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루이스 세풀베다가 직접 겪은 일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에콰르도 아마존에서 수아르족 누시뇨를 만나 그에게 아마존의 일부가 되는 법을 배웠다.* 정글에 비가 쏟아지던 날 루이스 세풀베다가 누시뇨를 따라 세 시간을 뛰어 도착한 곳이 연애 소설을 읽는 노인의 오두막이었다. 아주 단출하고 소박한, 대여섯 권의 연애 소설이 있던 오두막에서 보낸 하룻밤이 수년 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으로 탄생했다.

이 세계의 일부분이 되는 법, 그거야말로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 해야 이 사회의 괜찮은 일부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을 지금 상황에 맞게 확대한다면, 어떻게 해야 지구의 괜찮은 일부가 될 수 있을까? 나에게도 누시뇨가 있으면 좋겠다.

아내와 친구를 잃고 도처에 야만성?개발이라는 전염병, 탐욕이라는 전염병?이 창궐하는 곳에 홀로 사는 노인이 상처받은 영혼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에게 마음껏 울 수 있는 연애 소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을 돈다발로 보는 한, 동물 역시 돈으로 보는 한, 아마존에 해피엔딩은 없다.

루이스 세풀베다는 이 책을 아마존의 환경운동가 치코 멘데스에게 헌정했다. 고무나무 노동자였던 치코 멘데스는 목축업자의 손에 의해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살해당했다. 루이스 세풀베다는 올해 코로나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여러 모습 중 지붕 위에 올라간 고양이를 구하려다 떨어져 죽은 친구를 기억하며 그를 위해서 건배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나도 몇 번이나 그를 위해 건배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려고 한다.

박쥐는 수많은 인수공통감염병의 출발지로 우리 시대 혐오동물이다. 도대체 왜 박쥐란 말인가? 대체 박쥐가 누구길래? 일단, 박쥐는 종류가 많다. 1,100종이 넘고 포유류의 25퍼센트를 차지한다. 박쥐는 무려 5천만 년 전에 현재의 모습으로 진화했고 그 시간만큼 다양한 바이러스들을 보유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동물과 인간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수많은 바이러스들은 야생동물의 몸 안에 오랫동안 있어왔다. 우리 인간이 가까이 가지 않는 한 종간 전파를 일으킬 기회가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 인간이 생태계를 교란시키면 위험은 점점 커져갈 것이다. 결론적으로 바이러스가 우리를 일부러 찾아오지는 않는다. 우리가 찾아가지 않는 한. 우리는 인수공통감염병이 우리 책임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도 모르고 아마존 같은 곳을 너무 많이 파괴했다. 그런데도 그동안 감염병의 대가는 다른 동물들이 치렀다.

감염병은 그동안 동물 몇 마리 죽이고 경제에 미칠 문제나 거론하는 정도의 사안이었다. 나는 이 사실이 가슴 아프다. 우리의 필생의 임무는 우리의 존재를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고, 코로나는 그 다른 존재에는 반드시 동물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 나는 말 못하는 생명들을 위해 발언하고 싶었다.

점보는 스티브와 30년을 함께 지냈다. 둘은 가끔 공원 산책도 나갔다. 세월이 흘러 젊은 조련사 클리프가 스티브 대신 왔다. 클리프는 긴 채찍으로 점보를 때렸다. 스티브는 점보를 동등한 생명체로 대했고 마음대로 하려고 하지 않고 이해하려 했지만 클리프는 그러지 않았다. 한번은 점보의 등에 탔던 한 사내가 나뭇가지에 걸려 떨어졌고 큰 소동이 벌어졌다. 클리프는 날카로운 막대기로 점보를 찌르며 고함을 질러댔다. 밤이 되어 공원 문이 닫히자 클리프는 다시 매질을 했다.

점보-코러스 걸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면 슬퍼졌다. 스티브가 나타나길 기대하다가 끝내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면 실망해서 코를 쳐들고 울부짖었다. 사람들은 재미있어했지만 그 울음은 "엄마가 부두에서 나와 떨어질 때 내던 그 울부짖음"을 닮았다.

