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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가 토끼굴에 빠진 일은 사고였지만 거울 속으로 들어간 일은 자유의지였으므로 훨씬 더 용감한 행동이었다.

이 우주에는 출발점도 없고 빅뱅도 없고 창조신화도 없었다. 그곳에서 작동하는 힘은 이른바 관성력 하나뿐이었고 그 힘의 영향으로 가속도가 무게처럼 느껴졌다.

비록 육체파 미녀는 아니지만 몸매 따윈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였고, 다만 꼬챙이처럼 호리호리한 미녀임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런 미녀라서 감히 자기가 넘볼 만한 여자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마족에게도 어미와 아비가 있지만 각 세대가 너무 길기 때문에 세대 간의 유대감이 무너질 때도 많다.

마족은 긴 세월이 흘러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들에게 삶이란 무엇이 되어가는 일이 아니라 그저 존재하는 일이다.

인간의 생활방식은행위, 인간의 현실은변화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라거나 늙고, 노력하거나 실패하고, 갈망하거나 부러워하고, 얻거나 잃고, 사랑하거나 미워한다.

요컨대 인간의 삶은 늘 흥미진진하다.

마족이 돌아오자 지상에서는 삶의 온갖 규칙이 달라져버려 늘 일정해야 할 규칙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마족은 프라이버시가 바람직한 일에 함부로 끼어들고, 지독한 심술을 부리고, 옳건 그르건 차별을 일삼고, 태생부터 초자연적인지라 은밀하게 행동하고, 흑마족의 본성대로 도덕 따위는 도외시하고, 솔직함 따위는 아랑곳없이 알쏭달쏭하게 굴었다. 게다가 지구상의 인간에게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족은, 마족이므로, 한낱 인간에게 굳이 새로운 규칙을 가르쳐주려 하지도 않았다.

네 할미의 할미의 할미의 할미의 할미의 할미이기도 한데,할미를 한두 개 더 붙여야 할지도 모르겠다만 대충 넘어가자.

아무튼 12세기에 나는 네 할아비의 할아비의 할아비의 몇 번 더 할아비를 사랑했는데, 바로 그 사람이 너의 빛나는 선조, 철학자 이븐루시드였지

지미가 비틀거리며 외쳤다. "하이고, 미국에서 갈색 인종으로 살아가기도 버거운데 절반은 도깨비 혈통이라는 말씀이군요."

인류의 생존을 위한 최고의 희망은 그들의 회복력, 즉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낯설고 터무니없는 일을 직시하는 능력이다.

병드신 어머니는 지미가 어느 빼빼 마른 여자, 큰 코로 온종일 책만 들이파는 여자, 즉 여대생을 만나 결혼하길 바라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런 여자는 겉으로만 싹싹하고 행실은 개차반이기 일쑤니 사양하겠습니다.

지미는 사촌형 니르말Nirmal이 얼마나 평범해지고 싶었는지 노멀Normal로 개명해버린 일이 못마땅했다.

지미는 옛날부터 핼러윈이라면 딱 질색이라 바론 사메디*를 비롯한 변장놀이에도 일절 동참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시큰둥한 태도는 애인이 없기 때문이라고, 애인이 없어 시큰둥하고 시큰둥해서 애인이 없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어머니의 병고를,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독백을, 그리고 비틀비틀 새 모이를 주러 가는 모습을 마주할 각오를 했다. 제가 할게요, 어머니. 그렇게 말할 때마다 어머니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얘야, 죽을 날만 기다리는 쓸모없는 늙은이가 새라도 먹여 살려야지. 늘 하는 소리지만 오늘밤은 조금 더 섬뜩하게 들릴 터였다.

오늘밤 우리는 누가 꿈을 꾸는지, 누가 깨었는지 보게 되리라.

이렇게 바람이 불고 역사의 파도가 밀어닥칠 때 평화로운 곳으로 건너가려면 모름지기 침착해야 한다.

