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나라 최초의 멕시코 이민자들을 태운 영국 상선 일포드 호는 1905년 4월 초 제물포항을 출발한다. 국운이 기울어 가던 때였다. 이들 이민자는 유카탄 에네켄 농장 이민 브로커 존 마이어스와 일본 대륙식민합자회사가 1904년 10월부터 모집한 한인들이었다. 1천33명의 이민자들은 남자가 702명,여자가 135명,아이가 196명이 었다. 40여일간 항해 중 아이 둘과 어른 한 명이 숨지고 한 명이 태어났다. 1905년 5월 12일 멕시코 중서부 태평양 연안 살리나 크 루스 항에 도착한 이들은 곧바로 남부 유카탄 반도 메리다로 이동 해 에네켄 농장에서 한많은 이민 생활을 시작한다. 현재 5세대까 지 내려오고 있는 멕시코 한인 후손들은 최소한 3만명이 넘는 것 으로 추산된다.

에네켄은 선박용 밧줄 등의 원료가 되는 용설란의 일종. 이민 1세대들은 멕시코에서의 첫 이민 생활을 메리다 일대 에네켄 농장에서 일해야만 했었다.

장미희 임성민 주연의 애니깽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에네켄 농장에 도착한 조선인들은 영어도 스페인어도 몰랐고 단지 에네켄이라는 식물의 이름은 애니깽으로 와전되어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애니깽이 되었다.

김영하의 장편소설 "검은 꽃"은 멕시코 이민 1세들의 이야기이다. 멕시코라는 땅에 처음으로 조선인들이 말을 디딘 바로 그 사건, 1033명의 한인들이 1905년 5월 12일에 멕시코 중서부 살리나 크루스 항에 도착한 그 사건, 그 1033명의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어떤 소설이 딱히 가치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힘이 조금 더 드는 소설이 있고, 좀 더 자유로운 소설이 있을 뿐이라고 할 지도 모른다. 김영하의 검은 꽃은 자료가 많이 필요한 소설이다. 멕시코 이민사를 이해했어야 했고 그에 대한 정확한 수치들이 남아있다면 그런 수치들도 필요했으며, 가상의 이야기를 덧붙여야 하지만 기본 소재는 사실에 입각한다. 거기에 소설가는 살을 입히고 윤기를 낸다. 그리고 멕시코라는 땅에 대해서도 알아야 했다. 작가 후기에 밝혔듯, 이 소설은 누군가의 피로 쓰인 한 줄로 시작한 소설이며, 잘 정리된 자료들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는 소설이라고 했다. 그리고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를 부인과 함께 답사하며 소설의 많은 부분을 완성했다고 했다.

1033명이 자세한 내막도 모르고 그저 墨西家라는 미지의 땅을 향해 배를 탔다. 그들은 멕시코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고 그만큼 그 나라에 대해서 무지했다. 그리고 그 땅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도 막연했다. 그저, 이러나 저러나 비슷한 목숨이라는 절망적인 시대적 상황이 그들의 출항을 설레이게 했고 그들을 신대륙의 꿈으로 유혹했다. 미지의 세계는 위험이 동반된다. 새로운 것들은 항상 불안한 미래가 동시수반된다. 그러나, 무지몽매했던 계몽기 조선인들에게는 단지 불안한 미래가 아닌, 인류의 정의가 불분명한 세계로의 진입을 뜻했다. 그 때는 아마 백인들 눈에 백인들 외의 다른 인종들, 누렇거나 붉은 인종들은 유인원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유인원을 인간의 범주에 넣어야 하느냐를 놓고 아직도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그들은 오로지 가진 몸뚱이 하나로 버텨야 하는 노동계약에 팔렸지만, 인간이길 주장했고 인간으로 남기 위해 투쟁한다. 스스로 투쟁하고 이웃과 투쟁하고 농장주와 권력에 투쟁했다. 그리고 결국 남의 나라 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싸우고 전쟁하는 것이 너무나 익숙한 소모품들이 되어간다.

