 있기에

그러나 진짜로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때는 우리가 죽을 때다
죽음에 가까워지면 우리의 본능은 우리가 자연임을 안다
내 몸은 이제 바짝 마른 낙엽 같고
네 몸 또한 바짝 마른 나뭇잎 같다는 사실을 애달파하고
한 줌의 흙, 거름

레이첼 카슨은 생명 그 자체가 기적이란 것에 깊게 감동받았다. 사랑하는 것이 위험에 처할 때 두려움 없이 용기를 냈다. 그녀는 과학과 양심을, 과학과 미래를, 과학과 사랑을, 과학과 용기를 결합시켰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 사랑은 손을 뻗는 것이고 팔을 벌려 안는 것이고 몸이 다가가는 것이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사랑은 실천이고 행동이고 창조다.

그녀는 일생에 걸쳐 자신의 사랑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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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셋은 이렇게 세상이 어려울 때 혼란을 치유할 최적의 방법은 연인을 만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의 경계를 넘지 않는 선에서 기쁨과 즐거움과 쾌락을 맛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모은다.

나는 『데카메론』이 슬플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십자가’라는 단어가 자주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십자가보다 ‘잠자리’라는 단어가 많이 나왔다. 마음껏 즐기다, 수도 없이 즐기다, 오래오래 즐기다, 힘껏 즐기다, 반복해서 즐기다, 상상도 못할 즐거움을 맛보다…. 모두 성관계를 용의주도하게 즐길 때 나오는 말이었다.

역시 책은 직접 읽어봐야 맛을 안다. 『데카메론』은 흑사병 시대의 『천일야화』나 다름없었다.

이 책 중 몇몇 장면을 읽을 때 나는 혼자인데도 괜히 뒤를 돌아보았다. 수줍었다.

내 눈에는 미풍양속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으로 보였다. 보카치오가 풍기문란 같은 죄로 화형을 당하지 않았을까 우려돼 자료를 찾아봤는데, 그는 병으로 자연사했다. 내가 소심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좀 과격하지만 완전히 허무맹랑하지만은 않은 나 나름의 상상을

『데카메론』에서 실컷 즐기는 사람들이 사실은 이미 죽어 땅 속에 묻혀 있는 사람들이라면? 발칙한 아홉 명의 수녀와 마세토 모두 유골이라면? 그렇다면 산 자는 죽은 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주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허망하게 죽어버릴 거면 살아 있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현실을 더 즐기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현실 세계에서 쾌락을 더 맛보길 바라는 것이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단식기도나 철야기도보다, 한숨 쉬며 사는 것보다 훨씬 스릴 넘치고 흥분되고 신나는 삶이 있는데….

바이러스만 전염되는 게 아니고 행복도 웃음도 기쁨도 전염된다. 어쩌면 사랑도 전염된다.*

흑사병이 초토화시킨 지구에서 하필이면 ‘사랑’에 대해서 썼다는 것이 나에겐 의미심장했다.

당분간은 우울하고 화난 얼굴들을 좀 더 자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위태로운 상황에선 가치 있는 변화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코로나는 우리가 그토록 오래 ‘자아!’ 혹은 ‘나!’를 외쳤지만 우리가 조금도 독립적이지 않고 그렇기는커녕 서로의 운명에 심하게 의존적이라는 것을 드러낸 셈이다.

언제나 우리에게 혼란을 주는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단어들이 있다. 정체성, 사랑, 행복, 자유. 이 단어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내가 너를 필요로 한다는 것.

코로나 시대는 그 관계 안에 우리가 거의 생각하지 않고 살았던 박쥐나 야생동물, 자연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려준 셈이다.

‘계속 살아라’라는 말은 ‘매순간 있는 힘껏 사랑하라’라는 말과 같다.

지금 우리의 새로운 상황은 새로운 사랑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뉴노멀 뉴로맨스’, ‘뉴노멀 뉴러브’다.

사람들이 나에게 "괜찮지요?"라고 물을 때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다른 생각이 뭐였을까? 사랑이었다.

이 시대에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지치고 진이 빠진 우리가 다시 삶을 사랑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우리 인간은 생존 그 자체로는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 생존 그 이상의 무언가를 원한다. 우리의 몸만 관찰해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몸은 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하나의 몸은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추억을 담고 있다.

우리의 몸이 하는 일, 우리는 그것을 영혼이라 부른다.

모든 행복한 이야기에는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 있고 모든 불행한 이야기는 잘못 보는 데서 시작된다(나는 언제나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해왔고 상황을 더 잘 볼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은 모두 천사로 여긴다. 이 글도 대천사들의 도움으로 써보겠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에게 아무런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리석음은 꽃피고 나쁜 일은 벌어진다.