이 글을 읽으면 코끼리의 영혼이 떠나는 게 보인다. 점보-코러스 걸과 스티브는 둘 다 친구를 원했던 것 같다. 이 커다랗고 온순한 동물의 자제력과 품위가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기를 바란다.

‘~로서’ 말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일생에 걸쳐 우리는 많은 정체성을 살아간다. 그 정체성을 가지고 말을 한다. 자식으로서, 부모로서, 동료로서, 친구로서, 선배로서, 비정규직 혹은 정규직으로서, 피해자로서, ~의 대변자로서… 이 중에 자신의 해방, 수많은 삶의 속박과 굴레의 해방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나는 인간의 눈에는 혐오의 대상일 뿐이지만 그러나 내가 무엇에 대해 책임져야 할지는 내가 결정한다.

철새들이 길을 찾는 북극성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길을 잃지 않기를 바라고 올바른 길을 가길 바란다. 나는 내 본성을 거슬러 환한 대낮에 여기에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나는 죽는다. 그러나 돼지와 사향고양이와 천산갑과 밍크와 그리고 다른 동물 누구도 더는 건드리지 말라!"

새로운 바라보기가 새로운 존재방식을 가져온다.
? 릴케

미국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1993년 8월에 열린 그의 고향 일리노이주 축제를 취재한다. 그는 그 취재를 원했다. 공짜로 놀이기구 등등등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닭 축사는 아예 들어가볼 생각도 못했는데 축사 안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음낭을 오그라들게 하는 소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글로벌 자본주의 논리 없이는 생겨날 수 없는 자연이다. 가축도 마찬가지다. 생명은 완벽하게 상품화되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에일리언은 인류가 아니다. 인간 포유류가 아니다. 우리랑 다른 종이다. 우리랑 다른 종이 우리한테 도덕적 의무를 져야 할까? 왜 우리 몸에 알을 낳고 싶은 마음을 참아야 할까? 우리도 다른 종에게 끔직한 일을 저지르는데 왜 에일리언은 우리에게 잘해줘야 하는가? 게다가 우리가 다른 종에게 저지르는 일들은 에일리언이 우리에게 저지르는 일보다 정도가 더 심한데? 마크 롤랜즈는 집약적으로 사육되는 돼지나 닭에게 물어봐라, 에일리언이 우리에게 저지르는 일이 과연 나쁜 짓인지, 도살장에 한번 가봐라, 에일리언이 우리에게 저지르는 일이 과연 나쁜 짓인지, 적어도 에일리언은 우릴 죽일 뿐 일생에 걸쳐 괴롭히지는 않는다, 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해마다 수십억 마리의 동물에게 심어주는 공포에 비하면 외계 생명체들이 우리에게 심어주는 공포는 새 발의 피다. 게다가 에일리언이 우리 몸속에 알을 낳는 이유는 번식을 위해서다. 이건 생명체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다. 반면에 우리가 돼지나 닭을 이렇게 대하는 것은 입맛 때문이다. 이게 생명체의 번식만큼이나 중대한 이해관계인가? 생존하기 위해서 고기를 꼭 먹어야 하는가? 아니란 것은 수많은 채식주의자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식의 삶과 에일리언이 내 가슴을 뚫고 나오게 하는 삶 중에서 선택을 해야만 한다면 나는 기꺼이 식탁보를 두르고 매일매일을 에일리언과 함께 다니겠다."

에일리언이 될 것인가 공장식 축산의 닭이 될 것인가, 라고 나에게 묻는다면 나의 선택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냉큼 식탁보를 두르고 마크 롤랜즈 일행과 함께 시고니 위버를 피해 다닐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사람, 특별한 몸이라는 것도 사회에서는 의미가 없다. 이런 의미의 상실이 삶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한편 분광기를 통해 지구 공기의 5분의 1이 산소임을 밝혀냈다. 오랜 항해를 했지만 태양계에서 이렇게 산소가 많은 행성은 처음 봤다. 외계 탐사선은 좀 더 지구를 관찰해본다. 그리고 이내 두 종류의 지역이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지금까지 지나온 다른 행성이랑 비슷하다. 암석이랑 광물이 있는 지역, 다른 하나는 빨간빛을 강하게 흡수하는 물질이 분포되어 있는 이상한 지역. 이 빨간빛을 강력하게 흡수하는 물질은 엽록소다. 이것은 식물이 있다는 증거다.