사람이 운명이란, 참으로 절묘한 것이라서,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처지들이 많으며, 한 번의 결정이 예상보다 수만배 더 큰 효과를 내어 인생을 홀라당 뒤집어버리기도 한다. 문제는 스스로 그 운명의 꺽이는 점을 잘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검은꽃은 인생이 뒤집어진 사람들의 분투를 그리고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언제부턴가 작가의 마음으로 책을 읽게 되는데, 작가 스스로 참 뿌듯하고 즐거웠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격동의 시기, 작가 말대로 매력적인 연대인 1910년대에, 격정적인 인물들을 창조하고 그들의 후일담까지 마지막으로 적으면서 작가는 정말 이 소설을 끝내고 싶지 않은 아쉬움에 휩싸였겠다고 생각했다.

첫 날 책을 4분의 1정도 읽고 그 다음날 새벽에 책을 잡기 시작해 다 읽고 나니 아침 7시였는데, 자리에 누우면서 나는 검은 꽃을 영화로 만든다면 배우를 누구를 캐스팅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이 연수는 아무래도 고현정밖에 없어. 김이정은 예전같으면 최재성이 적당할텐데, 조금 더 젊은 배우가 필요해. 그렇다면 이번에도 고현정의 짝은 천정명 뿐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소설을 읽고 나만의 화면에서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은 재미난 소설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야기꾼으로 인정받고 있는 김영하의 검은 꽃, 새해를 여는 소설로 박진감과 긴장, 그리고 삶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다듬기에 충분히 멋진 책이다.  
 

2007.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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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기가 시작되면서 교복가격에 대한 논란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문제는 매년 이 맘때쯤 교복가격이 문제가 된다, 는 설들만 난무할 뿐, 교복의 가격은 전혀 조정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교복가격이 문제가 되면서 모 업체에서는 저소득층 지원을 확대하겠다는 공지사항까지 올렸지만, 실질적으로 이러한 대기업 교복업체에서 저소득층 가정 자녀에게 교복을 지원해 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현재 서울/경기도 일대 중/고등학교의 브랜드 교복가격은 약 30만원대 이상에 달한다. 이 가격은 동복만의 가격이다. 블라우스 + 치마/바지 + 조끼 + 자켓을 포함한 가격이고, 여기에 정해진 지정 코트를 구입하게 되면 15만원 정도가 더 추가된다. 블라우스는 업체마다 다르지만 대기업 브랜드 교복의 경우 장당 2-3만원에 이르고 이 가격이 부담스러운 학생들은 지마켓등 온라인 쇼핑몰에서 만원대의 블라우스를 별도 구입하게 된다. 여기에 하복의 경우 약 10만원대에 이르고 체육복은 각 학교별로 3-5만원가량 일괄구매하도록 되어 있다. 학교에서 학생증을 달게 되어 있는 학교는 예외지만 학생의 이름이 새겨진 명찰을 교복에 부착하게 되어 있는 학교도 있는데 이런 경우 명찰을 약 1천원-3천원 대에 추가구매하도록 되어 있는데, 명찰은 동복 자켓과 하복 자켓, 체육복 상의에 필수부착하게 되어 있는 학교도 있다. 

 물론, 공동구매라는 대체 수단도 있다. 공동구매의 경우 15만원 선에서 동복세트를 구입할 수 있긴 하다. 그러나 15만원에 체육복 추가 비용, 그리고 하복까지 생각한다면 이 역시 만만한 비용은 아니다. 

 대부분의 교복 가격 논란자들은 대기업의 마케팅 정책과 거기에 물색없이 따라다니는 10대 소비자를 비난한다.

브랜드 교복의 경우 10대 학생들이 좋아하는 스타들을 내세워 교복광고를 하고 있는데, 2009년 신학기를 겨냥한 브랜드 교복의 광고 모델들은 다음과 같다.

