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vs 영화
원작- 배틀 로얄 (타카미 코슌)
영화- 배틀 로얄 (후카사쿠 긴지)
뜨거운 안녕
-일본에서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던 소설 <배틀 로얄>은 한국에서는 영화로 먼저 알려졌다. 아마 설정이 우리나라 정서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 아니었을까. 마침 소설 출간 당시 일본문화 수입에 따른 쓸데없는 논쟁이 과열되어서이기도 하겠다. 그러나 다시 돌아보면 <배틀 로얄>은 문제작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같은 반 고등학생들이 단 한 명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여야 한다는 설정은 너무 노골적으로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 폭력이 직접적이고 시각적이냐, 아니면 시스템 속에 녹아들어서 눈에 보이지 않느냐의 차이 뿐이었다. 최소한 일본과 한국에서는 그랬던 것 같다. 이 공격적인 '현실성'은 한일 양국에서(만)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작가인 타카미 코슌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고 말했던 스티븐 킹의 <롱워크>와 비교하면 더욱 그 점이 눈에 띈다.
지원자 중에 무작위로 뽑힌 청소년들이 단 한 명 남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끝없이 걷는 게임(멈추면 뒤따라오는 군인들에게 사살당한다), <롱워크>는 무한경쟁의 폐해와는 거리가 있다. 빗나간 사춘기의 여러가지 욕망, TV중계로 이 살인 서바이벌을 보고파 하는 대중의 어두운 욕망, 그리고 그 살인 서바이벌 쇼를 기획하는 파시즘 국가의 욕망. <롱워크>는 욕망들의 충돌이었다. 그에 반해 <배틀 로얄>은 강제적이다. 누가 억지로 등을 떠미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이것은 미국 청소년과 일본(한국) 청소년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롱워크>만큼이나 <배틀 로얄>이 중요한 작품이다. <배틀 로얄>은 <롱워크>만큼 신선하지도, 더 많은 사회적/문화적 의미를 숨겨놓고 있지도 않았지만, 지금 여기, 극동아시아의 청소년들에게 주어진 가장 노골적이고도 슬픈 위로였기 때문이다.
<배틀 로얄>의 남녀 주인공은 너무 전형적이어서 매력이 없다. 대신에 선과 악으로 쉽게 구분할 수 없는 캐릭터들의 매력이 작품을 끌고 간다. '뺏기는 쪽이 되느니 뺏는 쪽이 되겠다'고 말하면서 급우들을 거침없이 죽이는 학생에게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거기다 다른 평범한 아이들은 어차피 죽을 판이 되고 보니 사실은 내가 너를 좋아했네, 걔가 너를 좋아했네 같은 숨겨진 사연들을 공개하면서 소설의 분위기를 미묘하게 만든다. 지금 죽나 사나 하는 판에 그게 중요한가? 그렇다. 아이들에게는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 목숨만큼이나 중요하다. 어른들의 세계에 먼저 눈뜬 아이들이 급우들을 죽이기 시작하는 순간, 아직 소년소녀로 남아있는 아이들은 목숨만큼 소중했던 비밀들을 하나둘 터뜨리면서 죽어간다-어른이 되어간다. 이 모습이 바로 '지금 이 세계'다. <배틀 로얄>의 이 허망한 청춘 고백들은 결코 위대한 성취는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결코 위대하지 못했던 거의 모든 아이들의 이야기일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 <배틀 로얄>이 있다. 이 영화는 흥행용으로 생각하면 실패작에 가깝다. 원작의 소년소녀 감수성이 거의 다 삭제당한 영화 속에서는 감상은 거의 허용되지 않는다. 가끔 있는 플래시백은 환상이거나, 죽기 직전 찾아오는 주마등같은 추억 뿐이다. 이 영화는 드라마를 포기하고 아이들이 죽어가는 장면에 주목한다. 여자아이들끼리의 강력한 커뮤니티는 내부에서부터 붕괴하고, 철없는 남자애들은 아니나다를까 뭔가 하나 싶더니 죽는다. 이렇게도 죽고 저렇게도 죽는다. 무슨 사연을 가졌든간에 죽는다. 비주얼이 동기를 압도한다. 죽음이 지나온 세월을 압도한다. 대낮의 환한 햇빛 아래서 기관총탄을 맞고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여고생의 모습은 초현실적이지만, 그 와중에도 피와 죽음만큼은 맹렬하게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이래서야 주인공들이 살아서 섬을 떠난대도 결코 승리했다고 볼 수가 없다. 일본(소설에서는 대동아공화국) 전역에 지명 수배가 내려질텐데 그 기약 없는 투쟁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피투성이의 삶을 연장한 것뿐이지 않은가.