외계인 탐사대원은 긴장한 채로 분해능이 1미터 이내인 망원경을 꺼내 들었다. 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긴 직선들이 보인다. 직선들은 길고 느린 행렬로 달리고 있는 물체들의 물결로 꽉 차 있다. 이 행렬은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이 행렬들은 외계인의 눈에 서로서로 ‘호의’를 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흐름이 이어질 때 또 다른 흐름은 멈춰서 기다려주기 때문이다.

이들은 밤에 두 개의 밝은 빛을 비춰 길을 잃지 않고 가야 할 곳으로 가는 것 같다.
외계인들은 지구에 반했다.

외계인은 우울한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가? 그들 눈에는 안 보이는가? 보이는데 안 보이는 척하기로 한 건가? 그들은 종족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지구와 협력할 수 없단 말인가? 혹시 지구의 지적 생명체는 무슨 묵시론에 빠져들어 집단적으로 멸종하기로 내부에서 결정을 한 것인가?

이성적이란 것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고 미래와 공동체를 위해 지금 당장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것을 받아들일 줄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지적 생명체의 의미였다

나는 여기서 살아야 한다. 나는 바다가 있는 ‘창백한 푸른 점’ 지구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 현실이 내가 사랑해야 하는 모든 것이다. 내세를 사랑하며 살 수는 없다. 다른 현실을 만들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외계인이 진짜 좋은 친구로 느껴졌다.

1996년 세상을 떠난 칼 세이건은 생전에 이미 지구의 환경위기를 감지했다. 그는 ‘만약 외계인이 현 단계의 지구를 보면 무엇을 보게 될까?’ 상상하면서 『창백한 푸른 점』이란 책에 이 글을 썼다(거기에 내가 몇 가지를 추가했다). 그러나 칼 세이건도 상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근거를 가지고 이 글을 썼다. 최초로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 갈릴레오의 이름을 딴 NASA 우주선 ‘갈릴레오호’가 1990년 이후 보내온 사진이 근거였다. 갈릴레오호의 목적은 외계인이 지구 근처를 날아간다면 인간들을 탐지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뭔가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확신’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조금씩 죽기 때문에 매일 탄생의 기적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매일 새롭게 봐야 한다. 매일 다르게 보면서 더 풍요롭게 살아내야 한다.

우주는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고 세계는 늘 우리에게 말을 건다. "이봐, 주위를 좀 보라니까! 눈 좀 뜨라니까!"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기기 시작한다면 그 자리에서 악이 자란다.
? 어슐러 K. 르 귄

이윤을 쫓아야 한다는 중압감에 짓눌려 고꾸라지고 있는 세상, 기술-과학과 권력에 대한 탐욕이라는 만족할 줄 모르는 유혹에 시달리는 세상, 세계화와 새로운 형태의 노예화에 시달리는 세상에서도 그 모든 것 너머에, 모든 것 너머에 우정은, 사랑은 존재한다.
? 카르티에 브레송

토니오와 안토닌은 같은 계곡에 사는 두 남자였지만 둘은 서로 가까워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가끔 담배를 나눠 피우거나 함께 계곡 아래를 향해 욕을 퍼부을 정도로만 가까웠다. 이다음 부분부터는 글을 직접 인용해보겠다.

독수리는 영감을 주지만 먹을 것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

안토닌은 이런 식사는 평생 처음이었다고 말한다. 고급 레스토랑에 간 것 같다고. 어쩌면 안토닌은 고급 레스토랑에 가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토니오도 안토닌이 살아온 ‘시간’과 그의 삶의 ‘조건’을 봤다. 혼자서 대충 때운 수없이 많은 식사를 봤고, 대화 상대 없이 혼자 일하고 혼자 잠들던 많은 시간을 봤다. 그의 삶이 그에게 준 쓰라림을 봤다. 그 삶이 어떤 것이었을지 이해했다. 그리고 그의 노동과 외로움을 깊이 존중했다. 토니오도 울었다.