 

아이비클럽 - 원더걸스 & 김연아 & 슈퍼주니어
엘리트 교복 - 2PM & 소녀시대
스쿨룩스 - 빅뱅 & 다비치
스마트 교복 - 샤이니

 





 
이 중 일부 모델들은 2008년 모델과 겹치는 경우가 있고 한 그룹의 일부 멤버들이 주력 모델로 선발되기도 한다. TV 광고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각 회사의 홈페이지에서도 CF나 모델들의 정보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브랜드 교복의 마케팅 전략은 단순하게 모델의 기용 때문은 아니다. 실제 이들 모델들이 입고 나오는 교복은 대한민국에서 존재하기 어려운 교복의 디자인이다. (하얀 치마 교복이 가당키나 하나 / 아니면 저 짧은 길이의 치마가 가능한가)

 
브랜드 교복은 단순하게 모델이 입었다는 이유로 학생들이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이 브랜드 교복을 선호하는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10대들의 정서를 이해해야 한다.

요즘의 10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오해는 브랜드 교복이 스타들이 광고하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아이들이 따라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의 10대들은 단순히 스타가 입기 때문에 그 브랜드의 교복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요즘 10대들은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실리적이고 영리하다. 그들이 브랜드 교복을 찾는 이유는 디자인의 차별화, 원단과 기능의 우수성이다. 가격이 조금 비싸더라도 그정도 투자할 가치가 있는 상품을 구매하겠다는 것이 젊은 이들의 사고방식이다. 

 공동구매로 사게 되는 교복은 학교측에서 원하는 디자인을 그대로 만들어 낸다. 펑퍼짐한 치마, 넉넉한 품등, 한창 성장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만들어 주는 넉넉한 형태, 몸매를 전혀 살리지 않는 - 쉽게 말해 어벙벙한 스타일이 된다. 특히 1학년의 경우 3학년때까지 입기 위해서 엄마들은 두 치수 정도 크게 입히기를 원한다. 그러나 기성세대가 보기에도 커다란 교복을 입고 옷속에서 아이가 헤매는 것처럼 보이는 1학년 학생들을 보면 -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물론 그런 모습이 귀엽게 보이기도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이 원하는 것은 그런 어린이같은 귀여움이 아니다. 

 학생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초등학교 때 허리띠를 착용할 수 없는 고무줄 형태의 하의와 티셔츠를 입다가 정식으로 옷다운 옷을 만나는 첫 경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미 여학생의 경우 5-6학년 쯤 되면 브래지어 착용이 필요할 정도로 요즘 아이들의 성장속도는 무섭다. 버스 기사분들이 초등학생이라고 말을 하지 않으면 성인인 줄 착각하고 왜 요금을 반만 내느냐고 따지는 상황이 발생하는 아이들도 있다. 길에서 만나는 아이들 중, 그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고 몇 학년인지 명확하게 가려낼 수 있는 경우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미 몸매가 잡혀가는 상태로 중학교에 진학하는 아이들 (특히 여학생들)은 이제 제 몸이 성인의 형태를 갖춰간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커다란 교복을 입고 등교를 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사춘기 아이들은 외모가꾸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인지하고 또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는 단계에 있다. 아이들이 멋을 부리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학습해 가는 과정이다. 내가 가진 이미지와 남들에게 보여지는 모습이 무엇이며,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확인하는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이 아이들의 외모 가꾸기이다. 이 중 교복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하루중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고 바쁜 스케줄로 학교가 끝나자 마자 바로 학원으로 직행하는 아이들이 많다. 학원이라는 곳은 아이들이 각자의 교복을 비교해 볼 수 있는 또다른 경연장이 된다. 어느 학교 교복이 예쁘고, 어느 학교 교복은 촌스러운가를 확인하고 그 촌스러운 디자인도 멋지게 소화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아이들은 나도 남보기에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브랜드 교복은 여기서 아이들을 설득할 수 있는 디자인적 강점을 가지고 있다. 적당하게 살린 라인과 소매와 밑단 끝에 숨어있는 여유분이 성장을 하더라도 고쳐서 입을 수 있는 디자인으로 설계되어 있다. 교복대리점을 하는 분들은 아이들이 특별히 살이 찌지 않는 이상, 팔다리가 길어지지 몸통이 커지지는 않는다고 설명한다. 남학생의 경우 고등학생이나 되어야 본격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고 이 때는 자켓이 넉넉해야 하지만, 여학생들이나 중학교 남학생의 경우 특별히 살이 찌지 않는 이상 팔과 다리가 길어지기 때문에 그 때에 맞춰서 피트한 형태의 교복을 입고 자라게 되면 또 늘려서 입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브랜드 교복의 영리한 디자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공동구매와 브랜드 교복은 원단의 차이가 있어서 브랜드 교복의 경우 자켓 하나만 입어도 방한이 된다고 설명한다. 공동구매 교복과 브랜드 교복을 모두 구매해 본 학부형의 입장에서 이 부분은 맞는 것 같았다. 공동 구매 교복 자켓보다, 브랜드 교복의 자켓이 훨씬 더  따뜻하다는 것이다. 또한 브랜드 교복은 매년 안감을 다르게 설계한다. 아이들은 휘날리는 자켓 속의 안감을 보고도 몇 학년인지 파악한다. 만약 전학생의 경우는 08년도에 중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09년도 신입생 교복을 입게 될 경우 친구들과의 동질감 형성에 실패할 수 있다는 위험을 안고 있다. 기성세대의 눈에서는 그게 뭐 대수라고 할 수 있지만, 기성세대는 정확하게 자신의 어릴 때 모습을 상기 해 볼 필요가 있다. 친구들과 유난히 다른 나의 모습이 그렇게 자신감 넘쳤는가? 아니다.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차별화 되기를 원하기도 하지만 모순적으로 어느 정도의 동질감 형성과 그룹을 형성하길 원한다. 그게 10대의 마인드이다. 