"사람들이 공적인 공간이 뭔지를 몰라. 공공성이 다 죽었어. 왜 테이크아웃 잔은 아무 데나 두고 가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곧 가지러 올 거야. 핸드폰을 두고 갔을 때처럼 ‘어머 내 쓰레기 두고 갔네’ 하면서."
물론 헛소리다. 그러나 헛소리라고 해도 그 속에 희망이 담겨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다른 방향을 보는 친구 사이다. 그러나 인정하자. 내 친구는 비판 정신을 가지려는 사람들과 세상에 속지 않으려는 사람들, 자기 자신도 속이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만은 보석 같은 존재라는 것을 보증하겠다.

나는 우한[武漢]시내에 양쯔강이 흐른다는 것, 무척 더운 여름날 밤 젊은 연인들은 유람선을 타고 강바람을 즐긴다는 것, 우한이 야생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시골이 아니라 중국의 시카고를 꿈꾸는 거대 자본주의 도시라는 것, 우한의 수많은 공장과 대학을 밝히는 전기는 모두 삼협댐에서 온다는 것을 알아냈다(뿐만 아니라 사건 초기 우한의 기차 시간표, 비행기 시간표까지 알아냈다). 또 발이 묶여 일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농민공이 어떤 존재인지, 중국의 경제개발 과정, 도시화 과정에서 중국 정부가 농민들을 상대로 얼마나 강압적인 강제 이주정책을 펼쳤고, 그 결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야생으로 더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도 알아냈다. 중국의 야생동물 밀수입 루트는 동남아시아(특히 라오스) 쪽이 많고, 그 야생동물의 종류가 혀를 내두를 정도라는 것과(버마 별거북 같은 멸종위기종 포함) 가장 인기가 많은 야생포유동물인 족제비오소리, 돼지코오소리, 히말라야 팜시벳은 아예 농장사육을 시작했다는 것, 야생동물을 먹는 이유는 경제성장의 결과 수입이 늘어난 사람들의 과시욕이 작용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박쥐는 중국 사람들에게 행운과 복을 가져다주는 상징적 존재로 박쥐를 먹는 것에는 ‘복’을 섭취한다는 믿음이 작용한다는 것도 알아냈다. 어쨌든 중국의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말했다. 우한같이 급성장한 거대 도시들은 전 세계에 아주 많이 있다고. 핵심적인 질문은 코로나가 왜 우한에서 발발했느냐가 아니라 왜 우한 같은 거대 도시에서 발발했느냐라는 점이라고.

나는 우리나라 과거 질병의 역사까지도 공부했다. 나의 연구 결과 변강쇠가 죽은 이유는 만 가지 정도의 역병을 한꺼번에 겪어서였다.

전염병의 안보화는 AIDS에서 뚜렷하다. 점점 더 많은 군인들이 에이즈에 감염되고 있고 전쟁에서 강간은 상습적으로 이뤄진다. 다른 감염병의 문제도 국가비상사태를 유발할 만큼 심각한데 이것은 성장률 저하, 불황 수준의 실업률, 시장의 붕괴로 이어진다. 여기에 가뭄 같은 기후위기까지 더해지면 식량 안보 문제가 발생해 대규모의 기아를 불러오고 이에 따라 대규모 난민이 발생할 수 있다. 심란한 것은 이 와중에도 제약회사들의 이익(이 말은‘경제적 권리’라는 말로 불린다)에 대한 침해라는 이유로 개발도상국이 자국민에게 저렴하게 약을 제공할 수 있는 공중보건 국가비상사태 선포를 막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대략 1990년대 이래의 상황이다.

취재의 결론은 코로나는 가장 무서운 감염병도 아니고 유일한 감염병도, 마지막 감염병도 아니라는 점이다.

노인문제에 관한 한, 이미 우리는 수많은 노인들이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 과거와는 다른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럼 우리나라는? 방역을 잘해나간다고 평가받는 이유가 키스를 안 해서?"
"맞아. 딱 그만큼만 사랑하는 거지. 사랑은 안 해도 상관없는 일인 거야."
"하지만 너무 사랑한 나머지 온 힘을 다해 자제하는 중이라면?"
"우리나라에 현재 제일 없는 게 자제심이야. 힘이 있어도 그 힘을 쓰지 않으려는 사람 못 봤어. 그 많은 갑질들을 봐."

"자식의 미래는 좋은 학원을 알아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가 아니라고. 학교에 며칠 가느냐 마느냐 이걸 따질 때가 아니야. 미래에 기후난민이 몰려오면 일자리가 있을까? 식량값이 폭등할 텐데 밥은 뭘로 먹어?"