이렇게 해서 공간은 시간이 되었다. 수많은 시간이 하나의 순간으로 모였다. 고독한 노동의 한가운데에 있는, 삶이 준 쓰라림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함께 있는 것의 온기를 잠시나마 맛볼 수 있는, 어떤 조건도 없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그냥 그렇게 있었던 순간이다. 순수한 순간이다.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순간이다. 안토닌에게만 좋은 순간이 아니고 서로 좋은 순간이다. 두 사람은 안았고 나는 두 사람이 느꼈을 감정의 승화 같은 것을 함께 느낀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헤아리고 상상한다. 연결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많은 말을 하고도 고독한 이유다. 우리는 침묵 속의 상상을 팽개쳤다. 타인을 빠른 속도로 규정하거나 평가하고 있을 뿐이다. 어깨 한번 으쓱하고 털어낼 존재처럼.

고독했지만 이해와 존중을 받는, 지상에서 그 몸짓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 안토닌. 우리는 안토닌을 영원히 이 모습으로 기억할 것이다.

집에 가려고 일어선 순간 내가 안토닌이 되었다. 뭔가가 나를 미적거리게 했다. 너무 고마운데 뭘 해야 하지? 돈을 내는 건 말도 안 되고 설거지인가? 돈을 지불하지 않으니 뭘로 감사를 표현해야 할지 어려워 마음의 짐이 되었다.

이를테면 우리는 타인의 벌거벗은 몸을 좋아한다. 누군가 눈앞에서 벌거벗는다면 아무리 안 보려고 애를 써도 몇 초라도 눈길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토록 우리의 흥미를 끄는 벌거벗은 몸을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 몸이 내 몸과 별로 다를 게 없는 비슷한 몸이란 것이다.

성적 경험에서 분명한 것은 벌거벗는다는 것은 ‘상태’라기보다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점이다.

완전히 벌거벗기까지 하나씩 하나씩 진행되는 긴장되는 과정이 없다면 벌거벗은 몸이야말로 가장 진부한 것이고 흔하디흔한 일반적인 것이다. 이것이 그렇게 많은 성장소설에 살짝 열린 문틈으로 옷을 벗고 있는 누군가를 훔쳐보는 장면이 등장하는 이유다.

막 흘러내리려는 모피 코트를 걸친 알몸 그림이 1, 2초 정도의 찰나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면 대체 뭘 보여주는 것일까? 순간이 아니라 ‘시간’ 혹은 ‘시간의 축적’을 보여준다는 것이 존 버저의 생각이다.

이제 벌거벗은 그녀는 화가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하는 일반적인 모델이 아니다. 화가가 사랑하는 눈길로 쭉 그녀가 움직이는 ‘과정’을 바라본, 그 자신에게 특별하고 고유한 여자다

‘내가 뭐라고…. 하필이면 블렌더까지 망가져서… 물어내야 할까?’ 물론, 물어낸다는 말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불필요한 이야기 같았다. 그렇다면 이 싫지 않은 부담감과 감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시간이 돈이다. 그러나 환영과 환대도 돈으로 환산해야 할까? 돈으로 그 가치를 환산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엔 뭘 해야 할까? 안토닌적인
10분간의 망설임이 나에게 있었던 것이다. 토니오가 만약 "재료값이랑 내 노동력을 더하면…"이라고 했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토니오 말대로 기쁨에 침을 뱉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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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쾡이의 복수는 지나치게 대담해. 아무리 분노가 극에 달해도 인간의 거처까지 접근한다는 것은 무모한 자살 행위나 다름없어. 맞아, 그 짐승은 스스로 죽음을 찾아 나선 거야. 그래, 짐승이 원하는 것은 죽음이야. 그러나 인간과 한판 승부를 벌인 다음에 스스로 택하는 죽음이야.