 공동구매 교복을 구매해 세탁소와 수선집을 거쳐 브랜드 교복처럼 수선을 한다고 하더라도, 안감까지 바꿀 수는 없다. 또한 애초에 설계된 디자인이 다르기 때문에 수선에도 한계가 있다. 눈썰미가 발전하는 나이 - 10대들은 브랜드 교복과 공동구매 교복을 철저하게 구별할 수 있다. 

 브랜드 교복의 가격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공동구매 교복이 디자인을 중시하는 10대들의 선택에서 밀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교복가격의 문제를 단순히 브랜드 교복의 과도한 마케팅 전략과 학생들의 맹목적인 따라하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디자인과 실용적 측면에서 공동구매 교복은 분명히 브랜드 교복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가?

 주먹구구식이 될 수 있겠지만, 교복가격을 통일화 시키려면 모든 브랜드 교복과 공동구매 교복의 차이점을 없애야 한다. 원단의 선택은 업체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학교측에서 지정한 정확한 디자인을 절대로 변경할 수 없도록 하거나, 안감까지 통일시키거나, 브랜드 교복의 디자인적 잇점까지 끌어와 정확하게 학교에서 디자인을 하고 그 지침을 각 교복제작업체에 내려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각 교복업체는 디자인을 절대적으로 변경할 수 없도록 법제화 하는 방법이 있다. 또한 학생들에게 교복변형을 절대 금하도록 교칙을 확고히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브랜드 교복업체는 공동구매 업체를 뛰어넘을 방법이 오직 광고와 원단밖에 없어지고, 시장 점유율이 낮아질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되면 광고 모델에게 지불하는 모델료를 대폭 삭감할 수 있을 것이고, 과대 광고 역시 줄어들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이런 우격다짐식 대안은 교복이라는 제도 자체가 파시즘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개성이 없기를 강요받는 통일된 유니폼을 강제적으로 입히게 하고 그 안에서 변형을 추구하는 아이들의 의도까지 막지 못하는 이상, 교복가격의 문제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교복자율화를 거쳐 다시 각 학교마다 교복을 입힌 이유는 무엇인가. 과연 나는 부활한 교복이 아이들에게 소속감을 주기 위한 순수한 의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학생들의 탈선을 막고 관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혹은 새로운 시장의 창출을 위해서, 여러가지 이유가 복잡적으로 작용하여 생겨난 것이 교복시장이 아닌가. 

