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 년의 중국을 알고 싶으면 시안[西安]으로 가고, 천 년의 중국을 알고 싶으면 베이징[北京]에 가고, 백 년의 중국을 알고 싶으면 상하이[上海]에 가고, 30년의 중국을 알고 싶으면 바로 이 도시로 가라는 말이 있는데 그 도시가 바로 광둥성의 ‘선전’이다.

그러나 나는 광둥성과 사스의 연관 관계에 대한 취재에 어려움을 겪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선 국내에는 수의역학자가 없다. 사스를 두고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와 자료 등을 참고해서 썼다.

뭐든지 거꾸로 이루어지는 현실

2003년 11월 초, 태국의 농장에서 닭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닭들은 몸뚱이를 떨고 걸쭉한 침을 흘렸다. 농부들이 약초를 뜯어다 먹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닭들은 안색이 검은 초록색으로 변했다가 검은색으로 변해 죽어버렸다. 출랄롱코른 대학의 수의학자가 죽은 닭에서 H5N1을 발견했다고 경고했다가 묵살당했다.

정부는 닭들이 죽는 이유를 묻는 농민들에게 아무런 의학적 이유도 없이 죽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닭공장 노동자들은 닭들의 장기가 부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닭을 먹지 않기 시작했다. 그들은 뭔가 은폐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2003년 12월이 되자 한국에서도 닭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조류독감을 둘러싼 침묵의 장벽을 걷어낸 것은 한국이었다.

한국은 H5N1 바이러스를 발견하자 국제수역사무국에 재빨리 보고했다. 보고 일주일 후 대량 살처분 계획이 발표되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삶에 동물 살처분의 기억이 들어오게 되었다.

대규모 생산자와 소규모 생산자의 운명은 엇갈렸다.

결국 그들이 키우던 닭의 대부분이 죽고 한 농부의 10대 아들은 사망에까지 이르렀다. 죽은 아이의 어머니 이름은 라웽 분롯이었다. "병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기만 했어도 아들이 병든 닭에게 가까이 가도록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내 자식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내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이야기는 이것이었다. 내가 필요로 했던, 알고 싶었던 이야기도 이것이었다. 태국 시골 소년의 개인적인 죽음 앞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있다. 한 사람의 삶에 얼마나 많은 다른 삶이 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코로나로 숨진 백만 명 넘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개인적인 죽음 앞에도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을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몇 년이 지나면 우리들의 이야기도 약간이나마 라웽 분롯의 이야기처럼 재구성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살만 루시디가 『한밤의 아이들』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1001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렇다면 이전의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발현되지 못한 1001가지 가능성이 있는 것이며 또한 1001가지 종말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125만 명의 생물학적 죽음, 125만 가능성의 죽음, 125만 이야기의 죽음을 살고 있다.

나는 내가 라웽 분롯이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어떤 고통도 한 인간이 혼자 겪어야 하는 것보다 더 클 수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이 어머니와 10대 소년의 이야기는 나의 개인적인 ‘사랑’을 생각나게 한다. 내 가족을 향한 사랑, 내가 어떻게든 살려내고 싶은 사람들을 향한 사랑, 죽는다면 내가 슬퍼할 사랑, 내가 품에 안고 후회할 사랑. 그리고 태국 여행에서 만난 젊은 매춘 여성들의 사랑, 그녀들의 가족을 향한 사랑을 생각나게 한다.*

* 마이크 데이비스에 따르면 태국에서 대다수의 농민들에게 축산업 혁명은 부채의 증가와 자주성의 상실, 그리고 딸들이 계속해서 방콕의 노동 착취 공장과 매음굴로 팔려가게 되는 것을 의미해왔다고 한다.

생태계 파괴는 앞으로 더더욱 생물 종 사이의 관계를 기이하게 뒤흔들어놓을 가능성이 높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유니콘은 이런 말을 한다. "케이크는 그렇게 나누는 게 아니야. 먼저 나눠주고 잘라야지." 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현실이 그렇다. 뭔가 거꾸로 되어도 한참 거꾸로다.

보르헤스의 글에서 ‘거울’이란 단어는 생각할 거리를 준다. 거울은 함정을 가지고 있다. 거울을 보는 사람은 주로 자신만을 볼 수 있다. 거울 속에서 자기 얼굴 외에 나머지는 배경이다. 거울은 우리를 세계의 일부분으로 만들어주기보다는 폐쇄된 자기 세계에 갇히게 만든다. 온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세상 전체를 자신만을 비추는 거울쯤으로 여긴다. 어디서나 나를 본다.

맥주를 마시는 나, 거리를 걷는 나, 웃는 나, 행복한 나. 세상이 나를 봐주길 바라지만 내가 세상을 볼 마음은 없다.
온 세상에서 자신밖에 보지 못하면 자신 외의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상상력은 빈곤해진다. 빈곤해진 마음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 세상의 어느 것도 밝게 비추지 못한다.

불행히도 우리가 거울을 볼 때 제일 보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거울과 함께 있으면 우리는 더 이상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이상적인 나를 연기한다. 보이고 싶은 나를 연기한다. 혼자만의 무대에 서서 무언극을 한다. 우리는 완전무장한 채 거울을 본다. 그럴 때 거울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애가 타게 보이기를 원하는 우리의 자의식 말고는.

