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을 탐사했던 영국 작가 제이 그리피스의 말에 따르면 정글에서는 길을 잃기가 너무나 쉬운데 그것은 길이 금방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글에선 길을 반복해서 걷는 것이 사랑의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올바른 선택을 반복해서 하는 것도 사랑의 행위다.

삶의 해방은 다른 방식으로는 결코 쉽게 오지 않는다. 삶의 해방은 내가 하기로 한 일을 해내면서 온다.

* 내게는 이들이 거의 지상의 작은 신들처럼 보인다(실천하면서 보이는 창조력에 있어서 신에 버금간다는 의미로). 나와 비교하면 확실히 그렇다. 오랜 시간 시사 피디로 살고 있는 내가 앞에서 말한 자연과 인간사회의 복잡한 연결망을 몰랐다고 하면 거짓이다. 그러나 이런 연결망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면서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습관을 바꾸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고 나 역시 습관의 노예다). 그러나 뭐라고 정의하든 간에 결국 삶이란 일생에 걸쳐 우리가 주위에 미친 영향일 뿐이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무엇을 할 힘과 무엇을 하지 않을 힘이 다 있다(그런데 역설적으로 무엇을 하는 순간은 무엇을 하지 않는 순간이고, 무엇을 하지 않는 순간은 무엇을 하는 순간이다). 무엇을 하는 힘과 무엇을 하지 않는 힘, 이 둘을 합하면 능력이다. 그리고 무엇을 하는 힘과 무엇을 하지 않는 힘의 관계를 바꾸는 것을 변신이라고 부른다. 무엇을 하는 힘과 무엇을 하지 않는 힘 사이의 균형을 평화라고 부른다. 이 균형을 잡으면서 우리는 자기 삶의 주체가 된다. 이렇게 마침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게 된다.

자신을 알아가게 되는 과정에는 혜성의 꼬리 같은 것이 필수적으로 붙는다. 선택과 행동이다.

페터 한트케는 타인의 뿌리를 뽑는 것은 범죄 중에서도 가장 잔악한 범죄이나 자신의 뿌리를 뽑는 일은 가장 위대한 성취라고 했다.

이 지경까지 왔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살아갈 지구를 위해서라도 다르게 살기를 선택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우리가 지금 선택한 사랑의 행위들은 우리가 죽은 뒤에도, 아주 오래된 사랑이 있었다는 증거로 영원히 살아남을 텐데.

그래서 이런 질문이 남는다. 우리의 사랑 이야기에 무엇이 빠져 있는가? 우리의 사랑에 무엇이 없어서는 안 되는가? 너를 위한 나의 변신이다. 나는 너를 위해 나를 바꿀 것이다!

곧 죽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난 그게 참 낯설게 느껴진다. 난 이기적인 놈이라 그저 글을 계속 더 쓰고 싶을 뿐이다. 글 덕분에 내 맘속에 따듯한 빛이 자리 잡는가 하면, 글 덕분에 난 황금빛 대기 속으로 훌쩍 솟구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내가 얼마나 더 계속할 수 있을까? 마냥 계속하는 건 옳지 않다. 염병, 죽음은 연료 탱크 속 휘발유다. 우리에겐 죽음이 필요하다. 내게도 필요하고, 네게도 필요하다. 우리가 너무 오래 머물면 여긴 쓰레기로 꽉 찬다.
? 찰스 부코스키,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18

레이첼 카슨은 어려서부터 글을 쓰고 싶어 했다. 그녀에게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생명이었다. 레이첼은 열아홉 살 때 실험실 동료에게 이런 말을 했다. "생물학을 공부하면서 쓸 거리가 생겼어." 생명은 그녀에게 단어를 줬다. 그녀만의 목소리를 줬다. 그녀는 과학을 시처럼 쓸 줄 알았고 그녀의 글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어떤 부분에서인가는 숨을 죽였다. 글을 읽는 동안 아름다움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녀의 글에는 마치 죽은 뒤 하늘로 높이높이 떠오르는 인어공주의 영혼을 닮은 수정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

레이첼은 별장으로 이사오면서 도로시 프리먼과 스탠리 프리먼 부부를 만나게 된다. 프리먼 부부는 『우리를 둘러싼 바다』를 번갈아가면서 큰 목소리로 낭독할 정도로 좋아했고 레이첼이 이웃으로 이사를 온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레이첼과 프리먼 부부가 처음 만날 날, 초저녁의 햇살은 늦게까지 빛나고 달은 부지런히 썰물을 당겨 올렸다.