 학생들은 학교 배정 역시 자유롭지 못하고, 그 학교에 들어가 원하지도 않는 교복을 입기를 강요받는다. 학생들 중엔 저 학교의 교복이 더 예쁘니까 그 학교로 배정받았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본인이 입겠다고 동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교복의 파시즘에 자본주의가 결탁했다. 교복가격이 불안정하고 이 방대한 시장에 여러 경쟁자가 출현하는 것은 당연한 원리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을 한 업체들 중 승리한 자들이 가격을 주도할 수 있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논리이다. 아이들은 교복의 차이가 가정형편의 경제적 형편의 차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혹은 부모님의 완고함의 차이이거나, 자신이 가정에서 존중받는 존재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척도로까지 확대해석 하기도 한다. 

 처음 중학교에 진학한 딸아이에게 공동구매 교복을 당연하게 강요했다.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입고 다녔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학교에서 자신의 교복이 다른 아이들의 교복과 기능성과 디자인이 떨어진다는 것을 인지한 아이는 교복 수선을 반복했다. 보다 못해 브랜드 교복에서 자켓을 하나 구입해 주었는데, 아침에 학교에 가는 아이의 모습이 참 달라보였다. 가격이 비싼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교복가격을 안정화 시킬 수 있는 방법은 디자인 변경의 절대 불허 , 혹은 전국교복의 통일,  혹은 교복제도 폐지. 이 세가지로 함축된다.

물론, 브랜드 교복 업체에서 모델기용과 광고/마케팅에 쏟아붓는 비용을 대폭 줄이고 교육복지 사업에 투자하겠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브랜드 교복은 기업이 만든다. 기업은 이윤창출을 목적으로 한다. 그들이 과연 대한민국 교육복지에 투신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글쎄, 그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대한민국 교복시장, 의류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 크게 욕심날 부분이 아닌가 싶다. 아마 지금도 교복시장에 아직 진출하지 못한 것을 통탄하고 있는 기업들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2009.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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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울 만큼 배웠고, 해볼만큼 사회생활을 해 본 내노라 하는 여자들이 집안에 들어앉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좋은 엄마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가, 나의 시어머니가 그러했듯 어머니로서의 미덕은 희생과 봉사이니, 나도 그런 엄마가 되어야 한다고 젊은 엄마들이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다. 그런 그녀들은 이미 재능이 너무 뛰어나 와이블로거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내며 바느질과 요리, 인테리어 리폼에 프로폐셔널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실로 그녀들의 재능은 옹색하게 자기 집만 반짝이게 하기엔 너무 아쉬운 것들이었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발표하고자 블로그라는 매체를 선택했고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하며 지내는 파워풀한 엄마입니다. 라는 것을 지상에 공표하고 나섰다. 혹자는 와이블로거에서 시작해 진정한 프로의 길에 입문하여 경제적인 이익 창출에도 성공하였다. 대부분의 와이블로거는 이러한 인생 역전을 꿈꾸는 지도 모르겠다. 그녀들은 요리블로그를 모아 책을 내거나 인테리어 리폼 기술을 가지고 잡지에 기사가 실리거나 리폼 교실을 운영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자랑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들이 블로그를 굳이 운영하며 자기의 사생활을 드러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살림의 달인 마샤 스튜어트 이후, 살림의 달인들이 대한민국에도 늘어나고 있다. 아이들과 남편을 위한 살림의 달인이라고들 하지만, 과연 그녀들이 가족을 위해 그런 기능들을 익히고 있는가는 의심해 볼만한 여지가 있다.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욕망을 감추고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일거리를 만들고 스스로를 분주하게 만들어 집안에서도 충분히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역할론과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자 그녀들은 옹색한 아파트 베란다에서 톱질을 하고 먼지를 날린다.  

또래 친구들 중 인터넷 블로그 시스템을 잘 활용하고 있는 동기들은 대부분 음식을 한 사진이나, 뭔가를 꾸며낸 사진들을 전시하고 아이들의 사진으로 블로그나 싸이홈피의 메인사진을 장식하고 있다. 감정의 이입. 자신이 창조해 낸 창작물에, 자신이 창조해 낸 아이들에게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여하고자 하는 안타까운 노력들이 보인다.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하는 이데올로기는 가부장제에서 비롯된다. 남자는 바깥일을 하고 직업에 성실하며 부인의 내조는 이제 더 이상 그림자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창조성을 필수로 한다. 살림과 가사노동에 영 취미가 없는 여자들은 또 다른 컴플렉스에 시달리게 된다.  또한 남성들은 좋은 엄마가 집안에서 대단한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사이 가정 외부에서도 대단한 창조력을 발산해 막강한 재력을 구축해야 한다. 좋은 엄마 이데올로기는 모두를 죽이고 있다.