진실은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도 피곤하고 공허하고 외롭고 지치는 일이라는 것이다.

* 한편 다른 식으로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할 때가 있다.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 때, 하나의 풍경처럼 아름다울 때?사랑에 빠져 있을 때, 일에 몰두해 있을 때, 무심코 하는 행동이 음악처럼 아름다울 때?우리는 거울 속에서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한다. 그것은 늘 다른 사람이 봐줄 수 있을 뿐이다.

자기를 사랑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 그것은 누군가에게 발견되는 것이다. 사랑받을 만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음이 누군가에게 발견되는 것이다. 건강한 자기애는 감사와 사랑을 보낼 타인들이 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좋지 않게 행동하면 슬퍼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사랑과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살면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 중 하나다.*

세계에서 가장 큰 거울 밑에는 쓰레기가 살고 있었다. 키슈왁은 바라보는 사람을 밑에서부터 덮친다고 전해진다. 저 아래 깊은 곳으로부터. 키슈왁의 정체는 지구 온난화로 비단처럼 얇아진 얼음이었다.*
* 키슈왁 이야기는 로버트 맥팔레인의 『언더랜드』 일부분을 내가 잔재주 축에도 못 끼는 잔재주를 부려서 살짝 고친 것이다.

이 거울은 황혼 녘에 접어든 노쇠해가는 우리 문명을 비춘다. 우리의 맨 얼굴은 쓰레기다. 우리는 쓰레기와 함께 몰락하리라.
우린 우리를 사랑했다. 그러나 우리를 바꿀 만큼은 아니었다.

다른 방식의 앎, 다른 방식의 말하기가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시작이다. […]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 문화의 소산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과 다른 원주민들은 고대 그리스보다 수세대 전부터 민주주의를 실천했고,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개념을 생태민주주의적 지혜로 확장시켰다.

집단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오네이다 부족은 늑대가 사는 새로운 영토로 이사가기로 결정한 후, 의회에서 늑대들의 의견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라 회의에서는 항상 누군가는 늑대의 권리를 옹호하게 되었으며, 회의를 시작할 때 "누가 늑대를 대신해 말할 것인가?"를 묻곤 했다고 한다.
? 제이 그리피스, 『땅, 물, 불,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42

식물과 동물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경쟁 기술은 무궁무진하고 독창적이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이토록 영리한 존재인 우리가 그 단 하나의 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적응력은 생물의 이념이며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재능이다. 생물 종으로서 우리 인간은 아주 소름이 끼칠 만큼 거의 무한한 적응력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적 성장은 적어도 20세기가 시작된 시기부터 최소 1세기 동안 잘못된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무한한 성장이기도 했지만 통제받지 않은 성장이었다. 마구잡이 성장이랄까. 종양이 그런 식으로 자란다. 암도 그렇다. 우리 경제는 지금 불황이 아니다. 병이 든 것이다.
? 어슐러 K. 르 귄,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43

첫 문장부터 날씨와 관련해 기억해둘 만한 표현이 등장한다. "당나귀 배처럼 불룩한 먹장구름". 이것은 "푸른 망아지의 눈동자처럼 투명한 호수"가 그러하듯 상상의 영역에 속한다. 어떻게 생긴 구름일지 잘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나에게 하나의 공간을 준다.

수아르족은 히바로족을 멸시했는데 이유는 백인들에게 물들어 타락해버렸다는 것이다.

읍에는 읍장이 있었는데 이 읍장이 바로 이 소설에서 우리가 모두 힘을 합해 골려주고 싶어질 사람이다.

이 가죽들을 잘 보시오. 손바닥만도 못 되는 걸 벗겨서 뭘 어쩌자는 건지! 우기가 들이닥치는데 사냥을 나서다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될 짓이오? 어린 짐승의 가죽에 뚫린 총구멍을 보시오. 당신은 수아르족을 의심했지만 정작 욕을 먹을 놈은 그들이 아니라 여기 뒈져 있는 양키 놈이오. 이 빌어먹을 백인은 사냥이 금지된 기간에 사냥을 나섰고, 사냥이 금지된 짐승까지 총으로 쏴 죽였단 말이오. 게다가 나는 수아르족이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소. […] 되풀이하지만 비탄에 빠진 암살쾡이는 스무 명의 살인자들보다 더 위험한 존재라는 걸 잊지 마시오.44

이 정도의 긴 연설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자아를 폭발시킬 때 쓰는 방식을 떠올리게 하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바로 이런 말하기 때문에 욕깨나 먹었던 것 같다. 특급 작가는 아니라는 둥, 누가 그렇게 각 잡고 말하느냐는 둥. 그러나 나는 노인의 말이 구절구절 아름답다.

벌거벗고 맨발로 다니며 배가 고프면 과일을 따 먹었다. 밀림의 사소한 움직임도 감지할 수 있게 되자 한번도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자유를 자신이 누린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의 강렬한 존재감 속에서 그의 죽은 친구를 본다. 그가 친구와 함께 보낸 시간을 보고 그가 친구와 함께 지낸 아마존을 본다. 그의 친구의 눈으로 아마존을 본다. 나조차도 누시뇨가 가깝게 느껴지고 누시뇨가 내 친구 같다.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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