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루이스 세풀베다가 직접 겪은 일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에콰르도 아마존에서 수아르족 누시뇨를 만나 그에게 아마존의 일부가 되는 법을 배웠다.* 정글에 비가 쏟아지던 날 루이스 세풀베다가 누시뇨를 따라 세 시간을 뛰어 도착한 곳이 연애 소설을 읽는 노인의 오두막이었다. 아주 단출하고 소박한, 대여섯 권의 연애 소설이 있던 오두막에서 보낸 하룻밤이 수년 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으로 탄생했다.

이 세계의 일부분이 되는 법, 그거야말로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 해야 이 사회의 괜찮은 일부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을 지금 상황에 맞게 확대한다면, 어떻게 해야 지구의 괜찮은 일부가 될 수 있을까? 나에게도 누시뇨가 있으면 좋겠다.

아내와 친구를 잃고 도처에 야만성?개발이라는 전염병, 탐욕이라는 전염병?이 창궐하는 곳에 홀로 사는 노인이 상처받은 영혼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에게 마음껏 울 수 있는 연애 소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을 돈다발로 보는 한, 동물 역시 돈으로 보는 한, 아마존에 해피엔딩은 없다.

루이스 세풀베다는 이 책을 아마존의 환경운동가 치코 멘데스에게 헌정했다. 고무나무 노동자였던 치코 멘데스는 목축업자의 손에 의해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살해당했다. 루이스 세풀베다는 올해 코로나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여러 모습 중 지붕 위에 올라간 고양이를 구하려다 떨어져 죽은 친구를 기억하며 그를 위해서 건배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나도 몇 번이나 그를 위해 건배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려고 한다.

박쥐는 수많은 인수공통감염병의 출발지로 우리 시대 혐오동물이다. 도대체 왜 박쥐란 말인가? 대체 박쥐가 누구길래? 일단, 박쥐는 종류가 많다. 1,100종이 넘고 포유류의 25퍼센트를 차지한다. 박쥐는 무려 5천만 년 전에 현재의 모습으로 진화했고 그 시간만큼 다양한 바이러스들을 보유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동물과 인간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수많은 바이러스들은 야생동물의 몸 안에 오랫동안 있어왔다. 우리 인간이 가까이 가지 않는 한 종간 전파를 일으킬 기회가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 인간이 생태계를 교란시키면 위험은 점점 커져갈 것이다. 결론적으로 바이러스가 우리를 일부러 찾아오지는 않는다. 우리가 찾아가지 않는 한. 우리는 인수공통감염병이 우리 책임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도 모르고 아마존 같은 곳을 너무 많이 파괴했다. 그런데도 그동안 감염병의 대가는 다른 동물들이 치렀다.

감염병은 그동안 동물 몇 마리 죽이고 경제에 미칠 문제나 거론하는 정도의 사안이었다. 나는 이 사실이 가슴 아프다. 우리의 필생의 임무는 우리의 존재를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고, 코로나는 그 다른 존재에는 반드시 동물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 나는 말 못하는 생명들을 위해 발언하고 싶었다.

점보는 스티브와 30년을 함께 지냈다. 둘은 가끔 공원 산책도 나갔다. 세월이 흘러 젊은 조련사 클리프가 스티브 대신 왔다. 클리프는 긴 채찍으로 점보를 때렸다. 스티브는 점보를 동등한 생명체로 대했고 마음대로 하려고 하지 않고 이해하려 했지만 클리프는 그러지 않았다. 한번은 점보의 등에 탔던 한 사내가 나뭇가지에 걸려 떨어졌고 큰 소동이 벌어졌다. 클리프는 날카로운 막대기로 점보를 찌르며 고함을 질러댔다. 밤이 되어 공원 문이 닫히자 클리프는 다시 매질을 했다.

점보-코러스 걸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면 슬퍼졌다. 스티브가 나타나길 기대하다가 끝내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면 실망해서 코를 쳐들고 울부짖었다. 사람들은 재미있어했지만 그 울음은 "엄마가 부두에서 나와 떨어질 때 내던 그 울부짖음"을 닮았다.