집안에서 하는 가사노동은 대부분 본인이 아니어도 해결될 수 있는 무방한 것들이기도 하지만 혹은 본인이 아니라면 제대로 되지 않는 난해한 것들이기도 하다. 주방은 주부의 전적인 독립공간이자 작업/직업 공간으로 모든 물건은 그 주인의 동선에 따라 맞추어져 있다. 남의 집에 가서 쉽사리 요리를 해 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과학적 동선 설계는 고난도의 테크닉엔 끼지도 못한다. 뛰어난 창작물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가정주부는 그저 평범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좋은 엄마 이데올로기는 아이의 유아기와 아동기에는 가사일과 발전된 가사의 형태로 발현되지만 아이가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좋은 엄마들은 성적이 좋은 아이와 특목고를 갈 수 있는 아이의 엄마, 영어를 잘 하는 아이의 엄마 이데올로기로 변질된다. (최근 모 영어학습지에서 아이가 영어를 잘하면 엄마가 자랑을 할 수 있다는 논리로 광고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누가 엄마들의 가치를 이런식으로 매김하고 있는가.  

어미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저 아비로서 살아간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기본적인 아이의 욕구를 해결해 주고, 무엇을 더 해 줄 것인가를 고민하기 보다는 "상실"이 찾아왔을 때 아이가 어떻게 세상에 적응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풍요로운 시대속에 살고 있으므로, 풍요의 시대는 곧 상실의 시대이므로.  

지금 - 여성으로서의 자아가치의 창출은 식민지 근대의 신여성론 보다 못하다. 여자들은 자아를 찾고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 뭔가를 만들어 내어 남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동정론에 가까워지고 있다. 살림을 못할 수도 있고 하기 싫을 수도 있다. 각자의 분야는 모두 다르다. 모든 엄마가 희생과 봉사의 엄마로 살 수는 없다. 조금은 이기적인 엄마들이 결국은 이타적인 삶의 말년을 보낼 수도 있다.  

왜 명절이 되면 온 집안 식구들이 모여 집안에서 해 낸 음식을 먹어야 하는가, 음식을 하기 싫은 어머니가 가장으로 있다면 그 집은 시켜먹은 음식으로 명절을 지내서는 안되는가? 모든 어머니가 홍어회를 썰고 조기찜을 해 내고 사골국물을 우려낸 떡국을 끓여내야 하는 것은 성문법이 아니다. 그저 우리가 만들어 낸 관습법에 지나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성문법보다 관습법이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아이가 출생하면서 부터 젊은 엄마들은 병원에서 마련한 모유수유실에서 엄마가 미안해 라는 말로 아이와 대화를 시작한다. 뭐가 미안한가. 인간의 욕망에 기초하여 출산을 한 것이 왜 아이에게 미안한 일이 되는가. 네가 다른 엄마를 가졌더라면 희생과 봉사로 무장한 엄마로 살았더라면 아이는 더 편안한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게 싫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네 운명이라고 아이에게 왜 당당하지 못할까.  

 지금의 젊은 엄마들이 좋은 엄마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부모 봉양을 모토로 삼지 않을 지금의 어린 아이들이 자라나서 세대간의 갈등은 훨씬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의 아이들은 형제가 적고 우리들은 오래 살 것이다. 아이 한 명이 6명의 노인을 부양해야 하는 상황이 시작되면 세대간의 갈등은 극에 달할 것이다. 좋은 엄마로 늙어가기 위해서는 늙어 자식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 자존심과 경제력을 키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식은 스물이 되기도 전에 부모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한다. 그 때 되어 절대 후회하지 말고 배은망덕하다 하지 말고 배신감을 느끼지 않아야 할 방법을 지금부터 수련해야 한다.  