로사 패스트는 브라이턴 비치*에 거주하는 부유한 우크라이나계 유대인 가문 출신으로 산뜻한 랠프 로런 파워슈트를 즐겨 입었는데, "그 집안 사람들이 우리 이웃이었기 때문이죠, 십스헤드 베이**가 아니고"라고 종종 말했다.

천진난만한 아이를 왜 하필 그런 노출증 환자들에게 던져주었느냐, 누구든 돈만 준다면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똥을 싸지르고도 남을 인간들 아니냐, 그렇게 고래고래 호통을 쳤다.

이 말은 브롱크스 출신인 랠프 리프시츠***의 조상이 우크라이나의 이웃 나라 벨라루스에 살았다는 뜻이었다.

거짓을 진실로 포장하는 프로그램이 케이블방송 곳곳으로 널리 퍼져버리는 바람에 굳이 그런 프로그램만 제작하는 방송사가 따로 필요하지 않게 된 탓이었다.

사람들은 유명해질 가능성만 있다면 기꺼이 프라이버시를 포기했고, 사적 자아만이 진실로 자유롭고 자율적이라는 인식은 방송 전파의 잡음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 기적 같은 아기는 부정부패를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어. 아기가 어떤 사람을 부도덕하다고 판단하면 그 윤리적 부패상이 문자 그대로 몸에서 드러나지."

그녀는 신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면서도 기적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었고, 이튿날 위탁양육기관에서 이 버려진 아기를 시장실로 데려왔다.

패스트 시장의 얼굴은 티 한 점 없이 깨끗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했다.

"어떤 공동체든 그곳이 어떤 곳인지,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마디로어떤 상황인지 합의조차 할 수 없다면 이미 위기에 빠진 공동체입니다.

작은 설치류 동물을 항문에 넣어 성적 쾌감을 얻는 사람들이 있다는 괴담으로, 1980년대 당시 영화배우 리처드 기어가 모래쥐 때문에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착한 일을 하면 벌을 받기 마련이지."

아무도 얕잡아볼 수 없는 인물이지만 적개심 못지않게 신의도 두터워 의리와 우정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파괴적인 무분별의 승리가 무분별하게 파괴적인 신의 형태로 나타난 거죠.

뒤늦게나마 인생의 재미를 조금 맛보고 싶어하는 콰르토스에게 찰싹 달라붙어 테리사 사카는 결국 반지를 받아냈고, 체외수정이라는 기적 덕분에 그의 아기를 낳았고, 남편이 죽기만 기다렸다.

남편이 우두머리 수컷 행세를 하는 꼬락서니는 도저히 못 참겠다고 여자친구들에게 털어놓았다. 친구들이 합창하듯이 외쳤다. "가서 해치워버려!"

미국 억만장자 앨릭 와일든스타인은 아내 조슬린에게 위자료 25억 달러를 주고 십삼 년간 매년 1억 달러를 지급했다.

루마니아의 마을에서 어떤 여자가 알을 낳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한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하나둘씩 코뿔소로 변해갔다. 아일랜드 노인들은 쓰레기통에서 살기 시작했다. 어느 벨기에 남자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뒤통수를 보았다. 러시아의 한 공무원은 코를 잃어버렸다가 나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혼자 돌아다니는 코를 발견했다. 스페인의 어떤 여자는 가느다란 구름 한 가닥이 보름달을 지나가는 장면을 바라보다가 무시무시한 고통을 느꼈는데, 난데없이 면도날이 안구를 찢어버리는 바람에 유리체가, 즉 수정체와 망막 사이의 공간을 채운 젤라틴 모양의 물질이 흘러나왔다. 한 남자의 손바닥에서 개미떼가 구멍을 뚫고 나오기도 했다.

진실을 받아들이기보다, 그러니까 마족이 이 세계의 일상에 점점 더 많이 개입하게 되었다고 믿기보다, 언제나 우주의 숨은 원리였던 이른바 ‘우연’이 온갖 우화, 상징, 초현실, 혼돈 따위와 힘을 합쳐 인간사를 지배한다고 믿는 편이 차라리 쉬웠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사랑이, 형태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사랑이 너울너울 날아올라 멀어져갔고 다시는 되찾을 수 없었다.

