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역이 아무리 현대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해도 유족들은 중앙역 지하에 묻힌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 같은 이야기가 그들의 가슴에도 묻혀 있기 때문이다.

재난은 유족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오고 그다음에는 잊힌다. 유족들에게만 재난은 충격으로 그치지 않고 삶의 이야기, 목소리가 된다.

유족들이 대구시와 정부에 제일 먼저 요구한 것은 지하철을 불연재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유족들은 실제로 그 일을 해냈다. 이것이 유족이라면 누구나 하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의 의미다.

말은 행위로 드러난다. 우리는 운명을 바꾸는 법을 유족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다.

나는 궁금하다. 이것은 죽음의 순간인가, 사랑의 순간인가? 수세기를 살아남은 영광스러운 책들은 내게 끝없이 말해줬다. 사랑과 죽음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고. 심장이 뛰는 순간과 뛰지 않는 순간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고. 그러나 나는 아직도 사랑과 죽음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처럼 살고 있다.

이 매뉴얼을 읽던 날 락스 냄새가 하루 종일 나를 따라 다녔다. 시신과 락스는 슬픈 이야기다.

슬픔으로 무엇을 하는가는 ‘자연’과는 다른 이야기다.

우리는 왜 죽음을 특별히, 특별히 슬퍼하는가? 죽음이 소중하다면 삶도 소중한 것 아닐까? 죽음과 삶을 차별할 이유가 있는가? 이미 우리가 삶을 잃고 있다면 그것은 누가 애도하는가?

존 버저는 말했다. 미디어의 언어는 모든 것을 계량화하고 본질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고.

우리의 사랑, 우리의 미래, 우리의 인간적 가능성은 꽤 오랫동안 코로나와 기후위기라는 단어들 위에 구축될 것이다.

우리는 침이나 마스크 말고 더 근본적인, 더 본질적인 변화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만이 ‘코로나 2021’ 같은 감염병의 반복과 다가올 기후 재앙을 그나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어디선가, 아프리카 어디선가, 저기 멀리 저 밖에 있을 줄 알았던 문제가 여기 우리의 문제가 돼버렸다. 이제 변화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들 한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우울을 떨치라고, 변화된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고. 그렇다면 하나의 문제가 남는다. 변화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새로운 세계로, 삶으로 잘 들어갈 수 있을까?

당시 부모와 친구들을 잃고 큰 충격에 빠진 보카치오가 구상한 책이 『데카메론』이다. 상황상 『데카메론』은 슬픈 책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에 꼭 필요한 말을 했을 것이다. 나는 바로 그 이유,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말을 시작하는 방식을 배우기 위해’ 『데카메론』을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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