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가 토끼굴에 빠진 일은 사고였지만 거울 속으로 들어간 일은 자유의지였으므로 훨씬 더 용감한 행동이었다.

이 우주에는 출발점도 없고 빅뱅도 없고 창조신화도 없었다. 그곳에서 작동하는 힘은 이른바 관성력 하나뿐이었고 그 힘의 영향으로 가속도가 무게처럼 느껴졌다.

비록 육체파 미녀는 아니지만 몸매 따윈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였고, 다만 꼬챙이처럼 호리호리한 미녀임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런 미녀라서 감히 자기가 넘볼 만한 여자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마족에게도 어미와 아비가 있지만 각 세대가 너무 길기 때문에 세대 간의 유대감이 무너질 때도 많다.

마족은 긴 세월이 흘러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들에게 삶이란 무엇이 되어가는 일이 아니라 그저 존재하는 일이다.

인간의 생활방식은행위, 인간의 현실은변화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라거나 늙고, 노력하거나 실패하고, 갈망하거나 부러워하고, 얻거나 잃고, 사랑하거나 미워한다.

요컨대 인간의 삶은 늘 흥미진진하다.

마족이 돌아오자 지상에서는 삶의 온갖 규칙이 달라져버려 늘 일정해야 할 규칙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마족은 프라이버시가 바람직한 일에 함부로 끼어들고, 지독한 심술을 부리고, 옳건 그르건 차별을 일삼고, 태생부터 초자연적인지라 은밀하게 행동하고, 흑마족의 본성대로 도덕 따위는 도외시하고, 솔직함 따위는 아랑곳없이 알쏭달쏭하게 굴었다. 게다가 지구상의 인간에게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족은, 마족이므로, 한낱 인간에게 굳이 새로운 규칙을 가르쳐주려 하지도 않았다.

네 할미의 할미의 할미의 할미의 할미의 할미이기도 한데,할미를 한두 개 더 붙여야 할지도 모르겠다만 대충 넘어가자.

아무튼 12세기에 나는 네 할아비의 할아비의 할아비의 몇 번 더 할아비를 사랑했는데, 바로 그 사람이 너의 빛나는 선조, 철학자 이븐루시드였지

지미가 비틀거리며 외쳤다. "하이고, 미국에서 갈색 인종으로 살아가기도 버거운데 절반은 도깨비 혈통이라는 말씀이군요."

인류의 생존을 위한 최고의 희망은 그들의 회복력, 즉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낯설고 터무니없는 일을 직시하는 능력이다.

병드신 어머니는 지미가 어느 빼빼 마른 여자, 큰 코로 온종일 책만 들이파는 여자, 즉 여대생을 만나 결혼하길 바라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런 여자는 겉으로만 싹싹하고 행실은 개차반이기 일쑤니 사양하겠습니다.

지미는 사촌형 니르말Nirmal이 얼마나 평범해지고 싶었는지 노멀Normal로 개명해버린 일이 못마땅했다.

지미는 옛날부터 핼러윈이라면 딱 질색이라 바론 사메디*를 비롯한 변장놀이에도 일절 동참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시큰둥한 태도는 애인이 없기 때문이라고, 애인이 없어 시큰둥하고 시큰둥해서 애인이 없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어머니의 병고를,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독백을, 그리고 비틀비틀 새 모이를 주러 가는 모습을 마주할 각오를 했다. 제가 할게요, 어머니. 그렇게 말할 때마다 어머니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얘야, 죽을 날만 기다리는 쓸모없는 늙은이가 새라도 먹여 살려야지. 늘 하는 소리지만 오늘밤은 조금 더 섬뜩하게 들릴 터였다.

오늘밤 우리는 누가 꿈을 꾸는지, 누가 깨었는지 보게 되리라.

이렇게 바람이 불고 역사의 파도가 밀어닥칠 때 평화로운 곳으로 건너가려면 모름지기 침착해야 한다.

로사 패스트는 브라이턴 비치*에 거주하는 부유한 우크라이나계 유대인 가문 출신으로 산뜻한 랠프 로런 파워슈트를 즐겨 입었는데, "그 집안 사람들이 우리 이웃이었기 때문이죠, 십스헤드 베이**가 아니고"라고 종종 말했다.

천진난만한 아이를 왜 하필 그런 노출증 환자들에게 던져주었느냐, 누구든 돈만 준다면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똥을 싸지르고도 남을 인간들 아니냐, 그렇게 고래고래 호통을 쳤다.

이 말은 브롱크스 출신인 랠프 리프시츠***의 조상이 우크라이나의 이웃 나라 벨라루스에 살았다는 뜻이었다.

거짓을 진실로 포장하는 프로그램이 케이블방송 곳곳으로 널리 퍼져버리는 바람에 굳이 그런 프로그램만 제작하는 방송사가 따로 필요하지 않게 된 탓이었다.

사람들은 유명해질 가능성만 있다면 기꺼이 프라이버시를 포기했고, 사적 자아만이 진실로 자유롭고 자율적이라는 인식은 방송 전파의 잡음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 기적 같은 아기는 부정부패를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어. 아기가 어떤 사람을 부도덕하다고 판단하면 그 윤리적 부패상이 문자 그대로 몸에서 드러나지."

그녀는 신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면서도 기적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었고, 이튿날 위탁양육기관에서 이 버려진 아기를 시장실로 데려왔다.

패스트 시장의 얼굴은 티 한 점 없이 깨끗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했다.

"어떤 공동체든 그곳이 어떤 곳인지,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마디로어떤 상황인지 합의조차 할 수 없다면 이미 위기에 빠진 공동체입니다.