레이첼과 도로시는 같은 것을 사랑했다. 자연, 바다, 고양이. 레이첼은 다시 만나면 도로시를 조수 웅덩이, 즉 썰물의 세계에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썰물 때 드러난 조수 웅덩이를 지켜보는 것은 레이첼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우정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세계로 사람들을 초대하곤 했다.

친구와 함께 가고 싶은 모래언덕과 산마르크 솔숲은 혼자 가기에도 분명 좋은 곳일 것이다. 마린은 모래언덕과 솔숲의 일부이다. 모래언덕과 솔숲이 그의 일부이듯이. 마린은 모래언덕과 솔숲에 제대로 가치를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직 살아 있는 동안 인간들끼리 나눠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나랑 모래언덕도 안 가보고 산마르코 솔숲도 안 가보고 자네가 어떻게 나를 좋아한다 하겠는가"의 레이첼 카슨 버전이 조수 웅덩이다. 레이첼도 마린처럼 살아 있는 동안 나눠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레이첼 카슨은 이 반딧불이 이야기로 ‘경이로움’이라는 어린이책을 만들려고 했다. 그녀는 경이로움이야말로 권태와 피로, 무기력, 소외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착한 요정 같은 단어라고 생각했고, 어른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경이의 감정’을 알려주길 바랐다. 카슨의 이 말은 진리다. 호기심과 열정, 감탄, 깜짝 놀라는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시로 길을 잃을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첼은 도로시를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받은 생애 최고의 사랑스러운 선물로 여기게 되었고 그런 일이 자신의 인생에 일어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경탄과 기쁨이 밀려오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바다는 그녀에게 책의 성공과 사람들의 인정을 안겨주었지만, 도로시를 데려다줬기 때문에 특별히 더, 더, 더 소중한 것이 되었다.

"바닷속에서조차 제 힘만으로 살아가는 생명체는 없다는, 움직일 수 없는 진리"를 공유한 두 사람의 관계는 죽는 날까지 아름답고 건설적이었다.

1955년 레이첼은 도로시에게 "저와 제가 창조하려고 애쓰는 것까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느낌이 너무나 벅차다"고 편지를 보냈다.

아무도 꿈꾸지 않으면 그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아요. 하지만 누군가 골똘하게 생각하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물론 저는 정신세계를 공유하는 친애하는 두 벗에게 손을 내밀 작정입니다. 이런 꿈을 꾼다는 게 정말 신나지 않아요?"*20
* 그때 카슨이 본 것은 스트로부스 소나무와 해안선이었다.

이런 꿈을 꿀 줄 아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이런 꿈을 꿀 줄 아는 것이야말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의 삶이다.

우리는 보통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이 없음에 낙담한다. 그러나 신비로운 꿈을 꾸는 사람들은 자아를 넘어선 어떤 것을 생각한다. 제일 잘하는 것이 아니라 제일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 그 일을 한다. 그때 꿈의 주소, 꿈의 목적지는 돈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충분한 돈에 대한 꿈은 있지만 충분한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대동소이하다. 대체로 꿈의 주소는 풍족한 소비다. 짐작컨대 ‘세련됨’이라는 이름의 화려한(‘개성 넘치는’ 혹은‘독특한’ 혹은‘자기만의’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라이프스타일은 1960년대 이래 우리 꿈의 목적지가 되었다.
그녀는 책을 팔아서 숲을 사고 싶어 했다.

