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급한 마족 가운데 일부는 지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 그렇게 형태가 없는 자들은 가끔 인간의 귀나 코, 눈을 통해 몸속에 침투하여 한동안 머물다 싫증이 나면 나가버린다. 그렇게 몸을 빼앗겼던 사람은 안타깝게도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

불 없는 연기로 이루어진, 그림자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나운 지니리도 있고 사랑의 지니리도 있지만 이렇게 서로 다른 두 부류가 실은 동일한 진니아일 수도 있는데?사나운 정령을 사랑으로 보듬어 진정시킬 수도 있고 다정한 정령도 잘못 다루면 인간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포악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마족의 위대한 공주였던 어느 여마신, 벼락을 마음대로 부려 번개공주라 불리며 오래전에, 우리가 12세기라고 부르는 시대에 한 인간 남자를 사랑했던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녀의 수많은 후손에 대한 이야기이며, 기나긴 세월이 흐른 후 그녀가 이 세상에 돌아와 잠시나마 다시 사랑에 빠졌다 전쟁에 나서는 이야기다. 또한 여러 마족, 남성이든 여성이든, 날아다니든 기어다니든, 선하든 악하든 도덕 따위에는 무관심하든, 아무튼 온갖 마족에 대한 이야기이며, 2년 8개월 28일 밤, 다시 말해서 천 날 밤 하고도 하룻밤에 걸쳐 이어졌던 위기의 시대, 혼란의 시대, 우리가 괴사怪事의 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기들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유대인 사이에서 즉시 마음이 편안해졌다.

소녀는 최근에 양친을 잃은데다 수입원도 전혀 없는 처지였지만 사창가에서 일하기는 싫다고 했다.

이름은 두니아인데 유대인 이름처럼 들리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유대인 이름은 입 밖에 낼 수도 없거니와 까막눈이라 적어줄 수도 없다고 했다. 어느 나그네가 그 이름을 지어주면서 그리스어로 ‘세계’를 뜻한다고 설명해줬는데 자기는 그 뜻이 마음에 들었단다.

"그런데 왜 하필 세계를 뜻하는 이름을 골랐지?" 그가 묻자 소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내 몸에서 세계가 태어날 테니까, 그리고 내가 낳은 아이들이 세계로 퍼져나갈 테니까."

이성을 중시하는 그는 이 소녀가 여마족의 무리 즉 지니리에 속하는 초자연적 존재 진니아라는 사실을 짐작하지 못했다. 그녀는 지니리 중에서도 존귀한 공주로 지금은 지상에서 모험을 즐기는 중이었는데, 인간 남자에게 점점 더 매력을 느꼈으며 특히 슬기로운 남자를 좋아했다.

어쨌든 이 아이들은 어머니의 가장 뚜렷한 특징을 물려받았으니, 한결같이 귓불이 없었다.

이븐루시드가 초자연적 신비를 믿는 사람이었다면 자식들의 어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겠지만 그는 자기 세계에 몰두하느라 아무것도 몰랐다.

그의 성격은 너무 이기적이라 사랑을 불러일으키기는 힘들었을 테니까.

철학을 못하는 철학자는 그의 재산인 동시에 재앙인 이 슬픈 재능을 자식들이 물려받을까봐 걱정했다.

"예민하고 통찰력이 있고 수다스러운 사람은 매사에 너무 민감하고 너무 분명하게 꿰뚫어보고 너무 거리낌없이 지껄이지. 스스로 천하무적이라고 믿는 세상에서 상처받고, 스스로 영구불변이라고 여기는 세상에서 가변성을 깨닫고, 남들이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앞날을 예감하고, 남들이 타락하고 덧없는 과거에 집착하는 동안에도 곧 난폭한 미래가 들이닥쳐 현재의 대문을 때려부순다는 사실을 알거든. 아이들이 운이 좋다면 당신 귀만 물려받고 끝날 테지만, 내 자식이기도 하니 보나마나 너무 일찍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너무 빨리 너무 많은 일을 주워듣겠지. 생각하지도 듣지도 말아야 할 일까지 말이야.

그는 곧 앳된 모습의 그녀가 이불 속에서나 밖에서나 때때로 욕심 많고 고집스러운 상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몸집이 큰 남자인 반면에 두니아는 작은 새나 대벌레를 닮은 여자였지만 오히려 그녀 쪽이 더 힘이 세다고 느낄 때도 많았다.

이븐루시드에게는 늘그막에 기쁨을 안겨주는 존재였지만 그녀를 만족시키는 데 필요한 정력을 유지하기는 벅찼다.

"밤새도록 사랑을 나누고 나면 몇 시간이고 황소처럼 코를 골며 자는 것보다 오히려 더 잘 쉬었다는 느낌이 들죠. 누구나 아는 사실이에요."

이야기로 그녀의 성욕을 가라앉힐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조금은 편해졌다.

그는 동시대 사람들이 충격적이라고 생각할 만한 말을 많이 썼는데, 예컨대 ‘이성’, ‘논리’, ‘과학’은 그의 사유를, 즉 그의 책이 불타는 계기가 되었던 사상을 떠받치는 세 개의 기둥이었다.