‘감사야말로 여인의 마음을 얻는 최대 비결이다.’

오히려 여자가 지나갈 때마다 그의 심장만 두근거리고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왠지 그녀에게 분홍빛 장미꽃다발을 한아름 보내주고 싶다는 압도적 충동을 느낄 뿐이었다.

그런데 병원 대기실에서 충동을 못 이겨 한쪽 무릎을 꿇고 어느 못생긴 한국계 미국인 접수담당자에게 부디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영광을 베풀어달라고 애원했다. 그녀는 결혼반지를 보여주며 책상에 놓인 아이들 사진을 가리켰고 그는 울음을 터뜨려 결국 나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시내 길거리에는 여자가 너무 많고 사랑에 빠지는 일도 너무 잦아서 심장마비가 오지나 않을까 진심으로 걱정할 정도였다.

어느 밤, 자신의 페라리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가던 그는 만취한 사람만 경험하는 진정한 통찰력으로 문득 깨달았는데, 그에게는 친구도 없고, 사랑해주는 사람도 없고, 삶의 모든 측면이 황철석*처럼 번지르르할 뿐 천박하기 짝이 없고, 더구나 지금은 결코 자동차를 운전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언젠가, 아직은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시절, 어느 애인의 손에 이끌려 한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던 발리우드 영화가 떠올랐다. 자살하려고 브루클린 다리를 찾은 남녀가 서로를 보고 마음에 들어 투신자살을 포기하고 라스베이거스로 간다는 내용이었다.

모퉁이 식품점의 한국인은 직업상 싹싹한 사람들이었지만 최근에는 젊은 세대가 부모의 일을 대신하기 시작하면서 이따금씩 젊은이가 낯선 사람을 보는 눈으로 멍하니 쳐다보는 일도 있었다. 안경을 쓴 노부부는 오랜 단골손님을 볼 때마다 희미한 미소와 가벼운 눈인사로 맞이했건만.

돈 문제가 좀 걱정되긴 하지만 덩달아 걱정할 사람이 없다는 점은 역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이 좁디좁은 것만 남겨두고 넓디넓은 것은 파괴하려 한다면, 넓고 두툼한 입술보다 오종종한 입술을, 우람한 체격보다 앙상한 몸매를, 넉넉함보다 갑갑함을, 으르렁거리는 소리보다 칭얼거리는 소리를 선호한다면 차라리 큰 배를 타고 함께 침몰하리라.

왜 하필 나냐

어떤 일이든 원인은 있겠으나 반드시 무슨 목적이 있으란 법은 없다는 고통스러운 진리를 깨닫기 시작한 터였다.

원래 원하는 것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아내가 죽은 뒤에는 영영 가질 수 없는 하나를 원할 뿐이었다. 아내가 돌아오는 것.

물질의 본질을 깊이 파고들면 우주의 기본적 힘들이 지닌 엄청난 압력 때문에 인간의 언어는 해체되고 창조의 언어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는데,아이소스핀 더블릿, 뇌터정리, 회전변형, 업쿼크와 다운쿼크, 파울리의 배타원리, 위상적位相的주회周回횟수 밀도, 드람 코호몰로지, 고슴도치 공간, 분리 합집합, 스펙트럼 비대칭, 체셔고양이 원리 등등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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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스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습니다. 독자를 즐겁게 해주려고 피눈물 나게 노력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실패한 문학소설은 다른 결점을 보완할 만한 장점이 거의 없습니다. 따분하고 지루한 데다 믿을 만한 구석도 없어, 그야말로 최악의 죄악을 범한 책이 되는 셈입니다.