『우리를 둘러싼 바다』는 출간되자마자 이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사방에서 우호적인 반응이 쏟아졌는데 그때 카슨의 머릿속에 막연히 떠오른 생각은 "내가 어떤 일을 했다"기보다 "나를 통해서 어떤 일인가가 일어났다" 같은 것이었다. 해안 숲 보존을 위한 프로젝트를 염두에 둘 무렵 레이첼은 "작가는 무슨 일인가 일어나게 만드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녀 삶의 예언자가 되었다. 그녀는 곧 무슨 일인가 일어나게 하는 매개자가 될 참이었다. 1957년이 되자 뜻밖의 소송 건이 신문에 떠들썩하게 보도되기 시작했다. 이 소송에도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깔려 있다.
* 오늘날 글쓰기를 자기표현이나 힐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레이첼 카슨의 이 생각은 낯설 것이다.

그녀는 과거의 사고방식을, 특히 그것이 소중한 것일수록 버리기 어렵다고 말했는데 그 버리기 어려운 소중한 과거의 사고방식이란 바로 "자연은 위로가 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자연은 대체로 인간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영원하리라고 믿으면 위로가 됩니다. 인간은 숲을 파괴하고 둑으로 개울을 막을 수는 있지만, 그렇더라도 구름과 비와 바람은 신에게 귀속된 것이기에.

또 생명체는 신이 어떤 과정을 점지해주더라도 시간과 더불어 흘러가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다소 위로가 됩니다. 그 흐름 속의 일개 방울에 지나지 않는 존재, 즉 우리 인간들이 그 흐름을 방해한다 해도 말입니다.

그리고 물리적 환경이 생명체를 어떻게 주조한다 해도 그 생명체는 환경을 극적으로 변화시킬, 더군다나 파괴시킬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면 또한 위로가 됩니다.21

그녀가 도로시에게 편지를 쓰던 날 하필이면 라디오에서는 미국 최초로 우주선을 발사한다는 내용을 보도하고 있었다. 1939년 다섯 살짜리 칼 세이건을 매료시킨, ‘내일의 세계’라는 주제로 열린 뉴욕세계박람회에서 아인슈타인이 우주선이 뭔지 7백 자 이내로 설명해달라는 주문을 받은 지 20년 만의 일이었다.

해야 할 일이 뭔지 알면서도 손을 놓고 있다면 제게 미래의 평화는 없을 겁니다. […] 이 중차대한 일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용기 있게 발언하는 것은 제 의무이자 가장 깊은 의미의 특권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양심은 보통 ‘눈을 뜬다’는 말과 같이 사용된다. ‘전에는 왜 이것을 몰랐지?’ 같은 뜨거운 각성이 있고, 이 깨달음에서 고통과 전율이 복잡하게 얽힌 창조성이 폭발한다.

도로시는 레이첼의 베개 밑에 레이첼에게 늘 위안을 주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적은 쪽지를 넣어두었다.

모래 가루에서 세상을 보고
야생화에서 하늘을 보네
우리의 손바닥에서 영원을 보고
한 시간 속에서 영원을 보네24

썰물 때 드러나는 작은 따개비와 조개껍질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생명 전체의 위대함을 배웠던 카슨을 이만큼 잘 설명할 수 있는 시도 드물 것이다.

레이첼은 자신에게 죽음을 포함한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덜 집착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제부터 그녀의 삶은 죽음 일보 직전의 초연함과 지혜가 될 터였다. 그녀는 하기로 계획했던 일을 계속했다.