작은 설치류 동물을 항문에 넣어 성적 쾌감을 얻는 사람들이 있다는 괴담으로, 1980년대 당시 영화배우 리처드 기어가 모래쥐 때문에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착한 일을 하면 벌을 받기 마련이지."

아무도 얕잡아볼 수 없는 인물이지만 적개심 못지않게 신의도 두터워 의리와 우정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파괴적인 무분별의 승리가 무분별하게 파괴적인 신의 형태로 나타난 거죠.

뒤늦게나마 인생의 재미를 조금 맛보고 싶어하는 콰르토스에게 찰싹 달라붙어 테리사 사카는 결국 반지를 받아냈고, 체외수정이라는 기적 덕분에 그의 아기를 낳았고, 남편이 죽기만 기다렸다.

남편이 우두머리 수컷 행세를 하는 꼬락서니는 도저히 못 참겠다고 여자친구들에게 털어놓았다. 친구들이 합창하듯이 외쳤다. "가서 해치워버려!"

미국 억만장자 앨릭 와일든스타인은 아내 조슬린에게 위자료 25억 달러를 주고 십삼 년간 매년 1억 달러를 지급했다.

루마니아의 마을에서 어떤 여자가 알을 낳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한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하나둘씩 코뿔소로 변해갔다. 아일랜드 노인들은 쓰레기통에서 살기 시작했다. 어느 벨기에 남자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뒤통수를 보았다. 러시아의 한 공무원은 코를 잃어버렸다가 나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혼자 돌아다니는 코를 발견했다. 스페인의 어떤 여자는 가느다란 구름 한 가닥이 보름달을 지나가는 장면을 바라보다가 무시무시한 고통을 느꼈는데, 난데없이 면도날이 안구를 찢어버리는 바람에 유리체가, 즉 수정체와 망막 사이의 공간을 채운 젤라틴 모양의 물질이 흘러나왔다. 한 남자의 손바닥에서 개미떼가 구멍을 뚫고 나오기도 했다.

진실을 받아들이기보다, 그러니까 마족이 이 세계의 일상에 점점 더 많이 개입하게 되었다고 믿기보다, 언제나 우주의 숨은 원리였던 이른바 ‘우연’이 온갖 우화, 상징, 초현실, 혼돈 따위와 힘을 합쳐 인간사를 지배한다고 믿는 편이 차라리 쉬웠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사랑이, 형태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사랑이 너울너울 날아올라 멀어져갔고 다시는 되찾을 수 없었다.

‘감사야말로 여인의 마음을 얻는 최대 비결이다.’

오히려 여자가 지나갈 때마다 그의 심장만 두근거리고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왠지 그녀에게 분홍빛 장미꽃다발을 한아름 보내주고 싶다는 압도적 충동을 느낄 뿐이었다.

그런데 병원 대기실에서 충동을 못 이겨 한쪽 무릎을 꿇고 어느 못생긴 한국계 미국인 접수담당자에게 부디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영광을 베풀어달라고 애원했다. 그녀는 결혼반지를 보여주며 책상에 놓인 아이들 사진을 가리켰고 그는 울음을 터뜨려 결국 나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시내 길거리에는 여자가 너무 많고 사랑에 빠지는 일도 너무 잦아서 심장마비가 오지나 않을까 진심으로 걱정할 정도였다.

어느 밤, 자신의 페라리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가던 그는 만취한 사람만 경험하는 진정한 통찰력으로 문득 깨달았는데, 그에게는 친구도 없고, 사랑해주는 사람도 없고, 삶의 모든 측면이 황철석*처럼 번지르르할 뿐 천박하기 짝이 없고, 더구나 지금은 결코 자동차를 운전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언젠가, 아직은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시절, 어느 애인의 손에 이끌려 한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던 발리우드 영화가 떠올랐다. 자살하려고 브루클린 다리를 찾은 남녀가 서로를 보고 마음에 들어 투신자살을 포기하고 라스베이거스로 간다는 내용이었다.

모퉁이 식품점의 한국인은 직업상 싹싹한 사람들이었지만 최근에는 젊은 세대가 부모의 일을 대신하기 시작하면서 이따금씩 젊은이가 낯선 사람을 보는 눈으로 멍하니 쳐다보는 일도 있었다. 안경을 쓴 노부부는 오랜 단골손님을 볼 때마다 희미한 미소와 가벼운 눈인사로 맞이했건만.

돈 문제가 좀 걱정되긴 하지만 덩달아 걱정할 사람이 없다는 점은 역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이 좁디좁은 것만 남겨두고 넓디넓은 것은 파괴하려 한다면, 넓고 두툼한 입술보다 오종종한 입술을, 우람한 체격보다 앙상한 몸매를, 넉넉함보다 갑갑함을, 으르렁거리는 소리보다 칭얼거리는 소리를 선호한다면 차라리 큰 배를 타고 함께 침몰하리라.

왜 하필 나냐

어떤 일이든 원인은 있겠으나 반드시 무슨 목적이 있으란 법은 없다는 고통스러운 진리를 깨닫기 시작한 터였다.

원래 원하는 것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아내가 죽은 뒤에는 영영 가질 수 없는 하나를 원할 뿐이었다. 아내가 돌아오는 것.

물질의 본질을 깊이 파고들면 우주의 기본적 힘들이 지닌 엄청난 압력 때문에 인간의 언어는 해체되고 창조의 언어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는데,아이소스핀 더블릿, 뇌터정리, 회전변형, 업쿼크와 다운쿼크, 파울리의 배타원리, 위상적位相的주회周回횟수 밀도, 드람 코호몰로지, 고슴도치 공간, 분리 합집합, 스펙트럼 비대칭, 체셔고양이 원리 등등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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