루소가 말했다. 배은망덕이라 함은 그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분명히 어떤 댓가를 바랬기 때문이라고. 아무 댓가없는 희생과 봉사가 과연 있는가, 배은망덕이라는 것이 성립하는가에 대해서 루소는 물었다. 세상에 배은망덕이라는 것은 없을 지도 모른다. 조금은 이기적인 삶 - 나는 좋은 엄마 보다 좋은 사람이길 원한다는 욕망이 결국 말년엔 가족들의 속 뒤집지 않는 좋은 엄마의 기억으로 세상을 떠날 수 있는 필수조건일지도 모른다. 

 PS. 

이글을 쓰고 난 뒤 알라딘 메인을 보니 남편을 사로잡는 101가지 요리라는 책이 오늘의 반값이다. 합의하에 결혼했으면 됬지, 매번 남편을 위해 시어머니의 요리솜씨를 모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먹기 싫으면 사먹고 들어오든지!  

혼자 놀고 즐기겠다고 귀가시간이 습관적으로 늦는 남편이 있다면 더 이상 같이 살 필요가 없지 않을까. 먹고 살겠다고 늦는 것과 이기적으로 놀고 즐기겠다고 늦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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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먹고 싶은 것을 먹지도 못했고,  

탐욕을 부린 적도 없으며,  

남들을 해꼬지 한 적도 없고, 

모든 것이 내 탓이고 내 덕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한 여인네가. 

속썩이던 아들이 떠맡긴 손녀까지 길러내고  

평생 손빨래로 지문이 사라지고  

밥상을 들고 문지방을 건너느라 몸통이 동그랗게 굽은 한 여인네가, 

명절마다 현관에 신발이 가득차던 그 집에서  

이모라는 이유로 작은 엄마라는 이유로 하루종일  

꼬막을 삶고 홍어회를 썰어내고 갈비찜을 해 내고  

명절 상 물리기도 전에 쏙 쏙 빠져나가는 동서들을 보고도 

한숨 한 번 크게 쉬지 않던 한 여인네가, 

몹쓸병에 걸려 며느리 좀 부려먹어볼까 했더니  

며느리들은 많이 배워 그런지 일일이 내 품이 다 필요한 한 여인네가, 

맨바닥에 누워 이불만 덮고 눈 감고  

억울해선 안된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억울한 인생,  

점쟁이는 3년을 넘기기가 힘들다고 하고, 

평생 계란후라이 하나 맘 편하게 먹지 못한 억울한 인생, 

부엌에서 40년을 넘게 보내고 그래 나는 모피도 있고 가락지도 있다고, 

세탁기 쓰는 법도 모르겠고, 손주놈은 와서 청소기를 부러뜨리고 가고 

억울한 인생,  

억울하면 안된다고 혼자 아둥바둥. 

몹쓸 병에 걸린 늙어버린 몸. 

억울한 인생.  

 

당신 - 많이 억울해 보여요.  

2008년 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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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 미국 인디언 멸망사
디 브라운 지음, 최준석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인디언 역사서.

서부개척의 미명 아래 행해진 인디언 멸망에 대한 충격적이고 놀라운 이야기.

1971년 첫 출판되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생생하고 세밀한 기록으로 독자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는 기록문학의 걸작 

 -이 책은 유신 시대 전제 정권의 발호가 극에 달하던 70년대 말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미국의 호도된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 글이 미국인들에게도 충격적이었다면 미국에 맹목적이었던 우리에게는 경악과 자괴가 뒤섞인 이중적인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역자 최준석 

 우리가 기억하는 인디언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군사독재정부가 미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그 시절, 인디언은 야만적인 폭력을 일삼는, 말도 하지 못하는, 문명과 거리가 먼, 단지 사람의 가죽의 둘러쓴 동물과도 다름이 없었다. 서부개척시대를 표현한 그 시절의 영웅적인 미국영화에서는, 인디언들은 대부분 말을 하지 못하고 바야바나 킹콩, 조금 발전하면 타잔같은 소리만 내고 사람의 머릿가죽을 벗기는 일이 예사였다. 그리하여 아파치라는 종족은 야만성의 대표주자로 분류되었고 잡히면 죽는 것이 인디언에 대한 생각아니었던가. 