지난여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지 않고는 지빠귀의 노랫소리를 다시는 행복한 기분으로 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어젯밤 모든 새와 모든 생물과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스러운 것들에 대한 생각이 깊은 행복감과 함께 물밀듯이 찾아왔어요. 지금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으니까요. 나는 그 책을 완성할 수 있었어요. 그 책은 이제 자신만의 생명을 갖게 되었어요.25

그녀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해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만족감을 표현하는 서사가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무엇이 그녀에게 만족감을 줬나 찬찬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레이첼 카슨은 암의 위험을 경고하는 글을 쓰는 동안 정작 자신은 암을 앓게 되었다. 그런데도 "지금껏 어떤 것도 제가 포기하도록 심지어 포기할까 하고 한번쯤 생각해보도록 만들지는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백 번쯤 포기할까 생각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고 해도 인간적으로 감동할 마당에 말이다.

첫 번째 이유는 양심일 것이다("해야 할 일이 뭔지 알면서도 손을 놓고 있다면 제게 미래의 평화는 없을 겁니다"). 그녀는 자신(자신의 양심)을 저버리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가 있다. 1957년 최초의 살충제 소송을 제기한 사람들은 레이첼 카슨에게 워싱턴에 살면서 도움을 줄 누군가를 찾아달라고 청했다. 카슨은 그들에게 도움이 될 누군가를 찾는 과정에서 그 ‘누군가’가 바로 자신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누군가가 되어가는 과정이 『침묵의 봄』을 쓰는 과정이다. 『침묵의 봄』을 쓰는 일은 그녀의 거의 모든 시간과 전적인 헌신을 요구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다’ 혹은 ‘어떤 사람으로 보인다’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어간다’의 삶을 살았다.

우리는 죽기 때문에 모든 것이 덧없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죽기 때문에 숭고해질 수도, 죽기 때문에 다른 생명체의 죽음을 절절하게 느낄 수도 있다. 우리의 삶은 생물학적 ‘사실’과 인간적 ‘가치’ 사이 어딘가에, 간밤에 꾼 꿈의 흔적처럼 흐릿하고 신비롭게 묻어 있다.

우리가 향하는 곳이 죽음만은 아니다. 우리가 향하는 곳은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우리는 인생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 스스로를 맞춰가고, 그 방법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이 되어가고 자기 자신을 향해 다가갈 수 있다. 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혼란을 겪는 대신 자신을 실현해냈다.

우리가 오직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 있다고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문명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과 모든 생명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이토록 비극적으로 간과된 시대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기술을 통해 자연 세계와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 불필요한 파괴와 고통을 묵인하며 우리는 인간으로서 우리의 명성을 땅에 떨어뜨리고 있습니다.26

『침묵의 봄』에는 자연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수많은 사례들이 적혀 있다. 자연과 사람은 깊게 연결되어 있다. 문제는 그 연결고리가 죽음의 연결고리라는 점이다. 모두 인간의 욕망이 저지른 일의 결과다.

레이첼은 도로시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우리는 행복해질 거예요.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사랑스러운 것들, 해돋이와 해넘이, 만에 비치는 달빛, 음악, 좋은 책, 지빠귀의 노랫소리, 지나가는 야생 거위의 울음소리를 함께 즐길 겁니다.27

깊은 고통 속에서도 이런 아름다운 생각이 솟구쳐 올랐다.

그녀와 세상을 연결해주는 끈은 언제나 사랑이었다. 그 사랑 안에는 달빛, 지빠귀의 울음소리도 있지만 "서로가 서로를 위해 살아가는 기쁨"을 함께 누렸던 도로시가 있었다. 둘의 사랑 이야기에는 인내와 헌신이 있고 둘이 누린 추억과 기쁨이 있다.

우리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나는 우리의 사랑이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우리의 사랑은 평온하게, 우리가 함께한 모든 소중한 기억들과 함께 조용한 그늘에 보관될 겁니다. 다시 이 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만 하고 싶어요. 사랑해요. 지금도 그리고 항상.

