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동의하고 혼자 지껄여댔다.

어쩐 일인지 구멍 뚫린 풍선처럼 한꺼번에 온몸이 쭈그러드는 느낌이 들고 눈이 어질어질하면서 꼼짝할 수가 없더란 말일세."

1년에 한 번뿐인 아내의 소원이어서 꼭 들어주고 싶었는데. 항상 야단만 치고 제대로 말도 붙이지 않은 데다 쪼들리는 살림에 아이들 뒷바라지에 온갖 집안일까지 고생만 시키고 호강 한 번 시켜주지 못했는데, 오늘은 다행히 시간도 있겠다, 지갑에는 지폐도 네댓 장 있겠다, 데리고 가자면 얼마든지 데려갈 수 있는데, 아내도 가고 싶어 하고, 나도 데리고 가고 싶은데, 꼭 데리고 가고 싶은데, 이렇게 오한이 들어 어질어질해서야 전차 타는 건 고사하고 현관에도 내려서지 못할 지경이니, 아, 안타깝다. 안타깝다, 이런 생각을 하자 오한은 더욱 심해지고 어질어질한 것도 점점 심해지더란 말일세.

자네들한테도 해명하자면 난 절대 악의로 영어를 쓴 게 아니네. 전적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진심에서 나온 것인데, 그걸 아내처럼 해석한다면 내 체면이 서지 않네. 게다가 오한과 현기증으로 정신이 혼란스러운 데다 유위전변, 생자필멸의 이치를 이해시키려고 서두르다 보니 그만 아내가 영어를 모른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아무 생각 없이 쓰고 만 것이라네.

자기 아내를 칭찬하는 건 팔불출이나 하는 우스운 일이지만, 난 이때만큼 아내가 예뻐 보인 적이 없었네. 어깨를 드러내고 비누로 깨끗이 씻어낸 피부가 검정 비단 하오리에 화사하게 비쳐들고 있더군.

나는 얌전히 앉아 세 사람의 이야기를 차례로 들었는데, 우습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인간이라는 족속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애써 입을 놀리고,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에 웃고, 재미있지도 않은 이야기에 기뻐하는 것 말고는 별 재주가 없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내 주인이 방자하고 속 좁은 인간이라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평소에는 말수가 적어 어쩐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은 것 같았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얼마간 두려운 느낌도 들었으나, 지금 이야기를 듣고 나자 갑자기 경멸하고 싶어졌다. 그는 왜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단 말인가. 그들에게 질세라 얼토당토않은 잡담을 지껄여댄들 무슨 소득이 있을까. 에픽테토스의 책에 그렇게 하라고 쓰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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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3-19 1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이라는 족속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애써 입을 놀리고,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에 웃고, 재미있지도 않은 이야기에 기뻐하는 것 말고는 별 재주가 없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하하~~

라로 2022-03-21 15:5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 여기 재미난 부분 많은데 2장은 또 지루하면서
가끔 재미난 부분 있고,, 고양이가 인간을 바라보는 모습이라며
소세키가 인간을 생각하는 부분 재미나요.ㅋㅋㅋ
 

주인은 덮어놓고 감탄했다.

하품을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으나 모처럼 주인이 열심히 붓을 놀리고 있는데 내가 움직이는 것도 미안해 그냥 꾹 참고 있었다.

나는 고양이로서 결코 잘생긴 용모는 아니다. 키도 그렇고, 털 색깔도 그렇고, 얼굴 생김새도 그렇고, 결코 다른 고양이보다 낫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아무리 못난 나라도, 지금 주인이 그리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묘한 모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주인은 남에게 욕을 퍼부을 때는 꼭 ‘바보 같은 놈’이라고 하는 게 버릇이다. 다른 욕을 모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제까지 참아준 내 속도 모르고 무턱대고 바보 같은 놈이라고 하는 건 실례가 아닌가.

원래 인간이라는 족속은 자신의 역량을 과시하여 다들 우쭐거리며 거만하게 군다. 인간보다 좀 더 강한 자가 나와 혹독하게 다루지 않는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거만하게 굴지 모른다.

그는 늘 하던 자랑을 마치 새로운 자랑거리라도 되는 양 늘어놓고 나서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원래 검둥이는 자기 자랑이 많은 만큼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있어서 기염을 토하는 그의 이야기를, 감탄한 듯 목구멍을 그르렁거리며 공손한 태도로 듣고 있기만 하면 아주 다루기 쉬운 고양이였다.

이봐, 인간이라는 족속은 정말 겉만 멀쩡하지 순 도둑놈들이야.

원래 다른 사람을 방탕한 자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대부분 방탕할 자격이 없는 경우가 많다.

요릿집에서 술을 마시거나 기생집에 드나든다고 한량이 될 수 있다면 나도 어엿한 수채화 화가가 될 수 있을 게다.

마치 남을 속이는 건 괜찮지만 속임수가 들통 나면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투였다.

기특하게도 아이들은 빼먹지 않고 유치원에 다닌다.

하녀는 지금도 싫다. 이름은 아직도 지어주지 않았지만 욕심을 부리자면 한이 없는 일이니, 그런대로 만족하면서 평생 이 선생 집에서 이름 없는 고양이로 살아갈 생각이다.

나는 새해 들어 다소 유명해졌으니 비록 고양이지만 다소 자부심이 드는 것 같아 흐뭇하다.1

이렇게 명백한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저렇게 고심하나 하는 생각에 어쩐지 인간이 안쓰러웠다.