‘내 코가 석 자’로 자신의 선택을 설명하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포기하는 것이 타인과 미래다. 내가 불안한데 어떻게 남까지 생각해? 현재가 불안한데 어떻게 미래를 생각해? 그러나 위험은 늘 현재만을 생각할 때 온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일명 ‘미래인지 감수성’?‘내가 이렇게 하면 미래한테 너무 폭력적인 거 아닐까?’라는 질문?이다.

"함께 있을 때 뭘 하는지 보라고. 각자 자기 핸드폰을 봐. 심지어 함께 인증샷을 찍을 때도 각자 자기 얼굴만 본다니까."

"사랑은 요구사항이 더럽게 많은 나르시시즘을 가리키는 말이야. 인정 욕구로 넘치면서 왜 또 계속 우쭈쭈 해주길 바라는 거야?"

* 예를 들면 내 친구의 말은 자식의 ‘미래’를 위해 물려줄 아파트가 없음을 가슴 아파하는 것이 부모 사랑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세상에 문제 제기를 한다. 어떤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 것을 우리는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이데올로기에 깊게 물든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 없이 사랑도 하지 못한다.

친구는 쓰레기를 양산하는 상품보다 생각을 혹은 지식과 꿈과 경험을 나누면서 사랑하고 싶어 했다. 소비가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대화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삶을 사랑했다. 함께 소비하는 것보다는 함께 추구하는 것을 사랑했다. 사물들로 이뤄진 세상이 아니라 가치들로 이뤄진 세상을 사랑했다. 지금 이대로의 삶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의 삶을 고치고 수선하는 삶을 사랑했다. 내 친구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새로운 대화를 만드는 전문가일 수 있었지만, 할 수 있는 한 그렇게 해냈지만, 꽤 고독했다. 한 도시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혼자 깨어 있는 사람처럼, 누군가 일어나는 기척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고독했다. 꿈과 욕망이 달랐고 보는 눈이 달랐기 때문이다.

내 친구의 사랑관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의 고통을 깊게 느끼는 사람의 애타는 사랑관이다. 내 친구는 생명을 사랑한다. 생명 파괴를 다른 무엇보다 슬퍼한다. 내 친구는 불타 죽은 동물, 멸종된 동물, 함부로 여겨지는 노동자, 아름다움 없이 살아갈 미래 세대 모두에게 ‘진지한’ 관심을 쏟는다. 이제는 없는, 말 없는 혹은 말을 뺏긴 생명들을 자신의 일부처럼 고통스럽게 바라본다. 동물들의 고통, 생명 있는 것들의 고통을 느끼는 사람에게 현실은 무한지옥이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현실은 지옥이다. 안타깝게 죽은 동물들은 내 친구의 가슴에서만큼은 살아 있다. 그들은 자신이 죽어서도 이렇게 사랑받는 것을 모를 것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들도 자신이 미리부터 이렇게 사랑받는 것을 모를 것이다. 내 친구는 죽은 생명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 모두를 사랑한다. 이런 상태를 가리켜 우리는(때로는 조롱하면서) 꿈속에 산다고 한다. 현실은 다른 것을 생각하라고 하고 우리에게 다른 것을 내놓는다. 죽은 동물의 몸, 일하다 죽은 노동자의 몸 같은. 내 친구는 언제나 일관되게 꿈을 현실보다 우위에 놓고 있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반대할 일이 없다는 점이다.

별들은 첫 번째 천사이므로 별이 있는 한 우리는 천사와 함께 있는 셈이라고 한 보르헤스의 말도 떠올리게 한다.

알퐁스 도데의 『별』에서 양치기는 사랑하는 주인집 아가씨에게 모든 별 중 가장 아름다운 별은 ‘양치기의 별’이라고 말해준다. 그 별은 새벽에 양치기가 양을 몰고 나갈 때 빛나고, 저녁에 양들과 함께 돌아올 때도 빛난다. 7년마다 한 번씩 양치기의 별에게 달려가 결혼하는 별도 있다.

어깨에 기대 잠든 아가씨를 깨우지 않으려고 양치기가 새벽이 올 때까지 꼼짝 않고 앉아 있는 동안 몇 마리 양들은 별과 맛있는 풀을 꿈꾸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을 것이다. 밤은 그렇게 숨죽이고 그렇게 평화롭고, 별은 양치기의 마음속에서 아가씨에 대한 사랑과 함께 머뭇거리고, 노래는 그렇게 태어났고 밤과 잠처럼 오래도록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이 글에 나오는 인간의 손동작 중 어느 하나도 부자연스럽거나 억지스러운 데가 없다. 이럴 때 인간은 섬세하고 우아하다. 이중 내가 보지 못한 것은 표범이 와락 덮치는 것뿐인데, 경험해보고 싶은 종류의 일은 아니다. 나머지 것들은 자연을 다시 한번 자세히 보고 싶게 만든다. 이럴 때 자연도 나도 다시 한번 생명력을 얻는다. 자연이 나를 길들인다.