이 글을 읽으면 코끼리의 영혼이 떠나는 게 보인다. 점보-코러스 걸과 스티브는 둘 다 친구를 원했던 것 같다. 이 커다랗고 온순한 동물의 자제력과 품위가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기를 바란다.

‘~로서’ 말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일생에 걸쳐 우리는 많은 정체성을 살아간다. 그 정체성을 가지고 말을 한다. 자식으로서, 부모로서, 동료로서, 친구로서, 선배로서, 비정규직 혹은 정규직으로서, 피해자로서, ~의 대변자로서… 이 중에 자신의 해방, 수많은 삶의 속박과 굴레의 해방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나는 인간의 눈에는 혐오의 대상일 뿐이지만 그러나 내가 무엇에 대해 책임져야 할지는 내가 결정한다.

철새들이 길을 찾는 북극성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길을 잃지 않기를 바라고 올바른 길을 가길 바란다. 나는 내 본성을 거슬러 환한 대낮에 여기에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나는 죽는다. 그러나 돼지와 사향고양이와 천산갑과 밍크와 그리고 다른 동물 누구도 더는 건드리지 말라!"

새로운 바라보기가 새로운 존재방식을 가져온다.
? 릴케

미국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1993년 8월에 열린 그의 고향 일리노이주 축제를 취재한다. 그는 그 취재를 원했다. 공짜로 놀이기구 등등등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닭 축사는 아예 들어가볼 생각도 못했는데 축사 안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음낭을 오그라들게 하는 소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글로벌 자본주의 논리 없이는 생겨날 수 없는 자연이다. 가축도 마찬가지다. 생명은 완벽하게 상품화되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에일리언은 인류가 아니다. 인간 포유류가 아니다. 우리랑 다른 종이다. 우리랑 다른 종이 우리한테 도덕적 의무를 져야 할까? 왜 우리 몸에 알을 낳고 싶은 마음을 참아야 할까? 우리도 다른 종에게 끔직한 일을 저지르는데 왜 에일리언은 우리에게 잘해줘야 하는가? 게다가 우리가 다른 종에게 저지르는 일들은 에일리언이 우리에게 저지르는 일보다 정도가 더 심한데? 마크 롤랜즈는 집약적으로 사육되는 돼지나 닭에게 물어봐라, 에일리언이 우리에게 저지르는 일이 과연 나쁜 짓인지, 도살장에 한번 가봐라, 에일리언이 우리에게 저지르는 일이 과연 나쁜 짓인지, 적어도 에일리언은 우릴 죽일 뿐 일생에 걸쳐 괴롭히지는 않는다, 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해마다 수십억 마리의 동물에게 심어주는 공포에 비하면 외계 생명체들이 우리에게 심어주는 공포는 새 발의 피다. 게다가 에일리언이 우리 몸속에 알을 낳는 이유는 번식을 위해서다. 이건 생명체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다. 반면에 우리가 돼지나 닭을 이렇게 대하는 것은 입맛 때문이다. 이게 생명체의 번식만큼이나 중대한 이해관계인가? 생존하기 위해서 고기를 꼭 먹어야 하는가? 아니란 것은 수많은 채식주의자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식의 삶과 에일리언이 내 가슴을 뚫고 나오게 하는 삶 중에서 선택을 해야만 한다면 나는 기꺼이 식탁보를 두르고 매일매일을 에일리언과 함께 다니겠다."

