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서로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고, 살고 있는 집에도 관심이 없었다.

두 사람의 눈길이 머문 구두는 무척 비싼 것이었지만, 서로의 얼굴도, 눈앞의 집채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그들에게는 내면적인 뭔가가 결여되어 있는 듯했다.

한편 지적 깊이는 없지만 세련된 마리로르는 유행에 따른 독서, 암시적 화법, 금기시되는 주제를 적절히 배합해 자신을 돋보이게 함으로써 사교계에서 완벽한 패션과 기민한 지성의 소유자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도 이끌어 가고 싶었다.

자신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원한다는 것외에는,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 삶에서 원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이 지루한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기억력보다는 상상력이 필요하리라.

그의 목소리는 무척 친절하고 부드러웠지만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법석을 떠는 것 같았고 지나치게 쩔쩔매는 것처럼 들렸다.

야외에 나올 때에도, 심지어 혼자 있을 때에도 마리로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아함과 ‘최신 유행으로 치장한’ 모습을 유지했다.

그런데 천연의 요새나 다름없는 청년의 몸속 기관들, 전체적인 건강을 좌우하는 폐와 어깨와 목 같은 것들이 예상보다 훨씬 튼튼했던 모양이었다. 그 결과,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과 매장 때 틀 음악을 고르고 있을 때, 아내 마리로르가 단아하면서도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과부의 차림새(필요하지는 않지만 반창고 하나를 관자놀이에 붙이면 효과적이었다.)를 연구하고 있을 때, 아버지 앙리 크레송이 아무 예고 없이 닥친 이 일에 몹시 화가 나 사방에 발길질을 해 대고 직원들에게 욕설을 퍼부어 대고 있을 때, 앙리 크레송의 새 아내이자 뤼도빅의 계모인 상드라가 언제나처럼 침대에 누워 까다롭고 오만하게 환자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을 때, 뤼도빅은 필사적으로 죽음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그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자 모두들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다시피 때때로 환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진단에 더 집착하는 의사들이 있다.

실제로 그는, 다리를 단련하라는 과제를 받은 아이처럼 넓은 정원을 달리면서, 또한 성인다운 태도를 되찾으려 애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의 재산으로 충분했다.(사실 마리로르가 원하는 것은 그 재산일 뿐 그가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뤼도빅이 집으로 돌아온 것은 마리로르에게 재난과도 같았다.

그녀는 사람들의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과부 역할은 해낼 수 있었지만, ‘멍청이 ? 그녀는 터놓고 어울려 지내는 이들 앞에서 남편을 의도적으로 그렇게 불렀다 ? 의 아내’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는 두려운 마음으로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무엇일까? 누구일까? 하지만 그것에 진심으로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집안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뤼도빅 자신뿐이었다.

그 친구는 쉬라고 하면 몹시 좋아해. 온갖 보장 보험에다 급료까지 계속 나가니까. 그는 위험한 시도 같은 건 안 하려 들고 필요할 땐 침대를 안 떠난다고.

앙리 크레송에게는 형이 둘 있었는데, 둘 다 ‘39~40 전쟁’3)에서 전사했다. 앙리는 유쾌한 어조로 말하곤 했다. "그 전쟁에서 죽은 사람 중엔 멍청이가 많아. ‘14~18 전쟁’4)에서 죽은 이들은 대개 영웅들이지만 말이야. ‘39~40 전쟁’은 그렇다고!"

그는 그렇게 심술궂지는 않았지만 친절해지려는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탐욕스럽지는 않았지만 너그러워지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평판 같은 것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천성적으로 집에 사람이 오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고, 아들이 천사인지 유령인지 알 수 없게 된 이제는 집 안에 자기 이외의 남자, 그러니까 진짜 남자가 있다는 사실에 막연히 마음이 놓였다.

