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셋은 이렇게 세상이 어려울 때 혼란을 치유할 최적의 방법은 연인을 만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의 경계를 넘지 않는 선에서 기쁨과 즐거움과 쾌락을 맛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모은다.

나는 『데카메론』이 슬플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십자가’라는 단어가 자주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십자가보다 ‘잠자리’라는 단어가 많이 나왔다. 마음껏 즐기다, 수도 없이 즐기다, 오래오래 즐기다, 힘껏 즐기다, 반복해서 즐기다, 상상도 못할 즐거움을 맛보다…. 모두 성관계를 용의주도하게 즐길 때 나오는 말이었다.

역시 책은 직접 읽어봐야 맛을 안다. 『데카메론』은 흑사병 시대의 『천일야화』나 다름없었다.

이 책 중 몇몇 장면을 읽을 때 나는 혼자인데도 괜히 뒤를 돌아보았다. 수줍었다.

내 눈에는 미풍양속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으로 보였다. 보카치오가 풍기문란 같은 죄로 화형을 당하지 않았을까 우려돼 자료를 찾아봤는데, 그는 병으로 자연사했다. 내가 소심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좀 과격하지만 완전히 허무맹랑하지만은 않은 나 나름의 상상을

『데카메론』에서 실컷 즐기는 사람들이 사실은 이미 죽어 땅 속에 묻혀 있는 사람들이라면? 발칙한 아홉 명의 수녀와 마세토 모두 유골이라면? 그렇다면 산 자는 죽은 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주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허망하게 죽어버릴 거면 살아 있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현실을 더 즐기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현실 세계에서 쾌락을 더 맛보길 바라는 것이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단식기도나 철야기도보다, 한숨 쉬며 사는 것보다 훨씬 스릴 넘치고 흥분되고 신나는 삶이 있는데….

바이러스만 전염되는 게 아니고 행복도 웃음도 기쁨도 전염된다. 어쩌면 사랑도 전염된다.*

흑사병이 초토화시킨 지구에서 하필이면 ‘사랑’에 대해서 썼다는 것이 나에겐 의미심장했다.

당분간은 우울하고 화난 얼굴들을 좀 더 자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위태로운 상황에선 가치 있는 변화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코로나는 우리가 그토록 오래 ‘자아!’ 혹은 ‘나!’를 외쳤지만 우리가 조금도 독립적이지 않고 그렇기는커녕 서로의 운명에 심하게 의존적이라는 것을 드러낸 셈이다.

언제나 우리에게 혼란을 주는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단어들이 있다. 정체성, 사랑, 행복, 자유. 이 단어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내가 너를 필요로 한다는 것.

코로나 시대는 그 관계 안에 우리가 거의 생각하지 않고 살았던 박쥐나 야생동물, 자연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려준 셈이다.

‘계속 살아라’라는 말은 ‘매순간 있는 힘껏 사랑하라’라는 말과 같다.

지금 우리의 새로운 상황은 새로운 사랑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뉴노멀 뉴로맨스’, ‘뉴노멀 뉴러브’다.

사람들이 나에게 "괜찮지요?"라고 물을 때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다른 생각이 뭐였을까? 사랑이었다.

이 시대에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지치고 진이 빠진 우리가 다시 삶을 사랑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우리 인간은 생존 그 자체로는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 생존 그 이상의 무언가를 원한다. 우리의 몸만 관찰해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몸은 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하나의 몸은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추억을 담고 있다.

우리의 몸이 하는 일, 우리는 그것을 영혼이라 부른다.

모든 행복한 이야기에는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 있고 모든 불행한 이야기는 잘못 보는 데서 시작된다(나는 언제나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해왔고 상황을 더 잘 볼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은 모두 천사로 여긴다. 이 글도 대천사들의 도움으로 써보겠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에게 아무런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리석음은 꽃피고 나쁜 일은 벌어진다.

"사람들이 공적인 공간이 뭔지를 몰라. 공공성이 다 죽었어. 왜 테이크아웃 잔은 아무 데나 두고 가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곧 가지러 올 거야. 핸드폰을 두고 갔을 때처럼 ‘어머 내 쓰레기 두고 갔네’ 하면서."
물론 헛소리다. 그러나 헛소리라고 해도 그 속에 희망이 담겨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다른 방향을 보는 친구 사이다. 그러나 인정하자. 내 친구는 비판 정신을 가지려는 사람들과 세상에 속지 않으려는 사람들, 자기 자신도 속이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만은 보석 같은 존재라는 것을 보증하겠다.