인간이라는 족속은 우리 고양이족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하늘의 은총을 받지 못한 동물이니, 안타깝지만 그대로 놔둘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찌꺼기에서 소와 말이 나오고, 소와 말의 똥에서 고양이가 만들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건, 자신의 무지도 모르고 교만한 표정을 짓는 선생들에게 흔히 있는 일인데, 옆에서 보기에 그리 좋은 건 아니다. 아무리 고양이라도 그렇게 허술하고 쉽게 생기는 건 아니다.

서로를 속속들이 아는 것이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는 것마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제까지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주인이 별안간 새로운 면목을 드러낸 것도 다 내 덕인 줄 안다면, 이런 정도의 눈빛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 간게쓰라는 사내 역시 주인의 문하생이었다고 하는데, 잘은 모르겠으나 지금은 학교를 졸업하고 주인보다 훌륭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슨 이유에선지 이 사내는 주인집에 자주 놀러 왔다. 와서는 자신을 사모하는 여자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는 둥, 세상사가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는 둥, 대단한 것 같기도 하고 시시껄렁한 것 같기도 한 불평만 늘어놓다 돌아간다. 쭈그러들기 시작한 주인 같은 인간에게 일부러 이런 얘기를 하러 찾아오는 것부터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서재에 굴처럼 딱 들러붙어 있는 주인이 그런 이야기를 듣고 가끔 맞장구를 치는 건 더욱 우스꽝스럽다.

원래 주인은 평소에 말라비틀어진 나무에 차디찬 바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나 실은 여성에게 결코 냉담한 편이 아니었다.

헤아려보니 길을 오가는 여성의 70퍼센트에는 애착을 보인다는 내용이 풍자적으로 쓰여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그게 바로 진리라고 감탄한 그런 사내인 것이다.

게다가 남의 눈을 피해 군것질하는 버릇은 우리 고양이 족속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이 집의 하녀는 안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 떡 같은 걸 슬쩍해서 먹고, 먹고는 또 슬쩍한다. 하녀만 그러는 게 아니다. 실제로 고상한 가정교육을 받고 있다고 안주인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아이들마저 그런 경향이 있다.

네즈, 우에노, 이케노하타, 간다 주변을 간게쓰와 산보. 이케노하타의 요릿집 앞에서, 옷단에 무늬가 들어간 봄옷을 입은 게이샤가 하네 놀이12를 하고 있었다. 옷은 예뻤지만 얼굴은 정말 못생겼다. 어딘지 우리 집 고양이를 닮았다.

얼굴이 못생긴 예로 굳이 나를 내세울 것까지야 없지 않은가. 나도 이발소에 가서 얼굴 면도만 하면 인간과 그다지 다를 바 없을 듯싶다. 인간은 이렇게 우쭐대니 곤란한 것이다.

인간의 심리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없다. 지금 주인이 화를 내고 있는지, 들떠 있는지, 또는 철학자의 유서에서 위안을 찾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세상에 냉소를 보내고 있는 건지, 세상에 섞이고 싶은 건지, 사소한 일에 분통을 터트리고 있는 건지, 세상사에 초연한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우선 일기처럼 쓸데없는 건 결코 쓰지 않는다.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주인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은, 일기라도 써서 세상에 드러낼 수 없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어두운 방에서나마 발휘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일기 쓸 시간이 있다면 툇마루에서 잠이나 자겠다.

오늘 아침의 울화통이 일기에 슬쩍 꼬리를 드러낸다. 인간의 일기는 이런 데서 그 본색을 드러내는 건지도 모른다.

주인의 마음은 내 눈동자만큼이나 끊임없이 변한다.

뭘 하건 오래가지 못하는 사람이다. 거기다 일기에서는 자신의 위장병을 그렇게나 걱정하는 주제에 겉으로는 아닌 척하며 오기를 부리니 정말 우습다.

칼라일도 위가 안 좋았으니 자신의 위가 안 좋은 것이 마치 명예로운 일이라도 된다는 듯한 엉뚱한 말이었다.

묘하게도 먹어보면 웬만한 건 다 먹을 수 있다. 이건 싫다, 저건 싫다, 고 하는 건 배부른 자나 할 소리고, 선생 집에 사는 고양이는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다.

‘얻기 힘든 기회는 모든 동물로 하여금 내키지 않는 일도 굳이 하게 한다.’

끝내 그릇의 바닥에 온몸의 체중을 싣듯이 하여 떡의 모서리를 한 입 덥석 물었다. 이 정도 힘으로 물면 대충 잘리는데, 놀랍다! 이젠 됐다 싶어 이를 빼내려고 했으나 빠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고쳐 물려고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떡은 요물이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늪에 빠진 사람이 발을 빼내려고 버둥거릴 때마다 쑥쑥 더 깊이 빠져들듯, 떡을 씹으면 씹을수록 입이 무거워졌다. 이가 움직이지 않았다. 씹는 맛은 있는데, 그것만 있을 뿐이지 도저히 이 난국을 타개할 수가 없었다.

씹어도 씹어도, 10을 3으로 나눌 때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다. 이런 번민에 빠져 있을 때 나도 모르게 두 번째 진리를 깨달았다.

‘모든 동물은 직감적으로 사물의 적합, 부적합을 예견한다

아아, 귀찮아, 하면서 이번에는 양쪽 발을 한꺼번에 사용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이때만은 뒷다리로만 설 수 있었다. 어쩐지 고양이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좌우지간 떡이라는 요물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는 기세로 얼굴을 닥치는 대로 긁어댔다. 앞발의 동작이 맹렬했기 때문에 자칫하면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그럴 때마다 뒷발로 균형을 잡아야 했기에 한 곳에만 있을 수 없어 온 부엌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내가 생각해도 이렇게 서 있는 것이 참 용했다. 세 번째 진리가 곧장 눈앞에 나타났다.
‘위험에 처하면 평소에 불가능한 일도 해낼 수 있다. 이를 천우(天祐)라 한다.’