상드라와 재혼한 후 그는 부부 관계라는 측면에서 십오 일 동안 그녀를 ‘존중했다’. 그다음에는 그녀의 존재를 좀 잊고 지냈고 이제는 드물게만 존중을 표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상드라는 이렇게 부부 관계가 뜸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뤼도빅이 열여덟 살이 되도록 여자 경험이 없었다는 것은 그가 외롭게 자랐다는 것, 다른 가엾은 시골 출신 소년들처럼 학창 시절을 거의 학교에 갇혀 보냈음을 말해 주었다.

"왜 보낼 필요가 없어요? 양갓집 여자들은 나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는데도 꽃을 보내야 하고, 나에게 서비스를 해 준 여자들에게는 꽃을 보낼 필요가 없다니요."

그가 불행해진 것은 얼마 후 마리로르를 만나면서였다. 그는 사랑에 빠졌고 자신보다 상대의 삶이 더 중요해졌고 그래서 불행해졌다. 사랑하는 이와 삶을 공유하지 않았다면 덜 불행했으리라.

마리로르는 영리하고 신중하게 그를 관리하고 감시했다. 여리고 상처 입기 쉬운 돈 많고 시간 많은 청년 뤼도빅 크레송에게 어린 아가씨든 성숙한 여자든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제대로 된 애정을 받아본 적이 없고 여자 경험이 늦었던 뤼도빅 같은 남자를 손에 넣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삶은 투쟁이었다. 두 사람 중 하나가 주도권을 쥐어야 했고, 승자는 언제나 예외 없이 그녀, 마리로르였다.

뤼도빅은 마리로르와 함께 그녀의 부모처럼 서로에게 의지하는 커플, 플라톤의 사과처럼 하나에서 갈라져 나와 갖다 대면 꼭 맞물리는 그런 커플이 되기를 꿈꾸었다.

마지막 두 개의 계단을 내려오면서 그 젊은이는 나이를 단번에 서른 살 더 먹은 것 같았다.

필립은 오래전부터 시골을 몹시 싫어했지만, 오 년 전부터는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어 말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는 미남이었다. 그러니까 한때는 미남이었고 그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지 안타까워하는지는 그날그날 상황에 따라 달랐다.

미남에다 부자이고 집안 좋고 건방진 스물두 살의 청년 필립 라바유는, 어리석고 유혹에 약한 여자 ‘제트 피플’들이 그런 형의 남자들에게 열어 주는 다양한 세계에 뛰어들었다.

그는 유산을 모조리 탕진했으나 누군가와 나눠 쓴 적이 없었고, 여자들을 정복할 줄만 알았지 사랑한 적은 없었다.

방문할 때마다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긴 했지만 필립의 잘생긴 외모는 그의 유일한 밑천이었으므로, 상드라는 그것을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그는 의자의 방향을 전환해 전용 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이야말로 그가 꿈꾸던 것임에 분명했다.

그가 보고 싶어 하는 프로그램이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프로그램과 일치하는 적은 결코 없었다.

식사 시간이면 저택의 주인인 앙리의 머릿속에는 이런 냉철한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그의 아들은 머리가 좀 이상해진 것 같고, 며느리는 속물에다 어리석으며, 아내는 못생기고 우둔하고, 처남은 멍청한 식객이었다! 그는 그런 상황을 운명인 양 차분하게 받아들였지만, 이따금 생각지도 못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발작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랑으로 여기는 고갯짓을 꾸며 내는 것을 한순간 잊고, 아무렇게나 고개를 흔들어 대며 그렇게 덧붙였다.

앙리 크레송의 두 번째 아내인 상드라 크레송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권위와 매력을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해 꾸며 낸 고갯짓을 동원하곤 했다.

"여자라면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특유의 고갯짓이나 권위 같은 것을 갖고 있어야 해요. 그건 무기인 동시에 방패라고 할 수 있어요, 내 말 믿으세요."

그 말을 듣는 데 넌덜머리가 난 앙리는 어느 날, 중요한 것은 머리를 기울이는 방식이 아니라 머릿속에 든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여자의 목과 어깨와 목덜미는 그녀가 받은 교육과 권위를 드러낸답니다.