1970년의 고래는 뭐라고 말했을까? 한 번만이라도 고래의 언어를 알아듣고 싶다. 소리를 배열한 순서는 대체로 지구의 진화 방향을 따랐다.

16번에 ‘키스 소리’가 나온다. 앤 드루얀의 말에 따르면 키스 소리가 녹음하기 제일 어려웠다고 한다. 그 이유는 녹음실 엔지니어가 자기 팔을 빨아서 키스 소리를 내려고 애를 쓰다가 그래도 우주로 보내는 ‘영원한 키스’인데 기왕이면 진짜 키스 소리가 낫지 않겠느냐는 결론에 이르렀는데, 진짜 키스 소리는 너무 희미하거나 너무 끈적거려서 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완전히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데서 오는 가난함,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것들 속에 있지 않다는 데서 오는 가난함. 둘 다 치명적으로 우리 마음속 깊은 곳을 외롭게 한다. 그런데 우리에겐 최근 또 다른 가난함이 생겼다. 조회수에 매달리면서 생긴 가난함이다. 조회수와 그에 따르는 수익 창출에 관심을 쏟으면서 우리는 창조성을 많이 잃었다.

우주와 인류를 위해서 영원히 최고로 좋은 것을 고르는 것.

우리는 ‘영원성’의 관점에서 볼 때만 볼 수 있는 수많은 삶의 좋음을 잃어버렸다.

사실 남의 이목이나 조회수가 아니라 우주와 영원함을 신경 쓴다니 얼마나 우습고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 딱 좋은 말인가!

동물이 없다면 인수공통전염병은 없다. 그러나 동물 없이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지구는 더 이상 지구가 아닐 것이다. 동물이 살 수 없는 지구는 인간도 살 수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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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역이 아무리 현대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해도 유족들은 중앙역 지하에 묻힌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 같은 이야기가 그들의 가슴에도 묻혀 있기 때문이다.

재난은 유족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오고 그다음에는 잊힌다. 유족들에게만 재난은 충격으로 그치지 않고 삶의 이야기, 목소리가 된다.

유족들이 대구시와 정부에 제일 먼저 요구한 것은 지하철을 불연재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유족들은 실제로 그 일을 해냈다. 이것이 유족이라면 누구나 하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의 의미다.

말은 행위로 드러난다. 우리는 운명을 바꾸는 법을 유족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다.

나는 궁금하다. 이것은 죽음의 순간인가, 사랑의 순간인가? 수세기를 살아남은 영광스러운 책들은 내게 끝없이 말해줬다. 사랑과 죽음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고. 심장이 뛰는 순간과 뛰지 않는 순간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고. 그러나 나는 아직도 사랑과 죽음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처럼 살고 있다.

이 매뉴얼을 읽던 날 락스 냄새가 하루 종일 나를 따라 다녔다. 시신과 락스는 슬픈 이야기다.

슬픔으로 무엇을 하는가는 ‘자연’과는 다른 이야기다.

우리는 왜 죽음을 특별히, 특별히 슬퍼하는가? 죽음이 소중하다면 삶도 소중한 것 아닐까? 죽음과 삶을 차별할 이유가 있는가? 이미 우리가 삶을 잃고 있다면 그것은 누가 애도하는가?

존 버저는 말했다. 미디어의 언어는 모든 것을 계량화하고 본질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고.

우리의 사랑, 우리의 미래, 우리의 인간적 가능성은 꽤 오랫동안 코로나와 기후위기라는 단어들 위에 구축될 것이다.

우리는 침이나 마스크 말고 더 근본적인, 더 본질적인 변화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만이 ‘코로나 2021’ 같은 감염병의 반복과 다가올 기후 재앙을 그나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어디선가, 아프리카 어디선가, 저기 멀리 저 밖에 있을 줄 알았던 문제가 여기 우리의 문제가 돼버렸다. 이제 변화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들 한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우울을 떨치라고, 변화된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고. 그렇다면 하나의 문제가 남는다. 변화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새로운 세계로, 삶으로 잘 들어갈 수 있을까?

당시 부모와 친구들을 잃고 큰 충격에 빠진 보카치오가 구상한 책이 『데카메론』이다. 상황상 『데카메론』은 슬픈 책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에 꼭 필요한 말을 했을 것이다. 나는 바로 그 이유,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말을 시작하는 방식을 배우기 위해’ 『데카메론』을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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