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스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습니다. 독자를 즐겁게 해주려고 피눈물 나게 노력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실패한 문학소설은 다른 결점을 보완할 만한 장점이 거의 없습니다. 따분하고 지루한 데다 믿을 만한 구석도 없어, 그야말로 최악의 죄악을 범한 책이 되는 셈입니다.

우리는 감정적으로 안정된 것을 선호하고, 익숙한 것을 찾아 함께하고 싶어 합니다. 예컨대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난 후에도 부모와 꾸준히 연락하고, 죽을 때까지 한 사람과 정착해서 살기를 바라며, 평생 버리지 못할 습관을 만들어갑니다. 이렇게 고착된 삶은 지적 능력의 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적인 삶에서 변화와 발전을 모색하며, 끊임없이 배워서 시대에 뒤지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정신세계에서의 안락과 과도한 친숙함은 안정이 아니라 정체(stagnation)의 징후입니다. 따라서 끊임없는 사색이 필요합니다. 새로운아이디어는 생각하는 행위에서만 잉태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플로베르의 앵무새』에서 격식에 어긋나지 않은 언어적 표현에 감명 받았고, 그 소설에 담긴 지성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짤막한 광고성 추천글은 작가가 예술계의 시민이 되는 한 방법입니다.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입니다.

이 소설은 삭막하지만, 아름답게 삭막합니다.

어떤 곤경이라고 이겨내려고 노력하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일을 하면서도 적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것입니다.

책의 겉표지는 내용을 시각적으로 압축한 장식일 뿐만 아니라 보호장치이기도 합니다.

놀랍게도 문명은 책을 만들어내는 혜안을 발휘했고, 책은 냉장고처럼 단어들을 신선하게 보존했습니다.

『타타르의 사막』은 햇살과 침묵과 고독에 젖은 철학적인 소설인 반면에,『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몸에 뿌리를 두고, 사람과 정치와 고통이 뒤범벅된 사회적 소설입니다. 쿳시는 부차티에게 영향을 받아 자신의 창의적인 여행을 시작하긴 했지만, 자기만의 고유한 종착역에 도착했습니다.

약간만 풀어놓아도소설만큼 흥미진진할 만한 삶을 살아온 작가라도, 픽션에는 자서전보다 더 원대한 것이 계획됩니다.

영리하고 재밌게, 진심을 담아서 독창적으로 쓸 수 있다니!

마농은 위선을 끔찍하게 혐오합니다. 자신의 위선에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의 위선에도 치를 떨지만, 정작 자신도 전혀 나아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어떤 것도 순전한 오락거리로만 단순화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어떤 하나로도 단순화될 수 없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옹호하며 정당화하기 마련입니다.

마르가야의 부는 로또 복권처럼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의해 결정됩니다. 예컨대 부의 첫 물결은 책의 출판으로 시작됩니다. 마르가야가 그 책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전문가가 아니라는 뜻을 함의하고 있으니까요.

책은 삶을 다룬 것이, 삶은 겸손함을 배우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책이든 거기에 쓰인 내용을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평가해보라고 요구합니다. 비교하고 대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정직하게 해낸다면, 자기검열의 과정이 되어 자신에 대해 좀 더 많이 알게 되고, 따라서 좀 더 현명해질 겁니다.

책은 소유한 것이든 빌린 것이든 오래된 것이든 새 것이든 영혼을 살찌우고 지탱해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