필립은 나오려는 눈물을 매형 앞이라 애써 억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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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는다는 구상이 설익은 빵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빵을 제대로 굽는 조리법도 모르고 경영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능력은 무력뿐이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렇게 삶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초록색 보석이 사랑한다고 말해주며 마음속의 혼란을 씻어주었다. 이리 오너라, 귀염둥이야! 그는 외치며 마법의 보석을 한아름씩 긁어모아 부둥켜안았다.

분노의 대상이 흑마신과 졸개들뿐인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남을 향한 증오는 곧 자신을 향한 증오다. 그녀는 위험한 아군이었다.

인식의 문이 활짝 열리는 순간, 마족의 사악하고 극악무도한 모습은 곧 인간의 극악무도하고 사악한 일면을 비춰주는 거울과 다름없음을 깨달았고, 인간의 본성에도 똑같은 무분별이 있어 무자비하고 괴팍하고 악의적이고 잔인함을, 마족과의 싸움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싸움과 닮았음을, 따라서 마족은 현실인 동시에 추상적 개념임을, 그들이 하계로 내려오면서 이 세상에서 무엇을 근절해야 하는지 보여주었음을 깨달았는데, 그것은 바로 비이성이었고, 비이성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리는 흑마족의 이름이었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테리사 사카의 자기혐오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녀가 이미 알듯이 제로니모 자신도 내면에 깃든 마족 자아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마족뿐만 아니라 인간 내면의 무분별도 물리쳐야 비로소 이성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다.

하버드대학 사람들한테 물어보세요. 어떤 언어든 금방금방 배웠거든요. 해변에서 예쁜 조약돌 줍듯이.

우리는 사랑하는 것으로 인해 새로 태어나듯이 증오하는 것으로 인해 몰락하고 파멸한다.

누군가의 명성이 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뛰어넘어 살아남기는 쉽지 않다.

두려움은 결국 사람들을 신의 품으로 돌려보내지 못했다. 두려움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고, 두려움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비로소 신을 폐기처분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의 장난감을 내려놓듯이, 혹은 젊은 남녀가 부모의 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당당히 새 가정을 꾸리듯이. 벌써 수백 년째 우리는 그런 행운을 누리며 산다.

제로니모와 알렉산드라가 갈망했던 세상, 평화롭고 성숙한 세상, 열심히 일하고 대지를 존중하며 사는 세상이 실현되었다.

갈등이야말로 오랫동안 인류를 규정하는 서사였지만 이제 우리는 그런 역사를 바꿀 수도 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우리 사이의 차이점, 예컨대 인종, 지역, 언어, 관습 따위는 더이상 우리를 갈라놓지 못한다. 오히려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마음을 사로잡을 뿐이다. 우리는 하나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 모습에 대체로 만족한다. 어쩌면 행복하다고 말해도 좋겠다. 우리는?더 넓은 의미의 ‘우리’가 아니라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우리는?이 위대한 도시에 살며 이곳을 찬미한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꿈꾸는 능력을 지닌 사람의 수가 점점 줄어 요즘은 꿈을 꿈꾸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평화, 번영, 이해, 지혜, 친절, 진리를 얻은 대신에 우리가 치른 대가가 바로 그것이다. 밤마다 잠이 해방시켰던 우리 내면의 야성이 얌전해지면서 야간극장을 움직였던 내면의 어둠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족과 인류의 싸움은 곧 신학과 과학의 싸움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상식적 인과율을 벗어난 환상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문학적 경향."

인간이 신을 위해 존재하기보다 신이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옳다고, 모든 종교는 인류의 행복하고 조화로운 삶을 추구해야 마땅하다고 역설한다.

이 소설은 인간다움에 대하여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우리끼리도 잘살 수 있다고.