우리는 감정적으로 안정된 것을 선호하고, 익숙한 것을 찾아 함께하고 싶어 합니다. 예컨대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난 후에도 부모와 꾸준히 연락하고, 죽을 때까지 한 사람과 정착해서 살기를 바라며, 평생 버리지 못할 습관을 만들어갑니다. 이렇게 고착된 삶은 지적 능력의 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적인 삶에서 변화와 발전을 모색하며, 끊임없이 배워서 시대에 뒤지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정신세계에서의 안락과 과도한 친숙함은 안정이 아니라 정체(stagnation)의 징후입니다. 따라서 끊임없는 사색이 필요합니다. 새로운아이디어는 생각하는 행위에서만 잉태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플로베르의 앵무새』에서 격식에 어긋나지 않은 언어적 표현에 감명 받았고, 그 소설에 담긴 지성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짤막한 광고성 추천글은 작가가 예술계의 시민이 되는 한 방법입니다.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입니다.

이 소설은 삭막하지만, 아름답게 삭막합니다.

어떤 곤경이라고 이겨내려고 노력하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일을 하면서도 적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것입니다.

책의 겉표지는 내용을 시각적으로 압축한 장식일 뿐만 아니라 보호장치이기도 합니다.

놀랍게도 문명은 책을 만들어내는 혜안을 발휘했고, 책은 냉장고처럼 단어들을 신선하게 보존했습니다.

『타타르의 사막』은 햇살과 침묵과 고독에 젖은 철학적인 소설인 반면에,『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몸에 뿌리를 두고, 사람과 정치와 고통이 뒤범벅된 사회적 소설입니다. 쿳시는 부차티에게 영향을 받아 자신의 창의적인 여행을 시작하긴 했지만, 자기만의 고유한 종착역에 도착했습니다.

약간만 풀어놓아도소설만큼 흥미진진할 만한 삶을 살아온 작가라도, 픽션에는 자서전보다 더 원대한 것이 계획됩니다.

영리하고 재밌게, 진심을 담아서 독창적으로 쓸 수 있다니!

마농은 위선을 끔찍하게 혐오합니다. 자신의 위선에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의 위선에도 치를 떨지만, 정작 자신도 전혀 나아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어떤 것도 순전한 오락거리로만 단순화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어떤 하나로도 단순화될 수 없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옹호하며 정당화하기 마련입니다.

마르가야의 부는 로또 복권처럼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의해 결정됩니다. 예컨대 부의 첫 물결은 책의 출판으로 시작됩니다. 마르가야가 그 책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전문가가 아니라는 뜻을 함의하고 있으니까요.

책은 삶을 다룬 것이, 삶은 겸손함을 배우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책이든 거기에 쓰인 내용을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평가해보라고 요구합니다. 비교하고 대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정직하게 해낸다면, 자기검열의 과정이 되어 자신에 대해 좀 더 많이 알게 되고, 따라서 좀 더 현명해질 겁니다.

책은 소유한 것이든 빌린 것이든 오래된 것이든 새 것이든 영혼을 살찌우고 지탱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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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인간의 행위가 호의적이거나 악의적인 정령 때문에 유발된 것이라면, 선과 악이 인간의 내면이 아니라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윤리적인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정의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존재든 사랑을 하려면 감정이 있어야 하고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무엇이 꼭 필요한데, 그런 존재라면 우리 인간이인격이라고 부르는 각종 특징도 당연히 갖춰야 한다.

그들은 본질 그 자체다. 선하거나 악하고, 어질거나 모질고, 사납거나 순하고, 굳세거나 변덕스럽고, 교활하거나 너그럽다.

그때부터 그녀는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능력을 사랑하고, 사랑의 이타심을, 자기희생을, 관능을, 희열을 사랑했다. 연인과 살을 섞는 순간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사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인류가 사랑하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었지만 차차 다른 감정들도 소중해졌다. 그녀가 남녀노소 모두를 사랑한 까닭은 그들이 두려워하거나 노여워하거나 움츠러들거나 기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 내 모습을 제멋대로 바꿔버린 거야, 젠장, 누군지 정말 뻔뻔스럽네, 내가 언제 변신할지 결정할 사람은 나뿐이란 말이야.

"이상한 일이라면 진짜가 아니야."

