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쾡이의 복수는 지나치게 대담해. 아무리 분노가 극에 달해도 인간의 거처까지 접근한다는 것은 무모한 자살 행위나 다름없어. 맞아, 그 짐승은 스스로 죽음을 찾아 나선 거야. 그래, 짐승이 원하는 것은 죽음이야. 그러나 인간과 한판 승부를 벌인 다음에 스스로 택하는 죽음이야.

수색대를 떠나보낸 다음 날 비가 멈추었다. 비가 그친 정글이 어떻게 묘사되는지 한번 짚고 넘어가자. "수백만 개의 햇살이 밀림의 지붕을 뚫으며 밀림 위에 내리꽂히며 수많은 무지개가 그의 눈앞에서 떠오르다 사라졌다." 내가 보지 못한 수많은 무지개들이 나를 어질어질 아득하게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살쾡이가 노인의 눈앞에 나타났다.

"네놈이 원하는 게 이거였단 말이지? 나에게 끝장을 내달라고?"
그러나 암컷은 어느 틈에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상처 입은 수컷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고통스런 짐승의 최후를 반기는 것은 늘 그렇듯 흰개미들이었다. 노인은 수컷의 가슴팍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기며 중얼거렸다.
"친구, 미안하군. 그 빌어먹을 양키 놈이 우리 모두의 삶을 망쳐놓고 만 거야."

암컷과 노인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암컷은 마지막까지 용감하게 싸웠고 사랑과 명예를 지켰다. 생의 마지막 도약은 숨을 멈추게 만들 만큼 아름다웠다. 노인의 표현을 따르자면 "두 발의 총탄을 맞은 자태는 굶어서 야위긴 했지만 너무나 아름다워 인간의 상상으로는 도저히 만들어질 수 없는 존재"처럼 보였다.

노인은 우리 인간을 고발하는 역할도 했지만 우리를 아마존으로, 야생동물의 세계로 인도하는 길잡이이기도 하다. 그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탐욕, 인간의 돈이라는 이해관계를 나누어 갖지 않아서다. 돈을 택하지 않은 그의 눈에는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 잘 보인다. 그는 동물을 잘 알고, 동물 또한 인간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동물의 슬픔을 헤아리므로 일종의 천사다.

인디언과 동물은 아마존에서 상호존중, 상호의존, 절제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아마존은 죽은 살쾡이, 죽은 재규어, 죽은 표범, 죽은 인디언들의 이야기와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가난을 모르던 인디언들에게 가난을 줬고 숲에서 누리던 그들의 존엄을 빼앗았다. 자급하던 사람들에게 설탕과 술과 커피와 식량을 사게 만들었다.* 동물들에게서도 존엄성과 생명, 가족, 서식지를 빼앗았다. 만약 아름다움을 나 자신도 그 안에 속하고 싶은 것이라고 정의를 내린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아름다움을 없애버린 채 그것이 없어졌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이 헛되이 추에 추만, 공허에 공허만 쌓는다.

우리가 다른 생명을 얼마나 외롭게 했는지는 잊은 채 외로움을 호소한다.

사랑을 나누어야 할 밤에 이런 백해무익한 고통이나 주고 있다는 것이 수치다. 많은 아름다움?우리가 끝까지 헌신했으면 좋았을 아름다움?이 파괴된 세상에서 결국 우리는 뼛속 깊이 외롭다. 당연한 결론이다.

추함은 뼛속에 새겨지는 것이니까(그러나 아름다움은 우리를 외롭게 하지 않는다. 숲에 가서5분만이라도 고요히 앉아 있어 보시길. 온갖 소리가 들릴 것이다).

키머러가 만난 그녀 부족에서 증조할머니뻘 되는 위치를 차지하는 원주인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언어는 그냥 말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담겨 있는 문화다. 인디언들이 사라질 때 세상(자연)을 바라보는 가장 좋은 방식 하나가 사라져갔다.

가끔 아침 출근길에 공원에서 ‘퍼퍼위’ 하고 속으로 한번 속삭여본다. 밤새 생명을 키운 보이지 않는 힘에 조금 더 가까이 있고 싶어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힘들과 함께 힘을 낸다.

살쾡이 수컷의 머리를 쓰다듬던 노인의 손길이 자꾸만 생각난다. 어쩐지 만져서는 안 될 것을 만진 ‘실수’를 저지른 것 같다. 자연을 향한 우리의 손길 전체가 부끄러운 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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