수색대를 떠나보낸 다음 날 비가 멈추었다. 비가 그친 정글이 어떻게 묘사되는지 한번 짚고 넘어가자. "수백만 개의 햇살이 밀림의 지붕을 뚫으며 밀림 위에 내리꽂히며 수많은 무지개가 그의 눈앞에서 떠오르다 사라졌다." 내가 보지 못한 수많은 무지개들이 나를 어질어질 아득하게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살쾡이가 노인의 눈앞에 나타났다.

"네놈이 원하는 게 이거였단 말이지? 나에게 끝장을 내달라고?"
그러나 암컷은 어느 틈에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상처 입은 수컷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고통스런 짐승의 최후를 반기는 것은 늘 그렇듯 흰개미들이었다. 노인은 수컷의 가슴팍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기며 중얼거렸다.
"친구, 미안하군. 그 빌어먹을 양키 놈이 우리 모두의 삶을 망쳐놓고 만 거야."

암컷과 노인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암컷은 마지막까지 용감하게 싸웠고 사랑과 명예를 지켰다. 생의 마지막 도약은 숨을 멈추게 만들 만큼 아름다웠다. 노인의 표현을 따르자면 "두 발의 총탄을 맞은 자태는 굶어서 야위긴 했지만 너무나 아름다워 인간의 상상으로는 도저히 만들어질 수 없는 존재"처럼 보였다.

노인은 우리 인간을 고발하는 역할도 했지만 우리를 아마존으로, 야생동물의 세계로 인도하는 길잡이이기도 하다. 그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탐욕, 인간의 돈이라는 이해관계를 나누어 갖지 않아서다. 돈을 택하지 않은 그의 눈에는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 잘 보인다. 그는 동물을 잘 알고, 동물 또한 인간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동물의 슬픔을 헤아리므로 일종의 천사다.

인디언과 동물은 아마존에서 상호존중, 상호의존, 절제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아마존은 죽은 살쾡이, 죽은 재규어, 죽은 표범, 죽은 인디언들의 이야기와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가난을 모르던 인디언들에게 가난을 줬고 숲에서 누리던 그들의 존엄을 빼앗았다. 자급하던 사람들에게 설탕과 술과 커피와 식량을 사게 만들었다.* 동물들에게서도 존엄성과 생명, 가족, 서식지를 빼앗았다. 만약 아름다움을 나 자신도 그 안에 속하고 싶은 것이라고 정의를 내린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아름다움을 없애버린 채 그것이 없어졌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이 헛되이 추에 추만, 공허에 공허만 쌓는다.

우리가 다른 생명을 얼마나 외롭게 했는지는 잊은 채 외로움을 호소한다.

사랑을 나누어야 할 밤에 이런 백해무익한 고통이나 주고 있다는 것이 수치다. 많은 아름다움?우리가 끝까지 헌신했으면 좋았을 아름다움?이 파괴된 세상에서 결국 우리는 뼛속 깊이 외롭다. 당연한 결론이다.

추함은 뼛속에 새겨지는 것이니까(그러나 아름다움은 우리를 외롭게 하지 않는다. 숲에 가서5분만이라도 고요히 앉아 있어 보시길. 온갖 소리가 들릴 것이다).

키머러가 만난 그녀 부족에서 증조할머니뻘 되는 위치를 차지하는 원주인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언어는 그냥 말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담겨 있는 문화다. 인디언들이 사라질 때 세상(자연)을 바라보는 가장 좋은 방식 하나가 사라져갔다.

가끔 아침 출근길에 공원에서 ‘퍼퍼위’ 하고 속으로 한번 속삭여본다. 밤새 생명을 키운 보이지 않는 힘에 조금 더 가까이 있고 싶어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힘들과 함께 힘을 낸다.

살쾡이 수컷의 머리를 쓰다듬던 노인의 손길이 자꾸만 생각난다. 어쩐지 만져서는 안 될 것을 만진 ‘실수’를 저지른 것 같다. 자연을 향한 우리의 손길 전체가 부끄러운 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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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에서 야영을 할 때는 불에 타거나 석화된 나무가 있는 곳을 골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감시병 역할을 할 수 있는 박쥐들이 서식하고 있으니까요. 무슨 말이냐 하면, 그놈들은 어떤 소리가 나면 정반대 쪽으로 날기 때문에 그 방향에 의해 맹수의 출현이나 맹수가 있는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이 말이오.