안쪽에서 발소리가 나며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런 상황에 사람이 오면 큰일이다 싶어, 더더욱 필사적으로 부엌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발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아아, 안타깝게도 하늘의 도움이 좀 부족했다. 결국 아이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어머머, 고양이가 떡을 먹고 춤을 추고 있네."

‘인고를 거치지 않은 안락은 없다.’
이 네 번째 진리를 경험하고 천연덕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집안사람들은 이미 안쪽 방으로 들어가버리고 아무도 없었다.

나는 고양이임에 틀림없지만 남녀 간의 흥취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다. 집에서 주인의 언짢은 얼굴을 보거나 하녀의 핀잔을 들어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반드시 이 이성 친구를 찾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면 어느새 마음이 풀리며 지금까지의 근심이나 고생은 말끔히 잊히고 마치 새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여성의 영향력이란 실로 막대한 것이다.

그 동그스름한 잔등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곡선미의 극치였다. 구부러진 꼬리의 곡선, 발을 구부리고 앉은 모양, 나른한 듯 이따금 귀를 쭈뼛거리는 모습은 도저히 말로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더군다나 볕이 잘 드는 곳에 따스하다는 듯 우아하게 앉아 있으니, 단정하고 정숙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도 벨벳을 무색케 할 만큼 매끄러운 온몸의 털은 봄의 햇살을 반사하여 바람이 없는데도 살랑살랑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황홀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이윽고 제정신을 차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앞발을 흔들었다.

고양이라고 웃지 않는 건 아니다. 인간들은 자기들 말고 다른 동물들은 웃지 못하는 걸로 아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나는 콧구멍을 세모꼴로 하고 목젖을 진동시켜 웃는데, 인간들이 이를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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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 2022-03-18 07: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재에 굴처럼..... ㅋㅋㅋㅋㅋㅋ 이 구절 웃겨요!!

라로 2022-03-18 13:45   좋아요 1 | URL
소세키가 서재에 들어가면 나오질 않았는데 주인도 자기가 모델이니 그렇게 표현한 것 같은데 여기 재밌는 부분이 넘 많은데요!!ㅎㅎ ㅎㅎㅎㅎ 서재의 굴같은 표현 많아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과연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작가로서 뭐라 말할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쓴 것이 내가 생각한 체재로 세상에 나가는 것은 내용의 가치 여부와 상관없이 나로서는 기쁜 일이다.

이 책은 취향도 없고 구조도 없고 시작과 끝이 어설프기만 한 해삼 같은 문장이어서, 설사 이 한 권을 내고 사라진다고 한들 전혀 지장이 없다. 또한 실제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으로 약간의 시간을 내 벼루에 먹을 갈 기회가 있다면 다시 원고를 이어나갈 생각이다. 고양이가 살아 있는 동안 ? 고양이가 건강한 동안 ? 고양이의 기분이 내킬 때는 ? 나도 다시 붓을 잡아야 한다.

나중에 들은즉 그건 서생(書生)1이라는, 인간 가운데서도 가장 영악한 족속이라 한다.

손바닥 위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서생의 얼굴을 본 것이, 이른바 인간이라는 존재와의 첫 대면이었다. 그때 참 묘하게 생긴 족속도 다 있구나, 했던 느낌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 후 고양이들도 많이 만났지만, 이런 등신 같은 족속과는 만난 적이 없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더니 과연 옳은 말이다.

내동댕이쳐졌다가 기어들었고, 기어들었다가는 다시 내동댕이쳐지고, 이 짓을 네댓 번이나 되풀이한 것 같다. 그때부터 하녀라는 인간이 정말 싫어졌다.

"이 도둑고양이 새끼가 아무리 쫓아내도 계속 부엌으로 기어들어와 아주 죽겠어요."
주인은 코밑의 검은 털을 배배 비틀면서 내 얼굴을 잠깐 바라보았다.
"그럼 우리 집에 그냥 두도록 해."

내 주인은 나와 얼굴을 마주치는 일이 좀체 없다. 직업은 선생이라고 한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하루 종일 서재에 틀어박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식구들은 그가 뭐 대단한 면학가인 줄 알고 있다. 그 자신도 면학가인 척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식구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다.

가끔은 읽다 만 책에 침을 흘린다.

그는 위장이 약해서 피부가 담황색을 띠고 탄력도 없는 등 활기 없는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 주제에 밥은 또 엄청 먹는다. 배터지게 먹고 나서는 다카디아스타제2라는 소화제를 먹는다

그다음에 책장을 펼친다. 두세 페이지 읽으면 졸음이 몰려온다. 책에 침을 흘린다.

나는 고양이지만 때론 이런 생각을 한다. 선생이란 정말 편한 직업이로구나.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선생이 되는 게 제일 낫겠다.

이렇게 자빠져 자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고양이라고 못할 게 없지 않은가.

주인은 친구들이 찾아올 때마다, 선생만큼 힘든 건 없는 것 같다며 구시렁구시렁 불평을 늘어놓는다.

아침에 주인이 신문을 읽을 때는 반드시 그 무릎 위에 올라앉는다. 그가 낮잠을 잘 때는 반드시 그의 등에 올라탄다. 그건 꼭 주인이 좋아서 하는 행동은 아니지만, 따로 상대해주는 이가 없으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제일 기분 좋은 건, 밤이 되어 이 집 아이들의 잠자리 속으로 기어들어가 함께 자는 일이다.