나는 우한[武漢]시내에 양쯔강이 흐른다는 것, 무척 더운 여름날 밤 젊은 연인들은 유람선을 타고 강바람을 즐긴다는 것, 우한이 야생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시골이 아니라 중국의 시카고를 꿈꾸는 거대 자본주의 도시라는 것, 우한의 수많은 공장과 대학을 밝히는 전기는 모두 삼협댐에서 온다는 것을 알아냈다(뿐만 아니라 사건 초기 우한의 기차 시간표, 비행기 시간표까지 알아냈다). 또 발이 묶여 일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농민공이 어떤 존재인지, 중국의 경제개발 과정, 도시화 과정에서 중국 정부가 농민들을 상대로 얼마나 강압적인 강제 이주정책을 펼쳤고, 그 결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야생으로 더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도 알아냈다. 중국의 야생동물 밀수입 루트는 동남아시아(특히 라오스) 쪽이 많고, 그 야생동물의 종류가 혀를 내두를 정도라는 것과(버마 별거북 같은 멸종위기종 포함) 가장 인기가 많은 야생포유동물인 족제비오소리, 돼지코오소리, 히말라야 팜시벳은 아예 농장사육을 시작했다는 것, 야생동물을 먹는 이유는 경제성장의 결과 수입이 늘어난 사람들의 과시욕이 작용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박쥐는 중국 사람들에게 행운과 복을 가져다주는 상징적 존재로 박쥐를 먹는 것에는 ‘복’을 섭취한다는 믿음이 작용한다는 것도 알아냈다. 어쨌든 중국의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말했다. 우한같이 급성장한 거대 도시들은 전 세계에 아주 많이 있다고. 핵심적인 질문은 코로나가 왜 우한에서 발발했느냐가 아니라 왜 우한 같은 거대 도시에서 발발했느냐라는 점이라고.

나는 우리나라 과거 질병의 역사까지도 공부했다. 나의 연구 결과 변강쇠가 죽은 이유는 만 가지 정도의 역병을 한꺼번에 겪어서였다.

전염병의 안보화는 AIDS에서 뚜렷하다. 점점 더 많은 군인들이 에이즈에 감염되고 있고 전쟁에서 강간은 상습적으로 이뤄진다. 다른 감염병의 문제도 국가비상사태를 유발할 만큼 심각한데 이것은 성장률 저하, 불황 수준의 실업률, 시장의 붕괴로 이어진다. 여기에 가뭄 같은 기후위기까지 더해지면 식량 안보 문제가 발생해 대규모의 기아를 불러오고 이에 따라 대규모 난민이 발생할 수 있다. 심란한 것은 이 와중에도 제약회사들의 이익(이 말은‘경제적 권리’라는 말로 불린다)에 대한 침해라는 이유로 개발도상국이 자국민에게 저렴하게 약을 제공할 수 있는 공중보건 국가비상사태 선포를 막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대략 1990년대 이래의 상황이다.

취재의 결론은 코로나는 가장 무서운 감염병도 아니고 유일한 감염병도, 마지막 감염병도 아니라는 점이다.

노인문제에 관한 한, 이미 우리는 수많은 노인들이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 과거와는 다른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럼 우리나라는? 방역을 잘해나간다고 평가받는 이유가 키스를 안 해서?"
"맞아. 딱 그만큼만 사랑하는 거지. 사랑은 안 해도 상관없는 일인 거야."
"하지만 너무 사랑한 나머지 온 힘을 다해 자제하는 중이라면?"
"우리나라에 현재 제일 없는 게 자제심이야. 힘이 있어도 그 힘을 쓰지 않으려는 사람 못 봤어. 그 많은 갑질들을 봐."

"자식의 미래는 좋은 학원을 알아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가 아니라고. 학교에 며칠 가느냐 마느냐 이걸 따질 때가 아니야. 미래에 기후난민이 몰려오면 일자리가 있을까? 식량값이 폭등할 텐데 밥은 뭘로 먹어?"

‘내 코가 석 자’로 자신의 선택을 설명하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포기하는 것이 타인과 미래다. 내가 불안한데 어떻게 남까지 생각해? 현재가 불안한데 어떻게 미래를 생각해? 그러나 위험은 늘 현재만을 생각할 때 온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일명 ‘미래인지 감수성’?‘내가 이렇게 하면 미래한테 너무 폭력적인 거 아닐까?’라는 질문?이다.

"함께 있을 때 뭘 하는지 보라고. 각자 자기 핸드폰을 봐. 심지어 함께 인증샷을 찍을 때도 각자 자기 얼굴만 본다니까."

"사랑은 요구사항이 더럽게 많은 나르시시즘을 가리키는 말이야. 인정 욕구로 넘치면서 왜 또 계속 우쭈쭈 해주길 바라는 거야?"

* 예를 들면 내 친구의 말은 자식의 ‘미래’를 위해 물려줄 아파트가 없음을 가슴 아파하는 것이 부모 사랑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세상에 문제 제기를 한다. 어떤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 것을 우리는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이데올로기에 깊게 물든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 없이 사랑도 하지 못한다.

친구는 쓰레기를 양산하는 상품보다 생각을 혹은 지식과 꿈과 경험을 나누면서 사랑하고 싶어 했다. 소비가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대화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삶을 사랑했다. 함께 소비하는 것보다는 함께 추구하는 것을 사랑했다. 사물들로 이뤄진 세상이 아니라 가치들로 이뤄진 세상을 사랑했다. 지금 이대로의 삶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의 삶을 고치고 수선하는 삶을 사랑했다. 내 친구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새로운 대화를 만드는 전문가일 수 있었지만, 할 수 있는 한 그렇게 해냈지만, 꽤 고독했다. 한 도시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혼자 깨어 있는 사람처럼, 누군가 일어나는 기척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고독했다. 꿈과 욕망이 달랐고 보는 눈이 달랐기 때문이다.