루슈디의 작품을 여럿 옮겼는데도 신작이 나올 때마다 감탄하며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 명랑하면서도 슬픈, 어두우면서도 한없이 해맑은 이 소설이 오늘을 살아가는 독자에게 부디 따뜻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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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2년 8개월 28일 밤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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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슈디는 타고난 이야기꾼의 재능에 무수한 상상력, 인간과 우주(?)에 대한 통찰과 사랑을 큰 스케일로 그려낸다. 한편의 초특급 엑스맨 영화를 본듯한 느낌도 들고. 과거와 현재, 이성과 비이성, 신앙과 종교, 꿈과 현실 등을 영리하고 정교하게 엮어 제대로 재밌는데 여운도 길다. 번역도 완전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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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을 사랑하면 인류 전체를 사랑하게 된다. 인간을 둘이나 사랑하면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고 꼼짝없이 사랑에 사로잡힌다.

그저 내 주위에 현실세계를 다시 창조하고 싶다. 설령 현실세계가 환상에 불과하고 이 터무니없는 공간이 진실일지언정 허구의 현실세계라도 되찾고 싶다. 걷고 달리고 뛰어오르고, 땅을 파고 초목을 기르고. 무슨 악마 같은, 공중의 권세를 잡은 괴물* 따위가 아니라 지상의 생물이 되고 싶다. 그것이 유일한 바람이다

이유를 따지는 건 인간의 헛짓이야.

내면에서 눈을 돌려 바깥세상을 바라보자. 내면세계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도록 내버려두자.

우리는 우리를 간단히 ‘우리’라고 칭할 뿐이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생물인지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생물이다.

우리에게 전해진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면서 처음에 지녔던 특수성을 잃어버리는 대신에 본질적 순수성을 얻어 이야기 자체만 오롯이 남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혹은 우리가 선호하는 표현으로는 그러한 이유로,비록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무엇이었는지 우리 스스로는 알 수 없지만 비로소 우리가 아는 이야기가 되고, 우리가 이해하는 이야기가 되고,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우리의 현재에 대한 이야기, 어쩌면 우리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나야! 그녀가 외쳤다.

너무 비참해서 나는 아버지가 딸을 멸시하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건강한 상태라고, 오히려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게 재앙이라고 믿었어. 그런데 이제야 진실이 드러난 거야. 아버지는 탈이 나셨고 나는 멀쩡해. 아버지를 중독시킨 독이 뭐냐고? 아버지 자신이겠지.

이때 그녀는 흐느끼고 있었다. 정원사 제로니모는 그녀를 안아주며 인간이 비인간 연인에게 해줄 수 있는 보잘것없는 위로를 건넸지만 실은 그 역시 심각한 실존적 고민에 빠진 터였다.

의미란 여러 조각이 없어져버린 퍼즐과 같아서 인간이 친밀도를 바탕으로, 즉 자기가 잘 아는 파편들을 가지고 형성해가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통해 세상이 좋은 곳이라고 믿게 되기를 바랐다. 이 세계든 저 세계든 살아 있는 두 생명이 이렇게 마주 안고 마법의 주문을 외울 수 있는 세계라면.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린 왕에 대한 근심에 그녀는 첫사랑의 기억을, 적어도 그녀를 처음 사랑했던 소년들의 기억을 포개어보는데, 그들도 처음에는 무시무시한 흑마신도 아니고 아버지의 적도 아니었다. 그 시절 자바르다스트는 귀엽고 진지한 소년 마법사였는데, 지극히 엄숙한 표정으로 각양각색의 우스꽝스러운 어릿광대 모자에서 정말 터무니없는 토끼를?실제로 존재한 적도 없는 괴상망측한 키메라 토끼와 그리핀 토끼를?끄집어내곤 했다. 끊임없이 재잘거리며 농담을 던지고 잘 웃던 자바르다스트는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아이였다. 주무루드 샤는 늘 자바르다스트와 정반대였는데, 근육이 울퉁불퉁하고, 말주변이 없어 웅얼거리기만 하고, 그렇게 말을 못해서 늘 심술궂었지만 둘 중에서 더 잘생겼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부루퉁한 백치미를 지녔다고나 할까, 아무튼 거대하고 멍청한 꽃미남을 좋아한다면.