나는 인간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관찰하는데, 그럴수록 그들이 제멋대로 군다고 단언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내가 존경하는 건넛집 흰둥이는 만날 때마다 인간만큼 인정머리 없는 족속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우리 고양이족이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나누며 가족적인 생활을 아름답게 영위해가려면 인간들과 싸워 그들을 섬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다 지당한 말씀이다.

이웃집 얼룩고양이는 인간들이 소유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며 크게 분개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믿고, 마땅히 우리가 먹어야 할 것을 빼앗고도 시치미를 뚝 뗀다.

흰둥이는 군인 집에 살고 있고, 얼룩고양이의 주인은 변호사다. 나는 선생 집에 살고 있는 만큼, 이런 일에 관해서는 흰둥이나 얼룩고양이보다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그럭저럭 그날그날을 지내기만 하면 된다

아무리 인간이라도 언제까지고 그렇게 번창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고양이의 시대가 오기를 기다리는 게 좋을 것이다.

원래 이 집 주인은 무슨 일이고 남보다 잘하는 것도 없지만, 무슨 일이든 참견하고 싶어 한다.

하이쿠를 한다고 《호토토기스》4에 투고를 하기도 하고, 신체시를 《묘조(明星)》 에 보내기도 하고, 엉터리 영어 문장을 쓰기도 하고, 때로는 활에 빠지기도 하고, 우타이(謠)5를 배우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바이올린을 끼익끼익 켜기도 하는데 딱하게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 그런 주제에 뭘 시작하면, 위도 좋지 않은 사람이 더럽게 열심이다.

뭘 사왔나 봤더니, 수채화 물감과 붓과 와트만이라는 종이였다.

"아무래도 잘 그려지지가 않네. 남이 그려놓은 걸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직접 붓을 들어보니 새삼 어렵게 느껴지더란 말일세."

자네도 그림다운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사생을 좀 해보는 게 어떻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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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세키는 대문호이기 때문에 분명 부자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은 소세키는 평생 동안 남의 집에서 살았으며 자녀들도 많아 돈을 융통하느라 고생했습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집필로부터 5년 후인 1911년(메이지 44년), 문부성으로부터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마침 이때 소세키는 입원 중이라 집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갑자기 ‘내일 학위를 수여할 터이니 문부성으로 출두하라’란 통지가 왔던 것입니다. 아내 교코 씨가 소세키가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전하자 바로 집으로 학위증서가 보내져 왔습니다.
이런 태도에 격노한 소세키는 사퇴 편지와 함께 증서를 돌려보냅니다. 문부성은 학위 사퇴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아무쪼록 받아달라고 말하지만, 소세키는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그

박사가 아니면 학자가 아니라는 식으로 세간에서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박사에 가치를 부여한다면 학문은 소수의 박사들의 전유물이 되어 일부 학자적 귀족들이 학문적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선택에서 누락된 다른 것들은 완전히 방치되는 결과를 낳아 가히 혐오할 만한 폐해가 속출될 것이 나에게는 절실히 염려되어지는 바이다.

웃음을 자아내는 밝은 작품이라는 이미지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이지만, 실은 한바탕 웃어버리는 것만으로 끝낼 수 없는 섬뜩한 장면이 언뜻언뜻 보입니다.

소세키는 그의 저서인 『심리학원론』, 『심리학개론』을 읽고 있었으며 전자는 아마도 번역까지 했을 것입니다. 그는 당시 등장한 지 얼마 안 된 심리학이란 학문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이라는 존재를 명확히 하고 싶다는, 오로지 그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고양이는 어미 고양이를 잃고 기댈 데가 없는 처지인데 소세키 역시 유소년기에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곳이 없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미 고양이를 잃고 우여곡절 끝에 구샤미 집에 숨어 들어와 살게 된 이름 없는 고양이에게는 자신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겠지요.

그런 고양이를 연재 마지막에서 어쩌면 자살이라고도 파악할 수 있는 형태로 죽게 해버렸던 것입니다. 비록 유머러스하긴 하지만 소세키 심정 어딘가에 죽음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은 역시 부정할 수 없다고 느껴집니다.

게다가 고양이가 죽은 원인이 ‘익사’였다는 것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소세키가 깊이 생각해서 나온 착상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세키 내면에서 ‘물과 죽음’은 종종 이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세키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죽은 미녀 오필리아가 조각배에 실려 흘러가는 장면을 즐겨 읽었고 그것을 자신의 소설 『풀베개』에서도 제재로 사용합니다.

어쨌든 이 작품에서는 소세키의 정신적 위기가 느껴집니다. 그런 위기는 그저 유머러스하고 즐거운 작품을 쓴다는 것만으로는 결코 해소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소세키의 딸은 당시의 아버지가 심한 노이로제 상태였으며 자녀들조차 가까이 다가오지 않도록 했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자의식과잉, 현대적 용어로 말하자면, 소세키는 성인이 되어도 여전히 이른바 ‘중2병(사춘기에 흔히 겪는 심리 상태를 빗댄 용어-편집자 주)’이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구샤미가 거울을 의식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곰보 자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소세키도 어린 시절 천연두에 걸렸던 탓에 얼굴에 곰보 자국이 남아 있어서 무척 신경 쓰였던 모양입니다. 고양이가 관찰한, 거울을 들여다보는 구샤미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꼬락서니만 보면 분명 미치광이임에 틀림없지만 하는 말은 진리다.