에일리언이 될 것인가 공장식 축산의 닭이 될 것인가, 라고 나에게 묻는다면 나의 선택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냉큼 식탁보를 두르고 마크 롤랜즈 일행과 함께 시고니 위버를 피해 다닐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사람, 특별한 몸이라는 것도 사회에서는 의미가 없다. 이런 의미의 상실이 삶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한편 분광기를 통해 지구 공기의 5분의 1이 산소임을 밝혀냈다. 오랜 항해를 했지만 태양계에서 이렇게 산소가 많은 행성은 처음 봤다. 외계 탐사선은 좀 더 지구를 관찰해본다. 그리고 이내 두 종류의 지역이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지금까지 지나온 다른 행성이랑 비슷하다. 암석이랑 광물이 있는 지역, 다른 하나는 빨간빛을 강하게 흡수하는 물질이 분포되어 있는 이상한 지역. 이 빨간빛을 강력하게 흡수하는 물질은 엽록소다. 이것은 식물이 있다는 증거다.

외계인 탐사대원은 긴장한 채로 분해능이 1미터 이내인 망원경을 꺼내 들었다. 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긴 직선들이 보인다. 직선들은 길고 느린 행렬로 달리고 있는 물체들의 물결로 꽉 차 있다. 이 행렬은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이 행렬들은 외계인의 눈에 서로서로 ‘호의’를 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흐름이 이어질 때 또 다른 흐름은 멈춰서 기다려주기 때문이다.

이들은 밤에 두 개의 밝은 빛을 비춰 길을 잃지 않고 가야 할 곳으로 가는 것 같다.
외계인들은 지구에 반했다.

외계인은 우울한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가? 그들 눈에는 안 보이는가? 보이는데 안 보이는 척하기로 한 건가? 그들은 종족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지구와 협력할 수 없단 말인가? 혹시 지구의 지적 생명체는 무슨 묵시론에 빠져들어 집단적으로 멸종하기로 내부에서 결정을 한 것인가?

이성적이란 것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고 미래와 공동체를 위해 지금 당장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것을 받아들일 줄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지적 생명체의 의미였다

나는 여기서 살아야 한다. 나는 바다가 있는 ‘창백한 푸른 점’ 지구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 현실이 내가 사랑해야 하는 모든 것이다. 내세를 사랑하며 살 수는 없다. 다른 현실을 만들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외계인이 진짜 좋은 친구로 느껴졌다.

1996년 세상을 떠난 칼 세이건은 생전에 이미 지구의 환경위기를 감지했다. 그는 ‘만약 외계인이 현 단계의 지구를 보면 무엇을 보게 될까?’ 상상하면서 『창백한 푸른 점』이란 책에 이 글을 썼다(거기에 내가 몇 가지를 추가했다). 그러나 칼 세이건도 상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근거를 가지고 이 글을 썼다. 최초로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 갈릴레오의 이름을 딴 NASA 우주선 ‘갈릴레오호’가 1990년 이후 보내온 사진이 근거였다. 갈릴레오호의 목적은 외계인이 지구 근처를 날아간다면 인간들을 탐지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뭔가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확신’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조금씩 죽기 때문에 매일 탄생의 기적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매일 새롭게 봐야 한다. 매일 다르게 보면서 더 풍요롭게 살아내야 한다.

우주는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고 세계는 늘 우리에게 말을 건다. "이봐, 주위를 좀 보라니까! 눈 좀 뜨라니까!"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기기 시작한다면 그 자리에서 악이 자란다.
? 어슐러 K. 르 귄

이윤을 쫓아야 한다는 중압감에 짓눌려 고꾸라지고 있는 세상, 기술-과학과 권력에 대한 탐욕이라는 만족할 줄 모르는 유혹에 시달리는 세상, 세계화와 새로운 형태의 노예화에 시달리는 세상에서도 그 모든 것 너머에, 모든 것 너머에 우정은, 사랑은 존재한다.
? 카르티에 브레송

토니오와 안토닌은 같은 계곡에 사는 두 남자였지만 둘은 서로 가까워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가끔 담배를 나눠 피우거나 함께 계곡 아래를 향해 욕을 퍼부을 정도로만 가까웠다. 이다음 부분부터는 글을 직접 인용해보겠다.