마족은 일부일처제를 경멸하므로 지상에 비해 마계에서는 별 문제도 아니었건만 그들은 늘 그녀의 애정을 독차지하려고 경쟁을 벌였다.

지금은 기억도 안 나지만 아마도 둘 모두와 섹스를 했을 텐데, 어쨌든 그리 대단한 감명을 받지는 못했고, 그녀는 성에 안 차는 이 마신들의 구애를 외면하고 더 애처로운 인간에게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자바르다스트는 서서히 어둡고 냉혹한 성격으로 변해갔다. 아마도 그가 제일 많이 사랑한 듯싶으니 그녀를 잃은 상실감도 그만큼 컸으리라.

"옳고 그름, 그리고 합리성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불행이야. 벼룩이 개의 불행이듯이. 마족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뿐, 선이니 악이니 하는 진부한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 그리고 마족이라면 누구나 알듯이 우주는 원래 비합리적이라고."

그날부터 그들은 그녀의 적이 되었고, 하루살이처럼 고작 하루를 살고 죽어버리는 인간에게 밀려 퇴짜를 맞았다는 굴욕감 때문에 인류를 증오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고,

아름다운 수다쟁이 엘라 엘펜바인,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자신의 몸을 자랑스러워했던 그녀는 때때로 제로니모보다 아버지 벤토를 더 깊이 사랑하는 듯 보였다.

정신 바짝 차려라, 넌 환상에 빠진 거야, 지금 두 발은 멀쩡히 지면을 딛고 있지만 머리는 까마득한 구름 속을 헤매는지도 몰라.

그는 자신의 괴로움이 향수병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h-빠진-바그다드의 계단통에 둥둥 떠 있는 블루 야스민과 시스터 올비, 올리버 올드캐슬과 철학녀를 그대로 두고 떠나왔는데, 멈춰버린 동영상 같은 이 장면도 다시 움직이게 해줘야 했다.

우리는, 나중에 태어나서 그때를 돌이켜보는 우리는 이미 잘 안다.

우리 시대가 정말 우리가 말하듯이 정상인지, 아니면 그저 그때와는 또다른 비정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정한 주제는 그렇게 계속 주제가 바뀐다는 사실뿐인 듯싶고, 단 오 분이라도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결말까지 가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으니 이렇게 정신없는 상황을 도대체 누가 견딜 수 있을까 싶고, 그런 환경에 무슨 의미가 있을 리 없으니 온통 부조리뿐이고, 거기서 붙잡을 만한 의미는 무의미뿐이다.

우리 역사에 따르면 바로 그 순간 그가 보여준 이 침착성에 미래가 갈렸으니, 그의 미래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도 함께 갈렸던바, 그는 재빨리 찬합을 집어들고 카프산의 비탈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로 달려가서 그 치명적인 물건을 있는 힘껏 하늘 높이 던져버린다.

제로니모처럼 강인하고 과묵한 사람은 유난스러운 감사 표시에 당황했으리라.

험담이란 말로 빚은 진흙 같은 것, 진흙이 으레 그렇듯이 찰싹 달라붙기 때문이다.

복수에 대한 계획을 선왕에게 밝혔고, 선왕도 굳이 만류하려 하지 않았는데, 이미 죽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원래 마족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다른 뺨을 내주기보다 당한 만큼 갚아주기 때문이었다.

안락의자에서 눈을 뜬 제로니모 마네제스는 처음부터 이런 삶이 자신을 기다렸음을 깨달았다. 불확실한 삶, 당혹스러운 변화.

연인이 연인을 부르는 목소리가 아니라 위엄이 넘치는 지배자의 목소리, 예컨대 턱밑 사마귀에 털이 돋아난 할머니가 가문의 어린아이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오래전 브라질의 한 여성 예술가는 자국민에게 각자 자기 피부색의 이름을 지어보라고 청한 후 각각의 피부색을 구현한 물감 튜브를 생산하고 색상마다 그 피부색인 사람이 지은 이름을 붙였다. ‘크고 시꺼먼 사나이 색’, ‘백열전구 색’, 기타 등등. 요즘은 그녀가 생산하는 색상이 어찌나 다채로운지 튜브가 모자랄 지경인데, 우리 모두는 이런 현실이 매우 바람직하다고 널리 믿으며 두루 인정한다.