거울과 구샤미가 서로 노려보는 장면은 계속 이어지며 옆을 향하거나 얼굴의 이곳저곳을 당겨보거나 메롱을 해보거나 수염을 비틀어보거나 하며 당최 거울 앞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이러고 보면 곰보 자국뿐만 아니라 거울 안에 나타난 자신을 무척이나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자각심이란 것은 문명의 진화에 따라 하루하루 민감해져 가기 때문에 결국에는 일거수일투족도 자연스럽게 할 수 없게 된다. 헨리라는 사람이 스티븐슨에 대해 말하며, 그는 거울이 걸린 방으로 들어와 거울 앞을 지날 때마다 자신을 비춰보지 않으면 마음이 홀가분해지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잠시라도 자기를 잊는 일이 불가능한 사람이다, 라고 평했던 것은 오늘날의 추세를 아주 잘 나타내고 있다.

사회는 어쩌면 미치광이들이 모여 있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미치광이들이 모여 맹렬히 싸우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욕을 퍼붓고 빼앗고, 그 전체가 집단적으로 세포처럼 무너졌다가 다시 솟아나고 솟아났다가 다시 무너지며 살아가는 곳을 사회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중에서 다소 이치를 알고 분별이 있는 놈은 오히려 방해가 되니 정신병원을 만들어 가둬둔 채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자는 보통 시민이고 병원 밖에서 날뛰고 있는 자가 오히려 미치광이다. 미치광이도 고립되어 있으면 미치광이 취급을 받지만 단체가 되어 세력이 생기면 정상적인 인간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심한 미치광이가 돈과 권력을 남용하여 대다수 경미한 미치광이들에게 난동을 부리게 하고, 자신은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사내라는 말을 듣는 예가 적지 않다.

현대인의 깊숙한 내면을 살펴보면 모두 광기로 이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1809~49년)에게 영향을 받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바탕이 된 것은 단편소설『타르 박사와 페더 교수의 광인 치료법The System of Doctor Tarr and Professor Fether』으로 어느 폭풍우 치던 날, 어떤 사람의 안내를 받아 한 정신병원에 도착한 주인공이 유명한 치료법을 시행하고 있다는 원장을 만나 환자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되는데, 마지막에 가서 사실은 원장이야말로 정신적인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고양이의 말에 따르면"사건은 대체로 이성을 잃고 화를 내는 것에서 발생한다. 이를 나타내는 말은 ‘거꾸로 선다逆上(앞뒤 가리지 않고 욱한다는 뜻의 일본어-편집자 주)’이며 글자 그대로 거꾸로 올라간다는 의미다"라는 게 됩니다. 박식한 고양이는 서양에서 옛날부터 전해져 온, 인간의 체액과 성격과의 관계를 설파한 논조를 들면서 현대에서는 인간의 혈액이 거꾸로 올라가 흥분이 발생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일본 역사상 최초로 mob가 탄생한 시대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소세키는 대문호이기 때문에 분명 부자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은 소세키는 평생 동안 남의 집에서 살았으며 자녀들도 많아 돈을 융통하느라 고생했습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집필로부터 5년 후인 1911년(메이지 44년), 문부성으로부터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마침 이때 소세키는 입원 중이라 집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갑자기 ‘내일 학위를 수여할 터이니 문부성으로 출두하라’란 통지가 왔던 것입니다. 아내 교코 씨가 소세키가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전하자 바로 집으로 학위증서가 보내져 왔습니다.
이런 태도에 격노한 소세키는 사퇴 편지와 함께 증서를 돌려보냅니다. 문부성은 학위 사퇴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아무쪼록 받아달라고 말하지만, 소세키는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그

박사가 아니면 학자가 아니라는 식으로 세간에서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박사에 가치를 부여한다면 학문은 소수의 박사들의 전유물이 되어 일부 학자적 귀족들이 학문적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선택에서 누락된 다른 것들은 완전히 방치되는 결과를 낳아 가히 혐오할 만한 폐해가 속출될 것이 나에게는 절실히 염려되어지는 바이다.

웃음을 자아내는 밝은 작품이라는 이미지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이지만, 실은 한바탕 웃어버리는 것만으로 끝낼 수 없는 섬뜩한 장면이 언뜻언뜻 보입니다.

소세키는 그의 저서인 『심리학원론』, 『심리학개론』을 읽고 있었으며 전자는 아마도 번역까지 했을 것입니다. 그는 당시 등장한 지 얼마 안 된 심리학이란 학문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이라는 존재를 명확히 하고 싶다는, 오로지 그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고양이는 어미 고양이를 잃고 기댈 데가 없는 처지인데 소세키 역시 유소년기에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곳이 없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미 고양이를 잃고 우여곡절 끝에 구샤미 집에 숨어 들어와 살게 된 이름 없는 고양이에게는 자신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겠지요.

그런 고양이를 연재 마지막에서 어쩌면 자살이라고도 파악할 수 있는 형태로 죽게 해버렸던 것입니다. 비록 유머러스하긴 하지만 소세키 심정 어딘가에 죽음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은 역시 부정할 수 없다고 느껴집니다.

게다가 고양이가 죽은 원인이 ‘익사’였다는 것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소세키가 깊이 생각해서 나온 착상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세키 내면에서 ‘물과 죽음’은 종종 이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세키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죽은 미녀 오필리아가 조각배에 실려 흘러가는 장면을 즐겨 읽었고 그것을 자신의 소설 『풀베개』에서도 제재로 사용합니다.