그녀가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내일 아침에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두려움에 떨며 썼던 편지를 레이첼 사망 직후 도로시가 발견했다. 이 편지를 발견한 도로시의 마음이 어땠을까 상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내게도 레이첼의 목소리가, 너무나 부드러운, 그녀의 것임이 틀림없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사랑하는 당신, 심장 발작이 일어나 내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그 편이 내게 얼마나 쉬울지를 생각해주세요. 사랑하는 이들을 남기고 가는 일이 몹시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내가 떠나는 일이 슬프지는 않아요. 얼마 전에 나는 늦게까지 서재에 앉아 베토벤을 들으면서 진정한 평온함과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당신, 내가 이 모든 시간 동안 당신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 잊지 말아주세요.
레이첼.30

바닷가에 서 있노라면, 밀물과 썰물을 느끼고 있노라면, 바닷물이 드러내는 거대한 늪지에 짙게 드리워진 안개를 호흡하노라면,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 동안 대륙의 해안선을 따라 비행을 계속하고 있는 해안 새들을 바라보노라면, 노쇠한 뱀장어와 어린 오징어가 바다로 미끄러지듯 헤엄치는 광경을 지켜보노라면, 지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그렇듯 자연은 거의 영원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저질러놓고 나중에 수습하자는 태도야말로 재앙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아무리 파괴해도
강물은 변함없이 투명하게 찰랑거릴 것이고
소나무, 매화 향기는 숲을 물들일 것이고
물고기들은 엄청나게 많은 알을 낳을 것이고
조개껍질은 빛날 것이고
아이들은 모래사장에서 모래성을 쌓을 것이고
가끔은 신기한 어떤 것
이를테면 불가사리나 예쁜 조개껍질을 보석처럼 손에 들고
"엄마. 내가 뭘 찾았나 봐" 뛰어올 것이고
바닷바람은 짭조름한 소금 맛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줄 것이고
여행자들은 해변가 카페에서 황금빛 맥주를 마실 것이고
커다란 팔딱거리는 새우는 노릇노릇 구워질 것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장엄한 노을이 백미러에 비칠 것이고
행복, 자유, 사랑, 풍요라는 말 또한 금빛으로 빛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파괴해도
소는 초록 언덕에 누워 평화롭고도 부드럽게 음매 울 것이고
콘도르는 안데스의 노래를 부를 것이고
높은 산맥 이마에 매달린 만년설은 우리의 눈을 시원하게 해줄 것이고
아마존의 불구덩이에서도 아기 새들은 쑥쑥 자랄 것이고
불타는 지옥에서도 꽃은 필 것이고
그 꽃은 희망의 상징이 될 것이고
지느러미가 잘린 채 살아남은 돌고래 또한 희망의 상징이 될 것이고
우리는 자연의 꺼지지 않는 생명력에 감동할 것이고
태풍이 지나가면 또 맑은 날이 오듯
우리도 그처럼 살기 위해 심호흡을 하면서 애를 쓸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파괴해도
달과 별과 태양과 우주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을 알기에
우리는 오로지 하루 왔다 가는 관광객처럼 자연에게 위로를 구한다
아무것도 해준 것 없으면서
자연을 위안을 생산하는 공장처럼 들락거리면서
즐거운 나의 흔적, 쓰레기를 남겨두고
모든 것을 인내하는 사람에게 무관심하듯
우리는 자연에게 무관심하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저녁이 있기에
멸종동물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수많은 저녁놀이 있기에

그러나 진짜로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때는 우리가 죽을 때다
죽음에 가까워지면 우리의 본능은 우리가 자연임을 안다
내 몸은 이제 바짝 마른 낙엽 같고
네 몸 또한 바짝 마른 나뭇잎 같다는 사실을 애달파하고
한 줌의 흙, 거름

레이첼 카슨은 생명 그 자체가 기적이란 것에 깊게 감동받았다. 사랑하는 것이 위험에 처할 때 두려움 없이 용기를 냈다. 그녀는 과학과 양심을, 과학과 미래를, 과학과 사랑을, 과학과 용기를 결합시켰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 사랑은 손을 뻗는 것이고 팔을 벌려 안는 것이고 몸이 다가가는 것이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사랑은 실천이고 행동이고 창조다.

그녀는 일생에 걸쳐 자신의 사랑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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