 시대가 지나, 이 책이 이제는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는 시절이 되어, 인디언들의 지혜, 미국인들의 잔인성에 대해서 사람들이 눈을 뜨게 된다. 2002년도에 출간된 이 책은 인디언들은 사람을 잡으면 머릿가죽을 벗겨 죽인다는 잘못전해진 이야기만큼의 잔인함을 가지고 있던 인디언들의 멸망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모르고 있던 수많은 부족들과, 그들이 어떻게 해서 전투에 임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들이 죽어간 이야기들이다. 책은 각각의 장으로 나뉘어져 각 부족의 전투와 살기 위한 투쟁들, 그들이 그들의 땅에서 쫓겨난 이야기들을 펼치고 있는데, 매 장은 예상했던 대로 인디언들의 죽음과 초토화된 땅에 대한 이야기로 끝맺음되고 있다. 그 처참함은, 그 어떤 전쟁보다 슬프다. 백인들과 싸워보겠다고 나섰던 인디언들은 그들이 사냥을 할 때 썼던 조악한 무기들을 들었고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아무 이유없이 헐벗고 굶주려 죽어갔으며, 이유도 없이, 단지 그 땅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차별 사살을 당한다. 

 어떤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책이든 영화이든 읽어 낼 때는 그 땅에 대한 이해가 선결되어야 한다. 미국이라는 땅의 광활함과 특성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인디언들의 땅에 대한 애착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조금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인디언들의 주장은 이 땅을 떠나면 풍토가 맞지 않아 먹을 것도 구할 수 없고 입을 것도 구할 수 없으며 병들게 된다고 하고 있는데, 그러한 조건들은 미주대륙의 특수성을 조금 더 잘 아는 사람이라면 책의 감동이 더 절절하게 다가올 것 같다. 나로서는 상상의 나래를 열심히 펼쳐보이고 인디언의 입장에서 책을 읽어야만 납득이 가는 이야기들이었다. 책은, 인디언들의 시각을 유지하지는 않지만, 인디언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중심사상을 가졌으나, 백인들이 그토록 잔인하게 인디언들을 몰아내려고 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이 빠져있다. 책을 읽는 내내 도대체 이토록 잔인하게 몰아내려고 했던 그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었다. 그만큼, 어처구니 없는 살육전이었다는 것도 그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일부의 백인들은 인디언들과 결혼을 하여 혼혈 아이를 낳기도 했는데, 함께 힘을 합쳐 새로운 제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생각은 왜 하지 않았으며 살인을 저지르면서 종족을 멸족시켜야 할 권력다툼의 이유는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부족하다. 

 책의 중간중간에는 홍인종으로 불리웠던 인디언 전사들의 중요인물 사진과 인디언들의 전래민요가 수록되어 있어서 사실감을 높인다. 

 "다음 해 봄이 오면 풀은 무릎까지 높이 자라고 땅은 백인들을 모두 파묻을 새로운 흙으로 덮이리라. 새 땅에는 향기로운 풀과 나무가 우거지고 맑은 물이 흐르리라. 수많은 들소와 야생마가 돌아오리라. 새로운 땅이 옛 땅을 뒤덮는 동안 망령의 춤을 춘 인디언들은 하늘로 올라가 있구나. 이 새로운 땅에 죽은 사람들의 망령이 다시 살아돌아오고 인디언들만이 이 땅에 살게 되리라."

 땅을 빼앗기고 부당당한 무릎(운디드 니)에서 죽어가야 했던 사람들이 단지 120년전 인디언 들일까. 지금도 우리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땅을 빼앗기고 정처없는 부랑의 길을 떠나야 하는 것을 권력집단에 의해 강요당하고 있다. 그야말로 노마드와 디아스포라의 시대가 다시 반복되고 있다. 그렇게 땅을 빼앗아낸 개척자들은 아직까지 잘 살고 있고, 땅을 빼앗기고 죽어간 힘없는 인디언들은 "보호"구역에 모여 죽어가고 있다. 우리 시대 또 다른 인디언들은 120년전 사라진 인디언들처럼, 그렇게 최후를 맞이하게 될런지, 또 다른 "보호"시설에 갇혀, 조용히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2006.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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