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나라 최초의 멕시코 이민자들을 태운 영국 상선 일포드 호는 1905년 4월 초 제물포항을 출발한다. 국운이 기울어 가던 때였다. 이들 이민자는 유카탄 에네켄 농장 이민 브로커 존 마이어스와 일본 대륙식민합자회사가 1904년 10월부터 모집한 한인들이었다. 1천33명의 이민자들은 남자가 702명,여자가 135명,아이가 196명이 었다. 40여일간 항해 중 아이 둘과 어른 한 명이 숨지고 한 명이 태어났다. 1905년 5월 12일 멕시코 중서부 태평양 연안 살리나 크 루스 항에 도착한 이들은 곧바로 남부 유카탄 반도 메리다로 이동 해 에네켄 농장에서 한많은 이민 생활을 시작한다. 현재 5세대까 지 내려오고 있는 멕시코 한인 후손들은 최소한 3만명이 넘는 것 으로 추산된다.

에네켄은 선박용 밧줄 등의 원료가 되는 용설란의 일종. 이민 1세대들은 멕시코에서의 첫 이민 생활을 메리다 일대 에네켄 농장에서 일해야만 했었다.

장미희 임성민 주연의 애니깽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에네켄 농장에 도착한 조선인들은 영어도 스페인어도 몰랐고 단지 에네켄이라는 식물의 이름은 애니깽으로 와전되어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애니깽이 되었다.

김영하의 장편소설 "검은 꽃"은 멕시코 이민 1세들의 이야기이다. 멕시코라는 땅에 처음으로 조선인들이 말을 디딘 바로 그 사건, 1033명의 한인들이 1905년 5월 12일에 멕시코 중서부 살리나 크루스 항에 도착한 그 사건, 그 1033명의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어떤 소설이 딱히 가치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힘이 조금 더 드는 소설이 있고, 좀 더 자유로운 소설이 있을 뿐이라고 할 지도 모른다. 김영하의 검은 꽃은 자료가 많이 필요한 소설이다. 멕시코 이민사를 이해했어야 했고 그에 대한 정확한 수치들이 남아있다면 그런 수치들도 필요했으며, 가상의 이야기를 덧붙여야 하지만 기본 소재는 사실에 입각한다. 거기에 소설가는 살을 입히고 윤기를 낸다. 그리고 멕시코라는 땅에 대해서도 알아야 했다. 작가 후기에 밝혔듯, 이 소설은 누군가의 피로 쓰인 한 줄로 시작한 소설이며, 잘 정리된 자료들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는 소설이라고 했다. 그리고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를 부인과 함께 답사하며 소설의 많은 부분을 완성했다고 했다.

1033명이 자세한 내막도 모르고 그저 墨西家라는 미지의 땅을 향해 배를 탔다. 그들은 멕시코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고 그만큼 그 나라에 대해서 무지했다. 그리고 그 땅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도 막연했다. 그저, 이러나 저러나 비슷한 목숨이라는 절망적인 시대적 상황이 그들의 출항을 설레이게 했고 그들을 신대륙의 꿈으로 유혹했다. 미지의 세계는 위험이 동반된다. 새로운 것들은 항상 불안한 미래가 동시수반된다. 그러나, 무지몽매했던 계몽기 조선인들에게는 단지 불안한 미래가 아닌, 인류의 정의가 불분명한 세계로의 진입을 뜻했다. 그 때는 아마 백인들 눈에 백인들 외의 다른 인종들, 누렇거나 붉은 인종들은 유인원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유인원을 인간의 범주에 넣어야 하느냐를 놓고 아직도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그들은 오로지 가진 몸뚱이 하나로 버텨야 하는 노동계약에 팔렸지만, 인간이길 주장했고 인간으로 남기 위해 투쟁한다. 스스로 투쟁하고 이웃과 투쟁하고 농장주와 권력에 투쟁했다. 그리고 결국 남의 나라 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싸우고 전쟁하는 것이 너무나 익숙한 소모품들이 되어간다.

사람이 운명이란, 참으로 절묘한 것이라서,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처지들이 많으며, 한 번의 결정이 예상보다 수만배 더 큰 효과를 내어 인생을 홀라당 뒤집어버리기도 한다. 문제는 스스로 그 운명의 꺽이는 점을 잘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검은꽃은 인생이 뒤집어진 사람들의 분투를 그리고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언제부턴가 작가의 마음으로 책을 읽게 되는데, 작가 스스로 참 뿌듯하고 즐거웠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격동의 시기, 작가 말대로 매력적인 연대인 1910년대에, 격정적인 인물들을 창조하고 그들의 후일담까지 마지막으로 적으면서 작가는 정말 이 소설을 끝내고 싶지 않은 아쉬움에 휩싸였겠다고 생각했다.

첫 날 책을 4분의 1정도 읽고 그 다음날 새벽에 책을 잡기 시작해 다 읽고 나니 아침 7시였는데, 자리에 누우면서 나는 검은 꽃을 영화로 만든다면 배우를 누구를 캐스팅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이 연수는 아무래도 고현정밖에 없어. 김이정은 예전같으면 최재성이 적당할텐데, 조금 더 젊은 배우가 필요해. 그렇다면 이번에도 고현정의 짝은 천정명 뿐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소설을 읽고 나만의 화면에서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은 재미난 소설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야기꾼으로 인정받고 있는 김영하의 검은 꽃, 새해를 여는 소설로 박진감과 긴장, 그리고 삶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다듬기에 충분히 멋진 책이다.  
 

2007.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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