키 큰 예쁜이는 뉴욕에 살고 키 작은 예쁜이는 로스앤젤레스에 산다.

만약 인간의 행위가 호의적이거나 악의적인 정령 때문에 유발된 것이라면, 선과 악이 인간의 내면이 아니라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윤리적인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정의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존재든 사랑을 하려면 감정이 있어야 하고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무엇이 꼭 필요한데, 그런 존재라면 우리 인간이인격이라고 부르는 각종 특징도 당연히 갖춰야 한다.

그들은 본질 그 자체다. 선하거나 악하고, 어질거나 모질고, 사납거나 순하고, 굳세거나 변덕스럽고, 교활하거나 너그럽다.

그때부터 그녀는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능력을 사랑하고, 사랑의 이타심을, 자기희생을, 관능을, 희열을 사랑했다. 연인과 살을 섞는 순간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사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인류가 사랑하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었지만 차차 다른 감정들도 소중해졌다. 그녀가 남녀노소 모두를 사랑한 까닭은 그들이 두려워하거나 노여워하거나 움츠러들거나 기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 내 모습을 제멋대로 바꿔버린 거야, 젠장, 누군지 정말 뻔뻔스럽네, 내가 언제 변신할지 결정할 사람은 나뿐이란 말이야.

"이상한 일이라면 진짜가 아니야."

키 큰 예쁜이는 뉴욕에 살고 키 작은 예쁜이는 로스앤젤레스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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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급한 마족 가운데 일부는 지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 그렇게 형태가 없는 자들은 가끔 인간의 귀나 코, 눈을 통해 몸속에 침투하여 한동안 머물다 싫증이 나면 나가버린다. 그렇게 몸을 빼앗겼던 사람은 안타깝게도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

불 없는 연기로 이루어진, 그림자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나운 지니리도 있고 사랑의 지니리도 있지만 이렇게 서로 다른 두 부류가 실은 동일한 진니아일 수도 있는데?사나운 정령을 사랑으로 보듬어 진정시킬 수도 있고 다정한 정령도 잘못 다루면 인간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포악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마족의 위대한 공주였던 어느 여마신, 벼락을 마음대로 부려 번개공주라 불리며 오래전에, 우리가 12세기라고 부르는 시대에 한 인간 남자를 사랑했던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녀의 수많은 후손에 대한 이야기이며, 기나긴 세월이 흐른 후 그녀가 이 세상에 돌아와 잠시나마 다시 사랑에 빠졌다 전쟁에 나서는 이야기다. 또한 여러 마족, 남성이든 여성이든, 날아다니든 기어다니든, 선하든 악하든 도덕 따위에는 무관심하든, 아무튼 온갖 마족에 대한 이야기이며, 2년 8개월 28일 밤, 다시 말해서 천 날 밤 하고도 하룻밤에 걸쳐 이어졌던 위기의 시대, 혼란의 시대, 우리가 괴사怪事의 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기들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유대인 사이에서 즉시 마음이 편안해졌다.

소녀는 최근에 양친을 잃은데다 수입원도 전혀 없는 처지였지만 사창가에서 일하기는 싫다고 했다.

이름은 두니아인데 유대인 이름처럼 들리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유대인 이름은 입 밖에 낼 수도 없거니와 까막눈이라 적어줄 수도 없다고 했다. 어느 나그네가 그 이름을 지어주면서 그리스어로 ‘세계’를 뜻한다고 설명해줬는데 자기는 그 뜻이 마음에 들었단다.

"그런데 왜 하필 세계를 뜻하는 이름을 골랐지?" 그가 묻자 소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내 몸에서 세계가 태어날 테니까, 그리고 내가 낳은 아이들이 세계로 퍼져나갈 테니까."

이성을 중시하는 그는 이 소녀가 여마족의 무리 즉 지니리에 속하는 초자연적 존재 진니아라는 사실을 짐작하지 못했다. 그녀는 지니리 중에서도 존귀한 공주로 지금은 지상에서 모험을 즐기는 중이었는데, 인간 남자에게 점점 더 매력을 느꼈으며 특히 슬기로운 남자를 좋아했다.