조금이라도 위험한 징후를 느끼면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배 속에 있는 것들을 몽땅 쏟아내고 마는 놈들이니 똥을 쌀 수밖에. 내 말을 잘 알아들었으면 어서 머리나 잘 닦으시오. 이번에는 개미가 아니라 모기들에게 물어뜯기고 싶지 않으면 말이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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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 년의 중국을 알고 싶으면 시안[西安]으로 가고, 천 년의 중국을 알고 싶으면 베이징[北京]에 가고, 백 년의 중국을 알고 싶으면 상하이[上海]에 가고, 30년의 중국을 알고 싶으면 바로 이 도시로 가라는 말이 있는데 그 도시가 바로 광둥성의 ‘선전’이다.

그러나 나는 광둥성과 사스의 연관 관계에 대한 취재에 어려움을 겪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선 국내에는 수의역학자가 없다. 사스를 두고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와 자료 등을 참고해서 썼다.

뭐든지 거꾸로 이루어지는 현실

2003년 11월 초, 태국의 농장에서 닭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닭들은 몸뚱이를 떨고 걸쭉한 침을 흘렸다. 농부들이 약초를 뜯어다 먹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닭들은 안색이 검은 초록색으로 변했다가 검은색으로 변해 죽어버렸다. 출랄롱코른 대학의 수의학자가 죽은 닭에서 H5N1을 발견했다고 경고했다가 묵살당했다.

정부는 닭들이 죽는 이유를 묻는 농민들에게 아무런 의학적 이유도 없이 죽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닭공장 노동자들은 닭들의 장기가 부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닭을 먹지 않기 시작했다. 그들은 뭔가 은폐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2003년 12월이 되자 한국에서도 닭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조류독감을 둘러싼 침묵의 장벽을 걷어낸 것은 한국이었다.

한국은 H5N1 바이러스를 발견하자 국제수역사무국에 재빨리 보고했다. 보고 일주일 후 대량 살처분 계획이 발표되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삶에 동물 살처분의 기억이 들어오게 되었다.

대규모 생산자와 소규모 생산자의 운명은 엇갈렸다.

결국 그들이 키우던 닭의 대부분이 죽고 한 농부의 10대 아들은 사망에까지 이르렀다. 죽은 아이의 어머니 이름은 라웽 분롯이었다. "병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기만 했어도 아들이 병든 닭에게 가까이 가도록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내 자식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내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이야기는 이것이었다. 내가 필요로 했던, 알고 싶었던 이야기도 이것이었다. 태국 시골 소년의 개인적인 죽음 앞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있다. 한 사람의 삶에 얼마나 많은 다른 삶이 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코로나로 숨진 백만 명 넘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개인적인 죽음 앞에도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을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몇 년이 지나면 우리들의 이야기도 약간이나마 라웽 분롯의 이야기처럼 재구성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살만 루시디가 『한밤의 아이들』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1001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렇다면 이전의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발현되지 못한 1001가지 가능성이 있는 것이며 또한 1001가지 종말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125만 명의 생물학적 죽음, 125만 가능성의 죽음, 125만 이야기의 죽음을 살고 있다.

나는 내가 라웽 분롯이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어떤 고통도 한 인간이 혼자 겪어야 하는 것보다 더 클 수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이 어머니와 10대 소년의 이야기는 나의 개인적인 ‘사랑’을 생각나게 한다. 내 가족을 향한 사랑, 내가 어떻게든 살려내고 싶은 사람들을 향한 사랑, 죽는다면 내가 슬퍼할 사랑, 내가 품에 안고 후회할 사랑. 그리고 태국 여행에서 만난 젊은 매춘 여성들의 사랑, 그녀들의 가족을 향한 사랑을 생각나게 한다.*

* 마이크 데이비스에 따르면 태국에서 대다수의 농민들에게 축산업 혁명은 부채의 증가와 자주성의 상실, 그리고 딸들이 계속해서 방콕의 노동 착취 공장과 매음굴로 팔려가게 되는 것을 의미해왔다고 한다.

