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동의하고 혼자 지껄여댔다.

어쩐 일인지 구멍 뚫린 풍선처럼 한꺼번에 온몸이 쭈그러드는 느낌이 들고 눈이 어질어질하면서 꼼짝할 수가 없더란 말일세."

1년에 한 번뿐인 아내의 소원이어서 꼭 들어주고 싶었는데. 항상 야단만 치고 제대로 말도 붙이지 않은 데다 쪼들리는 살림에 아이들 뒷바라지에 온갖 집안일까지 고생만 시키고 호강 한 번 시켜주지 못했는데, 오늘은 다행히 시간도 있겠다, 지갑에는 지폐도 네댓 장 있겠다, 데리고 가자면 얼마든지 데려갈 수 있는데, 아내도 가고 싶어 하고, 나도 데리고 가고 싶은데, 꼭 데리고 가고 싶은데, 이렇게 오한이 들어 어질어질해서야 전차 타는 건 고사하고 현관에도 내려서지 못할 지경이니, 아, 안타깝다. 안타깝다, 이런 생각을 하자 오한은 더욱 심해지고 어질어질한 것도 점점 심해지더란 말일세.

자네들한테도 해명하자면 난 절대 악의로 영어를 쓴 게 아니네. 전적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진심에서 나온 것인데, 그걸 아내처럼 해석한다면 내 체면이 서지 않네. 게다가 오한과 현기증으로 정신이 혼란스러운 데다 유위전변, 생자필멸의 이치를 이해시키려고 서두르다 보니 그만 아내가 영어를 모른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아무 생각 없이 쓰고 만 것이라네.

자기 아내를 칭찬하는 건 팔불출이나 하는 우스운 일이지만, 난 이때만큼 아내가 예뻐 보인 적이 없었네. 어깨를 드러내고 비누로 깨끗이 씻어낸 피부가 검정 비단 하오리에 화사하게 비쳐들고 있더군.

나는 얌전히 앉아 세 사람의 이야기를 차례로 들었는데, 우습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인간이라는 족속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애써 입을 놀리고,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에 웃고, 재미있지도 않은 이야기에 기뻐하는 것 말고는 별 재주가 없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내 주인이 방자하고 속 좁은 인간이라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평소에는 말수가 적어 어쩐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은 것 같았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얼마간 두려운 느낌도 들었으나, 지금 이야기를 듣고 나자 갑자기 경멸하고 싶어졌다. 그는 왜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단 말인가. 그들에게 질세라 얼토당토않은 잡담을 지껄여댄들 무슨 소득이 있을까. 에픽테토스의 책에 그렇게 하라고 쓰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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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3-19 1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이라는 족속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애써 입을 놀리고,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에 웃고, 재미있지도 않은 이야기에 기뻐하는 것 말고는 별 재주가 없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하하~~

라로 2022-03-21 15:5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 여기 재미난 부분 많은데 2장은 또 지루하면서
가끔 재미난 부분 있고,, 고양이가 인간을 바라보는 모습이라며
소세키가 인간을 생각하는 부분 재미나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