어쨌든 이 작품에서는 소세키의 정신적 위기가 느껴집니다. 그런 위기는 그저 유머러스하고 즐거운 작품을 쓴다는 것만으로는 결코 해소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소세키의 딸은 당시의 아버지가 심한 노이로제 상태였으며 자녀들조차 가까이 다가오지 않도록 했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자의식과잉, 현대적 용어로 말하자면, 소세키는 성인이 되어도 여전히 이른바 ‘중2병(사춘기에 흔히 겪는 심리 상태를 빗댄 용어-편집자 주)’이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구샤미가 거울을 의식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곰보 자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소세키도 어린 시절 천연두에 걸렸던 탓에 얼굴에 곰보 자국이 남아 있어서 무척 신경 쓰였던 모양입니다. 고양이가 관찰한, 거울을 들여다보는 구샤미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꼬락서니만 보면 분명 미치광이임에 틀림없지만 하는 말은 진리다.

거울과 구샤미가 서로 노려보는 장면은 계속 이어지며 옆을 향하거나 얼굴의 이곳저곳을 당겨보거나 메롱을 해보거나 수염을 비틀어보거나 하며 당최 거울 앞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이러고 보면 곰보 자국뿐만 아니라 거울 안에 나타난 자신을 무척이나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자각심이란 것은 문명의 진화에 따라 하루하루 민감해져 가기 때문에 결국에는 일거수일투족도 자연스럽게 할 수 없게 된다. 헨리라는 사람이 스티븐슨에 대해 말하며, 그는 거울이 걸린 방으로 들어와 거울 앞을 지날 때마다 자신을 비춰보지 않으면 마음이 홀가분해지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잠시라도 자기를 잊는 일이 불가능한 사람이다, 라고 평했던 것은 오늘날의 추세를 아주 잘 나타내고 있다.

사회는 어쩌면 미치광이들이 모여 있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미치광이들이 모여 맹렬히 싸우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욕을 퍼붓고 빼앗고, 그 전체가 집단적으로 세포처럼 무너졌다가 다시 솟아나고 솟아났다가 다시 무너지며 살아가는 곳을 사회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중에서 다소 이치를 알고 분별이 있는 놈은 오히려 방해가 되니 정신병원을 만들어 가둬둔 채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자는 보통 시민이고 병원 밖에서 날뛰고 있는 자가 오히려 미치광이다. 미치광이도 고립되어 있으면 미치광이 취급을 받지만 단체가 되어 세력이 생기면 정상적인 인간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심한 미치광이가 돈과 권력을 남용하여 대다수 경미한 미치광이들에게 난동을 부리게 하고, 자신은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사내라는 말을 듣는 예가 적지 않다.

현대인의 깊숙한 내면을 살펴보면 모두 광기로 이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1809~49년)에게 영향을 받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바탕이 된 것은 단편소설『타르 박사와 페더 교수의 광인 치료법The System of Doctor Tarr and Professor Fether』으로 어느 폭풍우 치던 날, 어떤 사람의 안내를 받아 한 정신병원에 도착한 주인공이 유명한 치료법을 시행하고 있다는 원장을 만나 환자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되는데, 마지막에 가서 사실은 원장이야말로 정신적인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고양이의 말에 따르면"사건은 대체로 이성을 잃고 화를 내는 것에서 발생한다. 이를 나타내는 말은 ‘거꾸로 선다逆上(앞뒤 가리지 않고 욱한다는 뜻의 일본어-편집자 주)’이며 글자 그대로 거꾸로 올라간다는 의미다"라는 게 됩니다. 박식한 고양이는 서양에서 옛날부터 전해져 온, 인간의 체액과 성격과의 관계를 설파한 논조를 들면서 현대에서는 인간의 혈액이 거꾸로 올라가 흥분이 발생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일본 역사상 최초로 mob가 탄생한 시대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다른 부분에서 구샤미는 자신이 직접 만든 명문으로 ‘야마토다마시!(일본 고유의 정신이란 뜻으로 제국주의 당시 강조된 관념-역자 주)라고 외치며 일본인이 폐병에 걸린 듯 기침을 한다’라는 문구를 사람들 앞에 내보입니다. 이것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 대외전쟁으로 내달려 승리하는 당시의 일본에서 내셔널리즘이 고양되어가는 모습을 야유한 문구라고 생각됩니다. 러일전쟁 당시 이런 글을 태연히 썼다는 것은 소세키가 상당히 도전적이고 대담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양성을 가진 소세키는 실로 그러한 작가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단순히 유머러스한 작가도 아니며 경박한 사회비평가도 아닙니다.

소세키는 무엇보다도 이지적인 사람, 두뇌명석한 지적인 인물이라는 인상이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소세키에게는 이지나 지성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오히려 정반대라고 생각되는 신비적인 것,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꿈이나 환상이나 로망, 괴기, 혹은 인간의 운명을 움켜쥔 초인간적인 힘에 대한 강한 취향이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비롭기만 한 소세키의 내면세계에 대해 알고 싶다면 짧은 작품이지만 『꿈 열흘밤』을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소세키 문학의 저변이 무한히 깊고 풍요로운 이유는, 인간이란 아무리 파헤쳐도 모든 걸 다 밝혀낼 수 없는 수수께끼의 존재라고, 소세키가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인생의 연륜을 더해갈 때마다 인생이란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것이 점점 흥미로워지면서 틀림없이 소세키에게 더더욱 깊이 빠져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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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는 아마도 여러분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가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차분히 음미하며 읽어본 경험이 있는 분은 의외로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소세키를 읽을 때마다 새로운 발견을 하며 저는 그것을 인생의 큰 양식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멋대로 소세키를 인생의 스승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소세키란 사람은 메이지(1868~1912년, 메이지천황의 통치 시기를 가리키는 연호-편집자 주) 시대가 시작되기 한 해 전인 1867년(게이오 3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메이지 29년이면 29세입니다. 연호와 연령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세키가 실로 메이지라는 시대와 함께 살아온 인물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특히 소세키란 사람이 가진 다면성에 매료되어갔습니다. 섬세하면서도 동시에 대담하며 유머러스하면서도 위태롭습니다. 한마디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으며 때로는 모순을 느끼게 할 정도로 깊이 있는 작가란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장에서 다룰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란 작품은 직접 읽어보진 않았더라도 제목은 들어본 적이 있다는 사람은 많지 않을까요. 주인공이 고양이라는 독특한 설정, 일본문학 사상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설정과 더불어 소세키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작품입니다.