생태계 파괴는 앞으로 더더욱 생물 종 사이의 관계를 기이하게 뒤흔들어놓을 가능성이 높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유니콘은 이런 말을 한다. "케이크는 그렇게 나누는 게 아니야. 먼저 나눠주고 잘라야지." 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현실이 그렇다. 뭔가 거꾸로 되어도 한참 거꾸로다.

보르헤스의 글에서 ‘거울’이란 단어는 생각할 거리를 준다. 거울은 함정을 가지고 있다. 거울을 보는 사람은 주로 자신만을 볼 수 있다. 거울 속에서 자기 얼굴 외에 나머지는 배경이다. 거울은 우리를 세계의 일부분으로 만들어주기보다는 폐쇄된 자기 세계에 갇히게 만든다. 온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세상 전체를 자신만을 비추는 거울쯤으로 여긴다. 어디서나 나를 본다.

맥주를 마시는 나, 거리를 걷는 나, 웃는 나, 행복한 나. 세상이 나를 봐주길 바라지만 내가 세상을 볼 마음은 없다.
온 세상에서 자신밖에 보지 못하면 자신 외의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상상력은 빈곤해진다. 빈곤해진 마음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 세상의 어느 것도 밝게 비추지 못한다.

불행히도 우리가 거울을 볼 때 제일 보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거울과 함께 있으면 우리는 더 이상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이상적인 나를 연기한다. 보이고 싶은 나를 연기한다. 혼자만의 무대에 서서 무언극을 한다. 우리는 완전무장한 채 거울을 본다. 그럴 때 거울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애가 타게 보이기를 원하는 우리의 자의식 말고는.

진실은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도 피곤하고 공허하고 외롭고 지치는 일이라는 것이다.

* 한편 다른 식으로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할 때가 있다.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 때, 하나의 풍경처럼 아름다울 때?사랑에 빠져 있을 때, 일에 몰두해 있을 때, 무심코 하는 행동이 음악처럼 아름다울 때?우리는 거울 속에서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한다. 그것은 늘 다른 사람이 봐줄 수 있을 뿐이다.

자기를 사랑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 그것은 누군가에게 발견되는 것이다. 사랑받을 만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음이 누군가에게 발견되는 것이다. 건강한 자기애는 감사와 사랑을 보낼 타인들이 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좋지 않게 행동하면 슬퍼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사랑과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살면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 중 하나다.*

세계에서 가장 큰 거울 밑에는 쓰레기가 살고 있었다. 키슈왁은 바라보는 사람을 밑에서부터 덮친다고 전해진다. 저 아래 깊은 곳으로부터. 키슈왁의 정체는 지구 온난화로 비단처럼 얇아진 얼음이었다.*
* 키슈왁 이야기는 로버트 맥팔레인의 『언더랜드』 일부분을 내가 잔재주 축에도 못 끼는 잔재주를 부려서 살짝 고친 것이다.

이 거울은 황혼 녘에 접어든 노쇠해가는 우리 문명을 비춘다. 우리의 맨 얼굴은 쓰레기다. 우리는 쓰레기와 함께 몰락하리라.
우린 우리를 사랑했다. 그러나 우리를 바꿀 만큼은 아니었다.

다른 방식의 앎, 다른 방식의 말하기가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시작이다. […]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 문화의 소산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과 다른 원주민들은 고대 그리스보다 수세대 전부터 민주주의를 실천했고,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개념을 생태민주주의적 지혜로 확장시켰다.