독수리는 영감을 주지만 먹을 것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

안토닌은 이런 식사는 평생 처음이었다고 말한다. 고급 레스토랑에 간 것 같다고. 어쩌면 안토닌은 고급 레스토랑에 가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토니오도 안토닌이 살아온 ‘시간’과 그의 삶의 ‘조건’을 봤다. 혼자서 대충 때운 수없이 많은 식사를 봤고, 대화 상대 없이 혼자 일하고 혼자 잠들던 많은 시간을 봤다. 그의 삶이 그에게 준 쓰라림을 봤다. 그 삶이 어떤 것이었을지 이해했다. 그리고 그의 노동과 외로움을 깊이 존중했다. 토니오도 울었다.

이렇게 해서 공간은 시간이 되었다. 수많은 시간이 하나의 순간으로 모였다. 고독한 노동의 한가운데에 있는, 삶이 준 쓰라림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함께 있는 것의 온기를 잠시나마 맛볼 수 있는, 어떤 조건도 없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그냥 그렇게 있었던 순간이다. 순수한 순간이다.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순간이다. 안토닌에게만 좋은 순간이 아니고 서로 좋은 순간이다. 두 사람은 안았고 나는 두 사람이 느꼈을 감정의 승화 같은 것을 함께 느낀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헤아리고 상상한다. 연결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많은 말을 하고도 고독한 이유다. 우리는 침묵 속의 상상을 팽개쳤다. 타인을 빠른 속도로 규정하거나 평가하고 있을 뿐이다. 어깨 한번 으쓱하고 털어낼 존재처럼.

고독했지만 이해와 존중을 받는, 지상에서 그 몸짓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 안토닌. 우리는 안토닌을 영원히 이 모습으로 기억할 것이다.

집에 가려고 일어선 순간 내가 안토닌이 되었다. 뭔가가 나를 미적거리게 했다. 너무 고마운데 뭘 해야 하지? 돈을 내는 건 말도 안 되고 설거지인가? 돈을 지불하지 않으니 뭘로 감사를 표현해야 할지 어려워 마음의 짐이 되었다.

이를테면 우리는 타인의 벌거벗은 몸을 좋아한다. 누군가 눈앞에서 벌거벗는다면 아무리 안 보려고 애를 써도 몇 초라도 눈길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토록 우리의 흥미를 끄는 벌거벗은 몸을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 몸이 내 몸과 별로 다를 게 없는 비슷한 몸이란 것이다.

성적 경험에서 분명한 것은 벌거벗는다는 것은 ‘상태’라기보다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점이다.

완전히 벌거벗기까지 하나씩 하나씩 진행되는 긴장되는 과정이 없다면 벌거벗은 몸이야말로 가장 진부한 것이고 흔하디흔한 일반적인 것이다. 이것이 그렇게 많은 성장소설에 살짝 열린 문틈으로 옷을 벗고 있는 누군가를 훔쳐보는 장면이 등장하는 이유다.

막 흘러내리려는 모피 코트를 걸친 알몸 그림이 1, 2초 정도의 찰나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면 대체 뭘 보여주는 것일까? 순간이 아니라 ‘시간’ 혹은 ‘시간의 축적’을 보여준다는 것이 존 버저의 생각이다.

이제 벌거벗은 그녀는 화가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하는 일반적인 모델이 아니다. 화가가 사랑하는 눈길로 쭉 그녀가 움직이는 ‘과정’을 바라본, 그 자신에게 특별하고 고유한 여자다

‘내가 뭐라고…. 하필이면 블렌더까지 망가져서… 물어내야 할까?’ 물론, 물어낸다는 말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불필요한 이야기 같았다. 그렇다면 이 싫지 않은 부담감과 감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시간이 돈이다. 그러나 환영과 환대도 돈으로 환산해야 할까? 돈으로 그 가치를 환산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엔 뭘 해야 할까? 안토닌적인
10분간의 망설임이 나에게 있었던 것이다. 토니오가 만약 "재료값이랑 내 노동력을 더하면…"이라고 했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토니오 말대로 기쁨에 침을 뱉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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