영문학을 전공으로 하고 있던 소세키 입장에서 작품 집필은 이른바 ‘놀이’이기도 했습니다.

왜 소세키에게는 ‘기분전환’이 필요했던 것일까요. 그 까닭은 이 무렵의 소세키가 심적으로 매우 침울해져서 정신적으로 거의 한계상황에까지 내몰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원인이 된 것이 30대 전반에 경험했던 영국 유학이었습니다.

매번 새로운 에피소드가 소개되는 형식으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굵직한 사건이 없는 구성을 취하기 때문에 유명세에 비해 실제로 이 작품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꼼꼼히 읽은 사람은 의외로 적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고양이 눈을 통해 묘사된 등장인물은 언뜻 보기에 모두 지식인(인텔리)이지만 무의미한 수다에 흥겨워하는 속물적인 인간들입니다. 아는 척하거나 허세를 부리거나 진지하지 못한 무책임한 사람들입니다. 읽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버리는 사람들뿐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객관적인 웃음거리로 삼아 소설을 쓰는 행위를 통해 소세키는 자신 안의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 이 작품은 소세키 특유의 유머로 가득 차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이런저런 대화 내용, 혹은 그런 인간들의 모습을 ‘고양이’가 비평하는 대목은 소세키의 박학다식함이 없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장면입니다.

자연스럽고 리드미컬하게 전개되는 언어들의 향연을 만끽하면서 동시에 소세키의 광범위한 지식, 그 깊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그저 유머러스하고 유쾌하고 소세키의 지식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에 머무르고 있지 않습니다. 언뜻 보면 유쾌하고 위트로 가득 찬 문장들 같지만 그 사이사이에서 소세키의 어둡고 날카로운 일면 역시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단 하루도 나체가 된 적이 없는 내 입장에서 보면 아무래도 잘못된 일이다.

소세키는 영국 유학 중 자신과 유럽 사람들을 비교하며, 도대체 미의식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괴로워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는 그 자신이 서양인과 똑같은 옷을 걸침으로써 어떻게든 문명인 같은 얼굴을 한 채 런던을 활보하고 있다는 감각을 맛보고 있었을 겁니다. 실로 인간은, 특히 일본인은 ‘완전히 옷으로 버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서양인은 강하니까 무리해서라도, 설령 그것이 바보스럽다 해도 흉내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겠지. 기다란 것에는 감겨라, 강한 것에는 꺽여라, 무거운 것에는 짓눌려라. 이런 명령들을 그대로 따르다니, 너무 어리석지 않은가.

모든 사람이 다 똑같다면 공부할 이유가 없다. 애써 고생해도 소용이 없다. 어떻게든 ‘나는 나다, 누가 봐도 나다’라는 점을 드러내고 싶다. (중략) 그렇다면 이런 심리로부터 중대한 발견을 할 수 있다. 그건 다른 게 아니다. 자연이 진공을 싫어하는 것처럼 인간은 평등을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병이란 조상과 자기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결과일 수밖에 없지"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선천적으로 위장이 약한 구샤미가 "자네의 가설은 흥미롭긴 하네만, 그 유명한 칼라일도 위는 안 좋았다네"라며 밑도 끝도 없는 답변을 하는 부분입니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칼라일을 그 정도로 권위 있는 인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겠지요.

칼라일은 ‘인간의 제도나 도덕이란 것은 유행하는 의상 따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의상철학』의 훌륭한 패러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패러디란 오리지널 책을 알면 보다 더 즐길 수 있게 되기 마련입니다. 조금 어려운 책이긴 하지만, 여러분들도 혹시 기회가 된다면 꼭 『의상철학』에도 도전해주시길 바랍니다.

소세키는 겁이 많고 신중하면서도 이렇듯 시대와 승부하는 대담한 일면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세키는 지금도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전형적인 ‘국민 작가’ 중 한 사람이지만, 실은 교과서에는 차마 실을 수 없는 비판적인 글도 적지 않으며 ‘반국가적’인 측면 역시 현저한 작가입니다.

오가이는 유학 중 어느 독일인으로부터 "일본인들은 코털을 뽑기 때문에 더럽다"는 말을 듣게 되어 쇼크를 받았다고 합니다. 오가이는 "그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분개하며 독일에 있는 일본인들을 관찰했다고 합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아마도 여러분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가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차분히 음미하며 읽어본 경험이 있는 분은 의외로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소세키를 읽을 때마다 새로운 발견을 하며 저는 그것을 인생의 큰 양식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멋대로 소세키를 인생의 스승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소세키란 사람은 메이지(1868~1912년, 메이지천황의 통치 시기를 가리키는 연호-편집자 주) 시대가 시작되기 한 해 전인 1867년(게이오 3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메이지 29년이면 29세입니다. 연호와 연령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세키가 실로 메이지라는 시대와 함께 살아온 인물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특히 소세키란 사람이 가진 다면성에 매료되어갔습니다. 섬세하면서도 동시에 대담하며 유머러스하면서도 위태롭습니다. 한마디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으며 때로는 모순을 느끼게 할 정도로 깊이 있는 작가란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장에서 다룰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란 작품은 직접 읽어보진 않았더라도 제목은 들어본 적이 있다는 사람은 많지 않을까요. 주인공이 고양이라는 독특한 설정, 일본문학 사상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설정과 더불어 소세키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작품입니다.