내 친구의 사랑관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의 고통을 깊게 느끼는 사람의 애타는 사랑관이다. 내 친구는 생명을 사랑한다. 생명 파괴를 다른 무엇보다 슬퍼한다. 내 친구는 불타 죽은 동물, 멸종된 동물, 함부로 여겨지는 노동자, 아름다움 없이 살아갈 미래 세대 모두에게 ‘진지한’ 관심을 쏟는다. 이제는 없는, 말 없는 혹은 말을 뺏긴 생명들을 자신의 일부처럼 고통스럽게 바라본다. 동물들의 고통, 생명 있는 것들의 고통을 느끼는 사람에게 현실은 무한지옥이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현실은 지옥이다. 안타깝게 죽은 동물들은 내 친구의 가슴에서만큼은 살아 있다. 그들은 자신이 죽어서도 이렇게 사랑받는 것을 모를 것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들도 자신이 미리부터 이렇게 사랑받는 것을 모를 것이다. 내 친구는 죽은 생명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 모두를 사랑한다. 이런 상태를 가리켜 우리는(때로는 조롱하면서) 꿈속에 산다고 한다. 현실은 다른 것을 생각하라고 하고 우리에게 다른 것을 내놓는다. 죽은 동물의 몸, 일하다 죽은 노동자의 몸 같은. 내 친구는 언제나 일관되게 꿈을 현실보다 우위에 놓고 있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반대할 일이 없다는 점이다.

별들은 첫 번째 천사이므로 별이 있는 한 우리는 천사와 함께 있는 셈이라고 한 보르헤스의 말도 떠올리게 한다.

알퐁스 도데의 『별』에서 양치기는 사랑하는 주인집 아가씨에게 모든 별 중 가장 아름다운 별은 ‘양치기의 별’이라고 말해준다. 그 별은 새벽에 양치기가 양을 몰고 나갈 때 빛나고, 저녁에 양들과 함께 돌아올 때도 빛난다. 7년마다 한 번씩 양치기의 별에게 달려가 결혼하는 별도 있다.

어깨에 기대 잠든 아가씨를 깨우지 않으려고 양치기가 새벽이 올 때까지 꼼짝 않고 앉아 있는 동안 몇 마리 양들은 별과 맛있는 풀을 꿈꾸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을 것이다. 밤은 그렇게 숨죽이고 그렇게 평화롭고, 별은 양치기의 마음속에서 아가씨에 대한 사랑과 함께 머뭇거리고, 노래는 그렇게 태어났고 밤과 잠처럼 오래도록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이 글에 나오는 인간의 손동작 중 어느 하나도 부자연스럽거나 억지스러운 데가 없다. 이럴 때 인간은 섬세하고 우아하다. 이중 내가 보지 못한 것은 표범이 와락 덮치는 것뿐인데, 경험해보고 싶은 종류의 일은 아니다. 나머지 것들은 자연을 다시 한번 자세히 보고 싶게 만든다. 이럴 때 자연도 나도 다시 한번 생명력을 얻는다. 자연이 나를 길들인다.

1970년의 고래는 뭐라고 말했을까? 한 번만이라도 고래의 언어를 알아듣고 싶다. 소리를 배열한 순서는 대체로 지구의 진화 방향을 따랐다.

16번에 ‘키스 소리’가 나온다. 앤 드루얀의 말에 따르면 키스 소리가 녹음하기 제일 어려웠다고 한다. 그 이유는 녹음실 엔지니어가 자기 팔을 빨아서 키스 소리를 내려고 애를 쓰다가 그래도 우주로 보내는 ‘영원한 키스’인데 기왕이면 진짜 키스 소리가 낫지 않겠느냐는 결론에 이르렀는데, 진짜 키스 소리는 너무 희미하거나 너무 끈적거려서 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완전히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데서 오는 가난함,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것들 속에 있지 않다는 데서 오는 가난함. 둘 다 치명적으로 우리 마음속 깊은 곳을 외롭게 한다. 그런데 우리에겐 최근 또 다른 가난함이 생겼다. 조회수에 매달리면서 생긴 가난함이다. 조회수와 그에 따르는 수익 창출에 관심을 쏟으면서 우리는 창조성을 많이 잃었다.

우주와 인류를 위해서 영원히 최고로 좋은 것을 고르는 것.

우리는 ‘영원성’의 관점에서 볼 때만 볼 수 있는 수많은 삶의 좋음을 잃어버렸다.

사실 남의 이목이나 조회수가 아니라 우주와 영원함을 신경 쓴다니 얼마나 우습고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 딱 좋은 말인가!

동물이 없다면 인수공통전염병은 없다. 그러나 동물 없이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지구는 더 이상 지구가 아닐 것이다. 동물이 살 수 없는 지구는 인간도 살 수 없는 곳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