바로 그것이 이 영화의 감독인 후카사쿠 긴지의 세계였다. '의리없는 전쟁' 시리즈로 유명한 그의 세계는 빠져나올 수 없는 폭력의 늪이었다. 그의 영화 속에서 가치판단은 거의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누가 어떻게 방아쇠를 당기고 칼을 뽑았느냐가 생사를 결정할 뿐이다. 그러니 이 부질없는 목숨 외에 신경쓸 것이라고는 간지 뿐이다. 후카사쿠 긴지의 세계는 그래서 희안하게 폼이 나는 선굵은 액션들이 빛을 발했다. 어떤 '인간'도 그 빛나는 늪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야쿠자들이 아닌 고등학생들이 나오는 <배틀 로얄>도 얼핏 그렇게 보인다. 후카사쿠 긴지 스타일의 늪.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영화 버전에는 원작에서 살아남은 소년 감성이 딱 하나 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아무 이유 없는 의욕이다. 아무것도 모른다면 일단 희망한다. 일단 희망하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유가 없다면 의심하지 않는다. 일단 믿는다면 서로의 목숨을 걸어줄 수도 있다... 이 희망은 영화 내내 아무런 근거가 없이 발생해서 좀 황당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단지 주인공이라서 살아남는 건가? 그렇지 않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선생 역할을 맡은 기타노 다케시다. 학생에게 칼을 맞고 교사를 그만두었다가 배틀 로얄의 진행자로 돌아온 다케시는 영화 내내 표정이 없다. 그러나 감정 자체가 거세당한 것처럼 보이는 그가 이 영화의 마지막 열쇠다. 그는 마지막에 주인공들과 대치하는 순간 총알이 없는 총으로 주인공들을 겨누고, 그들의 총에 맞아 죽은 뒤 여주인공의 꿈속에 다시 등장한다. 그는 그제서야 웃는다. 그는 말한다. 우리(세대)는 이미 끝났어. 그리고 그 꿈의 마지막, 혹은 영화의 마지막은 "달려라" 라는 커다란 자막이다. 나는 그제서야 기타노 다케시가 후카사쿠 긴지였다고, 배틀 로얄의 세계를 인생 내내 그려왔던 감독이 최후에 '아이들에게' 남겨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역시 희망을 어떻게 불러와야 하는지는 몰랐으나, 어쨌든 너희들만큼은 꼭 다른 인생을 살아가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는 아이들을 자신의 '의리 없는' 영화 속으로 초대한 다음, 힘겹게 그 손에 희망을 쥐어 주었다.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모르는 그 막무가내의 희망을.
<배틀 로얄>은 후카사쿠 긴지의 마지막 영화였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자막은 그대로 그의 유언이 되었다. 그것은 내가 아는 가장 뜨거운 유언, 작별인사다. 이렇게 하나의 세태 고발 SF는 한 거장이 다음 세대에게 남긴 마지막 주문이 되었다.
-외국소설MD 최원호
p.s: 사실 후카사쿠 긴지는 <배틀 로얄 2: 레퀴엠>도 만들고 있었다. 첫 촬영 이후 사망했기 때문에 마지막 작품이 <배틀 로얄>인 것은 맞으나, 다음 영화를 만들었으니 배틀 로얄의 마지막이 유언은 아니냐고 해도 할 말은 없다.
p.s 2: 원래 절판된 작품은 쓰지 않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으나, 이번 한 번만 예외로... 입니다.;
p.s 3: 재미있는 배틀로얄 영화판을 찾으실 분은, 헐리우드판 배틀로얄인 <헝거 게임> 시리즈 영화화를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라.
영화 원작소설 이벤트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