영문학을 전공으로 하고 있던 소세키 입장에서 작품 집필은 이른바 ‘놀이’이기도 했습니다.

왜 소세키에게는 ‘기분전환’이 필요했던 것일까요. 그 까닭은 이 무렵의 소세키가 심적으로 매우 침울해져서 정신적으로 거의 한계상황에까지 내몰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원인이 된 것이 30대 전반에 경험했던 영국 유학이었습니다.

매번 새로운 에피소드가 소개되는 형식으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굵직한 사건이 없는 구성을 취하기 때문에 유명세에 비해 실제로 이 작품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꼼꼼히 읽은 사람은 의외로 적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고양이 눈을 통해 묘사된 등장인물은 언뜻 보기에 모두 지식인(인텔리)이지만 무의미한 수다에 흥겨워하는 속물적인 인간들입니다. 아는 척하거나 허세를 부리거나 진지하지 못한 무책임한 사람들입니다. 읽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버리는 사람들뿐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객관적인 웃음거리로 삼아 소설을 쓰는 행위를 통해 소세키는 자신 안의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 이 작품은 소세키 특유의 유머로 가득 차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이런저런 대화 내용, 혹은 그런 인간들의 모습을 ‘고양이’가 비평하는 대목은 소세키의 박학다식함이 없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장면입니다.

자연스럽고 리드미컬하게 전개되는 언어들의 향연을 만끽하면서 동시에 소세키의 광범위한 지식, 그 깊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그저 유머러스하고 유쾌하고 소세키의 지식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에 머무르고 있지 않습니다. 언뜻 보면 유쾌하고 위트로 가득 찬 문장들 같지만 그 사이사이에서 소세키의 어둡고 날카로운 일면 역시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단 하루도 나체가 된 적이 없는 내 입장에서 보면 아무래도 잘못된 일이다.

소세키는 영국 유학 중 자신과 유럽 사람들을 비교하며, 도대체 미의식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괴로워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는 그 자신이 서양인과 똑같은 옷을 걸침으로써 어떻게든 문명인 같은 얼굴을 한 채 런던을 활보하고 있다는 감각을 맛보고 있었을 겁니다. 실로 인간은, 특히 일본인은 ‘완전히 옷으로 버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서양인은 강하니까 무리해서라도, 설령 그것이 바보스럽다 해도 흉내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겠지. 기다란 것에는 감겨라, 강한 것에는 꺽여라, 무거운 것에는 짓눌려라. 이런 명령들을 그대로 따르다니, 너무 어리석지 않은가.

모든 사람이 다 똑같다면 공부할 이유가 없다. 애써 고생해도 소용이 없다. 어떻게든 ‘나는 나다, 누가 봐도 나다’라는 점을 드러내고 싶다. (중략) 그렇다면 이런 심리로부터 중대한 발견을 할 수 있다. 그건 다른 게 아니다. 자연이 진공을 싫어하는 것처럼 인간은 평등을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병이란 조상과 자기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결과일 수밖에 없지"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선천적으로 위장이 약한 구샤미가 "자네의 가설은 흥미롭긴 하네만, 그 유명한 칼라일도 위는 안 좋았다네"라며 밑도 끝도 없는 답변을 하는 부분입니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칼라일을 그 정도로 권위 있는 인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겠지요.

칼라일은 ‘인간의 제도나 도덕이란 것은 유행하는 의상 따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의상철학』의 훌륭한 패러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패러디란 오리지널 책을 알면 보다 더 즐길 수 있게 되기 마련입니다. 조금 어려운 책이긴 하지만, 여러분들도 혹시 기회가 된다면 꼭 『의상철학』에도 도전해주시길 바랍니다.

소세키는 겁이 많고 신중하면서도 이렇듯 시대와 승부하는 대담한 일면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세키는 지금도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전형적인 ‘국민 작가’ 중 한 사람이지만, 실은 교과서에는 차마 실을 수 없는 비판적인 글도 적지 않으며 ‘반국가적’인 측면 역시 현저한 작가입니다.

오가이는 유학 중 어느 독일인으로부터 "일본인들은 코털을 뽑기 때문에 더럽다"는 말을 듣게 되어 쇼크를 받았다고 합니다. 오가이는 "그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분개하며 독일에 있는 일본인들을 관찰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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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3-17 1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의 책과 비슷하게 생각되는데 강상중의 <고민하는 힘>을 읽었어요.
검색해 보니 <고민하는 힘>은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를 실마리 삼아 고민하는 삶의 방법을 말하는 책이라 하네요.
그래서 제가 비슷하게 여겨졌나 봐요. 한 작가를 연구해서 쓴 책도 나름대로 유익한 책 같아요.^^

라로 2022-03-18 13:59   좋아요 0 | URL
강상중이 막스베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 것 같아요. 그러니 잘 썼을 것 같아요. 이 책은 짧아요. 아쉽게도.^^;; 소세키와 자신에 대한 인연(?)을 얘기하는데 뭐 좀 어거지 같지는 했어요.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