어쨌든 이 아이들은 어머니의 가장 뚜렷한 특징을 물려받았으니, 한결같이 귓불이 없었다.

이븐루시드가 초자연적 신비를 믿는 사람이었다면 자식들의 어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겠지만 그는 자기 세계에 몰두하느라 아무것도 몰랐다.

그의 성격은 너무 이기적이라 사랑을 불러일으키기는 힘들었을 테니까.

철학을 못하는 철학자는 그의 재산인 동시에 재앙인 이 슬픈 재능을 자식들이 물려받을까봐 걱정했다.

"예민하고 통찰력이 있고 수다스러운 사람은 매사에 너무 민감하고 너무 분명하게 꿰뚫어보고 너무 거리낌없이 지껄이지. 스스로 천하무적이라고 믿는 세상에서 상처받고, 스스로 영구불변이라고 여기는 세상에서 가변성을 깨닫고, 남들이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앞날을 예감하고, 남들이 타락하고 덧없는 과거에 집착하는 동안에도 곧 난폭한 미래가 들이닥쳐 현재의 대문을 때려부순다는 사실을 알거든. 아이들이 운이 좋다면 당신 귀만 물려받고 끝날 테지만, 내 자식이기도 하니 보나마나 너무 일찍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너무 빨리 너무 많은 일을 주워듣겠지. 생각하지도 듣지도 말아야 할 일까지 말이야.

그는 곧 앳된 모습의 그녀가 이불 속에서나 밖에서나 때때로 욕심 많고 고집스러운 상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몸집이 큰 남자인 반면에 두니아는 작은 새나 대벌레를 닮은 여자였지만 오히려 그녀 쪽이 더 힘이 세다고 느낄 때도 많았다.

이븐루시드에게는 늘그막에 기쁨을 안겨주는 존재였지만 그녀를 만족시키는 데 필요한 정력을 유지하기는 벅찼다.

"밤새도록 사랑을 나누고 나면 몇 시간이고 황소처럼 코를 골며 자는 것보다 오히려 더 잘 쉬었다는 느낌이 들죠. 누구나 아는 사실이에요."

이야기로 그녀의 성욕을 가라앉힐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조금은 편해졌다.

그는 동시대 사람들이 충격적이라고 생각할 만한 말을 많이 썼는데, 예컨대 ‘이성’, ‘논리’, ‘과학’은 그의 사유를, 즉 그의 책이 불타는 계기가 되었던 사상을 떠받치는 세 개의 기둥이었다.

그는 철학으로는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기는커녕 신이 둘일 수 없다는 사실조차 증명할 수 없다고 비웃었다.

철학은 원인과 결과가 필연적이라고 믿지만 그런 생각은 하느님의 권능을 과소평가한 소치다. 하느님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결과를 바꿔놓거나 원인을 무력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법칙이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따른다."

하느님의 우주에서 유일한 법칙은 바로 하느님의 뜻이니까."

"기적은 하느님이 규칙을 바꿔버릴 때 일어난다는 거야. 우리가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궁극적으로 불가해한 존재, 즉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고."

이제는그가 오히려그녀의 말을 두려워한다는 생각이 들자 두니아는 야릇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모든 글에서 ‘이성’, ‘논리’, ‘과학’ 같은 말과 ‘하느님’, ‘신앙’, ‘쿠란’ 같은 말을 서로 화해시키려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진정한 남자라면 행동의 결과를 감수해야죠. 인과관계를 믿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이름 말고 당신이 가진 게 뭐예요? 아이 만드는 재주꾼 노릇만 하면 곤란해요. 애가 생기면 먹여 살려야죠. 그게 바로 ‘논리’예요. 그게 ‘합리적’이라고요."