집단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오네이다 부족은 늑대가 사는 새로운 영토로 이사가기로 결정한 후, 의회에서 늑대들의 의견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라 회의에서는 항상 누군가는 늑대의 권리를 옹호하게 되었으며, 회의를 시작할 때 "누가 늑대를 대신해 말할 것인가?"를 묻곤 했다고 한다.
? 제이 그리피스, 『땅, 물, 불,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42

식물과 동물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경쟁 기술은 무궁무진하고 독창적이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이토록 영리한 존재인 우리가 그 단 하나의 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적응력은 생물의 이념이며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재능이다. 생물 종으로서 우리 인간은 아주 소름이 끼칠 만큼 거의 무한한 적응력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적 성장은 적어도 20세기가 시작된 시기부터 최소 1세기 동안 잘못된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무한한 성장이기도 했지만 통제받지 않은 성장이었다. 마구잡이 성장이랄까. 종양이 그런 식으로 자란다. 암도 그렇다. 우리 경제는 지금 불황이 아니다. 병이 든 것이다.
? 어슐러 K. 르 귄,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43

첫 문장부터 날씨와 관련해 기억해둘 만한 표현이 등장한다. "당나귀 배처럼 불룩한 먹장구름". 이것은 "푸른 망아지의 눈동자처럼 투명한 호수"가 그러하듯 상상의 영역에 속한다. 어떻게 생긴 구름일지 잘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나에게 하나의 공간을 준다.

수아르족은 히바로족을 멸시했는데 이유는 백인들에게 물들어 타락해버렸다는 것이다.

읍에는 읍장이 있었는데 이 읍장이 바로 이 소설에서 우리가 모두 힘을 합해 골려주고 싶어질 사람이다.

이 가죽들을 잘 보시오. 손바닥만도 못 되는 걸 벗겨서 뭘 어쩌자는 건지! 우기가 들이닥치는데 사냥을 나서다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될 짓이오? 어린 짐승의 가죽에 뚫린 총구멍을 보시오. 당신은 수아르족을 의심했지만 정작 욕을 먹을 놈은 그들이 아니라 여기 뒈져 있는 양키 놈이오. 이 빌어먹을 백인은 사냥이 금지된 기간에 사냥을 나섰고, 사냥이 금지된 짐승까지 총으로 쏴 죽였단 말이오. 게다가 나는 수아르족이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소. […] 되풀이하지만 비탄에 빠진 암살쾡이는 스무 명의 살인자들보다 더 위험한 존재라는 걸 잊지 마시오.44

이 정도의 긴 연설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자아를 폭발시킬 때 쓰는 방식을 떠올리게 하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바로 이런 말하기 때문에 욕깨나 먹었던 것 같다. 특급 작가는 아니라는 둥, 누가 그렇게 각 잡고 말하느냐는 둥. 그러나 나는 노인의 말이 구절구절 아름답다.

벌거벗고 맨발로 다니며 배가 고프면 과일을 따 먹었다. 밀림의 사소한 움직임도 감지할 수 있게 되자 한번도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자유를 자신이 누린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의 강렬한 존재감 속에서 그의 죽은 친구를 본다. 그가 친구와 함께 보낸 시간을 보고 그가 친구와 함께 지낸 아마존을 본다. 그의 친구의 눈으로 아마존을 본다. 나조차도 누시뇨가 가깝게 느껴지고 누시뇨가 내 친구 같다.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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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역사의 어느 한 시기, 세계의 기이한 악몽이자 거울처럼 우리 삶을 반영했던 피조물로서 존재했던 바이러스들, 너희들은 대체 누구니?

그는 2003년 1월 30일부터 이틀간 입원했는데 그사이 서른여 명의 의료진을 감염시켰다. 그는 다시 비정형폐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앰뷸런스 안에서 그는 사방으로 기침을 했고 각각 두 명의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앰뷸런스 기사를 감염시켰다. 두 번째 병원에서 그는 다시 스물세 명의 의사와 간호사, 열여덟 명의 환자와 그 가족들을 감염시켰다. 그는 병을 이기고 살아남았으나 감염된 많은 사람은 죽었다.

그에겐 ‘포이즌 킹’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사스의 최종 사망자는 774명으로 발표됐다. 홍콩, 싱가포르, 캐나다는 재빨리 사스 청정 지역을 선포했다. 그러나 과학자 중 사스-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해 12월 말 사스는 다시 돌아왔다. 다시 광둥성에서 세 명의 환자가 발생했다. 보건당국은 히말라야 팜시벳을 한 마리도 남기지 말고 살처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천만 마리가 넘는 시벳이 포획되어 끓는 물에 던져지거나 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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