너는 네 정체를 모를 때도 무중력 병을 스스로 치료하여 지면으로 내려왔으니 앞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상상해보아라.

인간 자아는 모래시계에서 흘러내리는 모래를 주시하며 늘 다급하고 덧없는 삶을 살았던 반면에 새로 발견한 마족 자아는 시간을 가볍게 무시해버리고 연대표 따위는 그저 생각의 폭이 좁아서 생긴 병폐 정도로 여겼다. 외부세계와 자신을 지배하는 변화의 원리도 깨우쳤다. 별, 귀금속, 각종 보석 등 반짝이는 것이 점점 더 좋아졌다.

"적어도 하루에 열두 번씩 섹스를 못할 바에는 차라리 수녀가 되는 게 낫겠다, 얘. 너야 옛날부터 책을 좋아했고 솔직히 말하자면 인간도 사알짝 지나치게 좋아했으니, 물론 나야 널 사랑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래서 너는 섹스를 안 해도 우리보다 잘 견딜 테고 그냥 책이나 읽으면 되겠지만 우리는, 얘, 우리 대부분은 그게 생활이잖니."

한창 잘나갈 때는 단 하루라도 헬스클럽이나 요가센터에 못 가면 하루를 헛살았다고 느꼈다.

아, 쥐랄. 술기운에 뭉개진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우리는 가속화에 중독되어 느림, 여유, 한가로움의 즐거움을 망각했고, 세 권짜리 소설도, 네 시간짜리 영화도, 열세 편짜리 연속극도, 끈기와 머무름의 즐거움도 잊어버렸다. 할일 있으면 어서 하고, 할 이야기가 있으면 털어놓고, 살 만큼 살았으면 꺼져버려라,빨리빨리.

그들은 신앙심의 필수 요소는 적개심이라고 믿었는데, 홀쭉이 옆에 뚱뚱이라고나 할까,

역사는 얼마나 불완전한가! 반쪽뿐인 진실, 무지, 속임수, 가짜 단서, 착오, 거짓말 등의 오리무중 어딘가에 진실이 묻혀 있으련만 우리는 믿음을 잃어버리기 쉽고, 그래서 다 허깨비다, 진실 따위는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누군가의 절대적 신념이 또 누군가에게는 망언에 불과하다, 그렇게 말하기 쉽다.

우리가 알지 못하더라도 진실은 분명히 존재한다.

제로니모는 평소처럼 느긋하게 움직이는 것만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느려지게 만들 수 있다니 참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고,

새로 얻은 재간으로 그들을 살포시 지상으로 내려놓고, 불평을 들어주고,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포옹하고, 평범한 일상을 돌려주고, 그렇게 이 광기 속에서 그들을 구조하고 친구가 되어 함께 기뻐해야 했다.

바로 그 순간을 이 세상에 상식을 회복하는 신호탄으로 삼아야 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제로니모 자신도 상식을 되찾는 일을 해야만 했다.

하강은 무심결에 해낸 일로 떠오를 때만큼이나 뜻밖이었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일찍이 상상조차 못했던 비밀 자아가 눈을 뜬 결과라는 것도 이해했다.

그러나 지상으로 다시 내려오는 데 어쩌면 인간적 측면도 함께 작용했는지 모른다. 아무래도 잘못했다는, 자기가 잘못한 탓이라는 생각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허공에 떠 있던 외로운 시간 동안 그는 일생의 온갖 어두운 기억을 직시했다. 예전의 인생과 결별하는 아픔, 그를 외면하고 그 역시 외면했던 인생행로에 대한 번뇌. 그는 이 깊은 상처를 인정하고 자신에게 보여줌으로써 고통보다 강해졌다. 그리하여 중력을 되찾아 지상으로 내려왔다. 최초 감염자가 질병의 근원으로 끝나지 않고 치유의 근원이 되었다.