그는 철학으로는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기는커녕 신이 둘일 수 없다는 사실조차 증명할 수 없다고 비웃었다.

철학은 원인과 결과가 필연적이라고 믿지만 그런 생각은 하느님의 권능을 과소평가한 소치다. 하느님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결과를 바꿔놓거나 원인을 무력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법칙이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따른다."

하느님의 우주에서 유일한 법칙은 바로 하느님의 뜻이니까."

"기적은 하느님이 규칙을 바꿔버릴 때 일어난다는 거야. 우리가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궁극적으로 불가해한 존재, 즉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고."

이제는그가 오히려그녀의 말을 두려워한다는 생각이 들자 두니아는 야릇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모든 글에서 ‘이성’, ‘논리’, ‘과학’ 같은 말과 ‘하느님’, ‘신앙’, ‘쿠란’ 같은 말을 서로 화해시키려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진정한 남자라면 행동의 결과를 감수해야죠. 인과관계를 믿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이름 말고 당신이 가진 게 뭐예요? 아이 만드는 재주꾼 노릇만 하면 곤란해요. 애가 생기면 먹여 살려야죠. 그게 바로 ‘논리’예요. 그게 ‘합리적’이라고요."

두니아는 그를 공격하는 데 효과적인 말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그녀가 기세등등하게 부르짖었다. "그러지 못하면 ‘부조리’란 말예요!"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삶을 선택하고 한 인간의 ‘인간’ 아내로서 인간관계를 맺었으니 자신의 선택을 고수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연인에게 본성을 드러낸다면 둘의 관계의 밑바탕이었던 속임수나 거짓말도 실토하게 될 터였다. 그래서 그가 그녀를 버릴까봐 두려워 두니아는 입을 다물었다.

어떤 이야기 속에 다른 이야기를 끼워넣고 그 속에 다시 다른 이야기를 포함시키는 방식이었는데, 그래서 이야기가 현실을 비춰주는 참다운 거울이 되었다고 이븐루시드는 생각했다.

현실에서도 우리의 이야기 속에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담겨 있기 마련이며 그 이야기 하나하나는 우리의 가족이나 조국이나 신념의 역사 같은 더 크고 장엄한 이야기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햇빛도 안 드는 이 집을 그득그득 채우는 저놈들, 내 환자들한테, 루세나의 병약한 사람들한테 터무니없는 치료비를 강요하게 만드는 저놈들이야말로두니아자트, 즉 두니아의 무리, 두니아 족속, 두니아족,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세계인’이니까."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는 그녀의 목숨을 구했지만 이븐루시드의 이야기는 그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릴 테니까.

그는 다른 도시와 여러 친지들의 서재에 아직도 자신의 책이 많이 남았다고, 어려운 시절이 닥치기 전에 이리저리 감춰두었다고 털어놓았는데, 슬기로운 자는 늘 역경에 대비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겸허한 자에게는 언젠가 이렇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오기 마련이니까.

그는 그녀를 그토록 쉽게 버렸건만 그녀는 그를 여전히 사랑했다.

당신은 나의 전부이거늘, 나의 해님이며 달님이거늘, 이제 누가 내 머리를 보듬어주랴, 누가 내 입술에 입을 맞추랴, 누가 우리 아이들의 아비가 되어주랴.

당신은 나에게 아픔을 주었지만, 먼 훗날 당신이 세상을 떠나고 다시 먼 훗날 언젠가 당신이 가족을 되찾고 싶어질 때, 바로 그 순간 내가, 당신의 정령 아내가 그 소원을 들어주겠어요.

사람들은 이븐루시드가 그녀에게 마족을 가둬놓은 램프를 주었는데 그가 떠난 후 태어난 아이들은 바로 그 마족의 자식이라고 말하기도 했으니?떠도는 소문이 얼마나 손쉽게 진실을 왜곡하는지 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 그녀의 생애는 이미 더듬더듬 흐트러진 문장이 되어버리고 글자 하나하나가 아무 의미도 없는 형태로 문드러져 도대체 그녀가 얼마나 오래,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함께 살았는지, 그리고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정말 죽었는지?전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틈새마다 삭막한 규율 같은 잡초와 따분한 사상 같은 가시덤불이 우거져 결국 완전히 막혀버렸고, 우리 선조들은 마법의 혜택이나 해악을 받는 일 없이 자기들끼리 재주껏 살아가야 했다.

거처가 없는 가족이지만 어디에나 있는 가족, 위치가 없는 마을이지만 지구상 방방곡곡에 두루 뻗어나간 마을이었다

역사는 자기가 버린 이들에게도 가혹하기 마련이지만 역사를 만들어가는 이들에게도 똑같이 가혹할 수 있다.

왜냐하면 두니아자트는 한결같이 귀가 특이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발바닥이 근질거려 좀처럼 한자리에 머물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상가들의 논쟁은 결코 끝나지 않는 법인데, 논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지식에 대한 사랑 즉 철학에서 비롯되었으므로 끊임없이 정신을 가다듬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예리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모두 거짓이거나 더러 거짓이더라도, 기록된 사실 속에 날조된 이야기가 심심찮게 섞였더라도 지금으로서는 이미 어찌할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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