두니아는 그를 공격하는 데 효과적인 말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그녀가 기세등등하게 부르짖었다. "그러지 못하면 ‘부조리’란 말예요!"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삶을 선택하고 한 인간의 ‘인간’ 아내로서 인간관계를 맺었으니 자신의 선택을 고수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연인에게 본성을 드러낸다면 둘의 관계의 밑바탕이었던 속임수나 거짓말도 실토하게 될 터였다. 그래서 그가 그녀를 버릴까봐 두려워 두니아는 입을 다물었다.

어떤 이야기 속에 다른 이야기를 끼워넣고 그 속에 다시 다른 이야기를 포함시키는 방식이었는데, 그래서 이야기가 현실을 비춰주는 참다운 거울이 되었다고 이븐루시드는 생각했다.

현실에서도 우리의 이야기 속에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담겨 있기 마련이며 그 이야기 하나하나는 우리의 가족이나 조국이나 신념의 역사 같은 더 크고 장엄한 이야기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햇빛도 안 드는 이 집을 그득그득 채우는 저놈들, 내 환자들한테, 루세나의 병약한 사람들한테 터무니없는 치료비를 강요하게 만드는 저놈들이야말로두니아자트, 즉 두니아의 무리, 두니아 족속, 두니아족,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세계인’이니까."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는 그녀의 목숨을 구했지만 이븐루시드의 이야기는 그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릴 테니까.

그는 다른 도시와 여러 친지들의 서재에 아직도 자신의 책이 많이 남았다고, 어려운 시절이 닥치기 전에 이리저리 감춰두었다고 털어놓았는데, 슬기로운 자는 늘 역경에 대비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겸허한 자에게는 언젠가 이렇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오기 마련이니까.

그는 그녀를 그토록 쉽게 버렸건만 그녀는 그를 여전히 사랑했다.

당신은 나의 전부이거늘, 나의 해님이며 달님이거늘, 이제 누가 내 머리를 보듬어주랴, 누가 내 입술에 입을 맞추랴, 누가 우리 아이들의 아비가 되어주랴.

당신은 나에게 아픔을 주었지만, 먼 훗날 당신이 세상을 떠나고 다시 먼 훗날 언젠가 당신이 가족을 되찾고 싶어질 때, 바로 그 순간 내가, 당신의 정령 아내가 그 소원을 들어주겠어요.

사람들은 이븐루시드가 그녀에게 마족을 가둬놓은 램프를 주었는데 그가 떠난 후 태어난 아이들은 바로 그 마족의 자식이라고 말하기도 했으니?떠도는 소문이 얼마나 손쉽게 진실을 왜곡하는지 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 그녀의 생애는 이미 더듬더듬 흐트러진 문장이 되어버리고 글자 하나하나가 아무 의미도 없는 형태로 문드러져 도대체 그녀가 얼마나 오래,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함께 살았는지, 그리고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정말 죽었는지?전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틈새마다 삭막한 규율 같은 잡초와 따분한 사상 같은 가시덤불이 우거져 결국 완전히 막혀버렸고, 우리 선조들은 마법의 혜택이나 해악을 받는 일 없이 자기들끼리 재주껏 살아가야 했다.

거처가 없는 가족이지만 어디에나 있는 가족, 위치가 없는 마을이지만 지구상 방방곡곡에 두루 뻗어나간 마을이었다

역사는 자기가 버린 이들에게도 가혹하기 마련이지만 역사를 만들어가는 이들에게도 똑같이 가혹할 수 있다.

왜냐하면 두니아자트는 한결같이 귀가 특이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발바닥이 근질거려 좀처럼 한자리에 머물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상가들의 논쟁은 결코 끝나지 않는 법인데, 논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지식에 대한 사랑 즉 철학에서 비롯되었으므로 끊임없이 정신을 가다듬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예리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모두 거짓이거나 더러 거짓이더라도, 기록된 사실 속에 날조된 이야기가 심심찮게 섞였더라도 지금으로서는 이미 어찌할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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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없는 불로 이루어진 이들 존재가 선한지 악한지, 사나운지 너그러운지, 그런 문제에 대해서도 논란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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