나이 따위는 생각에서 멀어지고 이제 내면의 눈 앞에 드넓은 가능성의 들판이 펼쳐졌다.

그녀는 바야흐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은 비관주의만이 아님을, 상황이 나빠지기도 하지만 좋아지기도 한다는 점을, 가끔은 기적도 일어난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하는 중이었다.

마치 일 년 반 전에 잃어버렸던 소중한 반지를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은 서랍 속에서 발견하듯이 잃어버렸던 희망을 거짓말처럼 되찾았으니,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었다.

삶을, 자신의 삶을, 인간으로서의 삶을 오롯이 되찾으려면 먼저 전쟁터에 승리의 깃발을 꽂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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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언어는 언어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음이 한 개이든 다섯 개이든 모든 단어는 궁극적으로 구체적인 현실과 관련지어지기 때문에 크리스티안 북이 우리를 즐겁게 해준 언어 놀이도 우리 세계에대한 의견 제시입니다. 따라서 북은 하나의 모음으로만 이루어진 단어로 말하면서도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시집의 원제 『에우노이아』(Eunoia)는 ‘아름다운 생각’이란 뜻이면서 영어의 다섯 모음을 모두 지닌 가장 짧은 단어입니다.

표현은 단순히 어휘의 문제가 아닙니다. 감정을 압도하지는 않지만 지적으로 무척 복잡한 현상을 경험하게 되면, 그 현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힘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단어가 아니라, 적절한 단어의 선택을 가능하게 해주는 이해력입니다.

『도깨비불』(Foxfire) 조이스 캐럴 오츠("제가 왜 글을 쓰는지 기억하고 싶을 때 다시 읽는 책입니다.").

허튼소리(facetious)-아, 이 단어에는 다섯 모음이 차례로 나타나는군요!

예술과 정치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라면, 정치는 잠깐이라도 멈출 수 있지만 예술의 삶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장난을 통해서 혹은 그저 장난삼아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도입니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은 보석처럼 반짝이는 소설입니다.

매년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발표는 문학계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거의 세계 전역에서 짧게 한숨을 내쉬며 "누구라고?!"라고 되묻는 소리가 들리는 듯할 정도입니다

여하튼 저는 『저지대』를읽었습니다. 그리고 "저런, 여기 독일계 사람들은 재밌게 사는 게 뭔지 모르는 게 분명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위대한 문학은 우리를 낯선 세계로 안내해서 마음의 폭을 조금이라고 넓혀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책입니다.

지난주에 저에게는 정말 신 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편지함에 중간 크기의 빳빳한 봉투가 있었습니다.
수상님만큼 많은 우편물을 받지는 않지만 저도 웬만큼은 받습니다(그렇다고 우편물을 전담할 직원을 두어야 할 만큼 많지는 않습니다만). 여하튼 무슨 우편물인지 궁금했습니다. 발송지가 미국이더군요. 봉투를 열었습니다. 두 장의 판지 사이에서 작은 봉투 하나가 빠져나왔습니다. 앞면 왼쪽 위에 발신인 발송지가 있었습니다. 백악관, 워싱턴 DC 20500. 저는 어리둥절하면서도 호기심에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습니다. 그 백악관인가?

스탈린은 오랫동안 독재자로 군림했습니다. 늙어서 죽을 때까지 권력을 장악했고, 끝없는 악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의 죄상사회적 파동, 경제의 재앙, 조직적인 엄청난 인권 침해, 만연된 기아와 빈곤은 전임자나 후임자보다 훨씬 악랄했습니다. 여하튼 러시아 사람들은 스탈린 전에는 황제의 치하에서 고되게 살았고, 스탈린 이후에는 그에게 정권을 물려받은 지도자들의 등쌀에 편히 살 수 없었습니다.

부득이하게 해야 하는 일이라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편이낫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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